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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
김경재
[1] 들어가는 말
이 글에서 필자는 20세기 한국 재야 사상가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에 관련한 그의 비젼을 말해보려 한다. 먼저 씨알사상의 사상적 메트릭스와 본질을 고찰하고, 그 기초로부터 귀결하는 그의 비폭력적 저항정신,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 그리고 새 종교와 새 문명론의 비젼을 고찰하려 한다. 논제의 고찰과정에서 이번 학술대회 주제인 “동아시아의 평화와 21세기: 유산, 과제, 전망”이라는 관점의 지향성과 맥락에서 함석헌 평화사상을 조명할 것이다.
함석헌(1901-1989)은 거의 20세기를 통체로 살았다. 은유적으로 말해서, 한반도 한민족이라는 지정학적으로 지구의 거대한 지질구조 판들이 맞부딪힌 곳, 틈새 지각구조를 뚫고 화산처럼 분출한 마그마와 화산재 같은 정치사회사적 현상들 속에서 일생동안 살았다. 그는 20세기 약육강식의 국가주의적 식민지배 가혹함, 냉전시대의 이념의 광기, 전쟁의 반생명론적 야만성,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우상숭배 피해를 온몸으로 겪고 행동적으로 저항하면서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영글어저 갔다.
그의 고등교육의 전공영역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와 윤리분야 전문 교사직’ 훈련을 4년 받은 것이 전부이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모교인 민족학교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직에 복무했으나, 그 외의 모든 삶은 민족 수난의 역사 한 가운데 이었기에 씨알사상의 탄생자리는 서재가 아니라 감옥이거나 민중의 고난현장 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이 생각만하고 독서는 하지 않은 ‘광야의 예언자’란 말은 아니다. 그는 이미 20세 무렵 한자로 된 동양고전은 물론이요 간디, 톨스토이, 로망 롤라, 윌리엄 블레이크, 괴테, 타고르, H.G. 웰스, 그리고 큰 영향을 받은 앙리 베르그송에 관한 글들과 저작물을 일본어판으로 읽은 다독의 독서가 였다.
함석헌 탐구에서는 그의 사상적 거인성과 다재다능한 면모 때문에 빛의 스팩트럼같은 다양한 색상을 지닌다. 예들면, 토인비의 문명사관과 비교되는 고난사관의 주창자로서 역사철학자(노명식, 2001), 일체의 권위주의와 권력제도를 거절하는 아나키스트적인 문명비판론자(안병무,1997), 동서 종교사상의 회통과 창조적 융합의 종교 사상가(박재순, 2001), 제4권력으로서 한국 시민운동의 창도자와 재야언론인 (김삼웅, 2011), 삶의 생명철학자(이기상,2001), 뛰어난 직관적 시인(고은, 2011) 등으로서 다양한 면모를 지닌다.
이 글의 논제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의 씨알사상의 다양한 색갈들을 동시에 입체적으로 조명하지 않으면 함석헌을 그저 낭만적인 ‘재야 평화운동가’ 쯤으로 오해하기 쉽다. 논제를 전개해 나갈 때, 1970년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를 창간 후 통권 제50호(1976년 1.2월호) 부터 대중의 이해를 감안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알아들 수 있는 쉬운말로 <우리가 내세우는 것>이라는 것을 잡지 책갈피에 부각시켜 싣고 있다. 선언적 형태의 그 문서내용을 통해서 씨알정신의 지향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아래 인용하고 차례차례 살펴가는 방법을 사용하려 한다.
□ 씨알이란 민(民,people)의 뜻인데, 우리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입니다.
□ 쓸 때는 반드시 씨알로 쓰시기 바람니다. <알>에서 ‘O’ 은 극대(極大) 혹은 초월적(超越的)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은 극소(極小) 혹은 내재적(內在的)인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 씨알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알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씨알은 너 나가 있으면서 너 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 씨알은 어떤 형태의 권력숭배도 반대합니다.
□ 씨알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습니다.
[2] 씨알사상의 알짬
(1) 씨알은 ‘친민’(親民)의 순수 우리말 번역 ‘씨알어뵘’에서 유래하여 존재론적으로, 정치사회사적으로 역동적 주체성을 드러내는 어휘
잘 알려진 대로 ‘씨알’이라는 순수 우리말 어휘는 함석헌의 선생 다석 유명모(1890-1981) 가 이끌었던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 고전강독에서 『대학』의 첫구절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을 다음같이 번역 풀이함으로서 세상에 새롭게 데뷔한 어휘이다: “ 한 배움의 길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뭄에 있느니라”. ‘親民’을 ‘씨알어뵘’이라는 순수 우리말로 번역했다.
