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공포' 허버트강 (본명 : 강춘식)
허버트강을 이야기하자면 그의 부친 강세철씨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강세철씨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으로 목포에서 살다가 서울로 상경해 복싱에 매진
1960년 신설된 동양 J.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한국 최초의 동양챔피언이 된 사람이다.
당시 강세철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지금의 복싱 챔피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화를 누렸다.
여배우들로부터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이에 따른 스캔들도 많았다.
김지미, 도금봉씨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도 철권 강씨를 좋아했고
도금봉씨와는 3년여의 동거생활도 하였다.
이때 당시 둘째 아들인 허버트강은 열 네 살이었다.
허버트강의 본명은 강춘식으로 1947년에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고 나서 몇 년후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이때부터 그의 외롭고 반항적인 기질은 시작되었고 어머니가 없는 어린 강춘식은
아버지가 양동의 골목에 차려놓고 운영하던 복싱도장을 중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가 글러브를 처음 끼기 시작한 것은 열 세 살때 아버지가 경영하는 도장과
그 인근의 골목을 배회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중 심심풀이로 헤비백을 두드리곤 했다.
그의 숨은 천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 강세철씨는 허버트강을 복서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인 휴버트.험프리의 이름을 따서
허버트강이라는 링네임을 지어주었다.
허버트강은 데뷔 후 몇 차례의 경기에서 모조리 패하였다.
그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967년 필리핀원정 경기에서였다.
필리핀 복싱 관계자들은 패가 많았던 허버트강을 노리개감으로 점찍었고 시합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4연패 끝에 가까스로 일본의 가네자와를 2회 KO로 잡고 다시 얼굴을 내민
허버트강은 이 원정에서 내일의 간판스타로 키우고 있던
쥬본, 휘커, 레이몬드 세 선수를 모조리 단발 KO승으로 링바닥을 기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필리핀의 권투계는 발칵 뒤집어졌고 일본과 미국에서도 이 무명의 선수를 주시했다.
그는 필리핀 원정에서의 선전에 힘입어 다음해 9월
동양 페더급 챔피언 사이또.가쓰오와 일본에서 타이틀전을 갖는다.
사이또. 가쓰오는 허버트강의 단 한방에 2라운드 실신 ko되어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이 경기에서의 승리로 허버트강은 동양의 공포로 등장했다.
그해 11월 그는 역시 일본의 가나자와.가쓰요시를 서울로 불러들여 6회에 KO시키고
다음해 1월 19일 일본에서 시바다.구니아끼를 맞아 1차방어전을 갖는다.
시바다는 후에 2차례나 세계챔피언이 된 일본의 강타자로
당시 허버트강과의 동양타이틀전은 세계전의 전초전 형식으로 치루어졌다.
당시 허버트강은 시합을 눈앞에 두고 10kg을 감량했고
훈련을 전혀 하지 않은채로 일본의 전쟁터로 날아갔다.
1회전부터 5회전까지 시바다는 허버트강을 치고 싶은대로 쳤다.
조개와 같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가드를 올린 허버트강은 웬만한 선수같으면
벌써 다운을 허용했어도 열번은 허용했을 법한 도전자의 강타를 수없이 맞으며 계속 전진했다.
그때까지의 채점은 20대 25로 허버트강의 완전 열세였다. (당시는 5점만점제)
그러나 6회에 접어들어 허버트강은 반격을 개시했고
허버트강의 무저항에 신이 난 시바다는 약점인 복부를 노출시키고 계속 대쉬했다.
그러는 순간 허버트강의 강한 주먹이 시바다의 복부에 꽂히면서 시바다는 약간 주춤하였다.
그러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허버트강의 무서운 라이트 어퍼가 시바다의 턱에 작렬했다.
시바다는 이 한방에 10카운트를 지나고도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당시 일본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일간스포츠지
가나자와, 다데, 사이도등 특급 선수들만을 골라
이미 KO로 누른 바 있는 허버트강이 유례없는 강펀치로 시바다를 눕혔다.
실로 동양의 공포다.
그는 단순한 강타자가 아니라 승부를 다투는 복서로서의 냉정함을 갖추고 있다.
