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김지하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李章熙)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봄> - 김광섭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어떻게 알고 새들은 먼 하늘에서 날아올까
물에 꽃봉우리 진 것을 어떻게 알고 나비는 저승에서 펄펄 날아올까
아가씨 창인 줄은 또 어떻게 알고 고양이는 울타리에서 저렇게 올까
<봄밤> - 정호승
부활절 날 밤 겸손히 무릎을 꿇고 사람의 발보다 개미의 발을 씻긴다
연탄재가 버려진 달빛 아래 저 골목길
개미가 걸어간 길이 사람이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답다
<봄> - 성낙희
돌아왔구나 노오란 배냇머리 넘어지며 넘어지며 울며 왔구나.
돌은 가장자리부터 물이 흐르고 하늘은 물오른 가지 끝을 당겨올리고
그래, 잊을 수 없다. 나뉘어 살 수는 더욱 없었다. 황토 벌판 한가운데 우리는 어울려 살자.
봄
- 김승희
혼불들이 돌아오고 있다 어느 구천의 깊은 땅속에서...... 못다한 뼈 위론 그렇게 신들이 오르고 있다...... 은빛의 기포들처럼......
거릿귀신 같은 나무들이 아지랭이를 입고 아물거린다...... 종이꽃만한 한줌 뼈를 싸들고 어디에선가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의 창궐하는 그림자같이......
무거운 향기가 나의 뇌를 꿰뚫고 지나간다...... 가면과 해골과 부채와 방울들이 봄바람 속엔 들어있어서.......
그렇게 나의 피엔 금이 잔뜩 가서 한자루 뼈끝에 태어나는 꽃이여......꽃이여....... 너를 보는 나의 눈동자 속으론 만경창파 어린넋들만 치렁치렁하구나.......
작가약력
1952년 전남 광주출생 서강대학교 영문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 첫시집 <태양미사>, 산문집 <고독을 가리키는 시계바늘> ,
70년대 작가론집 <영혼의 외로운 소금밭>, 이상평전 <제13의 아해도 위독하오>외
봄
- 송수권
언제나 내 꿈꾸는 봄을 서문리 네거리 그 비각거리 한 귀퉁이에서 철판을 두들기는 대장간의 즐거운 망치소리 속에 숨어 있다
무싯날에도 마부들이 줄을 이었다 말은 길마 벗고 마부는 굽을 쳐들고 대장간 영감은 말발굽에 편자를 붙여가며 못을 쳐댔다.
말은 네 굽 땅에 박고 하늘 높이 갈기를 흔들며 울었다 그 화덕에서 어두운 하늘에 퍼붓던 불꽃 그 시절에 빛났던 우리들의 연애와 추수와 노동
지금도 그 골짜기의 깊은 숲 캄캄한 못물 속을 들여다보면 처릉처릉 울릴 듯한 겨울산 뻐꾸기 소리......
집집마다 고드름 발은 풀어지고 새로 짓는 낙숫물 소리 산들은 느리게 트림을 하며 깨어나서 봉황산 기슭에 먼저 봄이 왔다.
작가약력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업 문학사상 신인상- <산문에 기대어>외 4편 시집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봄 기도
- 강 우 식
하찮은 풀잎이라도 새싹들은 지뢰 밟듯 조심스럽다 담장 포도나무들은 차 스푼보다 작은 송이 속에 좁쌀알만한 꿈들을 달고 바람 속에, 햇볕 속에 녹아 있고 사과나무는 하얗게 꽃 피어 벌들의 날개 짓에도 얼굴 붉혀라.
꿈 속에 꿈꾸던 내 사람아 이제는 혼수의, 인사불성의 긴 잠에서 죽이는 꽃들의 빛깔로, 향기로, 하늘거림으로 아픈 데서부터 깨어나 한 치 밖에 있는 봄 구경을 제발 좀 하여라. 단 하루만이라도 봄빛으로 눈 떠 보아라.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고 흰 눈동자를...... 펑, 펑, 펑 꽃 터지듯 떠 보아라.
