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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의 또 다른 책
Introduction.
Part 1 : The 'self' (Ego/Mind)
1. Nature of the 'Ego'
2. Nature of 'Mind'
Part 2 : Transcending the self
3. Pathway of Mind
4. Subjcetivity
5. Witnessing and Observing
6. Meditation
7. Devotion to God and Truth
Part 3 : Realizing the Self
8. Nature of Divinity/Self/Truth
9. The Presence of God
10. Nonduality
11. Enlightenment
Glossory
About the Author and Editor
Note : Reference to the Map of Consciousness and the concept of calibration are explained in detail in Dr. Hawkins' books Power vs. Force(Hay House, 2002)
서문 Preface
All life reflects the evolution of consciousness, from that of the simple bacteria to the advanced levels of Enlightenment of the world's Great Sages. Scott Jeffrey has taken on the formidable task of delineating core comprehensions that occur along the Great Pathway. These selections are inspirational, innately transformative steps that accelerate the journey to
Enlightenment. To completely understand any one of them illuminates all the others. It is the great journey that uplifts the reader from the seemingly mundane to the Realization of the Glory of God.
모든 생명체는 단순한 박테리아에서 세계의 위대한 현인의 깨달음의 진보된 수준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진화를 반영합니다.
Scott Jeffrey는 위대한 길(Great Pathway)을 따라 발생하는 핵심 이해를 묘사하는 막중한 작업을 완수했습니다. 11가지 주제 선정은 영감을 주고 깨달음 여정을 촉진하는 타고난 변형력있는 단계입니다. 그들 중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면 다른 모든 것에 빛을 비추어 밝힙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에서 신의 영광(Glory of God)의 각성으로 독자를 행복하게 하는 위대한 여정입니다.
David R. Hawkins, M.D., Ph.D.
작은 나(에고/마음) Part 1. THE “SELF” (EGO/MIND)
The process of transcending to the highest levels of enlightenment is one of letting go of the identification of a personal self. The belief in an "I" or "me"-a central processing unit that has its own body, mind, and emotions-is a hindrance to realizing one's true nature. Dr. Hawkins explains that the self (with a small “s”)-the composite of ego and mind-presumes there is a centralized “inner primary causal agent, for example, the 'doer of deeds, the 'thinker' of thoughts, and the decider' of decisions." We start by exploring the nature of the ego and the mind-the sense of a personal self- so we are better prepared to transcend this misidentification.
깨달음이라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 초월하는 과정은 개인적 작은 나(personal self)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몸, 마음 및 감정을 가진 중앙 처리 장치인 '나(I)' 또는 '나를(me)'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참 본성(true nature)을 각성하는데 하나의 방해물입니다. 호킨스 박사는 에고와 마음의 합성물인 작은 나(self)는 중앙집권화된 "내면의 주요 인과 대리인(inner primary causal agent)"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행위의 행위자', '생각의 생각하는 자', '결정의 결정하는 자"와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는 개인적 작은 나( personal self) 감각인 에고와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 동일시 오류(misidentification)를 초월할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에고의 본성 NATURE OF THE "EGO"
Hawkins describes the ego as "the imaginary doer behind thought and action." This "set of entrenched habits of thought," enforced by societal consensus and unconscious repetition, creates the illusionary sense of a personal self. The primary goal of spiritual work is to transcend the central processing unit believed to be essential for survival. Understanding the ego's nature reveals its underlying mechanisms so that we may withdraw the value we innocently projected onto it, thereby enabling spiritual progress.
호킨스는 에고를 "생각과 행동 뒤에 있는 상상속의 행위자(imaginary doer)"라고 묘사합니다. 사회적 합의와 무의식적 반복에 의해 강요된 이 "고착화된 일련의 사고 습관들(set of entrenched habits of thought)"은 개인적 작은 나(personal self)에 대한 환상 감각(illusionary sense)을 창조합니다. 영적 작업의 주요 목표는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믿어지는 중앙처리 장치(central processing unit)인 에고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에고 본성의 이해는 그것의 기저 메커니즘을 드러내고, 그래서 우리가 순진하게 투사한 가치를 철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영적 진보(spiritual progress)를 가능하게 합니다.
The progress of consciousness is facilitated by an awareness of the evolutionary nature of the ego and its structure.
의식의 진보(progress of consciousness)는 에고의 진화적 본성과 그 구조에 대한 앎(awareness)에 의해 촉진된다.
Realization is a progressive process. Spiritual progress is hastened by understanding the true nature of the ego. It is not an enemy to be attacked or defeated, nor is it an evil to be vanquished. It is dissolved by compassionate understanding.
참나 각성(realization)은 하나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영적 진보(Spiritual progress)는 에고의 참 본성(true nature)을 이해함으로써 앞당겨진다. 에고는 공격하거나 패배시켜야 하는 적이 아니며, 쳐부숴야하는 악도 아니다. 그것은 연민적 이해(compassionate understanding)로 해체될 뿐이다.
In spiritual parlance, ego implies a negative quality, an obstacle to realization because of its linear dualistic construction. In psychology, however, the term denotes coping and survival skills needed to deal effectively with the world.
영적 용어로, 에고는 그것의 선형적 이원성(linear dualistic) 구조때문에 영적 각성에 장애가 되는 부정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에고(ego)라는 용어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대처 및 생존 기술을 의미한다.
The world of the ego is like a house of mirrors through which the ego wanders, lost and confused, as it chases the images in one mirror after another. Human life is characterized by endless trials and errors while attempting to escape the maze. At times, for many people--and possibly for most--the world of mirrors becomes a house of horrors that gets worse and worse. The only way out of the circuitous wanderings is through the pursuit of spiritual truth.
에고의 세계는 거울의 집과 같아서 거울 속 이미지를 차례로 쫓으면서 방황하고,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한다. 인간의 삶은 미로에서 탈출을 시도하면서 끝없는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특징이다. 때때로 많은 사람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울 속의 세계는 점점 더 나빠지는 공포의 집이 되어간다. 쳇바퀴도는 방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추구하는 것이다.
Because the ego is constructed of positionalities, it has no option to be anything else except what it is. It therefore becomes an inescapable source of endless suffering and loss. Above all else, it fears the future and the specter of death itself, which is intrinsic to the ego's structure.
에고는 위치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에고는 에고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에고는 끝없는 고통과 상실의 피할 수 없는 근원이 된다. 무엇보다도, 에고는 에고의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미래와 죽음의 망령(specter of death)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
The ego is not an enemy to be subdued, but merely a compilation of unexamined habits of perception.
에고는 진압해야 하는 적이 아니라, 단지 점검되지 않은 인식 습관(habits of perception)의 편집일 뿐이다.
The ego can be thought of as a set of entrenched habits of thought, which are the results of entrainment by invisible energy fields that dominate human consciousness. They become reinforced by repetition and by the consensus of society. Further reinforcement comes from language itself. To think in language is a form of selfprogramming. The use of the pronoun as the subject and therefore the implied cause of all actions is the most serious error, and automatically creates a duality of subject and object.
