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DJ 가택연금' 19년만에 유죄 당시 마포서장에 집유 2년
대법원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1987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가택연금한 혐의를 받고 있는 당시 서울 마포경찰서장 김모(72)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6월13일 밝혔다. 재판부는 “김씨의 불법감금 행위는 상급기관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위법성이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87년 4~6월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 전 대통령의 집 주위에 경찰관 수백명을 배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김 전 대통령의 외출에 비서나 가족이 동행하지 못하게 한 혐의다./조선
[2002년] 6·13 지방선거 한나라당 압승, 민주 ·자민련 참패
← 이회창후보(가운데)와 서청원대표가 광역단체장 당선자들과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02년 6월 13일 실시된 제3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자민련의 참패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16개 시·도지사 중 11곳에서 당선한 반면, 민주당은 4곳, 자민련은 1곳에서만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한나라당은 특히 서울시장에 이명박, 경기지사에 손학규, 인천시장에 안상수 후보가 당선되는 등 수도권 3곳을 석권했다. 한나라당 세력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고, 수도권 3곳을 모두 이긴 것은 1995년부터 치러진 세 번의 광역단체장 선거 중 처음이다. 한나라당이 대전시장, 충북지사, 강원지사를 비롯, 부산시장, 대구시장, 울산시장, 경북지사, 경남지사 등 영남 5개 시·도 전부를 휩쓸었던데 반해 민주당은 광주시장, 전남지사, 전북지사 등 호남지역 3곳과 제주지사 등 4곳에서 승리했다. 자민련은 충남지사 1명만 당선돼 충청권 3곳 중 2곳을 잃었다. 전국 232명의 시장·군수·구청장을 새로 뽑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대약진한 반면, 민주당은 참패했다. 한나라당은 140명, 민주당은 44명, 자민련은 16명을 당선시켰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정당투표에서도 한나라당이 압도했다. 73명의 비례대표 의원 배분은 한나라당 36명, 민주당 22명, 민노당 9명, 자민련 4명 순이었다. 민노당은 이번 선거에서 구청장 2명과 시도의원 11명을 배출해 선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비례대표 73명을 포함한 682명의 시·도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467명, 민주당이 143명, 자민련이 33명을 당선시켰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48.9%로 전국단위의 선거로선 최저기록이었다./조선
[2002년] 미군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2명 사망
← ‘신효순, 심미선 양 미군장갑차살인사건’ 관련, 광화문 촛불시위 1주년 범대위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미대사관 앞에서 열고 규탄구호를 외치고 있다.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45분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친구 생일을 축하하러 가기 위해 갓길을 걷고 있던 이 마을 신효순, 심미선양 등 2명이 미군의 가교 운반용 장갑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나 미군측은 6월 19일 사고조사 결과 발표에서 “선임 탑승자가 피해 여중생들을 30m 전방에서 발견, 운전병에게 경고하려고 했지만 소음이 심해 제때에 경고할 수 없어 발생한 고의성 없는 사고”라고 말했다. 미군은 적법한 작전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미군측의 과실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정부경찰서가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사고 차량 운전병의 진술서에 따르면 운전병이 선행하던 중대장과 무전교신을 하고 있어 선임 탑승자의 경고를 못 들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찰조사 결과 탑승자들의 헬멧에 장착된 무전교신기가 동시에 두 곳과는 교신이 불가능, 유사한 사고의 발생 위험성이 높다는 점도 드러나게 됐다.