작가약력
1965년,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새 싹을 노래함
- 나호열
눈이 있는가 굳센 팔이 있는가 어디 힘차게 디딜 다리 힘이 있는가 견고한 땅을 밀어내며 얼굴을 내미는 새 싹은 오래 전 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으로 말미암아 땅의 틈새가 벌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다 오래 전 부터 얼음과 눈으로 덮혀있는 침묵을 조금씩 들어올려 이윽고 땅의 틈새로 하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눈 먼 채로 벙어리인 채로 혼자 커 가는 그리움처럼
4월의 소리
- 유안진
밤잠을 설친다 밤이슬에 묻어서 따라 내리는 별무리 떼지어 오고 가는 발자국 소리 덧문을 치고 가는 바람결 타고 오는 소리 촉 트고 움 돋고 새순 터지는 소리소리에
새벽잠도 설친다 아기종 꾸러미째로 마구 흔들어쌓는 개나리꽃 피는 소리탓에 가래 끓어 밭은 기침 연신 뱉어내는 소리 탓에 수유리 돌밭에서 잠든 돌들 깨어 일어나는 소리 탓에.
작가약력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프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받음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박목월 선생의 추천으로 시단에 나옴 시집으로 <달하><물과 바람으로><날개옷><영원한 느낌표>외 다수
봄 날
- 헤르만 헷세
숲 속엔 바람, 새들의 노래소리 높푸른 상쾌한 하늘 위엔 배처럼 조용히 미끄러지는 장려한 구름... 나는 한 금발의 여인을 꿈꾼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꿈꾼다. 저 높고 푸른 넓은 하늘은 내 그리움의 요람. 그 속에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행복하게 따스히 누워 나직한 콧노래를 부른다.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애처럼.
이른봄의 詩
- 천양희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을 안개를 길어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 웃고 있다.
백목련
- 백우선
나뭇가지가 알을 낳았다 수백의 알이다 알을 가지 끝끝마다 자랑스레 들어올리고 있다 햇살은 알에서 토도로록 튀어오른다 사람의 눈길도 모여들어 알을 어루만진다 바람은 그 비단결로 휘감아 흐르고 어느 하나 품어주지 않는 게 없다 한눈 판 사이엔 듯 일제히 부화해 재재거리는 하얀 새떼 오는 봄 다 불러모아 일일이 머리에 깃털을 달아주고 있다 나무도 벌써 몇 번을 날아올랐으리라
봄에서 여름으로
- 나호열
오전 7시에서 8시로 가는 페이지 235에서 236페이지로 가는 그 사이에 눈이 내린다 사월의 겨울나무 위에 돋는 상추 그 푸른 상처가 세상을 경이로 이끈다 쌓이지 않는 관념들 그리움의 옷자락에 얼핏 비치는 투명힌 살의 이끌림 아작아작 밀어 올리는 풀빛 무거운 하늘을 프로메테의 어깨로 받치고 있는 힘 봄의 힘!
삼월, 장독
- 전영애
꾹꾹 디뎌 밟아 누운 자리 밑에 감추어도 그리움 메줏덩이로 떠 곰팡이 슬고 냄새 피우고
그만 내다버릴까 내가 뛰쳐나갈까 싶더니
정·이월 차고 맑은 햇볕 다 받아 저 검정 숯덩이 매운 통고추와 함께 맑은 물에 몸풀고 우러나고 있고나 곰삭은 그리움 짱짱한 햇살 속에 말갛게 동동 뜨고 있구나
눈의 눈
- 나희덕
봄이 가까워질수록 눈은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햇빛이 시려워 시려워서
피워놓은 눈꽃을 자꾸만 꺼뜨리며 따라오는 햇빛의 눈을 피해 눈은 음지로 음지로 숨어든다 누구도 그를 알아볼 수 없는 곳으로
쫓기지 않고서는 오를 수도 없었을 산정에서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겨우내 연기 한번 피우지 않고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바위틈에 간신히 서려 있다가 점점 잦아들어, 마침내 훅 꺼져버린 눈의 눈
시린 물 흘러내리는 이른봄마다 나는 눈 어두워 알지 못했네 그것이 한 은둔자의 피라는 것을
악몽의 벚나무
- 최정례
숨통이 짓눌려진 채 벚나무 피었다 질린 분홍빛으로 천국페인트와 광성카센터 사이 밀리고 밀리다 멈춰서서
하늘은 인색하게 햇빛을 아끼며 벚나무를 윽박지르지만 피었다 벚나무
간판과 간판 사이 빈틈 위로 고개를 길게 내빼고 피어서 바라본다 으르렁거리며 지나는 트럭을 택시를 오토바이를
기름 범벅의 지하로부터 뿌리를 타고 올라오는 비명소리 피어서 기다린다 뿌리째 데리고 날아가줄 알루미늄 날개의 큰 새를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다리도 팔도 없는 불구자가 틀어대는 찬송가를 이를 악물고 듣다가 듣다가 악몽 속에 벚나무 떨어뜨린다 굉음 속으로 벚꽃잎 몇장을
春 雪
- 鄭 芝 溶
문 열쟈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금가고 바람 새로 딸으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
웅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가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바다와 나비
- 金起林
아모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 준일이 없기에 힌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公主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三月달바다가 꽃이피지않어서 서거푼 나비허리에 새파란초생달이 시리다.