함석헌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씨알’이라는 이 귀중한 단어에 혼과 생명을 불어넣고 존재론적이고도 정치사회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씨알’이라고 표기하던 것을 ‘씨알’이라고 표기하자고 제창하였고 그의 일생의 삶과 행동을 ‘씨알사상’이라는 이름안에서 총괄했다. ‘씨알’이라는 작명자는 유영모 이었지만 그 어휘를 인간학적으로, 종교철학적으로, 정치사회학적으로 확대심화시킨 사람은 함석헌 이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유영모와 함석헌이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제지간이면서 동일 할 수 없는 ‘차연’(差延)에서 발생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했다. ‘친민’을 ‘씨알어뵘’으로 번역풀이함으로서 ‘민’(民)이라는 한문자에 붙어다니던 온갖 더부살이 종노릇을 탈피하여 자주적 인격체가 된 것이다. 관민, 민초, 민중, 우민정책, 위민민본등 언어생활에서 쓰이던 ‘민(民)’의 개념안에는 양반 귀족 지식인 통치자에 대비(對比)하여 낮은 계층, 교도(敎導)대상, 긍휼히 여길 대상, 피지배계층, 덜 계몽된 무리들, 정치적 통치대상 이라는 잠재의식적 폄하가 스며들어 있다.
유영모에서 인간의 자기실현은 철저히 수직적 방향에로의 정신적 초연(超然)과 역사적 존재로부터의 초탈(超脫)을 통해서 ‘얼나’로서 자기를 완전 실현하는데 두었다. 함석헌은 유영모에게서 유교적 인간형의 자기완성으로서의 상향적 초월정신을 전수받으면서도, 역사학도로서 기초훈련을 받을 때 얻은 지구사, 문명흥망사, 생물진화사를 철저하게 훈련받은 자로서, 인간존재의 수평적 차원 곧 ‘역사적 · 문화적 · 정치사회적 존재자’로서 ‘씨알’의 본질을 더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함석헌의 종교시 ‘맘’이라는 시구절의 처음구절과 마침 구절이 함석헌의 씨알이해를 시적 은유를 통해 잘 드러낸다.
맘은 꽃 / 골짜기에 피는 란(蘭) /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 맑은 향(香)을 토해.
..................
맘은 씨알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맘은 차라리 처녀 /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
누구를 기다리어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위 시에서 씨알은 개체 인간이지만, 골자기에 피는 난초가 온갖 생명들이 퇴비로 된 거름을 먹고 자라 향기를 발하듯이, 사람이란 누구든지 통시적(通時的,diachronically)으로 지나간 역사의 희생물을 양분으로 섭취하면서 형성된 ‘역사적 존재’라는 것이다. 씨알사상에서 ‘창없는 단자’같은 단독자 처럼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개인주의 철학은 첨부터 용납되지 않는다. 개인의 실존성은 역사성과 사회성을 이미 그 안에 내포하고 그것들과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씨알이 식물 씨나 동물의 알을 은유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일견 정태적(靜態的) 인상을 주지만, 철저하게 생성론적이고 관계론적인 인간이해를 전제한다.
위 시 둘째련의 은유적 표현처럼, 씨알은 진화해온 과거 역사의 모든 것을 자신 안에 수렴하면서도, 앞으로 전개될 가문이나 사회적 생명의 전달 책임자가 된다. “온갖 형상의 어머니”라는 은유가 그것이다. 씨알이 망하면 미래가 망하고, 씨알이 병들면 미래역사와 오늘의 사회가 병든다. 동시에 씨알은 열려진 미래를 개방적으로 지닌 가능성의 존재이며 결코 숙명적 존재이거나 신들과 운명의 꼭두각시 놀이대상이 아니다. 인용한 시 셋째 련에서, 씨알은 자기의 순정 곧 씨알의 순수성을 지키며 폭력적 겁탈자에게 저항하면서 자기 정조를 아낌없이 바칠 참다운 님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여기에 씨알사상이 갖는 저항정신과 온갖 형태의 우상을 거절하는 비판정신이 나타난다.
씨알사상이 그 핵심 어휘로서 ‘씨알’이라는 상징어가 지닌 뜻은 여러 가지 있지만 무엇보다도 생명본래의 순수성, 역동적 성장성, 자기실현의 자율성, 유전자 DNA 처럼 맷돌의 폭력으로 부셔질 수 없는 불성(하나님의 형상)같은 항존성, 그리고 더불어 숲을 이루려는 평화적 공동체성을 기본적으로 상징한다. 특히 주목 할 점은 다석 유영모의 씨알사상과 확연히 다르게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존재론적 측면과 사회정치적 측면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회현실에서 온갖 기초살림의 힘든 짐을 다 짊어지면서 농상공의 생산활동, 병역의무, 저임금 사회 서비스노동, 조세부담 등 고난을 감내하는 사회생명의 ‘발굼치’라는 것이다.
(2) 씨알사상은 생명철학이요 살림철학 인데, 그 사상의 기본명제를 ‘생명은 하나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생명의 유기체적 전일성(全一性), 동체성(同體性), 연대성, 공동책임성을 강조한다.