법무부는 미군 당국을 상대로 장갑차 탑승 군인에 대한 1차 재판권포기를 요청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 20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이 무죄 평결을 받은 데 이어 20일에는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도 무죄 평결을 받아 파문이 확산됐다. 이후 국내에서 촛불시위를 비롯해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파문이 점차 확산되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토머스 하버드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사과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반미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12월 13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로 직접 사과했다.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개정에 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 사건이었다./조선
[1966년] ‘미란다 원칙’ 고지 의무화 판결
← 미국의 한 경찰이 ‘미란다 원칙’이 적힌 쪽지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1966년 6월13일, 범인체포시 이 ‘미란다 원칙’ 고지가 의무화되도록 한 판결이 처음 내려졌다. 경찰로부터 묵비권과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사전에 듣지 못한 피의자에게 미 연방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미란다는 1963년 3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시의 한 극장 앞에서 10대 소녀를 납치ㆍ강간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23세의 멕시코계 청년 어네스토 미란다의 이름이다. 미국인들에게는 ‘미란다 대 애리조나’로 더 잘 알려져있다. 경찰조사에서 자신의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진술조서에까지 서명을 마친 미란다가 돌연 재판과정에서 강요된 자백이라며 진술을 번복함으로써 재판이 잠시 차질을 빚긴했으나 법원은 미란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최고 30년의 중형을 내렸다. 주(州) 대법원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란다의 무죄를 주장하는 ‘미국 자유시민 연맹’이 연방 대법원으로까지 사건을 끌고가자 연방대법원은 5대4로 원심을 뒤집고 미란다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 후, 인권에 대한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않았다. 공교롭게도 판결이후 강력범죄가 급증했다.
미란다는 그뒤 동거여인의 증언 등으로 다시 유죄가 확정돼 옥살이를 하다가 1972년 가석방됐으나 1976년 술집에서 싸움 끝에 죽었다./조선
[2006년] 한국 축구대표팀, 토고를 2대1로 꺾어 월드컵 사상 첫 원정 승리
마침내 해냈다. 극적인 역전승에 온국민이 전율하며 환호했다. 16강이 보인다!
한국은 ‘반지의 제왕’ 안정환(뒤스부르크)과 이천수(울산 현대)의 미사일 같은 중거리포로 토고를 격침시키며 독일 월드컵 신화 재창조의 힘찬 시동을 걸었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13일 프랑크푸르트 월드컵 경기장에서 벌어진 2006 G조 첫 경기에서 토고에 전반 선제골을 내줬으나 후반 이천수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결승골로 2-1 값진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52년 만에 원정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거뒀다. 여섯차례 원정 끝에 이룬 쾌거이다. 또 4강 신화를 창조한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어 독일 월드컵 신화 재창조를 위한 단단한 기반을 마련했다. 승점 3점을 확보한 한국은 19일 새벽 4시(한국시각) 슈투트가르트에서 ‘강호’ 프랑스와 조별리그 두번째 경기를 벌인다.
한국은 이날 아프리카의 복병 토고에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강인한 정신력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으로 믿기 어려운 역전승을 뜨거운 응원을 한 조국의 국민에게 선사했다.
한국은 조재진(시미즈 에스펄스)을 원톱으로 내세우고, 왼쪽에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오른쪽에 이천수(울산 현대)를 포진시키고 3-4-3 전형으로 토고 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초반 중원 장악에 실패하며 토고에 선제골을 허용했다. 전반 31분 에마뉘엘 아데바요르(아스널)와 투톱으로 나선 선발 모하메드 카데르가 중앙선 왼쪽에서 넘어온 긴 크로스를 허벅지로 받아 몰고 들어가며 강하게 골망을 흔든 것이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의 반격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후반 6분 박지성이 상대 벌칙구역 정면에서 얻어낸 자유차기를 이천수가 강하게 오른발로 감아차 통쾌한 동점골을 뽑아냈다. 이후 토고의 중앙수비수 장폴 야오비 아발로는 두 번 경고를 받아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해 토고는 10명으로 경기를 해야 했다.
승부의 마무리는 안정환이었다. 후반 시작과 함께 수비수 김진규(주빌로 이와타)와 교체해 들어간 안정환은 후반 27분 상대 벌칙구역 오른쪽에서 강한 중거리 슛을 날려 그림 같은 역전골을 연출했다. 이후 이을용 대신 김남일을 투입하며 수비를 강화한 한국은 아데바요르를 앞세운 토고의 세찬 공세를 막아내며 귀중한 승리를 지켜냈다. /한겨레
[2000년] 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 첫 회담
←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3일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직접 만나 두손을 맞잡았다. 김대통령은 전용기로 오전 10시27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에는 사전예고없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환영나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비행기 승강구에서 내린 김대통령은 트랩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위원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역사적 첫 남북정상간 악수를 나눴다.
