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기(投機)의 의미 >
‘투기(投機)’라는 단어만큼 좋은 의미를 지녔으면서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도 드물 것이다.
부동산투기, 환투기, 주식투기 등에서 사용되는 의미는 단기간에 시세가 크게 변동하는 것을 틈타
요행히 큰 이익을 얻으려는 매매활동을 말한다.
즉, 일반사회에서 말하는 투기(投機, speculation)는 확신도 없이 요행만 바라거나
시세 변동을 이용해 큰 이익을 얻으려고 행하는 거래를 일컫다.
유가 증권 및 파생상품 등의 유동성 자산 혹은 부동산의 가격 변동의 차이를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행위다.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약삭빠르게 몸을 던지듯이 행운을 바라는 사행(射倖),
운 때에 기대어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賭博)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짓 투기다.
그러나 불교에서
‘투기(投機)’는 본래 ‘마음이 열려 부처님의 진리를 향해 몸을 던져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런 불교 용어가 시간이 지나며 일상적 의미로 변형된 것이다.
그만큼 이익에 민감해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이르게 됐다.
그런가 하면,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투기(投棄)’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글자 그대로 내던져 버린다는 뜻이다. 고속도로에 상에 쓰레기를
불법 투기하는 몰지각한 인사들도 있다.
그러나 투기(投機)는 원래 절에서 사용되던 말이다.
‘기(機)’라는 말은 기틀이라는 뜻이 있는데, 중요한 계기, 기반 등의 뜻이다.
이러한 ‘기(機)’는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적절한 인연을 만나면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근기(根機)’라고 하고, 가능성을 촉발시키는 조건이 되는 인연을 ‘기연(機緣)’이라고 한다.
이때 기(機)는 교화의 대상이며, 연(緣)은 교화하는 사람을 포함한 다양한 조건들을 말한다.
‘근기(根機)’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그 일을 감당해 내는 힘을 말한다.
대개는 수행을 통한 정진력과 불법(佛法)을 수용하는 이의 역량을 통틀어 이르기도 한다.
그 역량과 능력은 일률적일 수 없기에 부득이
하근기, 중근기, 상근기로 구분한다. 이는 차별하기 위해 차등을 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성장하는 모든 것은 뿌리가 있기 마련인데, 뿌리는 줄기의 굵기와 크기
그리고 세월의 흐름만큼 땅에 의지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또한 줄기는 크기만큼 햇살을 머금고 뿌리는 깊이만큼 수분을 모아
각기 종자의 특성을 드러내며, 해를 거듭할수록 좋은 결실을 맺는다.
이러한 작용의 힘을 근기(根機)라고 한다. 식물의 크기에 따라 행하는 작용이 다 다르다.
이와 같이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그 능력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교법의 수준을 달리한다.
이것을 식물의 성장에 비유한 것이 근기고, 근기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일례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받아들이는 거목과 잡목 그리고 풀의 용량이 각기 다르듯이
각자의 능력대로 행한다는 이치다.
그렇듯이 경전은 수많은 근기에 맞춰 설해졌기에 수기설법(隨機說法)이라고 한다.
강의와 설법 그리고 평소 신행(信行)의 모습으로 많은 이에게 공감을 일으킨 감동과 감화는
바로 수기(隨機)의 도리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설법할 때 항상 그 말을 들을 대상의 근기를 먼저 살피고
그에 알맞게 설법했는데,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 또는 수기설법(隨機說法)이라 한다.
이 때 스승의 근기와 배우는 자의 근기가 서로 계합하는 것을,
머물을 두(逗), 기틀 기(機), 두기(逗機)라 하며, 이를 선가(禪家)에서는 투기(投機)라 한다.
다시 말하면, 투기(投機)에서 기(機)라는 말은 기틀이라는 뜻이 있는데
투기는 스승의 틀과 제자의 틀이 일치 되는 상태를 의미했다.
즉, 서로 마음이 통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내용이 일치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투기(投機)’라는 글자의 어원은
중국 송(宋)대 유명 문인이자 관료였던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시에 나온다.
술 좋아하는 이, 술친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입에 자주 올리는 명구가 그가 지은 시에 있다.
삶을 살아가며 벗으로 아는 사람은 많아도 마음을 아는 벗은 얼마나 되겠는가?
주봉지기천배소(酒逢知己千杯少)
화불투기반구다(話不投機半句多)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면 천 잔도 적다 할 것이요,
배포가 맞지 않는 이와 얘기를 나눈다면 반 마디 말도 많다 할 것이다.
위 시 속에 투기(投機)는 배포가 맞다, 마음이 맞다, 그런 뜻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은 심지 말고 의리 없는 친구는 사귀지 말라 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는 천 잔의 술도 모자라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반잔의 술도 넘친다.
이게 바로 술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구양수는 말했다.
특히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知己)와 단 둘이 술 마실 때는 더욱 더 그렇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知己)와 단 둘이 술을 마시면서
달콤함을 주는 여자보다 이런 유대감을 주는 남자와 더욱 신뢰로 맺어지고 싶어 한다.
취기(醉氣)를 자기 목적에나 이용하려고만 하는 소인배들은 절대 이런 술의 맛을 모를 것이다.
술의 맛과 향을 알고 주도(酒道)를 알고 술친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술을 더욱 맛있게 해주는 그런 인연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機)’는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타고난 능력 크기를 얘기할 때
사용하는 ‘근기(根機)’라는 단어가 투기의 기와 같은 글자이다.
