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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진화하는 도덕의 원리를 밝혀내다!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통해 도덕적으로 진보해왔으며,
앞으로 더 진보하게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사람들은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의 저자이자 과학적 회의주의 잡지 〈스켑틱〉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과학의 전사를 자처해온 마이클 셔머는 《도덕의 궤적》에서 과학과 이성을 통해 인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왔고, 앞으로 더 도덕적으로 진보한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성과 계몽의 시대 이후, 사상가들은 사회적·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의식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했다. 이성은 과학적 실험과 분석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시민권, 시민 자유 그리고 법에 따른 평등한 정의, 열린 정치와 국제 경제, 자유로운 시장으로 정의되는 근대 사회를 창조하였다. 지금 우리는 역사적으로 어느 인간 사회도 누린 적 없는 권리와 자유, 해방, 교양, 교육, 번영을 누리고 있다. 셔머는 이 책에서 자유를 향한 권리, 여성의 권리, 성 소수자의 권리, 그리고 동물의 권리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살핀 뒤 인간의 본성과 도덕의 진화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이성, 합리성, 경험주의, 회의주의, 즉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모든 방법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도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과학, 도덕의 진보를 이끌다
뉴스를 보고 있다 보면 우리 인류는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있기보다는 퇴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일같이 강도, 살인, 강간, 사기 등 수없이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분명 인류는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깐 시선을 뒤로 옮겨보자. 1965년 3월 21일 앨라배마주 셀마로 말이다. 마틴 루터 킹과 그가 이끄는 8,000명의 시위대. 여기에서 마틴 루터 킹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거짓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구부러집니다.” 결국 이 연설은 1965년 8월 6일 존슨 대통령의 투표권 법안 서명으로 이어졌다. 도덕적 세계의 궤적이 또 한번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 순간이다. 자, 이제 다시 한번 시선을 넓혀보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수준으로 말이다. 그럼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바로 현재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그 역사상 가장 도덕적으로 진보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스켑틱〉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과학의 전사를 자처해온 마이클 셔머는 놀랍게도 이 책에서 이러한 도덕적 진보가 과학과 이성을 통해 이룩되었고, 이 둘을 통해 앞으로 인류가 더 도덕적으로 진보한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성과 계몽의 시대 이후, 사상가들은 사회적ㆍ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의식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했다. 이성은 과학적 실험과 분석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시민권, 시민 자유 그리고 법에 따른 평등한 정의, 열린 정치와 국제 경제, 자유로운 시장으로 정의되는 근대 사회를 창조하였다. 지금 우리는 역사적으로 어느 인간 사회도 누린 적 없는 권리와 자유, 해방, 교양, 교육,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인류의 도덕은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더욱 진보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마이클 셔머는 먼저 도덕과 진보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먼저 셔머는 도덕을 ‘감응적 존재의 생존과 번성’으로 설정한다. 감응적 존재란 감정, 지각, 감각, 반응, 의식이 있어서 느끼고 고통받을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여기에 ‘더 나은 상태나 조건으로의 진전’으로 진보의 개념을 설정한다. 따라서 도덕의 진보라는 것은 ‘감응적 존재의 더 나은 생존과 번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
우리 인류는 어느 정도 도덕 감각을 타고나며, 이미 오래전부터 추상적 추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씨족 공동체가 마을이 되고, 군장국가와 도시국가를 지나 민족국가의 형태로 사회 집단이 커짐에 따라 인류의 도덕은 조금씩 세련화되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비교적 완만하고 느리게 진행된 도덕 진화는 최근 200~300년 사이 급격하게 가팔라졌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마이클 셔머는 그것이 바로 180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몽적 인본주의와 뒤이어 일어난 과학혁명이었다고 말한다. 이 시대에 확립되어 발전한 과학적 합리주의가 윤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을 끌어올림으로써 지금과 같은 도덕적 진보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황금률로 대변되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 원리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통해 점점 정교해지면서 오늘날 도덕의 영향권을 동물로까지 확장했다.