‘생명은 하나다’라는 기본명제는 개체와 전체를 상호 순환관계적 상호 포괄존재자로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인의 상식으로서는 선듯 받아드리기 어려운 고차적인 생명관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철학적으로는 불교의 연기론에 입각한 화엄철학적 실재관을 받아드리는 것이며 ‘주객 상호관계’로 도식화되는 근대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다. “씨알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 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생명은 하나다’라는 기본명제는 함석헌에 있어서 종교철학적 깨달음의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혼란과 역사의 비극을 극복하는 실천적적 문제해결의 시작점이라고 강조한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제1부 사관을 다루면서 현대문명이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인 ‘카이로스’ (kairos)라고 보는 이유는 “세계가 하나 되는 시대”에 들어와 있고, 인류가 민족 · 인종 · 국가 · 이념 · 종교 · 정치사회제도 등이 상대적인 것임을 깨닫고 그것들을 초월하여 ‘생명은 하나’라는 철저한 의식전환이 만인에게 절대 요청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일화(全一化) 하는 인류적 동원령은 절대로 시급하다. 그런데 그것은 세계 역사의 새로운 해석이 아니고는 안 된다. 한 조상을 어서 발견하여야, 그리하여 한 형제인 줄 알아야, 싸움을 그만둔다. 한 나라 백성인줄 알아야, 그리하여 한 곳에 가서 만날 것을 알아야, 서로 제 주장하기를 그칠 것이다. ‘하나’를 어서 의식하여야, 그리하여 각각 서로 한 몸의 지체인 것을 깨달아야, 이 미친 자살적인 경련이 그칠 것이다.
위에 인용한 함석헌의 주장을 언듯 들으면, 전형적인 도덕적 관념주의자의 비현실적 넉두리라고 느껴질만 하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20세기 인류와 특정사회가 동물적인 야수성을 가지고 경쟁하는 단계를 넘어서 인간다운 사회로의 전환할 것인가 아니면 멸종할 것인가의 갈림길이 ‘하나 의식’의 보편적 인식에 달려있다고 본다. ‘생명은 하나’라는 성숙한 의식을 가진자가 계몽된 자요, 진정한 성숙인 이며, 참 지성인 이고, 종교적 영성인 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은 하나다’라는 철저한 자기의식에 도달하여 자기 삶의 행태(行態)를 실천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능력은 학벌의 높고 낮음이나, 교양이나 사회신분의 높낮음과 아무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 진리를 확철하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대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일컬어 아귀가 튼 ‘씨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씨알’은 단순히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당하는 사회하층계층과 단순하게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정치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더 갖고자 하는 탐욕과 소유욕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집착할만한 소유물과 기득권이 없기 때문에 세상돌아가는 진실을 꿰뚫어보는 ‘인식론적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며, 맨바닥에서 하늘을 보기 때문에 소위 지식사회학이 말하는 ‘사유의 존재제약성’을 훨씬 덜 받는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가복음 6:20)라고 예수가 말씀한 것이다.
폴 틸리히는 생명은 근본적으로 세가지 운동 속에 있다고 본다. 그 첫째는 자기중심성과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생명의 자기통전 운동’(self-integration movement of life)이요, 그 둘째는 생명이 반복적 자기동일성에 멈추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맛보고 모험하려는 ‘생명의 자기창조 운동’(self-creation movement of life)이며, 그 셋째는 생명에 지워진 온갖 제약과 유한성을 극복하여 초극하려는 ‘생명의 차기초월 운동’(self-transcendence movement of life) 이 그것이다. 진화곡선상에서 인간 출현단계에 이르러, ‘생명의 자기통전 운동’은 인격적 자의식과 도덕적 양심으로 꽃피어 있다. ‘생명의 자기창조 운동’은 문화현상으로 꽃피었고, ‘생명의 자기초월 운동’은 종교적 영성으로 발현되었다.
함석헌이 ‘생명은 하나다’라고 강조할 때, 개인의 독자적 가치와 개성이나 인격을 전체속에 함몰시켜버릴 위험이 없는지 염려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생명의 자기통전운동은 대립되면서도 상생하는 생명의 ‘길항적 상생작용’(拮抗的 相生作用)에서만 가능하다. ‘길항적 상생작용’이란 ‘정반합의 변증법’과 달리 역설적인 표현인데, 두가지 이상 서로 대립되는 성분이나 운동이 맞버티면서 동시에 상대방 때문에 자신의 존재성이 가능하게 되는 모든 생명체들의 역설적인 존재구조를 나타낸다. 작용과 반작용, 원심력과 구심력 관계도 그런 예이다. 자기중심과 자기정체성을 지니려는 모든 생명체의 개체화(individualization)운동은 자폐증 환자처럼 타자와의 일체관계성을 단절하고 자기중심적 내향화 됨으로서 가능하지 않고 타자에로의 참여(participation)를 통한 관계적 그물망 속에서만 그 형성이 가능하다. 함석헌은 그러한 생명 현상을 생활체험과 역사이해, 그리고 나무와 숲의 관계를 은유로 삼아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사실에는 두면이 있다. 인생과 역사다. ...이리하여 여기서부터 우리살림의 두 언칙인 개인적 생활 체험과 세계적 역사이해가 나온다. 생활체험이란 것은 개인이 자기의 존재를 한 개 저만으로, 값을 가지는 인격적인 것으로 알고 파들어가고, 붙잡고, 나타내려는 데서 나온다. 역사이해라는 것은 자기를 뜻있는 발전으로 보는 세계의 체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돌아보고 들여다보고, 내려다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를 나무의 씨라면 하나는 숲이다.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생명은 하나다’라는 기본명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함석헌의 씨알사상 이해의 관건이 되기 때문에 장황하게 설명이 길어졌다. ‘생명은 하나다’라는 기본명제가 개인주의 철학과 집단주의 철학을 극복하고, 주객구조로서의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고, 인간사회생활에서 선과 악은 알고보면 ‘공동책임’이라고 말하는 함석헌의 윤리의식을 기초놓는다. ‘생명은 하나다’라는 기본명제를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이해하든, 장회익교수가 말하는 생태학적 ‘온생명론’에서 이해하든, 혹은 진화론적 인류공동조상론에서 이해하든, 그 기본명제가 이해되지 않으면 함석헌의 비폭력적 평화사상, 씨알생명의 저항의식,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 이해가 사실상 불가능 하다.