두 정상이 두손을 맞잡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나누자 환영행사에 나온 평양시민들은 노도처럼 '결사옹위 김정일' '만세' 등을 외치며 뛰면서 열광했다. 이날 환영나온 인파는 60만으로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북한의 기대를 짐작케 했다. 김위원장은 김대통령의 승용차에 함께 타 백화원 영빈관까지 가는 동안 약 50분간 '차중 회담'을 해 눈길을 끌었다.
양 정상은 이날 낮 김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27분간의 1차 회담을 갖고 남북 정상간 직통전화의 개설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오후에는 만수대 의사당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예방하고,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한 뒤, 저녁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베푼 환영만찬에 참석했다./조선
[1986년] '스윙재즈의 킹' 베니 굿맨 사망
← 미국의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
1930~40년대 재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며 일명 ‘스윙재즈’로 재즈 역사를 새롭게 장식한 베니 굿맨이 1986년 6월 13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클라리넷 연주의 명인일 뿐 아니라 부다페스트 사중주단과 모차르트를 협연할 만큼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었다.
1909년 시카고의 가난한 양복재단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밥벌이를 위해 미시간 호수 유람선 밴드를 드나들며 연주를 했다.
그러던 1935년 8월 21일 팔로마 보룸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미국과 전세계를 들끓게 한 ‘스윙재즈’ 붐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나의 26세였다.
‘스윙재즈’의 열풍이 일기까지 재즈는 소규모 밴드, 술집 그리고 거리축제 등에서 연주되던 흑인 음악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윙재즈’가 나오면서 재즈는 더 이상 흑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스윙재즈’... 말 그대로 재즈 연주 특유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듯한 리듬감을 표현한 이 음악은 대공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내 ‘스윙재즈’ 열풍을 타고 재즈는 온통 거리를 휩쓸게 되었고 이로써 약 10년 동안 베니 굿맨의 스윙 황금시대가 계속됐다.
이제 베니 굿맨의 몇몇 앨범은 전문 수집가들조차 구하기 어려운 희귀음반이 되어 버렸다. 그의 명곡들로는 ‘sing sing sing’ ‘Let`s Dance’ ‘Body And Soul’ 등이 있다. /조선
[1878년] 베를린 회의 개최
1878년 6월 13일 유럽 열강들의 국제회의인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 정부에 강요해 산스테파노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투르크는 발칸 반도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상실할 뻔했다. 러시아 슬라브주의자들의 성장에 반감을 품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 조약에 반대했고, 영국도 새로 생긴 불가리아가 러시아의 위성국이 되어 이스탄불을 위협할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야기된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열강은 베를린에서 국제회의를 열었다. 결국 베를린 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얻은 이익을 원상복귀시켰으나, 발칸 제민족의 희망은 도외시함으로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는 국제적 위기가 싹텄다./브리태니커
[1865년] 영국 시인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출생
1865년 6월 13일 태어남 / 1939년 1월 28일 죽음
"지금껏 저 찬란한 새들을 보아 왔건만 / 지금 나의 가슴은 쓰리다. / 맨 처음 이 호숫가 황혼녘에 / 저 영롱한 날개 소리를 들으며 /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그때 이래 / 모든 것은 변해 버렸다. " - 윌리엄 B. 예이츠, <쿨 호수의 야생 백조들>
예이츠는 아일랜드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 더블린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80년부터 수년간 더블린에 머무는 동안, 미술을 공부하는 한편 시를 쓰기 시작했고 아일랜드의 민간전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7년 런던으로 돌아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위시한 광범한 신비주의 전통에 접하는 동시에 아일랜드 문예부흥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1889년에 발표된 첫 시집 <오이신의 방랑 The Wanderings of Oisin>은 아일랜드적 주제들을 신비주의적 영감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1891년 아일랜드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이 죽자, 정치적 환멸이 남긴 공백을 아일랜드 문학 전통의 부흥으로 메꿈으로써 민족 정신을 고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이끌었다. 1896년에는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오거스타 그레고리를 만나 아일랜드 극장(1904년 애비 극장이 됨)을 설립하는 등 아일랜드 시극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전설을 바탕으로 영웅적 가치관에 호소한 그의 희곡들은 점차 중산층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그는 한층 더 시적이고 정적이고 비의적인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 Book of Modern Verse 1892~1935〉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 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 알 The Hern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그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외국에서 죽었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결국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 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 수록된 시 〈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에 명시된 장소로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그는 주로 <쿨 호수의 야생 백조들 The Wild Swans at Coole>(1919) · <탑 The Tower>(1928) · <나선 계단 The Winding Stair>(1933) 등에 수록된 시들로 기억되고 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97년] 핀란드의 육상선수 누르미[Nurmi, Paavo Johannes] 출생
1897. 6. 13 핀란드 투르쿠~1973. 10. 2 헬싱키.
