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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 제4주일)
일상에서 듣는 목자의 음성
행9:36~43; 시23편; 계7:13~17; 요10:22~30
오늘 “예배의 부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시편23편 5절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의 번역으로 5절 말씀으로 옮겨 보겠습니다. “나의 적들 보라는 듯 내 앞에 밥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생기를 찾게 하시니(내 머리를 기름으로 상쾌하게 하시니), 나의 잔이 흘러넘칩니다.”
“나의 적들 보라는 듯”(내 적들 맞은편에) 이 말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듯이, 시인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적들이 보는 앞에서, 적들 보라는 듯이, 주님께서는 시인에게 밥상을 한가득 차려주십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식탁을 차려주었다”<타아록 슐칸>라고 했는데, 그 식탁(밥상)은 잔칫상처럼 푸짐한 밥상이었을 것입니다.
또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라는 말씀은, “기름으로 내 머리에 생기를 찾게 하시니/내 머리를 기름으로 상쾌하게 하시니”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부어주다”라고 번역한 히브리 단어 <디센>은 “to refresh, revive”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본디 “살이 붙게 하다, 뼈를 튼튼하게 하다(힘있게 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to refresh, revive”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활기를 주고 생기를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시인의 머리에 향내 나는 기름을 발라 머리에 생기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상쾌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머리는 자존감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승리자의 머리에는 월계관을 씌웁니다. 머리를 꼿꼿이세운다는 것은 명예롭다는 표시입니다. 머리를 푹 숙이는 것은 실망했다는 표시입니다. 주님은 시인의 머리를 향내 나는 기름을 바름으로 그의 명예를 한껏 높여 줍니다.
그때 시인의 잔은 <러와야>, 흘러넘칩니다. 충만합니다. 가득합니다.
여러분, 이 싯구의 이미지를 상상해 볼 수 있을런지요? 시인은 처음에 “주님은 나의 목자,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라고 노래했지만, 그런 목가적인 싯구는 곧바로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바뀝니다. 아마도 이 “죽음의 그늘 골짜기”가 어쩌면 시인의 솔직한 실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주님은 느닷없이 3인칭이 아닌 2인칭으로 바뀐다는 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3인칭으로서의 “주님, 그분”이 아니라, 주님은 2인칭으로 “당신”, “Thou”, “너”<아타>가 되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아니라,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됩니다. 오히려 위기 속에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은 더 가깝고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로서의 “당신”이 되십니다. 그래서 나와 너의 관계가 됩니다.(우리말 번역은 이 뉘앙스를 잘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5절에는, 그런 “죽음의 그늘 골짜기”의 그늘이 남아 있습니다. “나의 대적자”<쪼르라이>들이 “내 맞은편에서”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내가 망하는 것을 보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한껏 자존감을 높여 주시고, 자존감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푸짐한 밥상에서 먹게 하십니다. 먹고 활력을 찾게 하십니다. 그리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생기를 찾게 하시고, 내 머리를 상쾌하게 하셔서, 나의 명예를 한껏 높여줍니다. 그래서 나의 잔은 흘러넘치고, 충만해집니다.
이 싯구가 잘못하면, 오해될 수 있습니다. 나를 깔보고 나를 시기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 가운데, 보란 듯 나를 높이고, 한껏 나를 추켜세우는, 어떤 보상심리를 이 싯구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작깃털의 보여주기 식 우쭐함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싯구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긴 하지만, 이 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우쭐함으로 그치는 싯구가 아닙니다. 그런 낮은 차원의 “회복” “소생” “revive, refresh”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더 깊은 자존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의 삶은 훼손될 수 없다는 깊은 신뢰, 어떤 누구도 어떤 상황도 나에게 상처 줄 수 없다는 더 커다란 자유, 그리고 삶의 풍요로움이 이 싯구의 본디 의미입니다. 이 싯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삶을 보여주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나의 진정한 가치를 회복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우선은 우리 자신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문제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의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가진 지식, 우리가 가진 재산, 우리가 가진 명예, 우리가 가진 재주, 우리가 가진 외모나 멋진 의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의 한마디 칭찬이나 부러움으로 쳐다보는 눈길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젊었을 때 큰 열등감에 시달렸던 사람이라서 이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지금도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실감합니다. 우리의 삶은 열등감에 시달리기에는 너무나 짧고 너무나 아깝습니다.)