에고는 인간 의식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에 동승한 결과인, 일련의 확고한 사고습관(habits of thought)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고 습관은 반복과 사회적 합의에 의해 강화되어 간다. 추가 강화는 언어 자체에서 나온다. 언어로 생각하는 것은 자기 프로그래밍(selfprogramming)의 한 형태다. 주어로 나(I)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과 그 결과로 생기는 모든 행동의 암시된 원인이 바로 가장 심각한 오류이며, 그것은 자동적으로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duality)을 창조한다.
There is no such thing in reality as an ego; it is merely illusory. It is made up of a compilation of arbitrary points of view supplied by mental processing and powered by feelings and emotions. These desires represent the attachments that the Buddha spoke of as the bondage of suffering. With absolute humility, the ego dissolves. It is a collection of arbitrary mental processes that gain force only because of vanity and habit. If one lets go of the vanity of thought, it dissolves. All thought is vanity. All opinions are vanities. The pleasure of vanity is therefore the basis of the ego-unplug it and it collapses.
실제로 에고와 같은 것은 없고, 단지 환상일 뿐이다. 에고는 정신 처리에 의해 제공되는, 느낌과 감정에 의해 힘을 얻는, 독단적 관점의 편집으로 구성된다. 이들 욕망이 바로, 붓다가 고통의 속박(bondage of suffering)으로 언급한 집착에 해당한다. 절대적 겸손함(absolute humility)과 함께, 에고는 해체된다. 에고는 오직 허영과 습관 때문에 세력을 얻는 하나의 독단적인 정신 과정의 집합(collection of arbitrary mental processes)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의 허영을 놓아버리면, 그것은 해체된다. 모든 생각은 허영이다. 모든 의견 또한 허영이다. 그러므로, 허영의 쾌락이 바로 에고의 기초이며, 기초를 제거하면, 에고는 무너진다.
The ego is neither bad nor an enemy, but merely an illusion to release so that something far better can replace it.
에고는 나쁜 것도 아니고 적도 아니며, 단지 놓아줄 수 있는 환상이어서 훨씬 더 나은 것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
The ego is the imaginary doer behind thought and action. Its presence is firmly believed to be necessary and essential for survival. The reason is that the ego's primary quality is perception, and as such, it is limited by the paradigm of supposed causality.
에고는 생각과 행동의 배후에 있는 상상속의 행위자(imaginary doer)이다. 그 존재는 생존을 위해 필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굳게 믿어진다. 그 이유는 에고의 주요 특성이 인식(perception)이고, 이처럼 그것은 소위 인과관계의 패러다임에 의해 한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The ego fears dissolution and therefore resists giving up the illusion of a separate existence in an imaginary "here” and an imaginary "now." It fears it will dissolve into being nothing, and consequently the conscious awareness will also cease. With examination, it will become clear that one's reality is not a "who" at all, but instead is an intensely loving Allness, which is realized and known to be much closer and more comforting and fulfilling than the prior sense of "I."
에고는 해체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가상적 "여기(here)"와 가상적 "지금(now)"에서 분리된 존재(separate existence)의 환상을 포기하는 것을 거부한다. 에고는 그것이 무가 됨(being nothing)으로 용해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결과적으로 의식적인 자각 또한 중단할 것이다. 잘 고찰해보면, 자신의 실상(reality)은 어떤 '누구(who)'가 아니고, 대신에 이전의 '나' 감각보다 더 가깝고, 더 편안하고 충만한 존재로 각성되고 알려진, 몹시 사랑스러운 전부임(loving Allness)이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The ego could be called the central processing and planning center-the integrative, executive, strategic, and tactical focus that orchestrates, copes,sorts, stores, and retrieves.
에고는 통합적이고, 실행적이고, 전략적인 중앙 처리 및 계획 센터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조직하고, 대응하고, 분류하고 저장하고 검색하는 전술적 초점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As we get closer to the discovery of the source of the ego's tenacity, we make the amazing critical discovery that we are enamored with our self.
우리가 에고 고집의 근원에 대한 발견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홀딱 빠져있다는 놀랍고 결정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The ego secretly "loves" and clings to the position of victimhood and extracts a distorted pleasure and grim justification from pain and suffering.
에고는 은밀하게 희생자의 입장을 "사랑"하고 집착하며, 아픔과 고통으로부터 왜곡된 쾌락과 암울한 정당화(grim justification)를 추출해 낸다.
One mechanism the ego uses to protect itself is to disown the painful data and project it onto the world and others.
에고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가지 기제는 고통스러운 데이터를 멀리하고, 그것을 세계와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The ego is extremely tenacious and therefore often seems to require extreme conditions before it lets go of a positionality. It often takes the collective experience of millions of people over many centuries to learn even what appears to be a simple and obvious truth—namely, that peace is better than war or love is better than hate.
에고는 극도로 집요해서, 종종 위치성을 놓아버리기 전에 종종 극단적인 조건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집단적 경험을 통해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로 보이는 것, 즉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거나, 사랑이 증오보다 낫다는 것을 배우는데도 때로는 수세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Although the critical level of integrity (level 200 on the Map of Consciousness) is the very threshold of spiritual progress, one can see that due to the structure of the ego, it can be difficult to achieve. The strength of the ego is such that it can be overcome only by spiritual power.
온전성(integrity)의 임계 수준(의식수준 200)이 영적 진보의 문턱이지만, 우리는 에고의 구조로 인해, 달성하기가 어려울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에고의 위력은 오직 영적 파워(spiritual power)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The ego has habitual modes of determining perception. They have to be identified first before they can be disassembled. One has to give up guilt about having an ego.
에고는 단정적 인식((determining perception)의 습관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습관적 태도는 그것들이 해체되기 전에 먼저 식별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에고를 갖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버려야 한다.
More important is not the nature of the ego, but the problem of identification with it as the "me," the “I," or "myself. The ego was inherited as an "it," and is actually an impersonal "it." The problem arises because one personalizes and identifies with it. That "it" of the ego structure is not unique or individual, and it is relatively similar (with karmic variations) in everyone. What really varies from individual to individual is the degree to which one is enslaved by its programs. The degree of dominance is therefore determined by the extent to which one identifies with it. Inherently, it has no power, and the power to decline the ego's programs increases exponentially as one progresses spiritually. That is the real meaning of the Map of Consciousness. What the majority of people think to be truth is, in reality, opinions.
더 중요한 것은 에고의 본성(nature of the ego)이 아니라 에고를 "나에게(me)", "나(I)"또는 "나 자신myself)"으로 동일시하는 문제다. 에고는 하나의 "그것(it)"으로 상속 받았으며, 실제로는 비개인적 "그것(it)"이다. 문제는 자신이 개인화하고 그것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에고 구조의 "그것"은 독특하거나 개인화되어 있지 않고, 에고는 (카르마 변형과 함께) 비교적 모든 사람에서 비슷하다. 각 개인마다 정말로 다른 것은 에고 프로그램에 의해 노예화된 정도인 것이다. 따라서 우세함 정도는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프로그램과 동일시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선천적으로, 에고는 파워가 없다. 그리고 에고 프로그램을 거절하는 파워는 자신이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 극적으로 증가한다. 이것이 바로, 의식지도(Map of Consciousness)의 진정한 의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be truth)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의견들인 것이다.
From a greater context, we can view that the ego is not “evil,” but is primarily a self-interested animal. Unless the "animal self" is understood and accepted, its influence cannot be diminished.
