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김정호
백수 연습 외
이마에 시계 줄을 달지 않고도
아침마다 창문을 열고
출렁이는 햇살을 마중해야겠다
평일은 바빠 지키지 못해 지킬 수 없었던
아내의 잔소리를 차단한 미색의 벽
하늘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다
주말은 휴일이라 종일 엎드려 있어도
이대로도 좋은 자유 맘대로 부려도 되겠다
아무리 애써도 허망한 꿈
남은 삶의 여백 채우려 하지 않아도 되겠다
내 평안을 잠재울
당신의 평화를 흔든
산방 옆 남새밭
맨드라미, 접시꽃, 나팔꽃
바람이 물어다 준 이름 모를 풀꽃을 심으며
게으른 꽃비를 불러와도 상관없겠다
우물가 앵두 열매 빨갛게 익어
점점 풋사랑 그녀 입술을 닮아가도
더는 애가 타지 않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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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빨대들
해거름 빨라지면 어둠 밀치고
손수레를 끌고 엉금엉금 기어 나와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바리케이드를 친다
느리게 느리게 아주 느리게
지문으로만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든다
온종일 노동에 지쳐
걸음걸이가 수상한 사람 불러 세워놓고
영혼까지 탈탈 털어
뒷주머니 지갑 속 어둠의 냄새를 턴다
죄가 있는 사람은 죄를 묻어주고,
죄가 없는 사람은 새로운 죄를 만들어
귓속말로 은밀한 거래를 제안한다
만약 거래를 거부라도 하면
비명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아무렇지 않게 주리를 튼다
그 빨대 길어질수록
그 빨대 깊어질수록
목소리만 허황한 세상
그래도 당당하게 이것이 내 것이다
소리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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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2002년 《시의 나라》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대한민국문화예술대상, 한용운 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상처 아닌 꽃은 없다』, 『싱크홀』, 『핑크 라이트』 외, 산문집 『딴죽걸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