셔머의 주장은 과학이 ‘가치를 결정’하고 도덕의 방향을 정했다는 것이 아니다. 셔머는 과학을 “일련의 논증을 통해 추론한 다음 경험적 입증을 통해 그 결론이 참임을 확인”하는 절차로 정의한다. 따라서 세계와 자연,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과학과 이성의 기준에 따라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도덕의 진화에 속도가 붙었다는 것이다.
메뚜기 떼가 몰려오거나 전염병이 도는 것은 새로 이사 온 불길한 이웃이나 마녀 때문이 아니다. 가뭄이나 홍수의 원인은 신의 분노 탓이 아니다. 인종 간의 차별은 불합리하며 노예제도는 인간의 본성을 위배한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녀야 하며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다. 최근 이런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법으로 정해서도, 종교인이 교화해서도 아니다. 바로 과학과 이성의 논증에 따른 생각이다.
도덕의 궤적이 정의뿐 아니라 진리와 자유를 향해 구부러져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마이클 셔머는 이 책을 썼다. 이 책을 쓰기 위해 732편의 문헌을 참고한 셔머가 내린 결론은 간명하다. 한 종으로 인류는 점점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 원동력은 종교적 힘이 아니라 세속적 힘, 바로 과학이다.
종교는 도덕적 진보의 근원이 아니다
과학혁명부터 계몽 시대까지 이성과 과학은 미신, 교조주의, 종교적 권위를 서서히, 하지만 체계적으로 대체하였다. 종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셔머는 단순히 종교는 수많은 폭력과 전쟁, 범죄의 원인이었다고 밝히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종교성과 각종 사회적 조사 결과를 비교함으로써 종교가 한 사회의 도덕적 진보에 그다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증명한다.
이 책 4장에 있는 7개의 그래프는 2000년 기준 GDP 2만 3000달러를 넘는 17개 나라를 대상으로 종교성과 각종 사회 지표를 비교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종교성이 짙은 나라로 드러난 미국이 사회적 건강도는 가장 낮고, 연간 10만 명당 살인율은 가장 높으며, 10만 명당 수감자 수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다. 자살률은 종교가 사실상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보이고, 십대 임신율도 압도적으로 높다. 낙태율과 이혼율 가장 높지만 여성 인권의 신장과 관련하여 기타 선진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노예제도와 관련하여 종교,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수억 명이 강제 노역에 혹사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수천 년 동안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수많은 성경 구절에서 기독교의 신은 노예제도를 당연시한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1452년에 “사라센 사람과 이교도, 그밖에 신자가 아닌 모든 …… 사람의 인신을 영구적인 노예 상태로 전락시킬 수 있도록 승인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했다.
이성과 계몽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메노파교, 퀘이커교, 감리교 같은 진보적인 자유주의 기독교 교파들이 노예제 폐지론을 제기했다. 이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규범들에 굴하지 않고, 노예제도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며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의 운동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의문의 여지없이 동료 기독교인이었다.
여성의 권리와 관련하여 종교는 오랫동안 여성을 가계를 잇는 출산의 도구이자 재산으로만 취급했다.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고 사회적 진출을 이끌어내는 데 종교는 오히려 방해 요인이었다. 남성이 장악하고 있던 종교는 언제나 여성의 신체와 생식권을 통제하려 했다. 지금도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피임, 낙태를 죄악으로 여기며 여성에 대한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다.
종교인들은 ‘자연의 섭리’나 ‘우주의 질서’ ‘신의 뜻’을 빌어 동성애를 금지하고, 동성애자를 처벌한다. 이들은 이슬람과 기독교 할 것 없이 한목소리로 ‘전통적 가정’의 붕괴를 걱정하고 인구의 소멸(?)을 걱정한다. 종교인들은 청소년 동성애자의 높은 자살률을 근거로 동성애는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청소년 동성애자의 자살 수치를 끌어올리는 주범은 바로 종교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버림받았다거나 저주받았다며 자살을 선택한다.