더 큰 맥락에서, 우리는 에고가 "악"이 아니라, 주로 자기 관심동물(self-interested animal)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 자기(animal self)"가 이해되고 받아 들여지지 않는 한, 그 영향력은 줄어들 수 없다.
Curiously, the ego's hold is weakened by acceptance, familiarity, and compassionate understanding; in contrast, it is reinforced by selfcriticism, condemnation, fear, and shame.
흥미롭게도, 에고의 지배력은 받아들임(acceptance), 친숙함(familiarity) 및 연민적 이해(compassionate understanding)에 의해 약화되고, 대조적으로, 그것은 자기 비판(selfcriticism), 비난(condemnation), 두려움 및 수치심에 의해 강화된다.
Temptation stems from within; it is merely the desire to experience the ego's payoff and satisfactions of an impulse, even if it is only a curiosity or a wanting.
유혹은 내면에서 비롯된다. 유혹은 설사 그것이 단지 하나의 호기심이나 원함일지라도, 단지 에고의 보상과 충동의 만족감을 경험하려는 욕망일 뿐이다.
The human ego likes to pretend that evil exists "out there" and seduces its hapless, innocent self into inadvertently falling into the trap of seduction. The real tempter is the ego's desire for gain—whether that be sensation, excitement, advantage, prestige, or the pleasure of controlling others.
인간의 에고는 악이 "저기 바깥에(out there)"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불운하고 죄없는 자기(innocent self)를 유혹하여 무심코 유혹의 함정에 빠트린다. 진짜 유혹자는 이득을 위한 에고의 욕망(ego's desire for gain)일 뿐이다. 그것이 감각, 흥분, 이점, 명성 또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쾌락이든간에 말이다.
The psychological source of seeming evil is primarily the naïve childishness of the primitive animal instincts of the infantile ego, which tends to go into a rage if its impulses are blocked by external authority. The same oppositional rage or narcissistic rebellion characterizes the criminal, the adolescent delinquent, the warmonger, and the puritanical moralist; they are all the same.
외견상 악의 심리적 근원은 주로 유아적 에고(infantile ego)의 원시적 동물 본능의 순진한 유치함(naïve childishness)인데, 유아적 에고는 그 충동이 외부 권위에 의해 막히면 분노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동일한 반대 분노(oppositional rage) 또는 자기애적 반항(narcissistic rebellion)은 범죄자, 청소년 비행, 전쟁광 및 청교도 도덕주의자의 특징이고, 그들은 모두 동일하다.
It is well to keep in mind at all times that the ego/mind does not experience the world, but only its own perception of it.
다음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좋다. 에고/마음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인식(own perception)일 뿐이다.
The ego is not the real "you"; it was inherited as part of being born a human. It basically originates from the animal world, and the evolution of consciousness happened through the primitive stages of mankind's evolution, so it could be said that to seek enlightenment is to recapitulate the history of human evolution.
에고는 진짜 "당신(you)"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남(being born)의 일부로서 상속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동물 세계에서 기원하고, 그리고 의식의 진화는 인류 진화의 원시적 단계를 통해 발생했다. 그래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진화의 역사를 개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The ego is a set of programs in which reason operates through a complex, multilayered series of algorithms wherein thought follows certain decision trees that are variously weighted by past experience, indoctrination, and social forces;
it is therefore not a self-created condition. The instinctual drive is attached to the programs, thereby causing physiological processes to come into play.
에고는 일련의 프로그램으로, 그것에서 이성(reason)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알고리즘의 연쇄(series of algorithms)를 통해 작동한다. 그 지점에서 생각은 과거의 경험, 세뇌 및 사회적 힘에 의해 다양하게 편중된 특정 의사결정 계통도(decision trees)를 따른다. 그러므로 생각은 스스로 창조된 상태가 아니다. 본능적 욕동(instinctual drive)은 프로그램에 들러붙고, 그럼으로써 생리학적 과정이 작동하게 된다.
The ego gets a grim pleasure and satisfaction from suffering and all the levels lacking integrity: pride, anger, desire, guilt, shame, and grief. The secret pleasure of suffering is addictive. Many people devote their entire lives to it and encourage others to follow suit. To stop this mechanism, the pleasure of the payoff has to be identified and willingly surrendered to God. Out of shame, the ego blocks out conscious awareness of its machinations, especially the secretiveness of the game of "victim."
에고는 고통과 모든 온전성 결핍 수준(즉, 자만심, 분노, 욕망, 죄책감, 수치심 및 슬픔)으로부터 암울한 쾌락과 만족감을 얻는다. 고통의 은밀한 쾌락에는 중독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평생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도 이를 따르도록 격려한다. 이런 메카니즘을 멈추기 위해서는 에고 보상의 쾌락을 식별하고, 기꺼이 신에게 내맡겨야 한다. 수치심 수준(의식수준 20)에서, 에고는 특히 '희생자' 게임의 은밀함이라 할 수 있는 그 교묘한 술책에 대한 의식적 자각(conscious awareness)을 차단한다.
Q: The programs of the ego do not continue unless they are secretly pleasurable?
A: That is the secret about secrets. The payoff is a gain of a pleasurably satisfying reward. The ego has learned to be very clever in order to survive. It is capable of resorting to any lengths or ruse of self-deception and camouflage. The world we witness is merely the drama of the collective egos acting out on the perceptual stage of form and time.
질문 : 만약 에고 프로그램이 은밀하게 즐겁지 않으면, 그것이 지속되는 것를 멈추지 않나요?
대답 : 그것은 비밀 중의 비밀입니다. 에고 보상(payoff)은 기꺼이 만족스러운 보상의 이득(gain)입니다. 에고는 생존을 위해 매우 영리하게 학습해왔습니다. 그것은 어떤 기간(any lengths) 또는 자기 기만(self-deception)과 속임수(camouflage)의 계략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세계는 단지 형상과 시간의 인식 단계(perceptual stage)에서 연출하는 집단 에고(collective egos)의 드라마 일뿐입니다.
The satisfactions of the ego are more pleasurable and addictive than the preservation of human life, much less dignity.
에고의 만족감은 인간 생명의 보존보다 더 즐겁고 중독성이 있고, 한편으로 자존감은 훨씬 적다.
By commitment to inner honesty, it will become apparent that the underpinning of the ego's responses is the pleasure that is derived from them. There is an inner satisfaction that is the payoff of self-pity, anger, rage, hate, pride, guilt, fear, and so on. This inner pleasure, as morbid as it may sound, energizes and propagates all these emotions. To undo their influence, it is merely necessary to be willing to forgo and surrender these questionable, inner secret pleasures to God and look only to God for joy, pleasure, and happiness.
내면의 정직성에 몰두해보면, 에고 반응의 토대가 바로 에고로부터 파생되는 쾌락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자기연민, 분노, 폭력, 증오, 교만, 죄책감, 두려움 등의 보상이라는 내적 만족이 있다. 병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이러한 내적 쾌락은 모든 감정에 활력을 불어넣고 전파한다. 이러한 에고의 영향력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서, 미심쩍은 내면의 은밀한 쾌락을 신에게 내맡기고, 오직 기쁨과 행복을 위해 신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To undo the ego, one must be willing to abandon this payoff game, with its grandstanding of emotions and repetitive rehashing of data and stories to justify its positions.