1920년대 장거리 육상 종목을 석권했다. 3차례의 올림픽 대회(1920, 1924, 1928)에서 6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가 기록한 1마일(1.6㎞) 경기의 세계기록 4분 10초 40은 8년 동안(1923~31) 깨지지 않았다.
1920년 이래로 올림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다른 수많은 핀란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누르미도 1912년 올림픽에서 장거리 경기 3종목을 석권한 핀란드의 한네스 콜레마이넨에게 감명을 받았다. 누르미는 훈련 때나 경기 때나 자신의 보폭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스톱워치를 가지고 다녔다.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와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추가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대회에서 그의 기록은 대단했다. 굉장히 더웠던 7월 10일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1,500m와 5,0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이틀 후 역시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1920년에 우승한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1924년 이후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 다음날 비공식 3,000m 릴레이에서 첫번째로 들어와 핀란드 팀이 승리했으나 메달은 없었다.
192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1마일 신기록을 세울 때에 자신의 스톱워치를 들여다보며 뛰어 처음 3쿼터는 각각 정확히 63초에 달렸고, 마지막 쿼터는 61.4초에 달렸다. 그가 각 쿼터를 거의 같은 시간대로 달려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수들은 그 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1928년 1시간 경기에서 1만 9,210m를 달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규정 이외의 금품을 받았다 하여 1932년 올림픽 직전에 국제 아마추어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브리태니커
[1991년] 옐친, 러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직선) 당선
보리스 옐친(Yeltsin, Boris Nikolaevich, 1931.2.1~]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러시아 사상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60% 이상을 득표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1931년 우랄산맥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방의 부트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1985년 직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추진 인물로 발탁돼 모스크바시 당중앙위원회 건설담당자로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대중 정치가로 부상하면서 1987년 개혁이 미온적이라며 고르바초프를 비판해 당직에서 해임되기도 하였으나 1989년 3월 실시된 인민대회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돼 고르바초프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했다. 1990년 5월에는 소련내 최대 공화국인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소련이 해체된 후 이날 처음으로 실시된 러시아공화국 직접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제4대 국왕 할리드(Khālid ibn ‘Abd al-‘Azīz as-Sa‘ūd, 1913~1982) 사망
리야드 출생. 초대왕 이븐 사우드의 아들이다. 이슬람교 학교를 마치고, 1934년 형 파이살 태자의 보좌역에 임명되어 수많은 국제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였다. 1962∼75년 국무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1965년 파이살왕(王)의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975년 파이살왕이 요르단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화해공작 중 암살당하자, 3월 25일 왕으로 즉위하였다. 1975년부터 국무회의의장을 겸임하였으며, 1977년 유엔의 평화훈장 금장을 받았다. 197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과 1981년 영국 답례방문으로 이득을 얻었다.
[1948년] 미국 뉴욕 양키즈팀, 베이브 루스(Babe Ruth)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발표
1948년 6월 13일의 양키스 구장은 어둠침침하고 침울했다. 베이브 루스 Babe Ruth는 15년의 야구생활 마지막 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스와의 작별을 위해 수천의 팬들이 야구장에 모여들었다.
