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기하성 신년하례예배 참가 소감
일시: 2024. 01. 08. 월 오전 11시
장소: 여의도순복음교회 바울성전
대상: 기하성 전국 지방회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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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가 밝았다. 나는 오늘 우리 교단 전국 지방회 임원들을 위한 신년하례예배에 참석했다. 이 예배에서 총회장 정동균 목사는 사회를, 대표총회장 이영훈 목사는 설교를 맡았다. 그리고 총회 임원들이 기도 등 다른 순서를 맡았다. 특별 순서로 CBS 사장이 나와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켐페인을 소개했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부흥의 시대이며 그 부흥의 파도를 타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에 집중하고 말씀에 충실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이 부흥의 시대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작년 2월부터 불붙은 애즈베리대학교의 부흥을 들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오순절 교단의 교인 수가 1억명을 넘어섬으로 장로교인의 다섯 배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런 일은 모두 오순절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이룬 위대한 성취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짧은 설교를 끝내고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청중은 소리를 높여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애즈베리의 부흥은 우리가 있는 여의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았다.
CBS 사장의 저출산 극복을 위한 열렬한 홍보가 있은 후에 사회자는 목회자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청중은 모두 웃었다. 우리는 모두 저출산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구호만 외치고 있는 듯하다.
모임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는 길에 피켓을 들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내용은 이민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이민자들을 수용하면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인 것 같다.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마이클 크레이머 교수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고 경제활동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여 자녀를 많이 낳으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문제의 원인에 대한 폭넓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는 다자녀를 둔 부교역자를 채용하자는 식의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와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가르친 대로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한 가족으로 부르셨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으로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한국교회가 유대인보다 더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 교단의 신년하례예배는 두 가지 문제를 보여주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이 미약함을 일깨워주었다. 그 문제 중에 하나는 부흥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저출산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실제적인 조언이 부족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이번 행사에서 무료로 나눠준 책, ‘한국 오순절의 초석을 놓은 메리 럼시’(한우리 지음)를 읽으면서 조금의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은 한교총(한국교회총연합)이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로 제작하여 출판한 열네 번째 작품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찻속에서 이 책을 다 읽었는데 그만큼 얇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장점은 메리 럼시 선교사의 일대기를 잘 정리했다는 것이고, 한국의 오순절 교단을 설립한 초창기 지도자들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준 점이다. 그리고 한국의 오순절 운동에 대하여 국내외 학자들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간략하면서도 다양하게 소개한 점이 좋았다.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것은 메리 럼시가 한국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은 후에 20년이 지나 마침내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는 것과 그 시간 동안 그 말씀을 굳게 붙든 여성 선교사의 일념이 마음에 다가왔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의 성령운동에 대하여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 하나는 은사와 표적을 중시하는 것인데 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성령의 역사다. 오순절 운동의 신앙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그 역사성을 강조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그 두번째 특징은 성령이 사람의 내면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역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바울이 쓴 성령에 대한 기록에 두드러진다.
저자는 럼시 선교사에게서 이 두 가지 특징이 동시에 나타난다고 평가하면서 오늘 우리가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성령이 내면을 새롭게 하는 역사에 좀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20년 전에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오순절 신학 또는 우리 교단의 성령론은 조용기 목사님 이후로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흑인들 중심으로 시작하여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신자들을 중심으로 퍼졌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억압받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방을 느끼게 해 준 경험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 운동도 그런 측면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부흥운동과 성령운동이 다 그런 특징을 보인다. 이를 사머니즘과 결부하거나 번영신학으로 폄훼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에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있고 동시에 사도 바울의 기록도 있듯이, 성령이 다양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과 우리나라의 성령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절의 독특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알면서도 성령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남겨 새롭게 이해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이후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그대로 따라하지 말고 오늘 우리 시대의 과제와 상황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오늘 순복음교회에 필요한 신학이며 과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의 글을 읽기도 하고 그의 강연을 듣기도 한다. 그가 설명하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순절 교회에 있는 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부흥이라는 갈망에 갇혀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상실한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마치 유대의 열성당원들이 자신들의 갈망에 갇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외면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본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나는 톰 라이트가 로마서 8장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해설한 책, Into the Heart of Romans: A Deep Dive into Paul’s Greatest Letter을 읽고 있다. 거기서 톰 라이트는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성령이 너희를 인도하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성막의 그림을 소개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는 모델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목적이기도 하다. 톰 라이트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성령 충만이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새 아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본래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여기서 영화롭게 된다는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국에 올라가서 누리게 될 영생이라고 이해되겠지만,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세상에 나타내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이며, 이 세상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 열리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우리가 받을 구원의 온전한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여기서 맛보고 누리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에 대하여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된다면 성령의 역사를 단지 은사나 내면적인 성결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 이야기를 다시 읽어서 그것으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바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적 이원론이나 반지성적 문자주의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성경을 새롭게 읽을 눈은 여전히 두꺼운 수건으로 가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금 부흥의 문제나 저출산의 문제를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안목과 그것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담을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는 성경에서 새 이야기를 읽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다.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는 신자가 이렇게 말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사도행전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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