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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1-10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2026. 2. 22.
오늘 본문 가운데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실족이라는 단어입니다. 실족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입니까? 사전적 의미는 발을 헛디딘다는 뜻입니다. 발을 헛디디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실족은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발생이 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대부분 수동적인 입장인데 연약한 쪽에서 실족을 당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실족을 시킨다고 합니다. 이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사실은 그렇게 상처를 주는 쪽 역시 연약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실족케 하는 사람들 역시 자기들이 더 강하고 상태가 좋아서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능동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 요셉에게는 10명의 형과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을 생각하면 정말 나쁜 사람들이지요? 동생을 죽이려 하다가 구덩이에다 던져 놓고 빈사 직전에 꺼내서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팔아 버린 사람들이 형들입니다. 그래 놓고 아버지께는 맹수에게 찢겨 죽은 것 같다고 둘러대지요. 같이 있었고 아버지 이스라엘의 심부름 때문에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세겜에서 양을 목양하고 있는 형들의 안부를 위해서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일행이 세겜에 도착을 했을 때에 형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면 요셉은 자신의 할 일을 100퍼센트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과 양떼를 생각해서 물어물어 도단까지 갔습니다. 도단에서 형들을 보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생각을 전달했습니다. 그런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고 구덩이에 집어 던지고 또 지나가는 아라비아 상인에게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너무나 비정하고 파렴치한 형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동생에게 이렇게 했을까요? 아버지는 요셉만 편애했습니다. 요셉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 요셉이 신중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에 도취되었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형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상처가 쌓이다 보니까 동생을 죽이려고 한 것 아닙니까? 어떤 방법과 방식이든 치유가 되어야 되는데 안 되니까 파괴적으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실족을 당하는 분이나 실족시키는 분, 모두가 똑같이 연약하기 때문에 실족을 당하고 실족을 시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부주의한 말 한 마디와 세심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교회를 그만 둔 사람이 있습니다. 잘 하려고 하는데서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거나,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가장 크게 받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한테 상처를 받습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를 실족시킬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교우들과 목사가 얼마나 친밀합니까? 목사에게 있어서 성도는 목회를 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적인 문제 때문에 교우들을 도와주고 케어하고 보살피고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이 목사의 소명입니다. 성도에게 목사는 미우나 고우나 생의 일부를 맡긴 본인의 지도자이면서 안내자입니다. 교회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 설교를 들어야 하고, 믿음을 지도 받아야 할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러나 목사에게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그 만큼 더 알고, 더 믿고 신뢰하고 더 가깝기 때문에 더 조심하지 않게 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실족을 당하지도 주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계를 하지 말아야 하나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할까요? 여러분, 관계를 안 하고 살 수 없잖아요? 예배를 안 드릴 수 없잖아요?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까울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가까울수록 더 배려해야 합니다. 마19;13-15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려고 하니까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막고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실족의 표현을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작은 자라고 하면 뜻 그대로 어린이를 말하는 것이지만 교회 공동체로 말하면 처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석한 성도와 믿음이 아직 연약한 분들을 말씀합니다. 그들뿐입니까? 좀 확대하면 우리들 모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은 생사람 목에다 연자 맷돌을 메게 한 후에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악한 일이 됩니다. 여러분, 맷돌 아시지요? 그냥 맷돌도 사람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리면 죽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연자 맷돌이라고 하셨어요. 연자 맷돌이 무엇입니까? 가정용 맷돌이 아니라 공장용 맷돌입니다. 그냥 맷돌은 사람이 손으로 돌려도 돌아가지만 연자 맷돌은 소에다 멍에를 지우고 돌리는 큰 맷돌입니다. 삼손이 연자 맷돌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런 듣기에도 엄청난 말씀을 하셨을까요? 현실적으로 이런 실족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파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연자 멧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사정에 따라 기쁘거나 우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과 신앙은 적용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한 모습을 잘 아십니다. 환경과 관계와 삶의 현장은 늘 재해들로 시끌벅적 한데 어느 때에는 하나님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내버려 두시고 막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왜 못 막으셨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한계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먼 미래의 작정과 섭리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뜻을 완벽하게 알 수가 없고 완벽하게 읽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해법을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일반화시키고 적용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안에서 적용을 하고 해법을 마련해야지요. 