그는 굉장히 아픈 상태였다. 2개월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Babe는 손을 흔들며 선수 대기석에서 나왔고, 천천히 본루(홈베이스)로 걸어나왔다. 밴드는 Auld Lang Syne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대단히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죠지 허만 "베이브" 루스는 앞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아무도 놓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넓은 어깨를 살짝 숙여서 야구방망이에 기대었고 자신을 지탱했다. 관중들은 일어나서 수백만의 영웅이자 훌륭한 스포츠정신의 상징인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거기엔 스물 다섯 명의 사진기자들이 있었고, 베이브 루스의 날을 장식했다. 다른 사진기자들과 같이 냇 페인도 그 순간에 일어난 일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루스의 유니폼과 그의 등번호인 3번을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사진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진기자들과 떨어져 Ruth의 등뒤로 갔다. 그리고 그는 한 장의 사진에 모든 사연을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장면을 보았다. 자신이 의도한 사진을 얻은 Nat는 장비를 챙겨서 지하철을 타고 헤럴드 트리뷴으로 돌아갔다. 사무실에서 Nat는 그의 흑백필름을 현상했고, 스포츠 편집장 Arthur Glass를 위해 사진프린트를 준비했다. 그가 책상에 그의 사진을 올려놓자마자 Glass는 "이거야"라며 Fein의 사진을 지목했다.
뉴욕 쿠퍼스타운에 있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는 역사적인 전시물 가운데 Babe Ruth가 소유했던 물품들이 있다. 그의 유니폼이 놓여있는 곳 바로 옆에는 Babe Ruth가 야구에서 은퇴한 그날에 Nat Fein이 찍었던 사진이 놓여있다.
[1944년] 한국의 외교관,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潘基文, 1944.6.13~ ) 출생
한국의 정무직공무원·외교관. 1970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무부에 들어갔다. 2004년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었고, 2006년 10월 유엔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2007년 1월 1일부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1944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나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충주고 2학년 때 '외국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보고 외교관의 꿈을 더욱 키우게 되었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1970년 2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5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외무부에 재직중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 유학하여 1985년 4월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2년 주뉴델리 부영사를 시작으로 1976년 주인도대사관의 1등서기관, 1990년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외무부 장관 특별보좌관, 1996년 외무부 제1차관보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2002년 외교부 본부대사, 2003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을 거쳐 2004년 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이 되었다.
1993~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 총책 역할을 하였다. 또 1997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이 망명할 때 중국과 필리핀을 오가면서 밀사 역할을 하여 망명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외교통상부 내에서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철두철미한 업무 처리로 정평이 나 있다.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중인 2006년 2월 유엔 사무총장직에 출마할 것을 공식 선언하였다. 같은 해 10월 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단독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14일 유엔 총회에서 공식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007년 1월 1일부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 2001년 오스트리아 명예대훈장을 받았고, 2002년에는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06년에는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 알제리 국가유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1890년]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허가(1890.06.13 음력)
조선조 말, 외국인이 숨지면 주로 제물포항 언덕에 묻혔다. 정부가 성내 매장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1890년 헤론이 전염성 이질에 걸려 숨진 것을 계기로 외국인들은 한강변에 가까운 양화진을 공동묘지로 불하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헤론은 1885년 의료선교사로 파견돼 불철주야 한국인을 위해 의료사업을 펼쳐온 사람이었다.
6월13일(음), 정부가 묘지설립을 허가하고 헤론이 이 곳에 처음 묻히면서 이후 양화진은 베델,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등 면면이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안식처가 됐다. 묘비도 감동적인 문구로 가득해 베델의 묘비에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건 소명”, 헐버트의 묘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적혀있다. 현재 4000여평의 공간에 500여명이 묻혀있다./조선
[1398년] 고려시대의 학자, 문신 문익점(文益漸, 1329~1398) 사망
강성현(江城縣: 경남 산청) 출생.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삼우당(三憂堂). 아버지는 숙선(淑宣)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에 좌정언(左正言)으로 계품사(啓稟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때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워 고려로 진군하게 하자 이를 지지했는데, 덕흥군이 패했다. 문익점은 그뒤 귀국했다가 그 혐의로 파직되었다.
귀국할 때 금수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진주에서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랐으나, 정천익이 호승(胡僧)·홍원(弘願)에게 씨를 빼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이를 보급시켰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痲布]에서 무명[綿布]으로 바뀌게 되었다.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임명되었으며,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를 지냈다. 그러나 전제(田制)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는데,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를 반대하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강성군(江城君)을 추증하고,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 1440년(세종 22)에는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목화의 전래와 재배, 가공 등에 대한 내용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실려 있다.