에고를 해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정의 과시와 그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데이터와 이야기의 반복적 재탕과 함께, 이 에고 보상 게임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One will note that the ego milks every wrong and that it has no greater pleasure than to indulge in "righteous indignation." It just "loves" that juicy positionality that has such a great payoff.
우리는 에고가 모든 것이 틀렸다는 생각을 이끌어내고, "의로운 분노"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쾌락은 없다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에고는 단지 그러한 큰 보상이라 할 수있는 달콤한 위치성(juicy positionality)을 사랑한다.
The ego's addiction and survival are based on the secret pleasure of negativity, which cannot be abandoned until it is first recognized, identified, and owned without shame or guilt. One has to see that this is just how the ego-which everyone inherits-operates, and recognize that it is not really personal at all.
에고의 중독과 생존은 부정성의 은밀한 쾌락에 기초하고, 그것(부정성의 은밀한 쾌락)은 수치심이나 죄책감없이 처음 지각, 확인, 소유될 때까지는 버려 질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사람이 타고난- 에고의 작동방식이며,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To the ego, abandoning the self-reward dynamic is looked upon as a loss. The ego does not trust God and thereby thinks it has only itself to turn to for sustenance, survival, and pleasure. The ego has faith in its own mechanisms and not God. It should not be faulted for this error because it has no experiential basis for comparison. Its only way out is with faith that there is a better way. It hears a spiritual truth and begins to search for it when the mind becomes disillusioned with its own fallacies and failure to achieve happiness. It finally realizes that the grim satisfaction it squeeze out of pain is a poor substitute for joy.
에고에게, 자기-보상 역동(self-reward dynamic)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의 손실로 간주된다. 에고는 신(God)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에고는 자양물, 생존, 쾌락에 의지하는 그 자체(only itself)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고는 신이 아닌, 그 자신의 메커니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에고는 비교할 수 있는 경험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 오류에 대해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그 유일한 탈출구는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신념과 함께 하는 것이다. 에고는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듣고, 마음이 행복 달성에 대한 오류 및 실패와 함께 환상이 깨지기 시작할 때, 그것을 찾기 시작한다. 마침내 에고는 고통에서 짜내는 암울한 만족감이 기쁨을 위한 하나의 시원찮은 대체물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To the ego, gains lie without; to the spirit, they are internal, for the ever-present joy of existence is independent of content or form. To the spirit, a sunny day or a rainy day are the same. Awareness enjoys qualities rather than grasping at form.
Thus, it can enjoy "being with," without having to own or control. Awareness is not driven by goals but instead values the capacity for equal pleasure in all circumstances.
에고에게 이득(gain)은 함께 있지 않고, 영에게는 그것이 내재적이다. 왜냐하면 상존하는 존재의 기쁨(joy of existence)은 내용 또는 형상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영에게는 화창한 날 또는, 비오는 날도 실제로 동일하다. 자각( Awareness)은 형상을 붙들기 보다는 특성(quality)을 향유한다. 따라서 소유하거나 통제할 필요없이 "함께 있는 것(being with)"을 향유할 수 있다. 자각은 세상의 목표에 이끌리지 않고, 대신에 모든 상황에서 동등한 기쁨(equal pleasure)을 위한 역할에 가치를 둔다.
The ego's rigidity and resistance to correction are based on narcissistic egotism, pride, and vanity. The collective egos of whole nations bring about their downfall and destruction.
오류의 교정에 대한 에고의 경직성과 저항(rigidity and resistance)은 자기애적 자기중심주의, 자만심 및 허영에 근거한다. 국가의 집단 에고(collective egos)는 그들의 몰락과 파괴를 초래한다.
The ego is not only unable to correctly assess situations that are fatal, but it even willingly sacrifices life for its own ends. The ego is therefore potentially deadly and would rather "see you dead” than admit it is wrong.
에고는 치명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기꺼이 생명까지도 희생한다. 따라서 에고는 잠재적으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고,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기 까지 한다.
The ego conceals, whereas awareness reveals. The answer to many defective ego positions could be subsumed in the commonly overlooked sanity of "common sense."
에고는 은폐하는 반면, 자각은 드러낸다. 결함많은 에고 입장(ego positions)에 대한 정답은 흔히 간과되는 "상식"의 건전함이라고 할 수 있다.
At the higher levels, the ego is seen to be an illusion, without any innate reality.
높은 의식수준에서, 에고는 어떤 내재적 실상이 아닌, 하나의 환상(be an illusion)으로 보인다.
At its roots, the ego is the extreme of selfishness and is completely lacking in all ethical principles.
그 근본 뿌리를 보면, 에고는 이기심의 극단이며, 모든 윤리적 신념(ethical principles)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The ego is a victim of itself. With rigorous introspection, it will be discovered that the ego is really just "running a racket" for its own fun and games and survival. The real "you" is actually the loser.
에고는 그 자체의 희생자다. 엄격한 자기성찰(introspection)과 함께, 에고는 실제로 자신의 재미와 게임 및 생존을 위해 단지 "사기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짜 "당신"은 사실상 패자인 것이다.
The ego clings to emotionality, which is intimately connected with its positionalities; it pretends to think that it has no other choices. To "surrender to God" means to stop looking to the ego for solace and thrills and to discover the endless, serene joy of peace. To look within is to find the underlying, ever-present source of the illumination of the mind itself.
에고는 그것의 위치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감정(emotionality)에 집착한다. 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하는 척한다. "신에게 내맡긴다"는 것은 위안과 전율을 얻기 위한 에고찾기를 멈추고, 그리고 끝없고 고요한 평화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은 마음 자체의 빛비춤의 상존하는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그 근원의 바닥(underlying)을 찾는 것이다.
The ego defends its own limitations with prideful denial, thus becoming its own victim.
에고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부정으로 자신을 한계짓고, 그 결과 그 자신의 희생자가 된다.
From a developmental analysis, which utilizes consciousness-research techniques, it appears that the human ego itself is primarily the product and continuation of the presence of the survival core of the animal evolution.
의식-연구기술을 사용한 발달 분석(developmental analysis)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에고 자체는 주로 동물 진화의 생존을 위한 핵심 존재(presence of the survival core)의 산물이자 연속성이다.
In contrast to the innate arrogance of the ego, true intelligence is a quality of consciousness/awareness and is not subject to attack because its essence is nonlinear. It is, however, utilized by the ego in its expression as mind, which then becomes and subserves the ego's drive for survival. Thus, the ego really uses the mind as camouflage and becomes hidden in its clever constructions. This recognition clarifies why the ego's masquerade as religion and the undermining of spiritual truths have been central to its domination of large cultures for extended periods of time and the deaths of millions.
에고의 타고난 오만함과는 달리, 참 지성(true intelligence)은 의식/자각의 특성이며, 그 본질이 비선형적이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성은 에고에 의해서 마음으로서 그것의 표현(expression)으로 활용되며, 또한 마음은 생존을 위한 에고의 추진력이 되어 보조한다. 따라서 에고는 실제로 눈가림(camouflage)으로서 마음을 사용하고, 그 교활한 구조에 숨기 시작한다. 이 사실로 우리는 다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왜 에고가 종교로 가장했는지 그리고, 영적 진리의 훼손이 오랜 기간 동안 거대 문명의 지배와 수백만 명의 죽음에 중심이 되어왔는지를 말이다.