그리운 이 그리워
- 오세영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온 동백 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득 타보는 완행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봄 비
-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현대문학,1955)
곡우
- 조예린
동남풍 좋은 바람 서리 담가 둔 님 그린 눈물다이 맑은 淸明酒 더운 피 품에 안아 술병 다숩고 뒷산 연한 죽순 뜯어 놓았네
산마다 산메나리 들엔 들메나리
흙고무신 채마밭엔 씨앗이 트고 곡우날 고마운 비 돌아오는데 하물며 그린 님도 정녕 오겠네 바라맞는 산마루엔 실아지랑이 아지랑이 뒷짐엔 짙오는 신록
님 그리는 믿음은 벌써 재 너머 꿈꾸는 사월 숲 넘쳐오는데,
동남풍 맑은 바람 좋은 청명주 대숲 연한 죽순 뜯어 놓았네 -부제<동동별사 4월령>
봄길에서 만난 황홀
-박세현
강의도 재미 없고 사는 일도 시들해서 연구실 문 걸어 닫고 도망간다 전화도 끄고 메모도 없이 완벽하게 달아난다 시장통 같은 교문을 빠져나와 네거리 몇을 지나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섞으면서 봄들판에 도착 일년생 아지랑이 한창인 봄길을 걷다가 봄닭 우는 소리에 걸려 보기좋게 넘어졌다 치악산 한 자락을 물고 논 가운데 서 있는 백로 곁에서 느닷없이 봄기운이 내게 거는 수하誰何 길가던 제자뻘 처녀가 흘린 여별의 기가 허락도 없이 몸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튼다 (((살려주세요!)))
배꽃밭 지나며
- 허형만
저 미치도록 하이얀 보아라 속살 풋풋한 비린내 질펀하게 깔리고 벌들 끙끙 온몸으로 힘써대는 소리 신음 소리 천지가 하나로 뒤얽혔어라 토실토실한 새끼들 오지게도 퍼질러놓겠구나 밀레니엄 베이비 만들기 좋다는 날 햇살도 눈부신 봄날
은방울 꽃
- 김승기
사는 일에 힘이 부쳐 내 몸 하나 세우기 버거울 때마다 너를 만나러 간다
산의 품에 안기어 이미 마음이 고요로운데
종소리로 다가오는 하얀 웃음이 가슴 속을 후려치는구나
그래 어떻니 찾아오는 길이 더 힘들었지
그렇게 사는거야 모든 세상살이 다를 게 없어 누군들 벗어버리고 싶은 짐 무슨 미련이 남았겠지
그렇게 끓는 열정을 주체 못하겠거든 오늘처럼 나를 찾아오게나 오는 걸음 되돌리지 말고
그래 네가 있어 오늘도 가냘픈 몸뚱이 바로 세울 수 있지
너를 찾는 일이 즐거워 이미 고요로운 마음 무엇을 더 애닯다 하리
사는 일에 숨이 차서 내 몸 하나 가누지 못할 때마다 거기 숲에 있는 너를 만나러 간다
목련
- 홍우계
돌아보지 말아야지 다시 보면 그 속에 쏘옥 빨려들고 말거야. 첫눈에 입맞추고 가는 나비도 한모금에 취해서 저리비틀 나는데 나 같으면 한번다시 보기만 해도 빨려들어 한방울 이슬이 되고말걸? 돌아보지 말아야지 울며라도 가야지
배꽃 지는 풍경
- 노영임
봄은 온통 누룩 빚어 흩날리는 흰 빛 축제 햇살 투명한 날 싸륵싸륵 꽃눈 내립니다 혀끝에 닿는 그 배꽃, 알싸하니 녹습니다
산등성이 저만치 명지바람 불어올 때 파르르 떠는 꽃잎, 허공 속에 포물선 긋고 사월의 끝자락 잡고 물구나무 서는 하루
이울어진 꽃자리마다 봉긋이 내민 가슴 아그배 닮은 계집아이 부끄러워 샐쭉하니 청술레 밭길 따라서 앵돌아 뛰어갑니다.
