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마지막 주말. 아직 대기도 대지도 뜨겁다.
인류의 삶이야 비슷한 흐름이겠지만 이런 계절에는 더 뜨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뜨거운 여름도 어쩔 수 없이 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뜨거웠던 태양 그렇게 아우성치던 사람들의 흔적이 사라지고
파도 소리 은은한 백사장을 거닐던 일이 기억난다.
바닷가는 인생을 닮았다.
뜨거움, 왕성함, 아우성, 퇴장, 고요, 조용한 물결소리의 패턴. 그렇지 않은가?
바다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의 빈자리를 환기시키며
파도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 없는 해변은 뭔가 내 안에 흐느낌 같은 슬픔을 일깨운다.
그렇게 지나가던 모래사장 구석구석에는 소라껍질 조개껍질 굴 껍질이 뒹굴고
조금 더 나아가니 해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 하나가 나타났다. 사람의 신발 한 짝.
반쯤 모래에 파묻혀버린, 이름 모를 주인이 집어넣었을 신발의 발 없는 빈 공간이 처연했다.
한 짝은 이미 어느 쓰레기장에 던져졌을 것이며
그 한 짝은 다른 한 짝과 헤어져 그렇게 혼자 모래밭에 남아 낮과 밤을 지나며 낡아간 것이다.
비와 눈을 맞았을 것이다. 야유회를 나온 게들이 장난삼아 거기를 들락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은 빛바랜 퇴물의 신세가 된 것이다.
다시 인간의 발을 넣는 일은 없을 것이며, 인간의 신발장에 진열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 장미가 피어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새들이 내려와 앉아 노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즉 끝이다. 그래도 없어지는 날까지 햇볕이 들고 바람도 들어가고 그 위에 하늘이 깃들고
가끔 씩 광대한 바다 저 위 창공에 펼쳐지는 무지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사장과 신발 한 짝. 이것은 창조세계와 타락한 인간의 관계처럼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여름이 가듯 인생은 가고, 인간들이 앓고 있는 인간의 역사도 지나갈 것이다.
광야의 조그만 돌멩이처럼 광대한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은 별 볼일이 없다.
동성애 문제로 세상이나 교계는 시끄럽고 인간의 더러운 욕심으로 죄악을 합리화시키는 작업들이 즐비하다.
이렇게 인간세계는 각종 이슈와 의제로 왁자지껄하지만 그것이 이 우주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사람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백사장에 처박힌 신발 한 짝이라곤 생각지 않으리라.
사람은 자신들이 하늘의 별이라고 우쭐대지만 백사장에 뒹구는 껍질들이라는 생각에는 못 미치리라.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지구 해변을 오염시키는 자 누구인가? 사람 아닌가.
인간 역사의 길목에 끝도 없이 피를 뿌린 자가 누구인가. 가인부터 시작해서 현대전쟁에 이르기까지 사람 아닌가?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그래도 자기들이 우주의 중심이나 하늘의 별이라고 주장할 셈인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롬3:10)"
이 말씀의 엄중함이 무엇인지 이해하는가?
그 이상이 아니다. 사실 이 우주 무대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요,
세상이 폭풍에 휩쓸려 끝났을 때 우주의 백사장을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일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백사장에 파묻힌 신발짝처럼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의 태도를 취하라.
우리가 버려진 한 짝 신발의 운명을 벗어나려면 우리의 주인이 누구며 우리는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
이 주인 이 목적을 상실한 자는 빈 해변처럼 비어버리게 된다는 것,
그 공허 그 슬픔은 그 무엇으로도 복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품는 순간
그는 백사장에 처박힌 신발에서 벗어나 그분의 눈길이 머무는 해변의 진주가 된다는 사실을
두고 두고 생각하라.
2024. 8. 24
이 호 혁
첫댓글 겸손히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