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황 진숙
유영한다. 말라비틀어진 몸피로 둥실 떠다닌다. 야윌 대로 야위어 생기와 물기를 찾아볼 수 없다. 향내를 풍기지도 않고 탐스런 살빛으로 시선을 잡아끌지도 않는다. 아무런 기척을 내비치지 않아 빈한하다. 엎치락뒤치락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도 잠시, 고통과 인내의 기록으로 주름졌던 외피가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붉은 옹고집으로 햇살과 바람의 고행을 견뎌냈건만 절절 끓는 물의 노기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일백 도의 열기에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마른 껍질의 가슴을 연다. 생 몸뚱어리 익는 뜨거움을 안고 생애의 전부였을 진액을 쏟아낸다. 쟁여놓은 단물을 남김없이 밀어낸다.
처음부터 메마른 과실로 세상에 나온 건 아니다. 햇살이 연둣빛으로 부서질 무렵, 나뭇가지에서 새 움을 틔운다. 손톱보다 작은 꽃잎으로 하늘바라기 하며 세상과 마주한다. 찾아들어 간질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방싯거린다. 벙글거리며 터트리는 꽃내음에 달큰해진다. 차오르는 꽃빛으로 환해지는 나날이었다. 달무리 아래 사운대는 풀벌레 들여 어둠을 헤아리는 시절이었다.
일장춘몽이라던가. 초록물의 감미로움은 한 철이다. 꽃 진 자리에 열매를 달고 허공을 헤집는 기다림은 고달프다. 한 여름의 불볕에 덴 표피는 벌겋게 달아오르기 일쑤다. 뒤이어 장맛비가 내리치고 흡수한 빗줄기의 팽압으로 껍질이 갈라터진다. 드러나는 속살을 부여잡고 있으려니 현기증에 혼곤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처 입은 과피에 말벌이 달려들면 살점이 갉아 먹히는 처참함은 피할 수 없다. 기어 오른 민달팽이에게 과즙이라도 빨아 먹힐라치면 쓰라림에 온몸이 저려온다. 살갗을 파고드는 것들로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투둑. 여문 가을 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날은 울렁이는 가슴을 붙잡고 일어서야 했다. 생의 무게에 연연하지 않아 가장 눈부신 순간에 낙화하는 목숨도 있거늘. 사뿐히 내려앉는 낙법을 익히지 못해 들어차는 멍이 막막했다. 멍든 속내로도 덮이지 않는 캄캄함이 아득했다. 엎어지고 뒹굴며 홀로 서 보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말라가기 시작한다.
의지가지없이 맨몸에 박히는 바람 한 자밤, 이슬 한 모금, 햇살 한 움큼에 달음박질치는 기운이 수굿해진다. 속결을 위해 넘쳐흐를 정도로 길어 올린 물기가 증발한다. 휘어지게 매달려 있고 싶은 바람으로 둥글게 움켜쥔 무게를 덜어낸다. 가누지 못할 것을 내려놓고 가벼워진다. 가붓해진 몸으로 한 골 한 골 접혀간다. 지닐 것 없는 단출함으로 참선에 든다.
한 잔의 차를 완성시킨 시련이 저리 고울까. 끝내 오그라든 가슴팍으로 물과 불의 담금질을 견뎌내고 진액을 내주는 무심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고통마저 켜켜이 응축시켜 놓은 생이 다갈 빛으로 우러난다. 제 몸의 물기를 말려 소금을 내보내는 바다처럼 온몸으로 농축시킨 과당을 내놓은 대추가 여릿하게 다가온다. 힘겹게 써 내려간 삶의 끝에서 퍼 올린 진액이 울컥 밀려든다. 다디단 맛 속으로 골 깊은 주름을 인 어머니가 흘러들어온다.
한때는 삼색제비꽃마냥 다채로운 빛깔로 생긋한 시절을 보낸 어머니였다. 아들 둘에 막내딸이었으니 티 하나 없는 손으로 십자수를 놓으며 처녀시절을 보냈다. 한 여자에서 아내로 어머니로 이어지는 시간들로 푸른빛은 퇴색되고 생기는 엷어져갔다. 다보록한 수국을 좋아했던 어머니는 꽃이라면 참깨꽃과 감자꽃이 다인, 그늘이라면 탱자나무와 대추나무 그늘이 다인, 뙈기밭과 자갈밭에서 몸 하나로 일군 세월이 칠십 평생이다. 닳고 닳아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게 어디 손뿐이랴.
살과 뼈를 내어준 자식을 품지 못하고 놓쳤을 때는 먹장가슴이 되어 주저앉았을 터이다. 화마에 모든 걸 잃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에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시퍼랬을 것이다. 맨몸으로 부딪쳤을 고통과 벗어날 수 없는 가난으로 달구어진 세월이 곱아진 등과 잘록한 허리에 깊게 새겨져 섧기만 했을 테다. 설움이 덧칠될수록 아리기만 했을 것이다. 부풀고 쪼그라들면서 단맛을 묻어두는 대추처럼 식솔들에게 단물만을 물려주기 위해 버틴 시간이다.
생애의 가장 뜨거웠던 구절로 버거웠을 어머니. 이제는 이고 진 여정을 벗고 나른한 단잠에 드신다. 더는 내어줄게 없는 빈 몸이지만 오래된 풍경속의 장독처럼 우련하다. 검버섯이 돋아나 환해질 날 없는 어머니의 얼굴 위로 남실바람이 스친다. 허공을 흔든 된바람에 여물대로 여문 삶이니 흔들릴 일도 떨어질 일도 없다. 무던히 애쓴 안간힘 다음에 찾아온 안온함이 내 속으로 배어든다.
돋아나는 새순이었다가 열어젖히는 꽃잎이었다가 여물어가는 열매를 거쳐 존재를 산화시킨 차로 거듭나기까지. 속살 헐고 풀어져 차곡차곡 하나가 되는 무아의 깊이에 도달하는 것. 고뇌도 아픔도 좌절도 첩첩히 쌓여 마침내 생의 향기로 남는 것. 등굽잇길에서 풀어내는 존재의 절명시가 그윽하게 번져온다.
사그라지지 않는 진한 여향에 내 가슴을 얹는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