문익점이 목면을 전래했다는 것에 대해 고려 이전 시기에 이미 목화가 재배되고 있었다는 이설이 있다. 그러나 고려 이전 시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면포(綿布)는 대개 누에실에서 뽑아낸 사면(絲綿)을 일컬으며 이 목면포(木綿布)는 중국에서도 송말(宋末)·원초(元初)에 처음 보급되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1381년] 영국 와트 타일러의 난 발발
1381년 6월 13일 영국 최초의 대규모 민중 반란인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다. 그해 부과되기 시작한 인두세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면서 잉글랜드 남동부 지방과 이스트앵글리아를 중심으로 소요가 일어났다. 5월에 에식스에서 시작된 반란은 리처드 2세의 정부에 타격을 입혔다. 6월 13일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켄트의 반란군이 런던에 들어가 플랑드르 상인을 학살하고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저택을 파괴하면서 민중 반란은 본격화되었다. 리처드 2세는 농노제 및 강제노동 철폐를 약속하면서 설득했으나, 호전적인 노위치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가 이스트앵글리아에서 존 리처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리처드 2세의 약속은 시행되지 않았지만 이 반란 후 정부는 더이상 인두세를 걷지 않았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 사망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6월 13일 원정지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끊임없는 정신적-육체적 과로, 국사에 대한 엄청난 중압감, 장기간의 행군과 심각한 부상 등으로 원기가 소진되어 걸린 열병이 원인이었다. 만 33세가 되지 못한 나이였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지 1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동방원정 기간동안 1만 7,600킬로미터를 행군한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정복자였으며, 전술 및 전략의 새로운 준거를 확립한 지휘관이었다. 그의 정복으로 거대한 세계의 문은 활짝 열렸고 통합되었으며 헬레니즘 문화는 꽃을 피웠다.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부친인 필리포스 왕에게서 군사적 재능과 냉철한 합리주의를 이어받았으며 모친 올림피아스에게서는 신비주의, 낭만성, 격정적인 기질, 카리스마 등을 물려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는 지식에 대한 사랑, 특히 과학적 탐구와 의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갑작스런 부친의 살해에 그가 부친의 왕국, 군대, 아시아 원정계획 그리고 코린트동맹군 지휘의 임무를 떠맡은 것은 그의 나이 약관 20세때였다. 동방 정복에 나선 이후로 단 한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그가 갖는 중요성은 단순히 군사적 천재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만민의 평등과 협조에 바탕을 둔 세계국가 이념이야말로 그의 업적이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다. 젊고 자부심에 찬 정복자가 착안한 이 정치적 비전은 그가 사망하고 그의 제국이 사라진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당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밖에
2004년 영화계 대표적 감초배우 김일우씨 별세
2002년 중국, 한국 영사관 진입한 탈북자 강제연행. 이를 제지하는 한국외교관 폭행
1997년 미연방배심원, 티모시 맥베이 사형평결
1993년 캐나다 총리에 캠블 선출
1984년 런던서 시크교도 망명정부 칼리스탄국 창설
1982년 제12회 월드컵 스페인서 개막
1974년 중국, 비림(批林).비공(批孔)운동 전개
1974년 제10회 월드컵 서독서 개막
1971년 뉴욕타임스(NYT)지 베트남전 기밀문서 게재 정치문제화
1968년 정부, 가이아나와 국교 수립
1961년 언커크, 한국의회제도 부활을 촉구
1959년 민판수호총연맹, 언론수호대회 서울서 개최
1958년 스위스 의회, 부인참정권 가결
1958년 일본, 한국에 반환할 문화재목록을 제공
1956년 영국군 74년 만에 수에즈운하서 철수
1955년 일본-북한 어업협정조인
1953년 콜롬비아 육군 유혈쿠데타
1938년 학교 근로 보국대 실시요항 발표
1938년 휘발유 및 중유판매취체령 공포
1938년 경성제대 강당에서 육군지원병훈련소 입소식 거행
1918년 광화문선 전차 운행 개시
1917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915년 1938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미국의 테니스 선수 버지 출생
1903년 소련 압록강목재회사 설립
1903년 소련,청나라 전선연접 조약 성립
1871년 런던 상해간 전신 개통
1831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출생
1790년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에스 출생
1402년 명나라 율문제, 정강의 변으로 폐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