The persistence of the primitive ego in man is referred to as the narcissistic core of "egotism," which, at calibration levels below 200 (the critical level of integrity), indicates the persistence of the primitiveness of self-interest, disregard for the rights of others, and seeing others as enemies and competitors rather than as allies. There is nothing deadlier than the religionized ego.
인간에게서 원시적 에고(primitive ego)의 지속은 "자기중심주의(egotism)"의 자기애적 핵심이라고 언급되어 왔는데, 이는 측정수준 200(온전성의 임계 수준) 이하에서, 자기-흥미(self-interest)의 미개성 고집, 타인의 권리 묵살, 다른 사람들을 협력자가 아닌 적과 경쟁자로 보기를 가리킨다. 종교화된 에고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While the ego/self routinely takes credit for survival, its true source is the presence of Divinity as Self. It is only because of the Self that the ego is capable of being self-sustaining. It is just a recipient of life energy and not its origin, as it believes.
에고/자기(ego/self)는 관례적으로 생존이 에고 덕분이라고 하지만, 생존의 진정한 근원(true source)은 참나로서 신성의 현존(presence of Divinity)이다. 에고가 자기로 존재할 수 있는 것(being self-sustaining)은 오직 참나 덕분이다. 에고는 단지 생명 에너지의 수령자일 뿐이며, 에고가 믿는 것처럼 그 기원은 아니다.
The ego is the main hero/heroine in the inner movie of one's life. The clever ego expresses its inner grandiosity by seeking to replace Divinity by declaring itself to be God (or Nero, Caesar, and so on), or claiming special Divine authority by its declaration that it is Divinely ordained and therefore authorized.
에고는 한 개인의 삶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다. 교활한 에고는 신성을 대체하려고 시도함으로서 스스로의 내적 웅장함(inner grandiosity)을 표현한다. 이때 에고는 신성을 대체하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신(네로, 카이사르 등)이라고 선언하거나, 신성하게 임명되었음을 공인하는 선언문을 통해 신성한 권위(Divine authority)를 주장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Ego positions have the characteristics of disowning responsibility and placing blame "out there." In the end, the ego's payoff is the energy by which the ego persists, because it lacks the pleasure of the input of spiritual energy. The ego's payoff is its substitute for Divinity; thus, it maintains its sovereignty and is convincing in its secret, silent belief that it is the source of one's life itself-that is, that it is God.
에고 위치는 책임성 부인(disowning responsibility)과 "저기 바깥에(out there)"에 비난을 두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결국, 영적 에너지 입력(spiritual energy)의 즐거움이 부족하기 때문에, 에고의 보상(ego's payoff)은 에고를 지속시키는 동력자원이라 할 수 있다. 에고 보상은 신성을 향한 에고의 대체물이다. 따라서 에고는 그 통치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말하자면, 신이 자신의 삶 자체의 근원이라는 그 은밀하고 고요한 믿음에 확신을 가진다.
On its own, the ego would never seek salvation ... the mechanism for salvation is via the will, which invites the intervention of Divinity.
그 자체로, 에고는 결코 구원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 구원을 위한 메커니즘은 의지(will)를 경유하며, 의지는 신성(Divinity)의 개입을 초대한다.
To the ego, a "want" is interpreted as a "need" and a "have to have". Thus, its seeking can become frantic, and all caution can be thrown to the wind. Desires are thereby escalated to being desperate and demanding any sacrifice, including even the deaths of millions of other people. It must have what it wants at any cost and will find many excuses to justify itself. It gets rid of reason with clever rhetoric bolstered by blame and demonizes others, for the ego has to win at all costs because throughout millions of years of evolution, it did die if it did not get its wants and needs fulfilled. The ego has a long, long memory and millions of years of reinforcement.
에고에게는, "원함(want)"은 "필요"와 "가져야 만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그것의 추구는 광란이 될 수 있으며, 모든 경고(caution)가 바람에 던져진 듯 무시될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욕망은 확대되어 자포자기 상태가 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어떤 희생까지도 요구하게 된다. 에고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하는 것을 가져야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있는 많은 변명거리를 찾을 것이다. 에고는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승리해야 하기 때문에, 비난에 의해 강화되고 다른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교활한 수사학으로 이성(reason)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에고는 수백만년의 진화를 통해, 자신의 원함과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죽음을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에고는 길고 긴 기억과 수백만 년의 강화(reinforcement)를 가지고 있다.
The ego structure is dualistic and splits the unity of Reality into contrasting pairs and seeming opposites that are therefore the product and content of perception, which consists of projections. The ego's position propagates itself because its secretly sought payoff is the emotion itself.
에고 구조는 이원론적이며, 실상(Reality)의 단일성을 대조적인 쌍(contrasting pairs)으로 나누고, 따라서 정반대로 보이는 것은 투사로 구성된 인식의 산물과 내용이 되어 버린다. 은밀하게 추구된 에고 보상은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에고의 위치는 스스로 전파된다.
The inflated ego is devoid of reality testing as well as amelioration by reason, logic, or rationality.
팽창된 에고는 이성, 논리 또는 합리성에 의한 개선뿐만 아니라 현실 검증이 결여되어 있다.
Addiction to the ego's proclivities is like intoxication where pleasure is derived from the emotional payoff of negativity. Thus, negative positionalities tend to be self-perpetuating habits akin to addiction, based on presumptions and the inner seductive lure of the gratification of basic animal instincts. By repetition, they eventually gain dominance and control, which is the innate purpose of the narcissistic ego in the first place.
에고의 성향에 대한 중독은 쾌락이 부정성의 감정적 보상에서 파생되는 도취와 비슷하다. 따라서 부정적 위치성은 기본적인 동물본능의 만족감에 대한 추정과 내면의 매혹적인 유혹에 기초하여, 중독과 유사한 자기-영속적 습관인 경향이 있다. 반복에 의해서, 동물적 본능은 결국 지배력과 통제력을 얻게되며, 이는 애초에 자기애적 에고의 타고난 목적이다.
The levels below calibration level 200 (the critical level of integrity) tend to be self propagating because of the seductive emotional pleasure of the ego's animal-instinct payoff.
측정수준 200(온전성의 임계 수준) 이하의 수준은 에고의 동물-본능 보상의 매혹적인 감정적 쾌락때문에 스스로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The ego is oriented toward specifics and the linear content of the field of vision. Its effect on vision itself is exclusive and limited in order to focus primarily on the near side of objects (so as to facilitate manipulation). Spirit is oriented toward context and the whole, and is thus inclusive and focused on the far side of objects. Its field is diffuse rather than local.
에고는 구체적인 것(specifics)과 시야범위(field of vision)의 선형적 내용(linear content)을 지향한다. 에고의 시야 자체( vision itself)로 인한 영향은 주로 대상의 가까운 쪽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배타적이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조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영은 맥락과 전체를 지향하며, 따라서 대상의 먼 곳까지 포괄하고 집중한다. 영의 범위(field)는 국소적이라기 보다는 넓게 퍼져있다.