우리는
- 이지현
그대는 봄이고 나는 꽃이야 그러니 무심천 벚꽃이 눈 밖에 있지 나는 봄이고 그대는 꽃이야 그래서 내 눈 속이 온통 그대지
우리는 꽃밭이고 우리는 봄이야
*이지현 경북 의성 출생 시집 ‘가끔 그대 잊는 날 있다 해도’
기다림
- 김삼주
저 눈부신 오월의 공기 같은 기다림은 아름답다 라일락 향기가 되어 문간을 넘어서는 투명한 기다림은 아름답다 마냥, 기약도 업이 그저 네 이마를 찾아 떠도는 공백(空白)의 바람 설령 그것이 네게 닿기도 전 꽃비 속에 스러진다 할지라도 라일락 향기가 되어 길을 더듬는 기다림의. 이 투명한 비어 있음은 아름답다
연(緣)
- 최 승 호
쑥내 풍기는 햇살 속에서 오래 전에 타계한 우리 할머니 같은 꼬부랑할머니가 냉이를 캐고 있었다 어른거리는 아지랑이들, 이미.많은 내 숨결은 나 아닌 숨결이 되어 버렸다.
오후의 섬을 가로지르다 평지처럼 밋밋해진 무덤을 밟고 서 있는 염소와 눈이 마주친다 내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 길 위에서의 우연들, 엉성한 거미줄처럼 찢어질 인연들, 악연이든 우연이든 필연이든 내가 그 무슨 연에도 속하지 않는 날이 있을 것이다. 밋밋한 무덤 위에서 염소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우물우물 어금니를 갈 듯 되 새김질하면서 당신은 뭐요?라고 묻는 듯 나를 쳐다본다. 그 뿔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비천(飛天)의 바다.
생의 노래
- 이기철
옴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 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을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기슭엔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잎이 씨를 읽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 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들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의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 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알리 초록에서 숨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새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금씩 쓰며.
*이기철 경남 거창 출생 <자유시> 동인 시집 <청산행> 외 다수 영남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엄마 목소리
- 정완영
보리밭 건너오는 봄바람이 더 환하냐
징검다리 건너오는 시냇물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목소리가 더 환하다.
혼자 핀 살구나무 꽃그늘이 더 환하냐
눈감고도 찾아드는 골목길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그 목소리 더 환하다.
봄은 어디에서 먼저 오는지
- 하정심
햇살 가득한 날 놀이터에 가 보면 봄이 어디서 먼저 오는지 알게 되지.
봄꽃보다 더 환한 놀이터의 아이들
봄 기운 돌아 촉촉해진 눈망울 마알갛게 피어나는 분홍볼
움츠렸던 어깨 활짝 펴지며 발걸음도 통통 튀어 오르지.
놀이터 봄꽃들도 아이들 웃음소리 따라 꽃망울 톡톡 터뜨려 놓지.