주님께서 차려주신 푸짐한 밥상을 받으십시오. 이미 밥상은 여러분 안에 차려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머리에 발라주신 향내 나는 기름으로 생기를 얻으십시오. 이미 여러분의 머리에는 향기 나는 기름이 발라져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디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신”, “그냥 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수수한 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그냥 이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나”를 “새사람”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오늘 시편23편 5절의 이미지를 마음에 꼭 품고 사시기 바랍니다. “나의 적들 보라는 듯 내 앞에 밥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생기를 찾게 하시니(내 머리를 기름으로 상쾌하게 하시니), 나의 잔이 흘러넘칩니다.” 이 멋진 이미지가 여러분의 이미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잔이 흘러넘치고 넘쳐서, 여러분 주변까지 흘러넘치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본문 앞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27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여기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압니다. 여기서 듣고, 안다는 말은 지식이나 정보와 관련된 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듣고 안다는 말은 은총을 받는 통로입니다. 듣고 안다는 말은 깊은 친밀함의 표시이고, 하나됨과 사랑의 표지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우리 숨결보다 가깝고 우리 생각보다 가까우며, 우리 의식 자체보다 더 가까운, 우리 자신보다 더 가까운 분과의 깊은 친교”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십시오. 수많은 세상의 목소리는 그렇게 잘 알아듣고,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게도 잘 느끼는데, 정말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 부드러운 세미한 소리를 알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어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숨결을 열고 생각을 열고 의식을 열어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십시오. 저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당신의 목소리에 길들이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진정 우리를 이끄는 목자를 알고 그 목자의 소리를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내 말”을 들으라는 목소리를 우리는 우리 안에서 수없이 듣고 있습니다. “너 그렇게 살다간 남들이 뭐라겠냐?”부터 시작해서, “저런 게 진짜 사는 거지, 내 사는 꼴이 이게 뭐야?” “나를 뭘로 알고 그렇게 무시하는 거지?” 등등. 여러분, 여러분에게서 올라오는 수많은 소리들을 우리는 무시하지 못합니다. 아니 온통 그 소리들뿐입니다. 그 목소리들은 내 안에서 들리지만, 실은 내 목소리가 아닙니다. 다 밖에서 온 소리고, 세상의 수준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우리를 걱정과 염려, 두려움으로 이끕니다.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나는 온통 작아지고, 희생자가 됩니다. 한없이 나 중심적이 되지만, 그 나는 상처투성이의 나입니다.
진짜 나의 목소리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선한 목자, 참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소리입니다. 그 휘파람 소리는 바람결에 들려오고, 그렇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언뜻 언뜻 들려올 것입니다. 아기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 속에서, 저녁노을이 지는 고즈넉한 저녁 바람에, 여명에 물드는 불그스름한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비온 후의 새파랗고 투명한 하늘에서, 요즘처럼 연한 초록빛이 가득한 숲속을 거닐면서, 우리는 언뜻언뜻 주님의 휘파람 소리를 듣습니다. 괜찮아,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이 그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십시오”, 진정 갈망하면, 여러분은 주님의 소리도 우리의 일상 여러 곳에서 들려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는 고단한 일상,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오늘과 내일이 똑같을 지루한 일상은 목자의 소리를 듣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성경에서만 들리고 기도할 때만 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일상에서 목자의 음성을 들으려면 목자의 음성에 길들여 있어야 하기는 합니다.
길들여진다는 의미를 아시지요? <어린왕자>에서 길들여진다는 말의 의미를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넌 아직 네게 수십만의 아이들과 같은 아이일 뿐이야....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거야. 나는 너에게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될꺼고.”
