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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분 / 전체관람가>
=== 프로덕션 노트 ===
잉그리드 버그만 탄생 100주년 기념
2015 칸영화제 포스터 주인공 선정 및 다큐멘터리 제작
이사벨라 로셀리니, 음악감독 마이클 니만, 20세기 잉그리드 버그만 알리시아 비칸데르 참여
<카사블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잔 다르크> 등 할리우드 황금기를 빛낸 여배우
"나는 성녀에서 창녀가 됐다가 다시 성녀가 됐다"
7번의 오스카 노미네이트, 3번의 수상
로버트 카파,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불꽃 같은 스캔들과 할리우드 퇴출, 그리고 화려한 복귀
"후회는 전혀 없어요. 한 일보단 하지 않은 일이 후회돼요"
지금껏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그녀가 직접 기록한 생애 가장 내밀한 순간들이 펼쳐진다.
=== 작품해설 === <2015년 10월 8일 네이버 영화 / 찬란 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집중 탐구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잉그리드 버그만. 이를 기념해 제68회 칸영화제는 하얀 바탕 위로 하늘색 칸영화제 로고와 기품 있는 그녀의 모습을 담은 공식 포스터를 헌정했다. 또한 딸이자 배우인 이사벨라 로셀리니, 감독 스티그 비요크만, 음악감독 마이클 니만, 그리고 21세기 잉그리드 버그만 [대니쉬 걸]의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참여로 탄생한 영화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이 오는 10월 15일 대한민국 극장가를 찾아온다. 2015년 가을, 우리가 사랑했던 여인 잉그리드 버그만을 다시 한 번 주목하자.
#1.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나에게서 연기를 빼앗는다면 숨을 빼앗는 것이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191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수줍음 많았지만 연기를 좋아했던 소녀 잉그리드는 상상 속 캐릭터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며 자신도 모르게 연기를 시작한다. 스웨덴 왕립연극학교에서 연극 공부를 하던 그녀는 영화 [뭉크브로그레벤](1935)에 캐스팅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영화에 집중한다. 최고의 연극학교였지만 잉그리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뜻을 두고 학교를 박차고 나온 것.
"카메라 앞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좋다. 내 선택이 옳았기를. 언젠가 대배우가 되기를 희망한다."
[스웨덴이엘름가](1935), [인터메조](1936), [달러](1938)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5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그녀는 더 큰 꿈을 품는다.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대배우가 되겠다는 꿈이었다. 1939년, 그녀의 히트작 [인터메조]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잉그리드는 그 꿈에 한 걸음 다가간다.
이후, 1941년에는 빅터 플레밍 감독이 연출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1941)에서 매혹적인 요부 아이비 피터슨을 연기하고, 1942년에는 [카사블랑카]에 험프리 보가트와 출연하며 절정에 다다른 아름다운 외모와 섬세한 연기를 보여준다. 연기 활동에 탄력받은 그녀는 [성 메리 성당의 종](1945),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57)에 연이어 출연하고 1945년 영화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예술성을 입증한다.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던 그녀였지만, 할리우드 활동에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신의 날개를 시험해보기로 한다.
"세상의 기대를 깨고 싶었어요. 할리우드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어요."
잉그리드는 영화 [무방비 도시]를 보고 감명받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에게 영화 작업을 제안한다. 결국 할리우드에서 이탈리아로 건너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게 됐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이 바로 영화 [스트롬볼리](1950), [유로파](1951), [이탈리아 여행](1953)이다. 할리우드 황금기를 군림했던 그녀가 이탈리아로 건너가 네오리얼리즘의 대가 로셀리니 감독과의 작업으로 스스로 또 다른 길을 개척한 것이다.
1965년, 잉그리드는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온다. 감독 아나톨 리트박이 "잉그리드가 아니면 이 영화 접겠습니다."라는 말로 그녀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냄과 동시에 영화 [아나스타샤](1956) 출연 제안을 했기 때문. 이 작품으로 1957년 잉그리드는 다시 한 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할리우드로 복귀한다. 1973년,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지만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스웨덴 출신의 영화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작품 [가을 소나타](1978)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2. 사람, 잉그리드 버그만
"자유로운 게 좋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스웨덴에서 연기하다 미국 할리우드로 건너가 10년간 활동했고, 이탈리아에서 8년을 머물렀다. 그 후 파리로 가서는 20년을 살았고 인생의 마지막 여정은 런던에서 끝맺었다. 한 인터뷰에서 잉그리드는 답했다. "뿌리가 없어도 괜찮아요?" "네." "왜요?" "자유로운 게 좋아요." 새로운 곳으로 터전을 옮겨가며 용감무쌍하게 살아간 그녀의 에너지의 원천에 대해 첫째 딸 피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엄마가 온몸을 던져서 인생을 산 이유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부모님 때문일 것이다. 그게 무의식적으로 엄마에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살자고 다짐한 것이다."