“선의를 가지고 주를 찾는 동성애자를 내가 무슨 권리로 심판합니까?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소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2013년 7월 29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세계, 과학과 함께 진보하다
노예제도는 1만 년 전 농업혁명이 일어났을 무렵 시작되었고, 최근까지 유지되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종교는 노예제도에 대해 수천 년 동안 사실상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노예제도의 폐지에 대한 이성적인 논증은 계몽의 시대가 오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도덕적 진보를 이루어낸 것은 무기의 힘이 아니라 생각의 힘이다. 볼테르, 디드로, 루소 등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노예제도가 결국 인간의 권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따라서 당연히 부도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이 체계화되어 법의 형태를 갖추고, 국가가 이 법을 시행함으로써 마침내 노예제도는 서서히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노예제도는 감응적 존재의 생존과 번성에 해를 끼치는 제도이기에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2010년 영국이 법적으로 노예제도를 금지한 뒤 현재는 모든 나라가 법적으로는 노예제도를 금지한다. 물론 여전히 성매매와 강제노동 등의 형태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아직 더 진보가 이루어져야 한다.
1870년 미국에서는 노예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1920년에 투표권이 주어졌다. 남성 투표권과 여성 투표권의 획득 시점은 덴마크가 1915년으로 동일하며, 영국은 남성 1918년, 여성 1928년으로 10년 차이이다. 미국은 50년 차이가 나고, 프랑스는 남성 1848년, 여성 1944년으로 96년 차이가 난다. 스위스는 1848년에 남성의 참정권이 주어졌으나 여성에게는 123년이 지난 1971년에 주어졌다. 무려 123년의 격차가 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21세기 이후 여성 국방부 장관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에 현재 22명의 여성 CEO가 있고, 이들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들보다 수익률이 50퍼센트 더 높다. 여성의 학위취득률은 남성을 넘어섰고, 남녀간 임금 격차는 1980년 8달러에서 2012년 1.04달러로 서서히 줄고 있다.
지난 몇 백 년 동안의 추세는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 의학 분야에서 일어난 발견은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를 이끌었고, 이로 인해 여성들은 생식에 대해 더 많은 자기 결정권과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다가온 것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탄력이 붙었으므로 여성의 권리는 거침없이 확장될 것이다.
한때 동성애자는 당연한 혐오의 대상이었고, 정신질환으로 간주되었다. 구약성서 〈레위기〉 20장 13절에는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는 구절이 있다. 현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동성애를 음주, 도박, 살인과 같은 것으로 본다. 하지만 과학적 연구의 결과 성 지향성은 주로 유전자, 출생 전의 생물학적 과정, 태아 시기의 호르몬 발달에 결정됨을 밝혀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성에게 끌리고, 전체 인구의 1~5퍼센트만이 동성에게 끌린다.
1973년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정신질환에서 제외했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큰 첫걸음이 되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인종차별만큼이나 무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79년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는 칼에 베어 어깨뼈가 훤히 드러난 채 머리만 간신히 붙어 있는 물소가 나온다. 영화를 위해 실제로 물소를 칼로 벤 것이다. 2011년 영화 〈워호스〉를 찍으면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400만 마리가 넘는 말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말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편집 기술과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발달은 동물들의 희생을 막았다.
종차별주의는 인간 외 동물들의 이익이 인간의 이익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종교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별이 신의 섭리에 따른 당연한 원리라 한다. 동물은 서식지를 빼앗기는 것부터 공장식 축산과 실험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대우를 받고 있다. 현재 동물실험을 하기 위해선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꾸준히 관리ㆍ감독을 받아야 한다. 육식을 위한 사육동물의 환경도 좋아지고 있다. 동물 친화적인 사육은 홍보의 단계를 넘어 필수적인 규제 사항이 되었다. 우리 자신과 동물의 연속성에 대한 이해가 증진됨에 따라, 진보를 향해 구부러져 온 도덕의 궤적은 동물권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미래, 인류는 더 도덕적 존재가 될 것인가?