In ordinary life, the ego/mind goes from "unfinished” to "finished,” and then from "incomplete" to "complete." In contrast, the spiritual pathway is a direction and style that goes from complete to complete as evolutionary states of emergence. Ego positions are interactive and usually represent a composite. For example, to disassemble anger may require the willingness to surrender the pride that underlies that anger, which in turn depends on surrendering a desire. This means surrendering the fear that energized the desire, which again is related to the undoing of imaginary loss, and so forth.
마음이 훈련되지 않은 평범한 삶에서는, 에고/마음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그리고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이동한다. 그에 반해서, 영적 경로(spiritual pathway)는 출현(emergence)의 진화적 상태로서 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이동하는 방향과 방식이다. 에고 위치는 상호작용하고, 일반적으로 하나의 합성물(composite)을 대표한다. 예를 들어, 분노를 해체하려면 그 분노의 기초가 되는 자만심을 내맡기는 자발성이 필요할 수 있으며, 이는 차례로 욕망을 내맡기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욕망에 활력을 불어 넣은 두려움을 내맡기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가상적 상실(후회)와 같은 것의 취소와 관련이 있다.
Motivations are thus intertwined and mutually interactive, and operationally surrendering them leads to the next levels, which are comprised of dualities. Thus, the deeper layers tend to surface one's belief about God, programmed spiritual expectations, and belief systems.
따라서, 에고의 동기는 서로 얽혀있고 상호 작용하며, 운영적으로 동기의 내맡김은 이원성으로 구성된 다음 수준들(next levels)로 이어진다. 그래서, 더 깊은 층으로 들어가면 신(God)에 대한 자신의 믿음, 프로그램된 영적 기대 및 신념 체계를 수면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Spiritual work is therefore a matter of exploration that transcends mental concepts, such as those of cause and effect. The ego's survival relies on the defeat of truth because it is dependent on allegiance to falsity. For one thing, spiritual truth challenges the ego's presumption that it is sovereign.
결국, 영적 작업(spiritual work)은 원인, 결과와 같은 정신적 개념을 초월하는 탐구의 문제(matter of exploration)인 것이다. 에고의 생존은 거짓에 대한 충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진리의 타파(defeat of truth)에 의존하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는 자신이 통치자라는 에고의 추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The ego is addicted to being "right" (for example, politics). A prevailing goal of the ego is to be "right." Therefore, it is the core of the payoff of righteousness. You can be right without being righteous, and you can be righteous without being right.
에고는 "옳음"(예를들어, 정치)에 중독되어 있다. 에고의 지배적인 목표는 "옳음이 되는 것(be right)"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로움 보상( payoff of righteousness)의 핵심이다. 깨달은 당신은 의롭지 않지만 옳을 수 있고, 옳지 않지만 의로워질 수 있다.
The ego is focused on one point, the experiencer, which is programmed to seek pleasure and survival through gain. It views happiness as something one acquires, possesses, and incorporates. Therefore, the experiencer is programmed to "get." The experiencer's function is to get pleasure and possess it. It is not concerned with the soul unless it fortuitously becomes spiritually oriented. Then its goals shift, and it discovers that the source of pleasure is completely within. When it is discovered that the source of ongoing pleasure is the Self (and not the small self), the result is independence from the world. Gratification of the ego's desires is within the linear domain. True happiness arises from the nonlinear. With relinquishment of dependence on the experiencer for pleasure and happiness, one discovers that the source of happiness is one's own existence, and the realization of the Self is happiness itself.
에고는 한점(one point), 경험자에 중점을 두는데, 이는 이득을 통해 쾌락과 생존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에고는 행복이라는 것을 우리가 획득하고, 소유하고, 조직하는 어떤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경험자는 "얻기(get)"에 프로그램되어 있다. 경험자의 기능은 쾌락을 얻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만약 에고가 우연으로라도 영적으로 방향을 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 다음 에고의 목표는 바뀌고, 에고는 쾌락의 원천이 완전히 내면에 있음을 발견한다. 지속되는 기쁨의 근원이 (작은 나가 아닌) 참나라는 것이 발견되면, 그 결과는 세상로부터의 자립(independence)이다. 에고 욕망의 만족감은 선형적 영역(linear domain) 내에 있다. 참 행복(True happiness)은 비선형에서 비롯된다. 쾌락과 행복을 위한 경험자 의존의 포기와 함께, 우리는 행복의 근원이 자신의 존재이며, 참나의 각성(realization of the Self)은 행복 그 자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Notice that the experiencer aspect of the ego is constantly poised to derive benefit from the witnessed phenomena, even if it is only to confirm its own reality as being the "you" of the ever presumptuous personal "I."
에고의 경험자 측면은 목격된 현상으로부터 이익(benefit)을 끌어낼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언제나 주제넘은 개인적 "나(I)"의 "당신(You)"이 됨으로서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The ego is reluctant to accept that the unfolding of sequential phenomena is autonomous and impersonal. It is poised to jump in to impose a feeling, which in turn is always the expression of an ego viewpoint or positionality, such as an opinion, or at least an order to declare itself to be primordially essential to one's identity and sense of reality. To cease identifying the experiencer as the reality of oneself is a major transition from dualistic content to nondualistic context, and therefore, from self to Self. The ego is not the actual reality or source of life or existence, and is therefore vulnerable to dissolution. It is primordial but not essentially sovereign. It is dominant only until its illusory quality is recognized. The body itself is actually not experienced; instead, only the sensations of the body are experienced. Therefore, awareness of the body is merely a composite sensation by which the somatic area of the brain records input, and by neuronal function, replicates the body image.
에고는 연속적인 현상의 펼쳐짐이 자동적이고 비개인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린다. 에고는 감정을 강요하기 위해 뛰어들 태세이며, 이것은 결국 의견과 같은 에고 관점 또는 위치성의 표현이거나,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과 실상 감각(sense of reality)에 원초적으로 필수적이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하나의 명령이다. 경험자를 자신의 실상(reality of oneself)과 동일시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야말로 이원성의 내용(dualistic content)에서 비이원성의 맥락(nondualistic context)으로, 따라서 작은 나(self)에서 참나(Self)로의 주요 전환이다. 에고는 생명이나 존재의 실제적인 실상 또는 근원이 아니며, 따라서 해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에고는 원초적이지만 본질적으로 통치권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에고의 환상적 특성이 지각될 때까지만 지배적이다. 몸 자체는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다. 대신, 몸의 감각만이 경험된다. 따라서 몸의 자각은 단지 복합감각일 뿐이고, 그것에 의해 뇌의 체성영역은 입력을 기록하고, 신경 기능에 의해 신체 이미지를 복제한다.
The attachment to the body is to sensation and the superimposition of the concept of "mine", what is "mine" and is controlled by "me" must therefore be "who I am." Identification with the body is consequent to the ego's positionalities.
To detach from identification of the self as the body, it is necessary only to see the body as an "it" rather than a "me."
몸에 대한 애착은 '나의 것(mine)'이라는 감각과 개념의 합성물이며, 그리고 '나의 것'이라는 것과 '나의(me)'에 의해 통제되는 것은 반드시 '나는 누구인가(who I am)'여야 한다. 몸과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the body)는 에고의 위치성에 기인한다. 몸으로서 작은 나(self)와의 동일시를 떼어내려면, 오직 그 몸을 "나의(me)"가 아닌 "그것(it)"으로 볼 필요가 있다.