잉그리드가 세 살 때 그녀의 엄마는 황달로 생을 일찍 마감했다. 이후, 암으로 아빠마저 세상을 먼저 떠났다. 수줍음 많은 소녀 잉그리드는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하는 노력으로 결국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세기의 배우가 된 것이다.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할리우드에 맞춰 자신의 이름을 바꾸지도 않은 그녀의 소탈함과 자연스러움, 고결함에 전 세계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되는 그녀의 모습 또한 할리우드 황금기 대배우의 모습이 아닌 '사람' 잉그리드 버그만으로서 카메라를 든 모습이다.
"난 필름 카메라를 늘 갖고 다닌다. 촬영하는 게 좋다.
아빠의 영향일 거다. 아빠는 날 찍었지만 난 세상을 찍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벗어난 '사람' 잉그리드는 기록하기를 좋아했다. 늘 카메라와 펜을 들고 다니며 홈비디오와 사진, 일기와 편지 등을 남겼다. 부푼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향할 때 친구에게 쓴 편지, 첫 번째 남편과 이룬 가정의 행복한 한때, 로버트 카파와 나눈 로맨틱한 사랑의 언어, 어린 로셀리니 삼 남매의 귀여운 순간 등 기록으로 남은 그녀의 생애 가장 내밀한 순간들에서 우리는 그녀가 바라본 세상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 세상에는 어둠 속에서도 찬란한 빛이 있었고, 언제나 사랑이 있었으며, 행복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딸이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엄마는 늘 사진과 영화를 찍었어요. 할아버지의 영향일 거고 홈 무비 이상의 의미였죠. 그 안엔 이야기가 있고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담겨있어요. 유머와 따뜻한 시선이 늘 함께했죠."라는 말로 그녀의 기록에 대해 설명했다. 영화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에는 이제껏 공개되지 않았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생생한 기록물이 담겼다. 그녀가 포착한 찰나의 기쁨으로 잉그리드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 됐고, 우리는 시대를 풍미했던 한 여배우의 진솔한 모습을 이제서야 알게 될 것이다.
#3. 여자 그리고 엄마, 잉그리드 버그만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스웨덴 여배우 안 필요하세요?
영어를 아주 잘하고, 독일어도 좀 하고, 불어도 적당히 알아들어요.
이탈리아어는 '티 아모'밖에 모르지만요.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의사였던 첫 번째 남편과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와의 사랑이 그랬고, 이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의 결혼이 그러했다. 1945년 유럽으로 미군 위문을 위해 떠난 방문길에서 로버트 카파와 만나게 된 잉그리드. 그녀는 일기에서 이야기한다. '난 사랑에 빠졌어요.'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 로버트 카파와의 만남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늘 어디론가 떠나는 그였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슬픔 끝에 그를 떠나 보낸다. 이후 그녀는 네오리얼리즘의 대가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 결혼한다.
영화 [무방비 도시]를 보고 감명받은 그녀가 감독에게 같이 영화 작업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띄운 게 계기가 되어 사랑을 싹 틔운 것. '예술적 열정이 결합된 감정'에서 사랑이 된 이들의 만남은 곧 전 세계를 뒤흔든 스캔들이 됐고 잉그리드는 할리우드에서 퇴출당한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물론 상처받았지만 제삼자들이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배우는 배우로만 보는 게 맞죠. 스크린이나 무대에서 벌어진 일은 마음껏 비판해도 돼요. 연기가 거슬리면 나가셔도 되고요. 하지만 남의 사생활을 비판하는 건 잘못이죠. 워싱턴 상원의원까지 나서서 거들 일은 더더욱 아니고요. 저를 기점으로 인식이 바뀌길 기대했어요."
"엄마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매력'이라고 말하겠어요." -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
잉그리드는 친구 같은 엄마였다. 그녀에게는 첫째 딸 피아 린드스트롬, 아들 로베르토 로셀리니, 쌍둥이 자매 잉그리드 로셀리니, 이사벨라 로셀리니 총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피아는 어릴 적 배우 생활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엄마 잉그리드와 2주 이상 같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 로셀리니 삼 남매도 마찬가지.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엄마가 백 퍼센트 행복한 건 연기를 할 때라고 느꼈어요. 엄마는 가족들과 있을 때 행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권태로워 보였거든요."라고 말한다.
잉그리드 버그만 스스로도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릴 때부터 뭔가 새롭고 색다른 것을 동경해왔다. 많은 걸 보고 겪었지만 늘 목말랐다. 일상의 권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잉그리드는 틈 날 때마다 아이들을 보러 갔고, 여러 나라로 이사할 때마다 가족에 관한 모든 기록들을 가지고 다니며 간직했다. '그녀만의 가족을 보듬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온갖 힘든 선택들과 변화무쌍한 삶을 보세요.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하죠." 아들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말하듯 잉그리드 버그만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른다. 7번의 오스카 노미네이트, 3번의 수상에 빛나는 할리우드 황금기 대표 여배우,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연기력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스타 잉그리드. 그녀가 포착한 순간들은 참 유쾌하고 따스하다.
그녀가 오래도록 전 세계인의 뮤즈로 기억될 수 있는 이유는 삶의 매 순간들을 감사히 간직하려는 그 열정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그녀의 눈동자와 기록물에 건배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가 몰랐던 그녀의 생애 가장 내밀한 순간들이 담긴 영화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이 오는 10월 15일 개봉한다. 그녀의 눈동자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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