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를 지고
(마 10:34-42)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올해도 절반의 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잘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만족하십니까?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은 우리가 성취한 것을 칭찬합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으면 외면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인생일지라도 스스로 열심히 살았다면 칭찬받을만합니다. 남들은 칭찬하지 않지만 자기 자신을 칭찬할 수는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으니 자신을 칭찬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합니다. 실패한 것이 인생을 잘못 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합니다.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새로운 것을 찾을 때 수천, 수만 번의 실패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찾은 것입니다. ‘이 방법은 안 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실패를 통해서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를 하고 배움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수천 번 실패해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안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실패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를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책하고, 후회하며 자신을 업신여기는 미련한 사람이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신앙을 통해 자신이 변화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는 자신을 보며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왜 사람들은 변화하지 못하고 실망하게 될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앙에 대한 환상과 착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믿으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좋은 일’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에 좋은 것입니다. 솔직히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주님의 뜻에 좋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선언은 복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복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반대의 복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믿으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신앙 생활하지만 오해와 착각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착각하거나 오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하늘에서 들려온 소식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검’은 박해를 뜻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이들이 있다고 28절에서 경고하시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검’은 분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눅 12:51) 분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의 분열 뿐만 아니라,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 등 세대와 계층의 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우리 가족이 화목하고, 이웃과 더불어 화평하며, 온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대했는데, 우리는 오해와 착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평화와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예수님과 똑같아지는 줄 착각합니다. 심하면 자신이 예수님인 줄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처음 인간의 원죄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에 교만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사 55:8)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만큼 믿고, 아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신 줄로 믿고 있는데,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니 당황스럽습니다. 박해받고, 혼란과 분열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지 않으면 박해도 없고, 혼란과 분열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방법으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 믿기로 하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은 진리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박해할 것입니다. 그래서 검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가족, 세대 등의 분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삶과 자기 생각을 따르는 삶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쉽고 편한 삶은 아닙니다. 예수 믿어서 나쁠 것 있겠느냐는 식으로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를 받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가치관이 다르고, 진리를 따르는 길이 달라서 가족 간에도 분열과 갈등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보다 자기 안에서의 내적갈등이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적갈등에서 처음 겪는 것은 ‘자기 부정’입니다.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죄의 고통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명문대 학생이 아침 일찍 수업을 들으려고 뛰어갑니다. 헐떡이며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교수가 묻습니다. ‘왜 아침부터 바쁘게 뛰어다니느냐?’ 학생이 대답합니다. ‘좋은 성적 받으려고요.’ ‘좋은 성적 받아 무엇하려고?’ ‘좋은 직장에 가려고요.’ ‘좋은 직장 가서 무엇하려고?’ ‘연봉 많이 받고, 많은 일을 해서 성공하고, 결혼하고 자식 잘 길러 보람 있는 인생을 살려고요.’ ‘그래서 그다음엔 무엇하려고?’ ‘아마 편하게 노후를 살다가 죽겠지요.’ ‘죽은 다음에는?’ ‘죽으면 끝이지요.’ ‘그러면 자네는 죽기 위해 아침부터 달리고 있었구먼.’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참된 평화, 진리와 생명을 던져 놓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을 얻으려는 사람과 외면하는 사람이 갈등을 겪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계획, 주님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계획, 주님의 방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지와 결단이 아니라, 절대적 신뢰입니다. 절대적 신뢰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들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믿음입니다. 절대적 신뢰를 통해서 완전한 자기 부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것입니다. (마 13:42-46)
그렇다고 재물만 포기하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의 말씀은 ‘주님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내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독재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폭군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 좋은 것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주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방법과 다른 주님의 계획과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고집한다면 주님의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주님의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하겠지요.
믿음은 우리의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 너머에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포기는 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해방입니다. 재물이든지 가족이든지 목숨은 우리를 이 세상에 묶어두려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영원한 것을 포기합니다. 영원한 것,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쥘 손이 없습니다. 믿음은 버림으로써 얻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회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내게 있는 재물과 시간과 능력과 목숨은 주님의 일을 하도록 주님께서 내게 맡겨놓은 것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때 주님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것을 믿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