도덕적 퇴보와 악의 경로
평범한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나치에 동조하고, 심지어 학살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는 호의적이고 친절하고 착하게 행동하려는 성향뿐 아니라 배타적이고 잔인하고 악하게 행동하려는 성향도 있다.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전기충격 실험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악의 집행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이를 ‘대리인 상태’로 설명했다. 자신을 권위자의 대리인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을 비롯해 나치 독일에 부역한 그 많은 ‘학살자’들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마이클 셔머는 그 원인을 ‘잘못된 추정에 기반을 둔 사실 오류’에서 유태인이 전염병을 옮긴다거나 독일인을 몰살할 것이라는 등의 잘못된 추정(마녀 사냥 시절에도 있던)이 혐오감으로 발전하고,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는 것이다.
비개인화는 탈개인화를 낳고, 이는 권위자에게 복종하게 함으로써 맹종을 낳고, 맹종은 집단 규범에 대한 동조와 동일시로 변하고, 이는 악의 실행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요인들이 맞물려 특정한 사회적 조건 아래서 악의 기제가 형성된다. 수십 년 전 인종차별적이고 호전적이었던 독일인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평화로운 민족이 되었다. 그 사이 쌓아온 사회적 도구와 정치 기술이 새로운 사회문화적 조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악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정치와 법의 힘을 이성적으로 적용해 도덕을 궤적을 더욱 끌어올린 결과다.
도덕적 자유와 책임
인간의 자유의지란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벤저민 리벳의 실험 이후 우리의 의식적 결정과 선택의 자유는 늘 도전을 받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원인들의 집합도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모든 인자를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뿐 아니라 자유거부의지도 있어 욕구를 억누르는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사이코패시의 발생률은 남성은 1~3퍼센트, 여성은 0.5~1퍼센트 정도이고, 미국의 교도소 수감자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약 50퍼센트가 사이코패스로 나타났다. 사이코패시는 냉혹한 CEO부터 연쇄살인마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타고난 뇌의 이상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뇌 손상이나 종양, 폭력적 환경도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행동에는 늘 도덕적 가치 판단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우리는 도덕과 무관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도덕적으로 이로운 방식으로 행동할지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할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도덕적이다. 도덕은 의식적 선택을 수반한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는 늘 논란거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도덕적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이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도덕적 정의: 응보와 회복
오랫동안 인류의 갈등 해결 방법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복수와 정의는 불온한 행위에 대한 오랜 억지 수단이었다. 이렇게 죄에 비례하는 처벌이 범죄를 억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여기는 정의 이론을 응보적 정의라고 한다. 현대 사회의 형사 사법 제도는 이런 응보적 정의의 틀에서 진화했다. 응보적 정의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사후 처리에 집중한 방식이다. 이런 반쪽짜리 정의를 보완하는 것이 회복적 정의이다. 회복적 정의에 따르면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를 사과하고,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고, 피해자와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파퓨아뉴기니 사회의 톡소리tok-sori라는 의식을 통해 지역사회와 공동체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봉합하는지 보여준다. 셔머는 피해자 제니퍼 톰슨의 잘못된 판단과 오해로 강간범으로 몰려 11년이나 감옥에 갇힌 로널드 코튼의 사례를 소개한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로널드는 톰슨을 용서했고, 둘은 이후 사법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며 곳곳을 누빈다. 이들은 상처를 치유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데 배상, 욕서, 우정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원주민을 학대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 ‘사죄의 날’을 제정했다. 영국 역시 뉴질랜드와 인도인들을 학대한 일들 사죄했고, 캐나다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문화적 학살을 사과했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와 피해자의 용서가 있을 때 화해와 진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미래 인류의 도덕적 진보와 문명 2.0
15세기 유럽에는 5,000개가 넘는 독립적인 정치 단위가 존재했다. 17세기 초에 이 정치 단위들은 500개로 합쳐졌고, 1800년에는 약 200개로, 그리고 지금은 약 50개의 정치 단위가 존재한다. 기원전 2000년 중국에는 적어도 3,000개의 정치 단위가 존재했다고 한다. 이런 추세를 보면, 언젠가 지구가 하나의 정치 단위로 통합될 것이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의 통치 체제로 움직이는 세계 제국의 삶은 과연 어떨까?