아직도 먼, '이른 봄'
- 김후란
너와 더불어 듣고 싶었다 침묵 속에 팽창하는 대지의 젖가슴에 잠든 노래 한가닥 풀어내어
첫 새벽 이가 시린 얼음을 깨고 물방울 무늬의 미소로 피어난 환한 꽃송이로 만나고 싶었다
세상에는 신비스런 일도 많으니 시샘하여 부는 꽃샘바람에 어디선가 그대 손 내밀어 잡아준다면 깊은 눈으로 일으켜 준다면
심장에서 빼어 낸 소망의 언어에 촉촉히 눈시울 젖은 봄이 묻어 있다.
지리산 뻐꾹새
- 송수권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中
저 連連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움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유리 시편
- 조정권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紫色 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太古木들의 숙연한 全身沈默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端坐를.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 오던
古木들의 출렁거리는 뿌리 둥치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이 겨울내내 山中에서 杜門不出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봄산에 가면
- 오만환
햇볕이 옷을 갈아 입히는 희망의 속삭임을 듣고 저 아래로 한 발짝 한 발짝 깨금발도 뛰면서 즐겁게 여행하는 물과 이름 없는 풀과 꽃과 엉겨서 정겹게 살아가는 민생(民生)을 포개어 바라보면서 식은 눈으로, 그러나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오늘을 들여다 봅니다
불쑥 불쑥 기기묘묘한 바위들 이루지 못한 삶의 꿈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면 꼭 누구 누구의 마음 같아서 더 한번 보고 얼마 후 다시 오게되는 인연을 만듭니다
기지개 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게으른 나를 달래고 채찍질하며 나물 캐듯 다양한 빛깔을 속에 담아 부자가 됩니다 할미꽃이나 개동백 산철쭉 꽃망울을 만나면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유치원 갓 입학한 조카딸의 웃는 얼굴을 영화처럼 감상하게 됩니다 봄산에 가면
식목일에
- 박 현 자
어느 봄날 베란다에 모녀가 쪼그려 앉았다 움직이면 서로 부딪히는 좁은 공간을 햇살이 기웃거리고 화분의 흙을 고르는 손등위로 미끄러지는 아이의 웃음
봉숭아 꽃씨를 묻으며 마음은 벌써 손톱밑에 꽃물을 들이고 창밖에선 간간이 황사바람 일어도 화분속 씨앗 성급하게 만삭의 날 기다리며 마냥 꿈에 젖는다.
*박현자 경기 양평생 1992 인천문단 시부문 대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인천지회 회원 詩山동인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정일근
1958 경남 양산 출생 경남대 국어교육과 졸업
문학 프로필 ..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1984년 실천문학(5권) 신인 작품 발표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0년 한국시조 작품상 수상 2001년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수록 2001년 시와 시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현재, 『사람과 산』편집위원, 계간 『열린시조』운영위원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시와시학) 경주남산(1998, 문학동네) 감지의 사랑(1995, 빛남) 처용의 도시(1994, 고려원)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3, 푸른숲)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빛남)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창작과 비평사)
시선집
첫사랑을 덮다(1998, 좋은날)
민들레
-이윤학
민들레꽃 진 자리 환한 행성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가벼운 홀씨들이 햇빛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거장도 아닌 곳에 머물러 있는 행성 하나
마음의 끝에는 돌아오지 않을 행성 하나 있어
뿔뿔이 흩어질 홀씨들의 여려터진 마음이 있어
민들레는 높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윤학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봄 바람에게 -홍희표
삼월밤의 시편들은 어두운 방에서 한 그루 나무로 자라 나의 잠을 깨우고, 벼랑 위에 부딪는 빛깔 푸른 잎의 가지마다 한 악장씩 피워내는 나의 손은 한 오라기의 언어에 횃불을 밝히고 살다가 어느 핸가, 낯선 유형의 벌판에서 썰매를 끄는 순록에게 이끼를 주고, 어두운 방을 넘나드는 겨울의 나무들은 불시에 열기를 뿌리며 빈 하늘 속으로 줄달음치는 벌레, 창검을 쥐고 원정하던 앞개울에 달려가는 혹한(酷寒)의 온 몸으로 불어라, 번갯불에 나의 시들은 눈뜨고 가벼이 넘치는 선창(船窓). 문풍지에 어룽이는 작은 짐승들은 춤추며 봄바람이여 불어라.