(3) 씨알사상은 동아시아적 생의 철학(Lebens Philosopie)으로서 ‘생명은 스스로 함’ 이라는 자율적 창조성과, ‘고난은 생명의 구성원리’라고 보는 숭고한 자기초월성을 강조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그가 살았던 구체적 삶의 자리를 떠나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존재론적 철학을 말하는 것 같고, 낭만주의적 관념론을 논하는 것 같아도, 그 자신은 치열한 고난의 풀무불 같았던 동아시아적 · 한국적 고난의 역사 속에서 씨알사상을 낳은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의 유럽적 ‘생의 철학’과 공감하는 면이 많으면서도 그것과 구별되는 특성이 드러나는 것은 함석헌과 베르그송의 구체적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다른 데서 온다.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은 계몽정신의 합리정신이 경직화되어 생명현상 마져 기계론적 합리주의 관점에서 이해하여 생명을 단순한 물리화학적 기능의 복잡화된 표현이라고 보는 물질환원론적 실재관에 저항하여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은 생명의 지속과 자람, 직관, 생성, 생의 비약(elan vital), 창조적 진화, 인격적 의지의 강조등을 특징으로 한다.
함석헌의 동아시아적 ‘생의 철학’은 베르그송의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그 발생의 구체적 삶의 자리는 ‘강단의 철학세계’가 아니라 열강 식민주의의 타자에 대한 억압적 지배상황, 군국주의적 국가주의 광기가 생명을 완전히 몰인격화 시키는 ‘문명 자살적인 광기의 경련시대’를 배경으로 한 정치사회적 ‘현실의 생활세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함석헌 씨알사상의 중심화두는 사람의 창조적 주체성과 고난의 현실성이라는 타원형의 두개 중심촛점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함석헌 씨알사상에서 ‘생명은 하나다’라는 기본 지반(地盤)위에 두 개의 ‘생명원리’라고 까지 말하는 기둥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 하나의 원리는 ‘생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고난은 생명의 항존적 구성원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 두가원리가 서두에서 인용했던 <우리가 내세우는 것>안에 언표된 씨알사상의 본질 핵심을 이루게 된다.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생명은 지어냄(創造) 이다. 맞춤(適應) 뒤에 대듦(拒否, 抵抗)이 있듯이 대드는 바탈(性) 뒤에는 끊임없이 새것을 지어내려는 줄기찬 힘이 움직이고 있다. 생명은 자람이요, 피어남이요, 낳음이요, 만듦이요, 지어냄이요, 이루잠이다.
위의 인용문 속에 씨알사상의 알짬이 나타나 있다. 원리 혹은 법칙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은 함석헌이 그의 생명철학으로서 씨알사상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세가지 ‘생명의 원리’라는 정언적 수사어구를 허용한다. 그 세가지가, 다시말하지만, ‘생명은 하나라는 원리’, ‘생명은 스스로 함 이라는 원리’, 그리고 ‘고난은 생명의 구성원리’라는 것이다. 따로 떨어져있는 듯한 이 세가지 원리적 명제는 사실은 깊은 내면적 관계성을 갖고서 잇대어 있다.
‘생명은 그 본질이 하나’요 전일적인 것인데, 개인적 생명이나 집단적 생명은 갈라져있고 분열되어 갈등과 투쟁과 억압으로 인해 병들어 있다. 그렇게 비본래적 생명현상이 노정되는 근본원인은 생명체에게서 자율적 힘, 자유결단의 기회, 창조적 활동을 중단시키거나 억압하고 빼앗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명은 스스로 함’이라는 생명의 제2원리는 침해되어 타율적 지배, 종살이 근성, 숙명론적 체념, 창조 아닌 모방, 자유로부터 도피, 군중심리에로 영합, 대세론에 야합현상이 발생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본 생명철학의 둘째원리인 ‘생명은 스스로 함’ 명제는 앞서 잠시 언급한 폴 틸리히의 생명의 존재론적 구성틀에서 보면 ‘생명의 자기창조운동’에 해당한다. ‘생명의 자기창조운동’은 두가지 양요소가 길항상생작용을 하면서 발현되는데 ‘형태(form)와 역동성(dynamics)'의 상호 긴장과 균형 안에서만 가능하다.