▲시라이.요시오(전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천성의 강타자이자 복싱천재라고 생각한다.
허리를 이용해 체중을 얹고 칠 수 있으니 작은 체구에서도 그런 파괴력이 나올 수 있다.
▲군지노부오(복싱평론가)
단발 펀치의 위력으로만 따진다면 동체급에서 세계 최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정말로 무서운 복서이다.
이때가 허버트강으로서는 최전성기였다.
다시 탄생하기 어려운 맷집의 소유자, 다시 탄생하기 어려운 강펀치의 소유자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그는 이후로 5연승을 거듭하며 동양 최강의 위치를 지킨다.
그러나 허버트강은 그런 천부적인 재능과 펀치력을 가지고도 너무나 훈련을 하지 않았다.
권투선수인지 일반인인지 구별이 힘들 정도로 몸관리를 안했으며
항상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낼 정도로 사생활 또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에게 간섭받는 것을 가장 싫어 했던 성격탓에
체중조절이라는 형식적 간섭을 받아야 했던 그는 권투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욕을 못 느끼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너지게 마련이다.
이런 생활태도는 1969년 9월과 10월에 있었던 하와이 원정 경기에서
뼈아픈 연패를 불러 일으켰고 다음해 3월에는 보유하고 있던 동양 타이틀마저 빼앗겼다.
복싱을 가장 하기 싫어하면서도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어
복싱을 했던 '동양의공포' 허버트강의 전성기는 그렇게 서서히 막을 내렸다.
허버트강 그는 분명 한국복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배이다.
한국 프로복싱 역사상 최고의 돌주먹이자 천재적인 복싱센스를 가졌던 허버트강.
프로복싱이란 최종적인 결과만을 놓고 따질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스릴있고
극적인 승부를 엮어내는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선수이다.
어렸을 적 부터 어두운 환경속에서 자라왔던 허버트강.
그에게 확실한 복싱의 정신적 버팀목이 존재했거나 또 성실함마저 갖추었다면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복싱센스는 더욱 더 빛을 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참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복싱천재 '동양의공포' 허버트강.
올드 복싱팬들은 그를 아직 추억하고 있을 것이다.
1947년 출생
부친이 존경하던 휴버트 험프리의 이름을 따서 허버트강이라는 링네임을 지어 줌
1963년
양승돈씨를 매니저로 영입 본격적 선수 생활 시작
4연패 끝에 일본의 가네자와를 2회 KO시키고 첫승을 따냄
1967년
필리핀 원정 경기에서부터 주목 받기 시작
마샬 쥬본, 휘커, 레이몬드를 단발 KO시킴
1968년 9월
동양 페더급 챔피언 사이또 가쓰오와 일본에서 타이틀전 (2라운드 KO승)
그해 11월 서울에서 가나자와 가쓰요시를 6회 KO시킴
1969년 1월 19일
시바다 구니아끼와 1차 방어전 (동경 고라꾸엔 경기장) 6회 KO승
1969년 9월, 10월
하와이 원정 경기에서 연패, 천부적인 재능에 비해 몸관리상태 엉망. 훈련을 전혀 하지 않음
1970년 3월
미국과 일본 선수를 불러들여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
1974년 10월
명성을 되찾으러 일본행
2명을 KO로 잡았지만 그의 천성대로 훈련을 게을리 한 탓에 사야시 유끼오에게 8회 TKO패
홍수환, 유재두의 등장으로 허버트강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림
1977년 10월 16일
김종호와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링을 떠남
복싱센스나 파괴력면에서 한국 프로복싱사의 최고의 천재였으나
노력과 성실함이 부족하여 스스로를 파멸시킨 불운의 선수였다.
1969년 허버트강이 실신시킨 바 있는 시바다 구니아끼는 차후 극기와 훈련을 통해
2체급에서 세계 정상을 정복하는 인간 승리를 보여 주었다.
허버트 강이 복싱에서 보여준 성실성과 최종 결과는 불운했지만
그가 보여 준 스릴과 극적인 승부는 한국복싱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것 만큼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