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러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 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오월 - 정승렬
비가 온다 봄 가뭄에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고 있다 빗물은 벌어진 틈을 후시딘 연고처럼 감싸주며 상처의 흔적을 가리고 있다
광주에서 담양으로 가는 국도변 도벌꾼에 의해 잘려 나갔던 대나무 숲에서는 푸른 뿌리들이 땅속 깊이 잠을 자고 있다 대숲으로 이어진 밭둑 길 반공방첩이라고 쓰여진 낡은 표지판이 전봇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멧비둘기 울음소리 들리는 오후 진초록 마늘 잎새 사이로 연두색 마늘종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리다
봄 비 - 심훈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에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 숨도 못 이루시네
2월의 봄 -이복자
금방 젖을 뗀 입술로 욤욤 햇살 빨아먹는 요 작은 입하고
금방 꿈꾸고 일어나 제풀에 하르르 웃는 요 귀여운 눈하고
살찌는 방귀 금방 뿜어낼 것 같아 꼭꼭 만져 주고 싶은 요 향긋한 살내음하고
요 화초 따뜻한 앞뜰에 내놓아 자랑처럼 얼굴 살살 닦아 주고픈
봄 비
-최지언
새싹이 길을 모를까봐 안타까운 구름이 모여서 궁리하고 마침내 가벼운 빗줄기 되어 조심스레 땅을 두드립니다 보드라운 빗소리
빗소리에 씨앗은 눈 틔워 봄비가 스며들어 낸 길 따라 땅 위로 손을 내밉니다
흙 속에 숨어 있던 뿌리들도 기지개 켜며 발을 뻗습니다
작은 보살핌으로 새싹은 새로운 날 만들고 이파리 무성한 날을 기약합니다
화분에 새싹이 어우러지는 '봄'이라는 소리글자 다시 보니까 상형문자네요 'ㅁ'화분에 마구 싹이 오르는 모습
봄비가 길을 내어 화분의 새싹 올립니다
부석사의 4월
-강 재 현
천년을 타오르고도 다 타오르지 못한 절집 처마 밑 한 귀퉁이에 살고 있는 상사화, 소리도 없이 흘린 눈물 한 방울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눈물만큼 뜨거운 마음 자락을 놓지 못해 무량수전 부처 손끝에 필 우담바라보다 더 먼저 전생을 살고 다 못한 인연을 못내 그리워 하기 위해 제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앙상한 가지 하나 제 모태였던 지팡이 보다도 더 야위어 눈녹는 소리로 제 살을 저며 잎눈을 틔우는 살빛만이 이슬도 내리지 않는 맨 땅에 젖은 몸으로 누워 있다 미륵불처럼
浮
- 송정란
정도리* 밤 바닷가 저 멀리 부표들만 검은 머리를 내밀고 있다 건들거리는 영혼들이 끊임없이 제 머리를 흔들고 있다 떠나지 못하는 것들이, 더 깊고 무거운 어둠 속 닻에 발목 잡힌 것들이, 캄캄하게 지워진 수평선 너머까지 달아날 듯 출렁거리다 주저앉고 마는 플라스틱처럼 질기고 느물거리는 저 한심한 영혼의 머리통들
꿈쩍도 않는 자갈돌 하나를 집어 어둠의 정수리를 향해 힘껏 날린다 워―워― 떠나거라 달아나거라 달아나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말아라 네 영혼의 발목이 잡혀 있던 곳 지루한 반복의 물결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곳 망망한 삶의 한 지점을 버리고 가볍게 가볍게 어디로든 떠나버려라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잎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시조]봄비
- 나순옥
1
은침 하나 하나
맥을 짚어 꽂는다
찬란한 태몽 앞에
밀려 나가는 냉증
대지는 몸을 뒤틀며
입덧이 한창이다
2
호기심이 발동한
개구쟁이 눈빛이다
손톱 밑 까매지도록
땅거죽 헤집어
새싹들 간지럼 태며
키득키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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