그리고 거기서 추론을 하고 그 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뜻하시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 자신이 모르는 사건을 통해서 훈련시키고 그 자리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창45;4-5.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해석이 다르지요. 형들은 동생 요셉에게 상처를 부어준 엄청난 실족으로 보았지만 요셉은 실족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실족하게끔 만들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창50;15-20.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 이 때에 요셉이 어떻게 합니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해하고, 알 수 있습니까? 현실에서 당하는 실족이 얼마나 아프고 괴롭습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이집트의 국무총리로 세우기 위해서는 이해 할 수가 없고 알 수가 없는 수많은 실족이 있게 했습니다. 그 실족을 요셉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로 해석을 했습니다. 말씀 가운데 주시는 은혜와 깨달음이 있으면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작정과 섭리와 계획으로 해석하면 실족이 아니고 예비하심이 됩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으로 해석을 하면 역사가 달라질 수 있고, 결과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해석이 되지 않아서 기회를 놓치고 잃어버리면 실족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6~7절과 8~9절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앞에 나오는 실족이란 말씀의 희랍어 원어는 스캔들리조 입니다. 이 스캔달리조는 영어 스캔들 (Scandle)의 어원입니다. 스캔들이 무엇입니까? 공인과 유명인사가 어떤 잘못된 관계 때문에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사실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예술 등 전 방위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타인을 넘어지게 하고 걸림돌이 되게 하는 종류는 모두 스캔들리조 입니다. 힘과 능력과 조건과 말과 행동, 그리고 상식과 덕과 모든 것으로 주든지 받든지 걸려 넘어지게 하고 걸림돌이 되면 스캔들리죠 입니다. 그런데 8-9절의 말씀은 남을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7-8절의 전반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개역 개정은 범죄하거든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원어도 똑같이 스캔들리조 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상처를 줄 때나 상처를 받을 때나 똑 같은 단어가 쓰였다면, 상처를 주는 사람도 문제지만 상처를 받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상처가 되고, 실족이 실족이 되는 것은 그것을 그리 되도록 방치하는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이해가 달라서, 기대가 달라서, 살아온 과정이 달라서, 기준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런가하면 똑 같은 얘기를 들어도 어느 때는 괜찮은데 어느 때는 실족하고 실족을 당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실족 당하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이 왕이 되기 이전에는 웬만한 일에 실족하지 않습니다. 왕이 되는 당일에도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왕 되는 기름을 부으려고 보니까 당사자 사울이 없었습니다. 어디에 있었지요? 사람 들 앞에 나서는 것이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행구 뒤에 숨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왕으로 지명되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될 수 있어? 노골적으로 멸시를 하고 조롱을 하고 예물도 안 드렸는데, 사울이 그때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후에 보복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불렀던, 사울은 천 천을 죽이고 다윗은 만 만을 죽였네! 그 노래를 듣는 즉시 실족을 합니다. 경우를 따지고 보면 앞의 경우가 더 심한 모멸감을 주는 것인데, 그때는 오히려 참았다가 전혀 상처받지 않을 상황에서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여러분, 자기 부하가 잘 되면 결국 본인이 높임과 영광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실족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100%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실족을 당하는 본인에게도 얼마의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7절에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아무튼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실족시키지 마시고 실족을 실족으로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도 사려 깊게 표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족시키지도 않는, 실족하지도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실족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1. 실족의 위험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아주 하찮은 이유 때문에도 실족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위험성을 생각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 한 마디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끼리는 더 조심하고, 자기보다 아래인 사람에겐 더 큰 배려가 필요 합니다. 이 배려도 믿음의 행위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가장 흔한 경우가 어떤 경우지요? 너 내 이야기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여러분, 본인이 상처 받고 기분 나쁠 이야기를 하면서 상처 받지 말고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니요?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하지요. 그래서 한 번 충고를 하려면 10번의 칭찬과 격려를 한 이후에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그 영향과 효능을 생각해야 합니다. 윽박지르고 소리 지른다고 효과가 있습니까? 결국은 분풀이를 하는 것밖엔 안 되는 거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상처받고 실족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주변에서 빙빙 돌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들이 떠납니다. 왜 영혼의 고향 같은 교회를 떠날까요? 다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이런 저런 일로 실족해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아무튼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합니다. 