이 책이 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프로토피아protopia다. 이곳은 측정할 수 있는 꾸준한 진보가 일어나는 장소다. 전쟁을 줄이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고문과 사형을 없애고, 투표권을 확대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민권과 자유를 방어하고, 동성 결혼을 법제화하고, 동물을 보호하는 등 이 책에서 셔머가 언급한 사례가 모두 진보를 위한 프로토피아적 조치다.
마이클 셔머는 프로토피아로 가는 미래에 대한 세 가지 비전을 제시한다. 바로 임시기구로서의 도시국가와 깨어 있는 자본주의, 그리고 문명 2.0이다.
도시는 시민들의 삶과 밀착하여 오랫동안 습관과 문화에 맞춰진 서비스를 시민에게 제공한다. 기실 많은 미래학자들이 도시의 가능성을 국가보다 더 높게 보고 있다. 도시는 사람들을 더 부유하고 똑똑하고 친환경적이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프로토피아의 경제는 정보 기술을 바탕으로,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고 기존 자원을 재활용하며, 기술적으로 진보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탈 희소성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이 시대를 열어가는 힘은 ‘뒷마당의 땜장이들’로 불리는 DIY주의자,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오미디야르 형제 같은 테크노-자선가, 그리고 소액금융과 인터넷으로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누리게 될 ‘밑바닥 10억’이다. 노예제도와 차별에 대한 시선이 변한 것처럼 소득 불평등에 대한 시각도 바뀔 것이다.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한 가치 창출에 기반을 둔 윤리적 체제”를 기반으로 삼는 ‘깨어 있는 자본주의’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다.
마이클 셔머는 도덕적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 사회적 차원에 따라 문명 진보의 유형을 제안한다. 문명의 탄생 시점 아프리카에 살던 호미닌 집단의 삶은 문명 1.0이다. 수렵-채집의 무리 사회는 문명 1.1, 부족 사회는 문명 1.2, 군장제 국가는 문명 1.3, 도시국가와 봉건왕조는 문명 1.4, 민족국가는 문명 1.5, 제국은 문명 1.6, 선거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문명 1.7, 자유민주주의와 공화국은 문명 1.8, 민주자본주의는 문명 1.9이다. 그리고 지구촌과 지구문명은 문명 2.0이다.
문명 2.0 시대는 전 지구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전 지구적 지식, 깨어 있는 자본주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전 지구적 경제, 민주주의 국가 혹은 도시국가로 구성된 전 지구적 정치체, 재생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 부족과 인종 간 차이를 뒤로하고 모든 사람이 한 종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전 지구적 문화를 포함한다.
이 책은 프로토피아를 추구한다. 이 책의 처방은 극적이지 않고, 일반 원칙은 비교적 단순하다. 즉 세계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장소로 만들자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는 방법에 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원칙들을 4장의 끝부분에 ‘이성적인 십계명’으로 제시했고, 독자들도 충분히 나름의 방법을 제안할 수 있다. 전쟁을 줄이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고문과 사형을 없애고, 투표권을 확대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민권과 자유를 방어하고, 동성 결혼을 법제화하고,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동안 해왔던 일과 관련해서 내가 이 책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모두 진보를 위한 프로토피아적 조치다. 작은 발걸음을 통해 그토록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다. _ 584쪽 12 프로토피아: 도덕적 진보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