형태(form)는 조직, 기구, 제도, 법률, 국가, 종교등 삶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려는 필요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 형태들이 생명의 역동성(dynamics) 곧 자유, 자발성, 창조성, 새로운 모험, 자기조직의 능력, 발상의 전환을 억압하거나 방해하면 생명은 질식하고 병든다.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유명한 강연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생명의 주체적 자율성과 창조적 책임성을 포기하게 하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과 언론권력의 ‘채찍과 당근’에 맞서 비판적 저항정신을 가지고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꿈틀거리는 주체적 자아가 되라는 촉구였다.
그렇게 인간이 창조적 주체성을 가지고 책임적인 삶을 살려고 할 때, ‘고난’이라는 구체적 현실에 직면한다. 함석헌이 ‘고난은 생명의 구성원리’임을 받아드리라고 강조하는 것은 고통을 피하고 쾌감을 증대하려는 생물적 인간 본능을 극복하고 보다 정신적인 가치, 의미와 숭고함,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 삶에서 인간다움을 결단하라는 충고이다. ‘엔트로피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계 안에서 생명이 발생하여 생명의 꽃을 피워간다는 사실자체가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댓가로 치루고서야만 가능한 것이고,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해가거나 돌영변이를 겪으면서 종의 다양성을 창발적으로 지속해가는 것 자체가 ‘고난’ 없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순수 생물학적 차원에서 그렇듯이 정신적 삶의 성장, 성숙, 정화, 승화, 초월에선 더욱더 그러하다.
‘고난’을 통하여 생명은 더 높은 차원에로 정화되고 숭고한 삶으로 승화한다는 진실은, 다시한번 폴 틸리히의 생명의 존재론적 구조에서 보면 ‘생명의 자기초월운동’ 때문인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 특히 인간 생명은 단순한 반복운동 혹은 평면적 창조활동에 멈추지 않고 제약과 한계와 유한성을 돌파하여 대각선 방향으로나 수직방향으로 초월하려는 생명운동을 한다. 거기에서 상호 길항적 상생작용 요소는 ‘자유(freedom)와 숙명적 제한성(destiny)’ 이다. 인간의 지식의 제한성, 삶의 시간적 유한성, 도덕적 행위의 모호성, 이념과 신념의 상대성 앞에서 인간은 좌절하고 난파당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몸부림친다. 사회생활 속에서 강요된 사이비 전통과 권위와 여론조작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려 할 때, 자유는 ‘고난’을 댓가로 치루면서 그러한 숙명적 제한성(destiny)에 정면 도전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동아시아적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자라난 생명철학이지만, 생명을 억압하는 악에 대하여 체념, 묵종, 도피, 야합, 자기합리화를 거부하고 ‘저항’할 것을 강조한다. 불의와 비진실에 저항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고난을 감내하려는 의지가 요청된다. “씨알은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라는 선언은 사실 비폭력적 혁명운동을 선언하는 무서운 말이다.
씨알은 자동적으로 역사의 주체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바로 그 조건 곧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씨알의 자기실현을 방해하는 모든 제도와 힘에 저항하여 보다 사람다운 삶의 질서, 평화로운 공동체 창조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때 명실공히 깨어있는 ‘씨알’이 된다. 그런의미에서 씨알은 ‘되어가는 존재’요, 미완성의 존재이며, 미래지향적 존재이다.
(4) 씨알사상은 국가주의, 배금주의, 절대적 종교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권력숭배를 반대하면서 씨알의 자기실현을 위해 비폭력 투쟁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는다.
앞서 말한대로,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그가 경험한 20세기 삶체험에서 영글어갔다. 그 삶체험에서 씨알들에게 가장 혹독한 고통을 주는 실체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국가주의, 냉전시대 정치적 이념의 절대주의, 한국의 산업화과정에서 경제개발 독재주의, 민주화과정에서 언론권력의 정신적 폭력과 사이비 종교집단의 바알주의 힘숭배 였다. 함석헌은 그러한 힘들을 용납방치하는 것은 악에 굴복한다는 의미요 씨알로서의 참 생명이 이미 죽었다는 사망선고와 다름 없었다. 함석헌은 사실 매우 수줍고 부드러운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인데, 그를 광야의 포효하는 사자로 만든 것은 이들에 대한 비폭력적 투쟁이었다.
그는 현실을 지배하는 국가권력에 의해 일제시대 일본총독부에 의해서, 해방정국에서는 북한의 쏘련 주둔군, 남하한 이후론 대한민국정부와 군사정부에 의해 여러차례 투옥되었다. ‘인생대학’이라고 일컫는 옥중경험 속에서 그의 사유의 지평은 더욱 깊고 넓게 그리고 깊게 확대심화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의 피해를 절감하게 되었다.