항상 이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실족을 피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우선순위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타인에 대해서는 기능이 아니라 관계로 다가서야 하고, 본인에 대해서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향악단에 전속 피아니스트가 있지요? 여러 모로 피아니스트가 쓸모 있긴 하지만, 사실 협주곡을 하는 것이 아니면 피아니스트가 아주 절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향악단은 보통 연습을 할 때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이나, 해외연주를 갈 때도 연세 지긋하신 여성 피아니스트 한 분을 꼭 모시고 갔다고 합니다. 꼭 연습이나 연주에 필요해서가 아니라 교향악단에 그 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너무나 큰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성품이 좋은지 주로 하는 일이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그런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 분이 앉아만 있어도 악단 분위기가 훈훈해지고 따뜻해집니다. 소리까지 달라집니다. 한 번은 그 교향악단에서 해외공연을 가게 됐는데 편성 상으로 피아니스트는 필요 없었고 재정상의 이유로도 보낼 수가 없어서 참가자 명단에서 그 분을 제외했답니다. 그랬더니 단원들이 악단 측에 호소를 하고, 지휘자와 총무까지 나서서 악단 측에 요청을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다만 방법이 있다면 하나 둘 빠져도 지장이 없는 제1 바이올린이나 제2 바이올린 파트 중에 하나가 양보하면 그 분을 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연투어는 단원들로서는 놓칠 수 없는 아주 영광스런 중요한 공연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소식이 전해지자 그 두 파트에서 양보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각각 네 사람이나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수석도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기 소리 하나야 없어도 되지만 전체를 위해서는 그 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정말 이런 이야기 들을 때 마다 살맛이 납니다. 존재한다는 실제를 느끼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게 됩니다. 사실 기능으로야 그 분이 왜 필요합니까? 하지만 관계로 보면 그 분은 악단이라는 공동체를 부드럽게, 잘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 어린 아이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성가시지요. 본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어린아이 담당이 있습니다. 본당에 못 들어오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 한 명이라도 실족하길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한 어조로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다 다릅니다. 솔직히 여러분 중에도 일하는 능력이나 지능이나 센스나 이런 것들이 다 차이가 있지만 그런 기능이 우선 되면 공동체는 파괴가 됩니다. 여러분 각자는 무지개의 한 색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색이 모여 예쁜 무지개가 되듯이 서로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한조각의 퍼즐로서는 완성된 모양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하나의 조각까지 맞추어져야 완성된 작품이 됩니다. 서로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실족을 시키지도 실족을 당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육체보다 영혼을 우선순위의 앞에 두라고 합니다. 8절, 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설마 여러분 중에 오늘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그대로 하면 큰 일 납니다. 이 말씀은 그 만큼 영혼의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육체보다 영혼 관리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영혼까지도 능히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실적을 보십니다. 그 실적이란 세상에 있을 때 어떤 위치에 있었고, 얼마나 부자였으며, 얼마나 부하 사원을 많이 두었었느냐가 아닙니다. 자기 허물 때문에 얼마나 울었으며, 하나님의 소명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으며,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해 얼마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는가? 이런 것들을 보십니다. 손발을 도끼로 찍어 버리고, 눈을 빼버리고, 지옥이니, 영원한 불이니, 왜 주님께서는 자극적이고도 끔찍한 언어를 사용하셨습니까? 죽고 나면 남는 것은 영혼뿐이니까 그 영혼을 위해 투자하고 그래서 너희들 모두 천국에 들어오라는 간절한 부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그 간곡한 음성을 이 시간 재해석하여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실족을 피하고 당하지 않는 것은 믿음 안에서 결심하고 결단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실족시키지도 않고 실족을 당하지도 않겠노라 결단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정하는 것 없고 우선순위 없이, 댓가 지불 없이 무엇을 이루겠습니까? 인생은 결심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결정을 잘 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목표가 뚜렷하다 하더라도 결단 없이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하나님이 외치시는 ready 액션!!! 그 소리를 들으면 움직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 것도 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 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인가 결단하고 무엇인가 실행하는 것을 보시면 하나님이 앞서서 일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수훈의 말씀이 얼마나 주옥같은 말씀입니까? 내용과 구성과 문체의 아름다움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과도 같은 소중한 말씀의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의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집을 지은 것이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반석위에 지은 집이고 무엇이 모래위에 지은 집이 됩니까?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겼느냐? 바로 이 것입니다. 실족시키지 않도록 언행을 조심하고 스스로 실족 당하지 않도록 영혼관리를 해야 합니다. 일에만 묻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게로 눈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실족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겪는 일 때문에 슬프지만 여기에도 하나님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 디디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실족한 자리에서 일어나 더 높은 곳으로 눈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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