“널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묻는 어린왕자에게 그런 친구는 손쉽게 상점에서 살 수가 없는 거라고 하면서, 여우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하지요.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돼. 우선 넌 나와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는거야. 난 곁눈질로 널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마. 말은 오해의 씨앗이거든. 그러면서 날마다 너는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면 돼.” 그러면서 말하지요.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장미를 위해 소비한 시간이야.”
여러분의 진짜 목소리,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길들여진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 사람들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다그치지요. 이 말은 길들여지기를 바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이면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분명히 내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우리의 태도가 대충 이렇지 않습니까? 이것도 길들여지기를 바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진짜 목소리인 주님의 목소리는 여러분 속에서 한시도 끊김없이 울리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소리에 길들여있지 않아서 무시할 뿐입니다. 무시하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거리감, 단절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내지 마십시오. 거리감, 단절감이 실은 길들여지는 시작입니다.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 길들인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철학자이자 기독교 신비주의자이고, 약자들을 위해 투쟁했던 운동가, 여성과 노동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로 인접한 감방에 갇힌 두 죄수가 벽을 두드리며 소통한다. 그 벽은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소통의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분리는 하나의 연결이다.”
목자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막막하다면, 그 거리감, 단절감에 노크하십시오. 그 단절과 분리를 결론으로 삼지 마십시오. 거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어떤 고통스런 상황이 단절감의 원인이라면, 그 고통스런 상황을 두드려 보십시오. 그 고통스런 상황이 여러분을 주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어제 모르는 분에게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서울 모교회 집사인데, 어젯밤 금요철야에 가서 기도도 하고 왔는데,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답니다. 뭐가 그렇게 고통스럽냐니까, 그분 말이 남편과 딸이 자기를 무시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편은 오래 전부터 자기를 집에서 부리는 게으른 일꾼쯤으로 생각하고, 딸은 자기에게 악다구니를 써가면서 자기를 무시한다는 겁니다. 그 딸이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합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잠깐 더 하다가, 제가 이렇게 말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모르는 저한테까지 용기내서 전화할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어려운 줄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그 상황이(남편에게는 일꾼이고, 초등5학년 딸에게 무시당하는 그 상황) 집사님을 지금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상황은 집사님을 아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집사님을 흔들어 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를 흔들어 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더 나은 삶으로! 푸짐한 밥상과 향기 나는 기름으로!
여러분, 당장, 빨리, 단방에?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건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장기하의 노래에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 그런 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당장, 빨리, 단방에, 여기에 머물러 있다면, 한동안은 더,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그 고통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갈릴리입니다. 또한, 엠마오로 가는 길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일상 속에서 주님은 우리가 “알아차리기”를 원하십니다.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차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차리듯이, 우리의 밥상에서, 우리의 빵조각에서, 주님을 알아차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딸의 울음에서, 우리 아들의 웃음에서 주님을 알아차리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주님을 알아뵙기를 원하십니다. 산책길에 푸르게 빛나는 나뭇잎에서 주님을 알아뵙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공동기도에서 드린, “세상의 아름다움은 물질을 통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의 다정한 미소입니다.”라는 말은 시몬 베유가 한 말입니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불행에 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언제나 진심으로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인간다움의 자격이 달려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한번 읽어보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20세기의 세르비아 수도승 비트노브니차의 타데우스는 이렇게 쓴다.
“우리의 생각이
친절하고, 평화롭고, 고요하며, 오직 선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우리 주변 모든 곳에 (가족 안에서, 나라 전체에서, 어디에서든)
평화를 발산하게 됩니다.
이는 여기 지상에서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도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밭에서 수고할 때,
우리는 조화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조화, 평화, 고요함은 어디에나 퍼져 나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을 키울 때, 그것은 큰 악입니다.
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족에게,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발산하게 됩니다…
파괴적인 생각은 우리 안의 고요함을 파괴하며,
그러면 우리는 평화를 잃게 됩니다.”
Martin Laird, <An Ocean of Light>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