서양역사 전공자 노명식은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한 연구』에 나타난 문명사관에서 역사연구의 회기적 전환은 “세계사를 구성하는 궁극적 단위는 정치적 차원의 국가가 아니라 사회적 통일체로서 ‘문명’이라는 것, ‘도전과 응전’이라는 창조적 소수자의 고난극복을 통해 문명이 발생한다는 것, 세계사는 일직선적 발전단계가 아니라 병립적이요 동시대적이요 나선형의 발전과정을 갖는다는 것들이다. 노명식은 함석헌 사관과 토인비사관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그 같은 사상에 있어서 놀랍도록 서로 닮은 점을 상세하게 논술한바 있다. 함석헌은 『뜻으로 한국역사』증보개정판을 낼 때 서문에서 다음같이 담같이 중요한 말을 한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생각은 변할리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한 참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곁드려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것이 세계주의(世界主義)와 과학주의(科學主義)이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국가주의)를 내쫒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까지 이성(理性)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사상발전단계를 두 단계로 대별한다면 1950년 한국전쟁을 전환점으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전단계를 갑자기 부정하고 후단계로 갑자기 전환 것은 아니지만 보다 확신적으로 나타났다. 그 변화의 핵심은 세가지인데 기독교 절대주의를 상대적 종교로 봄으로서 종교다원론을 지지하는 것, 국가주의 시대가 그 역사적 임무를 마쳤으므로 국가주의를 청산하고 세계주의에로 나가야 한다는 것, 과학적 이성주의를 더욱 지지하고 과학과 종교의 갈등충돌이 지양된 높은차원의 새문명이 동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함석헌에서 민족, 국가, 국가주의라는 세가지 어휘는 분별해야 한다. 그는 민족주의는 반대하지만 민족의 실재성을 중요시 한다. 민족적 배경없이는 인격이 형성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안다. 이스라엘 민족사와 유대교의 모태 없이는 예수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나오지 못한다. 함석헌은 공동체 살림을 효과적으로 영위하기 위하여 법질서의 공공성 유지, 보편적 복지정책 실현, 야경국가로서 최소한의 정부의 기능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고 비판극복하려는 것은 19세기 말에 이미 끝났어야 할 ‘국가주의’가 시대착오적으로 씨알위에 군림하는 권위적 실체로서 삶 전반을 규정하고 인간의 근본적 자유와 인권, 창조적 활동과 표현, 자기초월적 생명의 도약을 억압하는 권력의 우상화인 것이다. 대학과 언론이 그 신성한 본래적 임무수행을 포기하고 국가권력의 시녀로 복무하거나 산업사회 인력 조달청으로 전락한다. 사회학자들은 후기산업사회에로 지구촌 문명이 돌입하여 실지로 국가가능은 세계적 기업지배아래서 통제된다고 말하지만, 현실지배의 물리적 힘 곧 군사력과 경찰력을 독점한 국가 권력은 후기산업사회 에서도 금융·기업권력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막강한 힘을 행사한다.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만 흉내 내면서 자본권력과 유착하고 언론권력을 시녀로 거느리는 현대의 국가들을 시대착오적인 정치권력 집단적 힘숭배 ‘우상’이라고 함석헌은 본다. 예들면, 한국사회에서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모든 청년을 군대로 강제징집하는 것, 보안법을 가지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경찰력으로 통제하는 것, 냉전적 사고틀로서 이산가족의 인륜적 상호방문 교류를 국가권력으로 막는 것, 수십조원의 국민세금으로 최첨단 무기를 구입하거나 외형전시적 토건사업에 낭비하는 것, 미래적 국가안보 대책수립을 명분으로 제주도 평화섬에 미중 G2충돌을 야기시킬 해군기지 건립을 밀어붙이는 것, 경제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교육철학을 국가주의 이념으로 착색하는 것등이 한국적 국가주의 실상의 몇가지 사례들 이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생명가치를 파수하고 인격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평화공동체 실현’을 위한 투쟁은 폭력적 혁명을 통한 기존질서의 급진적 변혁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혁명’(革命)의 본래적 의미가, 물리적 힘을 강압적으로 사용하여 기존 사회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물가죽에 붙은 오물과 지방을 거뒤내고 가죽 본래의 특성을 살려내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혁명’의 참 뜻과 실천적 길은 본래 인간성에 들어붙어있는 오물과 기름을 거두어 내버리고 인간성의 본 진면목을 되살려 내는 일이라고 함석헌은 본다.
그런 근거에서 볼 때, 참 혁명은 ‘비폭력적 혁명’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 양심과 인성의 중심을 흔들어 깨우고 혁신하려는 훨씬 힘든 일이기에 ‘우리 인간성 자체와의 싸움’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일의 실현에는 인내, 용기, 지혜, 자기희생등 한마디로 ‘고난’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간디나 함석헌의 ‘비폭력적 혁명론’은 참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악을 행하는 적의 생명 안에도 인간본성의 밝은 명덕, 하나님의 형상, 불성이 있음을 믿고 그것이 깨어나기를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폭력엔 물리적 폭력이나 정신적 폭력의 구별이 없고, 한번의 폭력사용은 폭력대응의 연쇄방응을 낳고, 폭력사용의 강도는 쌍방간 더욱 강렬해 가며, 설혹 폭력사용으로 상대를 제압하더라도 그것은 물리적 억제요 생명파괴의 결과를 가져올 뿐 어느쪽 승리도 아닌 모두의 패배일 뿐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비폭력 평화사상을 연구하는 전문학자들은, 그의 평화사상의 배경으로서 예수의 산상수훈, 간디와 힌두이즘의 아힘사 사상, 불교의 연기론과 보살사상, 노장철학의 소국과민적(小國寡民的) 무위정치철학, 유교의 대동세계를 지향하는 인의(仁義)사상, 퀘이커리즘의 사회실천적 평화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객관적 설명은 학문연구상 필요하지만 현실인간에겐 그렇게 사상족보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누구인들 인류문명 사상사의 훌륭한 교훈과 정신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사상을 형성해 갈 수 있겠는가?
