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18:13~25)
'랍사게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위대하신 왕
앗시리아왕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무엇을 믿고 이렇게 당당하냐?"'
(19절)
어제 묵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히스기야 왕을 엄청나게 높이 평가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유대를 침범한 물리적으로 엄청나게 강한
앗시리아에에
자신이 잘못했다며, 제단이나 성전에 붙어 있는
보석들을 뜯으면서까지 수집하여 조공을 바친다.
하나님에 대한 내적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지만
외풍이 거세어 연약한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 그 외세에 맞추어 주는 것이
옳고 그름의 양자택일의 기준으로는
당연히, 그르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으나
실존,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어쩌면 최소한 외형적으로나마 최선에 가깝지 않을까?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하게 들려
하나님의 구체적인 길이 제시되었을 때는
무조건 그 길을 선택해야겠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경우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무조건 근본주의적으로 '거부! 거부!'식으로 버티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가지고 외형적으로 내 주면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의 중심이 변질되었는가이다.
물론 이것도 나는 중심이 변질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실제에서는 변질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분투"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랍사게의 추궁이 믿음을 이어나가는 유대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올 듯하다.
"너희들이 의지하는 애굽을 보아라, 힘이 있어 보이는가?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이 다른 신들보다 무엇을 더 제공하였는가?
(비록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이나) 너희 지도자를 보아라,
제단과 산당을 모두 제거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 앞에서만
경배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말들은 어떻게든 믿음을 이어가거나
히스기야 왕의 의도에 겨우겨우 순종하려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흔들기에 충분한 도전의 말들이다.
지금 현세에도, 아니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순간이 없었을 것같이,
그런 도전은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야만
도전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 오늘 기적같은 하루를 또 주셨습니다.
일분 일초, 귀한 시간을 귀하게 여기게 해 주십시오.
평안하지만 낭비하지 않는 시간, 죄를 저지르지 않는 시간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강의 준비에 힘을 불어 넣어주시옵소서.
관계나 주변의 사안들에 대해서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을 허락하소서.
양정환, 안정적이고 평안함을 잃지 않은 가운데 치료에 전념하게 해 주십시오.
양소영, 간 수치, 갑상선, 육체적 피로와 심적 상태를 주님께서 만져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