The sense of "who" we are is primarily an identification with the body, the personality, and its mental processing, with accompanying emotional investment. One can do an internal mental imaging process to see how much of the body or its sensations could actually be lost and yet have the self retain a sense of "I". It becomes clear that the experiential "I" has a body but is not a body.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은 수반하는 감정적 투자와 함께, 주로 몸, 성격 및 그것의 정신적 처리와의 동일시다. 우리는 신체 또는 감각의 어느 정도가 실제로 손실될 수 있는지, 그리고 여전히 "나" 감각을 유지하는 작은 나(self)를 가질 수 있는지 보기 위해 내부 정신 이미지화 과정을 수행할 수 있다. 경험적 "나"는 몸을 가지고 있지만 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The narcissistic core of the ego is aligned with being "right," whether being "right" means being in agreement with wisdom or rejecting it as invalid. With humility, the serious searcher discovers that the mind alone, despite its education, is unable to resolve the dilemma of how to ascertain and validate truth—which would require confirmation by subjective experience as well as objective, provable criteria.
에고의 자기애적 핵심은 '옳다는 것(being right)'에 정렬한다. 그것이 지혜와 하나되는 것을 의미하든, 근거없는 것으로 거부하는 것이든 말이다. 겸손함을 가진 진지한 탐구자(searcher)는 교육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으로는 진리를 확인하고 입증하는 방법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진리란 주관적 경험뿐 아니라 객관적이고, 입증가능한 기준에 의해 확인이 필요할 수 있는 진리를 말한다.
There is a secret payoff and satisfaction in being the victim, martyr, or loser.
희생자, 순교자 또는 패배자됨(being the victim, martyr, or loser)에는 에고의 은밀한 보상과 만족이 있다.
As Freud discovered, out of guilt the animal nature of man becomes repressed and then projected onto others, or onto a deity that purportedly has the same character defects as man. Historically, man paradoxically fears his own projections and confuses Divinity with the repressed dark side of his own nature. The ego is dissolved not by denunciation or self-hatred, which are expressions of the ego, but by benign and nonmoralistic acceptance and compassion that arises out of understanding its intrinsic nature and origin.
프로이트가 발견한 바와 같이, 인간의 동물적 본성은 죄책감으로 인해 억압된 다음, 다른 사람이나 인간과 같은 성격상의 결함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신에게 투사된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투사를 두려워하고, 신성을 자신의 본성의 억압된 어두운 면과 혼동한다. 에고는 에고의 표현인 맹렬한 비난이나 자기-혐오에 의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에고의 타고난 본성과 근원을 이해하는데서 나오,는 온화하고 비도덕적인 받아들임과 연민(acceptance and compassion)에 의해 해소된다.
It is well to remember that the human psyche is like the hardware of a computer, which innocently accepts any software with which it has been programmed. This was stated by Socrates as "all wrong doing is involuntary, for man always chooses what he believes to be for his good.” Man is merely mistaken in what is really the source of goodness and happiness and thus mistakenly chooses externals (illusions) instead of Truth. Instead of vilifying the ego and indulging in guilt, shame, and self-hatred—it is far more productive to accept it for what it is, appreciate its historic value, and adopt it as one would a naïve pet.
인간의 정신은 프로그래밍된 모든 소프트웨어를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소크라테스에 의해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옳다고 믿는 최선을 선택하기 때문에 모든 잘못된 행함(wrong doing)은 본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단지 선함(goodness)과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못 알고있어서, 진리가 아닌 외부의 환상을 잘못 선택하는 것이다. 에고를 비방하고 죄책감, 수치심, 자기-혐오에 빠지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순진한 애완동물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We can accept that the ego is, of course, desirous of gain, advantage, greed, and the like. By simply expecting it to be as it is, its nature can be accepted and then transcended. The ego just does what it has been trained to do over the millennia, and it still thinks that its survival depends on adherence to, and the practice of, its programs. Because of evolution, these programs have now become the antithesis of the intentions of the ethical person of today or of the serious spiritual seeker.
물론 우리는 에고가 이득, 이익, 탐욕 등을 갈망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본성은 받아들여지고 초월될 수 있다. 에고는 수천 년에 걸쳐 훈련된 일을 할 뿐이며, 여전히 자신의 생존이 본래 프로그램된 것을 준수하고 실천하는데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영적 진화때문에, 이러한 에고의프로그램은 오늘날의 윤리적인 사람이나 진지한 영적 추구자 의도의 안티테제가 되어가고 있다.
In approaching the ego, it is well to remember that it feeds off of, and is seduced by, the energy of the negativity of pain, suffering, hate, and guilt-to which it then gets attached (addicted). It secretly nurtures the “juice" it gets from being the martyr or the victim; and it loves hatred, being "right," and revenge. The consciousness level of the ego is based on the utilization of the qualities of force, whether they are emotional, intellectual, or physical. The undoing of the ego, consequently, is not by the utilization of moralistic or emotional counterforce but by use of the power of Truth itself.
에고에 접근할 때는, 에고가 아픔(pain), 고통(suffering), 증오(hate), 죄책감(guilty)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먹고 유혹한다는 것, 그 다음에 집착(중독)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에고는 순교자나 희생자가 되는 과정에서 얻는 "단물"을 비밀리에 키우며, 증오, "옳음", 복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에고의 의식 수준은 감정적이든, 지적이든, 육체적이든 힘의 특성(qualities of force)활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결과적으로, 에고를 취소하는 것은 도덕주의적이거나 감정적인 반발력의 사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의 파워 사용에 의한다.
The primary underpinning of the persistence of negativity is the ego's secret payoff from negativity ("juice"). This secret payoff is the ego's only source of energy, so it sees forgiveness, as well as compassion, as the "enemy". The self identifies not only with the mind, but also with its content which becomes "my" memory, "my" senses,"my" thoughts, "my" emotions, "my" property, "my" success, "my" failure, "my" expectations, "my feelings, and so on.
Identification presumes ownership and authorship; thus, the ego sees and believes itself to be a personal, separate causal agent and the inferred source of its own existence.
부정성 지속(persistence of negativity)의 기본 토대는 부정성("단물")에서 비롯된 에고의 은밀한 보상이다. 이 은밀한 보상은 에고의 유일한 에너지원이므로, 에고는 용서뿐만 아니라 연민을 "적"으로 본다. 작은 나(self)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것의 내용 즉, "나의" 기억, "나의" 감각,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재산, "나의" 성공, "나의" 실패, "나의 "기대", "나의" 느낌 등과 동일시한다. 동일시는 소유권과 저작권을 상정하고, 따라서 에고는 자신을 개인적, 분리의 인과적 대리인이자 자신 존재의 추론된 근원으로 보고 믿는다.
Intrinsic to the very basic construction of the human ego is an innate innocence in that it believes in the reality or truth of its own programs and is unaware that it lacks an intrinsic capacity for self-correction. The reason for the ego's inherent lack of capacity for verification is that its data is limited to only internal processing systems.
The internal mechanisms of the ego lack any external, independent source of reference for verification. With compassion, one realizes that the structure of the ego is such that it cannot know what lies beyond.