함석헌의 중요성은 동아시아와 구체적으로 한민족 씨알들의 ‘고난의 현실’을 한시도 잊지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진리싸움을 외롭게 수행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성공한 사람도 아니다. 학파를 형성하지도 않았고, 학식있는 제자들을 양성하지도 않아서 조직에 서툴뿐만 아니라 인위적 기구조직체 만들기를 거부해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계는 그를 주목하여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후보자로 추천할 만큼 미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비젼을 씨알사상적 맥락에서 제시한 ‘들판에 선 예언자’ 역할을 하고 간 사람이다.
[3]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론의 오늘의 의미와 미래과제
지금까지 말한 내용읠 핵심을 간추려 요약하면서,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하여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제창하고 있는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론’이 오늘 우리시대에 주는 의미와 내일의 정치·사회·문화적 과제를 4가지로 열거해본다.
첫째, 함석헌의 탈국가주의적 공동체론은 생명의 근본원리를 재천명하고 병든 문명의 과거 패러다임을 새로운 인간공동체로 전환시켜가려는 새문명의 원리선언이다. 그 핵심은 국가주의의 권력독점적 권위주의의 비판을 통한 개인 인간 존엄성및 창의성의 회복에 있다.
문명의 단계는 후기산업사회, 정보화사회, 시민자율사회에로 들어갔는데, 20-21세기 에도 근대 국가주의 청치철학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는데 모순갈등의 근본원인이 있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근대 민주주의 근본원리가 형식적 구두선일 뿐, 실질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주권이 시민, 씨알, 국민에게 있지 않고 국가가 대행하고 독점하며 개인과 씨알은 선거때 이외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배제되어 있다.
최근 한국사회의 소위 ‘안철수 정치사회적 현상’의 본질적 의미도 정치적 주권을 국가와 직무태만의 정당에게 몰수당한 시민들이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면서 시민의 직접 참여정치를 요청하는 것이다. ‘국민에 의한 정치’나 ‘국민을 위한 정치’가 구호에 그치고, 대의적 의회 정치제도나 정당정치에 의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불완전하게 나마 실현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국민의 정치’가 실질적으로 실현되기를 시민들은 요청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소통부재의 국가권력 오만에 분노하는 것이다. 전시효과적 겉치례 세금낭비 행정에 분노하는 것이다. 언론 집회 결사의 기본권 자유를 ‘집시법’이라는 형식을 빌려 무조건 불허하고, 그에 항의하는 시민집단을 반국가단체, 종북좌파세력단체로 몰아가는 시대착오적인 국가주의 독단을 그대로 두고서는 소위말하는 ‘선진국진입’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둘째, 씨알사상의 우리시대 의미는 ‘고난이란 생명의 구성원리’임을 부정하는 ‘쾌락추구 철학’과 ‘무한경쟁을 통한 무한 소비-욕망 충족 가치관’을 정당시하거나 미화하는 병든 자본주의를 건강한 자본주의에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는 사회이념적 비판철학이다.
근대인류사회는 먹고살아가는 경제문제 해결방도로서 크게말하면 자유시장 살림살이 방법과 기획통제 방법을 실험해 왔다. 전자의 극단의 정치사회적 실험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시스템요, 후자의 이념적 실험은 공산주의 기획통제 경제시스템이다. 전자는 인간 자유가 지닌 창의력과 이기적 경쟁심을 생산력 증가에로 극대화 하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평등과 정의요청의 당위성을 노동과 생산재화의 사회화를 통해 담보하려고 시도했다. 실험 결과 후자는 인간성의 권력욕과 태만이라는 원죄성의 덫에 걸려 실패했고, 전자는 탐욕성과 자기중심적 이기심을 효율성 제고의 동기로 활용하여 소위 ‘전 지구촌의 세계화’로 천하통일 했다.
초국적의 대기업과 이윤추구를 근본동력 의지로 삼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는데 성공한듯 하지만, 그 안에는 심각한 근본문제가 있음이 우리 눈앞에 노정되고 있다. 빈부 양극화로 인한 사회통합의 붕괴위험, 생태자연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지구촌 종말위험, 극도의 배금사상이 지배하는 물신숭배풍조와 인간성의 상실, 대학·언론·예술·종교로 대표되는 문화영역이 상업주의 블랙홀에로의 흡수되는 현상은 결국 ‘세계화위기와 주기적 금융질서위기’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뜻있는 세계적 기업인들 안에서 ‘창조적 자본주의론’, ‘영리기업의 사회적 책임경영론’등을 주장하고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개선노력들은 의미있지만, 씨알사상이 제기하는 근본문제는 자본주의적 기업철학과 현대사회 에토스가 ‘생명의 근본원리중 하나’로 엄존하는 ‘고난’의 실재성과 현실성을 외면하거나 기피하고 행복추구, 쾌감충족, 쾌락본능의 자기합리화나 심지어 도덕적 미화를 도모한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건실하고 창의적인 노동활동을 기초로하는 생산제조업은 몰락해가고, 서비스산업과 금융산업발전이 경제의 선진화인양 착각하는 병든 문명사회가 되었다.