그러므로 투기라는 말은 결국 서로의 틀과 근기가 맞아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불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의 가르침에 끝까지
자신을 던지는 행위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 즉 배포가 맞는 사람이라는 본디 괜찮은 뜻으로
사용되던 이 단어가 불가에서는 서로의 틀과 근간이 맞아떨어지는 상태나
부처의 가르침에 끝까지 자신을 던지는 행위라는 뜻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그 의미가 ‘기회를 틈타 이익을 거두려는 행위’로 바뀐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투기’라는 단어가 위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그 뜻이 변해 차익(差益)을 노리는 부정적인 말로 쓰인다.
시장에서 투기와 투자는 쓰임새가 다르다. 자신의 재화를 불리기 위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돈을 묻는 게 투자일 것이다.
그에 비해 투기는 단기적인 차익을 염두에 두고 폭리까지 노리는 경우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이 말의 용례는 극히 부정적이다.
현대 중국에서도 투기라는 말의 뜻은 매우 좋지 않다.
이 단어 뒤에 교묘함을 취한다는 뜻의 ‘취차오(取巧)’를 갖다 붙인다.
결국 기회만 닿으면 이를 이용해 정당치 못한 이익까지 챙긴다는 얘기다.
중국 송(宋)나라 시대에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의 제자에
동산 수초(洞山守初, 910~990) 선사란 분이 있었다.
어떤 납자가 수초(守初)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이에 수초 선사의 답이 “마삼근(麻三斤)”이었다. 삼(麻)이 세 근이란 말이다.
그 때 수초 선사는 삼(麻)을 저울로 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달고 있는 삼(麻)의 무게가 세 근(三斤)이었다는 설도 있고,
당시 스님들의 한 벌 가사를 짓는데 삼이 세 근 들었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그래서 수초 선사는 ‘무엇이 부처’라는 질문에 태연히
‘삼 세 근(麻三斤)’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엔
별로 신경 써서 대답한 것 같지 않은데, 이게 유명한 공안이 됐다.
어떤 것이 부처냐는 질문에 ‘마 삼 근’이라는 대답은 하나의 격외(格外)이다.
그리고 불법의 대의를 숫자로 환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麻, 삼)가 세 근이라고 정확한 숫자를 들이대고 있다.
중생은 대개 숫자에 얽매인다. 중생은 삼천대천세계라는 숫자, 혹은 ‘삼이 세 근’이라는 숫자,
값이 얼마라는 숫자, 오늘 수입이 얼마라는 숫자,
이와 같이 분명한 숫자라야 납득을 하고, 숫자에 얽매여 집착한다.
그래서 ‘마 삼 근’이라는 말엔 중생들이 숫자 개념에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가를 시험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이 ‘마 삼근’을 참구하던 어떤 스님이 도무지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그 당시 선지식으로 알려진 운문종(雲門宗) 선사인
지문 광조(智門光祚, ?~1031, 설두 중현의 스승) 선사를 찾아가
왜 수초 선사께서 ‘마 삼근’이라 말했는지 그 의미를 물었다.
이때 지문 스님은 “화족족(花簇簇) 금족족(錦簇簇)”이라는 말만 했다.
내용인 즉 꽃이 다복하게 잘 피어 있고 비단이 황홀하게 걸려있다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무슨 뜻인지 더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화족족(花簇簇) 금족족(錦簇簇)」은 선(禪) 수행에서 (어떤 것을) 말로 설명을 해서
그 의미를 고정해 이해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서,
진리란 말로 드러내기 어렵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 지문 스님이 네가 묻는 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이에 그 스님은 다시 수초 스님에게 찾아가 그간의 이야기를 하고
무슨 뜻이냐고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이 때 수초 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이런 말씀을 했다.
「언무전사(言無展事), 어불투기(語不投機),
승언자상(承言者喪), 체구자미(滯句者迷).
말로는 이 일을 밝힐 수 없고, 또 말로써 투기할 수도 없다.
말로 이어가려 하면 잃을 것이고 글귀에 매달리는 자는 미혹한 자다.」라고 했다.
판단과 분별을 다 놓아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전부 다 알고 있으면
이 상태가 바로 투기(投機)이다.
선(禪)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인데, 자꾸만 알음알이로 말과 문자로
그 진의를 파악하려고 하면 안 된다. ― 파악살 수 없다는 말이다.
참구하고 참구해서 깨달으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타고난 능력 크기를 얘기할 때
흔히 ‘근기(根機)’라는 단어를 쓴다.
‘투기’라는 말은 결국 서로의 틀과 근기가 맞아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살아가는 여정에서 지니는 지향(志向), 각자 지닌 심성(心性), 삶을 바라보는 자세,
현안을 두고 품는 견해 등이 일치하는 경우다.
이를 테면 ‘배포’가 서로 맞아 떨어지는 상태의 표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의 가르침에 끝까지 자신을 던지는 행위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불교에서의 가르침으로 볼 때 ‘투기’는 매우 좋은 말이다.
부처의 깨달음에 다가가려는 노력, 즉 구도(求道)에 가까운 뜻이기 때문이다.
본디 괜찮은 뜻으로 쓰이던 이 단어는 나중에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머리를 써서 기회를 엿보다가 제 이익을 취하려는 행동이다.
부처의 가르침에 몸을 날리지 않고 제 몫이 아닌 재물 등에 올라타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기회를 틈타 이익을 거두려는 행위’다.
자신에게 찾아온 좋은 기회 몸을 날리는 동작이자, 이익에 민감해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