인간 에고의 고유한 근본 구성은 그것이 자신의 프로그램의 실상이나 진실을 믿고, 자기-교정(self-correction)을 위한 고유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타고난 순수함(innate innocence)이다. 에고가 고유한 검증 능력이 부족한 이유는 그것의 데이터가 단지 내부 처리 시스템(internal processing systems)에만 국한되기 때문이다. 에고의 내부 메커니즘에는 검증을 위한 외부의 독립적인 어떠한 참조 자료도 없다. 연민이 있을 때, 우리는 에고의 구조가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There is no timetable or prescribed route to God. Although each person's path is unique, the terrain to be covered is relatively common to all. The work is to surmount and transcend the common human failings that are inherent in the structure of the human ego. One would like to think that these failings are personal; however, the ego itself is not personal.
It was inherited along with becoming a human being. Details differ based on past karma.
신에게로 가는 시간표나 정해진 길은 없다. 비록 각 개인의 여정이 특별할지라도, 둘러싸고 있는 지형은 모두에게 비교적 일반적이다. (신에게로 가는) 작업은 인간 에고의 구조에 내재된 인류의 공통된 결점(common human failings)을 넘어서고 초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결점이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에고 자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에고는 인간임(human being)과 함께 유전된 것이다. 세부적인 것은 과거 카르마에 따라 다르다.
The vanity of the ego (at the level of pride) is endless and vainglorious in its grandiose delusion that it can disprove the existence of God. Cognition is only linguistic supposition confined to linear symbols, the limited content of mental processing. That it has any actual objective reality at all is a purely subjective presumption.
(자만심 수준에서) 에고의 허영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는 에고의 과대망상(grandiose delusion)으로 끝이 없고, 자만심으로 가득차있다. 지각(Cognition)은 정신 처리의 제한된 내용(limited content)인 선형적 상징에 국한된 언어적 추정(linguistic supposition)일 뿐이다. 에고가 어떤 실제적인 객관적인 실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인 가정에 불과하다.
By spiritual endeavor, one discovers that it is oneself who has been a captive and a "victim" ensnared by the clever deceptions of the ego. All the great teachers have declared that man's primary defect is "ignorance." Research reveals rather quickly that the underlying basis of this ignorance is due to the limitation of the innate structure of the ego itself as a consequence of the still-ongoing evolution of consciousness.
영적 노력(spiritual endeavor)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교활한 에고의 속임수(deceptions of the ego)에 사로잡혀 있는 포로이자 "희생자"임을 알게 된다.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인간의 일차적 결함이 "무지"라고 선언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무지의 근본 원인은 의식의 계속적인 진화의 결과로 에고 자체의 타고난 구조의 한계 때문이다.
In the human, there evolved not only the capacity to process and interpret linear data, but there was also available the nonlinear energy of consciousness/awareness that was called "spiritual” because the energy source was nonphysical and not definable by linear concepts.
인간에게는 선형적 데이터를 처리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진화했을 뿐만 아니라, 에너지원이 비물리적이며 선형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불리는 의식/자각의 비선형 에너지도 사용할 수 있다.
This, too, was evolutionary in its human development and was called the "human spirit." It was characterized by the emergence of a nonphysical (“etheric") energy body, the survival and evolution of which were independent of the physical body itself. Thus, spirit is related to essence, and reason to linear form and definition.
이것 역시, 인간 발달에 있어서 진화적이었고, "인간 영(human spirit)"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비물리적인("에테르") 에너지 몸의 출현을 특징으로 하며, 그 생존과 진화는 육체적 몸 자체와 관련이 없다. 따라서 영(spirit)은 본질과 관련되고, 이성(reason)은 선형적 형상 및 정의(definition)와 관련되어 있다.
As can be seen from its evolutionary development, faith was a biological necessity for survival that was built into a basic structure of the ego as the sense of self. The capacity to be aware of and experience the self was a quality of sentient awareness innate to the animal kingdom.
그것의 진화적 발달에서 알 수 있듯, 신념은 자기(self) 감각으로서 에고의 기본 구조에 내재된,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필연성이었다. 자기(self)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능력은 동물의 왕국에 타고난 지각있는 자각의 특성(quality of sentient awareness)이었다.
Thus, humankind lived by faith. Naïvely, the ego placed its primary faith in the narcissistic core of the ego itself (for example, perception and opinion), which therefore assumed autonomy and sovereignty as the arbiter of reality. The ego is, by virtue of its structure and origin, blind to its own limitations.
그래서 인류는 신념으로 살았다. 순진하게도, 에고는 에고 스스로 자기애적 핵심(예: 인식과 의견)에 일차적인 신념(primary faith)을 두었고, 따라서 자율성과 통치권을 실상의 중재자로 가정했다. 에고는 그것의 구조와 기원 때문에 자신의 한계에 대해 무지하다.
The absolute subjectivity of revealed Truth precludes all considerations or uncertainties which stem only from the ego.
When the ego collapses, all argument ceases and is replaced by silence. Doubt is the ego. That the mind is unable to prove a proposition does not mean that the proposition is false. This is the pitfall of the atheist because the mind is unable to know what is true. It is simultaneously equally unable to disprove it, for it would then be in the paradox of having to prove its opposite. The narcissistic core of the ego unconsciously and naïvely presumes that it is omnipotent and therefore lacks the humility that is requisite to arriving at higher Truth.
드러난 진리의 절대적 주관성은 오직 에고에서 비롯된 모든 고려사항 또는 불확실성들을 배제한다. 에고가 무너질 때, 모든 다툼은 멈추고 고요해진다. 의심이 바로 에고다. 마음이 하나의 명제(proposition)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명제가 거짓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무엇이 참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무신론자의 함정(pitfall of the atheist)이다. 그것은 동시에 그 반대를 증명해야 하는 역설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반증할 수도 없다. 에고의 자기애적 핵심은 무의식적이고 순진하게, 그것이 전능하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더 높은 진리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겸손함이 부족하다.
Paradoxically, benefit is derived by the selfinterest of the ego when it begins to realize that there is a great advantage to unselfishness. When it learns of the benefit of letting go of egocentric goals, the ego itself then becomes the springboard to spiritual inquiry and the means to its own transcendence, realizing that humility is strength and not weakness, and that it is wisdom and not ignorance. The willingness to "forgive and forget" calibrates at 450 (reason/logic). The willingness to "forgive and surrender to God" calibrates at 540(unditional love).
역설적으로 사심없음(unselfishness)에 큰 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이익은 에고의 사욕(selfinterest)에 의해서 유래된다. 에고가 자기중심적 목표를 놓아버리는 것의 유익함을 알게 되면, 에고 자체가 영적 탐구(spiritual inquiry)의 발판이 되고, 자신을 초월하는 수단이 되며, 겸손함은 나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며, 그것이 지혜이지 어리석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려는" 자발성은 450(이성/논리)으로 측정된다. "용서하고 신에게 내맡기려는 자발성'은 540(완전한 사랑)으로 측정된다.
첫댓글 영적 의도, 의지, 인내, 몰두, 헌신 그리고 enlightenment
잘 이해되지 않는 오리무중속 문장이 많지만 열심히 따라 읽겠습니다.. 오랜 만에 님의 글을 대하니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