씨알사상은 ‘고난’을 미화하거나 심지어 찬양하는 자학하는 비관주의적 삶의 철학이 아니다. 다만 생명있는 곳에 고난은 있게 마련이며, 고난은 외면하거나 기피해서 극복되지 않기 때문에, 정면돌파를 통하여 인간 개인과 사회적 삶을 성숙시키고 정화하고 승화시킨다는 진실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씨알사상에 기초한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 사상은, 한민족의 남북관계나 동아시아 미래를 내다보면서 문명착오적인 군수산업강화, 군비경쟁, 동아시아국가들간의 군사적 대결정책을 버리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실현의 비젼을 더욱 강화하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준다.
현재는 동아시아 시민들을 절망하게 하는 현실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는 적어도 중국, 일본, 남북한, 대만, 베트난, 몽골을 아우르는 한자문화권, 유교와 불교와 노장적 자연철학과 도교적 문화적 공동유산의 바탕, 근대산업화의 후발지역으로서 서구문명에 지배당한 역사경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장단점을 모두 경험해본 문명단위 사회로서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유럽공동체(EU) 형성조건 못지않는 문화적 토양을 갖추고 있으면서 정치의식의 후진성과 문명의식의 퇴화로 말미암아, 중국, 일본, 남북한, 대만, 베트남, 몽골까지 모두 소모적 군비경쟁과 무력적 긴장대결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동아시아 시민들과 씨알들을 수치심, 절망감, 분노에로 몰아간다. 국가주의자들은 항상 현실론을 명분으로 하여, 생존을 위한 국방력강화와 예산지출 그리고 국익을 위한 애국애족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 할 것은 ‘현실’이 ‘진실’을 대신할 수 없으며, ‘진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진리’인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사회와 동아시아 문명의 지도자들은 ‘현실’이 ‘진실’과 ‘진리’를 대신하고 판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씨알사상은 그러한 사고방식이 결국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경고하듯이 지나간 좌우 이념 대결의 동굴, 국가지상주의 동굴, 국방튼튼 충성동굴에 갖혀있기 때문에, 새 역사와 새문명이 부르는 소리를 전혀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정신적 장애인이 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말하는 탈국가주의적 평화공동체 실현은 정치혁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념들, 특히 고등종교들의 배타적 우월주의나 독선주의를 해체하고, 상호대화와 상호협동과 상호배움을 통한 전통종교의 패러다임전환을 촉구한다. “종교평화없이 세계평화 없다”(한스 큉)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역동적 우주종교는 과거전통의 각종보화를 부속건물에 보관하고 있는 궁궐같은 것이 아니고 해마다 파릇파릇한 새순이 돋아나는 살아있는 거목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 경재, 사회, 문화, 교육, 종교등 모든 집단들이 자기동굴에 갇혀있는 상태이다. 동굴 밖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사실,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어 갈수 있다는 역사적 실현가능성을 쉽게 포기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새역사 새문명이 이미 동텄다고 우는 새벽닭 울음소리 였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한민족 구성원들과 동아시아 시민들에게 그 무엇도 덧입지 않는 맨 사람, 순수 인간성, 사람의 본래성으로 돌아감으로서 인의(仁義), 관용, 합리성, 공공성, 그리고 사랑과 정의가 숨쉬는 평화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작은소리로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건내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 함석헌, 『함석헌 전집』, 총 20권 (한길사, 1983)
2. 김성수, 『함석헌 평전』(삼인, 2001)
3. 이치석, 『함석헌 평전』(시대의 창, 2001)
4.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 2006)
5. 노명식,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 자연사, 2002)
6. 노명식, 『토인비와 함석헌』(책과 함께, 2011)
7. 함석헌 선생 팔순기념문집 간행위원회, 『씨알 人間 歷史』(한길사, 1982)
8. 오산학교동창회편, 『함석헌선생 추모문집』(태극문화사, 1994)
9. 함석헌 기념사업회 엮음, 『함석헌 사상을 찾아서』(삼인, 2001)
10. 함석헌 기념사업회 엮음, 『끝나지 않은 강연』(삼인, 2001)
11. 씨알사상연구회 편, 『씨알 생명 평화』(한길사. 2007)
12. 함석헌 기념사업회 편, 『함석헌 선생』(한길사. 2001)
13. 박재순, 『씨알사상』(나녹, 2010)
14. 씨알사상연구원, 『함석헌 연구』, vol.1-2 (함석헌기년사업회, 2010,2011)
15. 기타자료. 함석헌 기념사업회 웹사이트 (http://www.ssialso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