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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5월7일(금)맑음
둘이 아닌 것에서 하나A와 다른 하나~A가 나온다. 하나A와 다른 하나~A는 서로 위치만 다를
뿐 동일하다. 둘-아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A와 다른 하나~A와의 관계가 둘-아님이라
는 말이다. 둘-아님이라고 해도 하나A와 다른 하나~A가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A가 곧
다른 하나~A이며, 하나A 가운데 다른 하나~A가 들어가도 걸림이 없다. 하나A와 다른 하나~A
는 경계가 없다. 하나A와 다른 하나~A는 둘-아님의 활발하고 자유로운 운동이다. 그 운동은
생생하여 만물을 살린다. 본래-없음(허공)이 둘-아님(진동)으로 운동하여 둘-있음(빛)이 된다.
빛이 퍼지면 시공간이 나타난다.
함안 무진정과 입곡 군립공원 호수를 산책하다.
春塘春水盡無盡, 춘당춘수진무진
萬古王孫歸不歸; 만고왕손귀불귀
阿羅伽耶五公主, 아라가야오공주
不忘本誓會不離. 불망본서회불리
봄 못에 봄 물은 다할 듯 다하지 않으나
만고에 왕손은 가서 돌아오지 않으나
아라가야의 다섯 공주는
본래의 서원 잊지 않기에 만나서 헤어지지 않으리
2021년5월8일(토)맑음
어제 오후에 지월거사 오다. 아침 먹고 함안 군립공원 무진정 둘러보고 입곡 호수 포행하다.
거사가 감흥을 읊은 시를 가필해주다.
木隣木成林, 목린목성림
水連水爲江; 수련수위강
小心感浩氣, 소심감호기
欲飛鳥出甁. 욕비조출병
나무와 나무가 이웃하여 숲을 이루고
물과 물이 이어져 강을 만드네,
소심한 마음에 호연지기 느끼니
병 속에 갇힌 새를 날리고져 하노라
나도 무진정 풍광 한 수 읊다.
山映倒淵碧一色, 산영도연벽일색
風輕飜葉燦綠光; 풍경번엽찬록광
落花柳絮增長春, 낙화유서증장춘
無盡亭中無盡情. 무진정중무진정
산 그림자 연못에 거꾸로 비쳐
한결같이 푸르고
바람 살랑 불어 잎을 흔들매
반짝이는 연록 빛이라
낙화와 버들개지가 봄을 더하니
무진정 가운데 무한한 정이여!
2021년5월9일(일)맑음
일진선사 선 강의 오후4:20~5:50 길상사
참석자: 원담, 민재거사
1. 주관과 객관의 거리
일진선사: 주관과 객관의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라는 어느 스님의 질문에 느닷없이 답이 튀어나갔습니다. “무한창공에 밝은 달입니다.” “원담스님, 알아듣겠습니까? 이렇게 말한 낙처를 아시겠습니까?”
원담: 저 같으면 “주관이 곧 객관이요, 객관이 곧 주관이라, 거리가 없습니다.”라고 하겠습니다.
일진선사: 그렇게 설명조로 이야기하면 교학적인 냄새가 풍겨요. 무한 창공이란 객관환경이요, 밝은 달이란 주관입니다. ‘무한 창공’이니 객관은 걸림 없는 경계요, ‘밝은 달’이니 주관은 활발발한 작용입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입니다”라 해도 됩니다. 부처님 손바닥은 객관을 상징한 말이요, 손오공은 주관을 상징한 말입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 그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2.
<의상조사 법성게>의 미진함을 지적함:
*法性圓融無二想, 諸法不動本來寂;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법의 본성은 한데 통하여 두 모습이 없고, 모든 법은 흔들리지 아니하니 본래로 고요하다.
이 구절에서 無二想이 껄끄럽다. 나, 일진은 本無相이라 하고 싶다. 그러면 ‘法性圓融本無相법성원융본무상-법의 자성은 한데 통하여 본래로 상이 없다’가 된다. 그 뒤에 따라오는 구절;
*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이름도 붙일 수 없고 형상도 없어 온갖 것 끊겼으니, 깨달음의 지혜로만 알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이 구절에 대하여 어떤 거사가 어느 선사에게 따져 묻기를 “어떤 것이 證知증지이며 어떤 것이 非餘境비여경입니까?” 선사가 답하기를 정법을 깨달아야 알 수 있습니다. 거사가 되묻되 “어떤 것이 정법입니까?” 선사가 답하되 “그건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사가 되받아치되 “스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사는 당황하여 묵묵부답이었다.
3.
<婆子燒庵파자소암>에 대하여:
①고래로 이 화두에 대하여 이견이 분분하다. 다루기 까다로운 공안이라 천하의 선사들도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 인연 이야기는 이렇다. 어떤 노 보살이 한 스님을 지극히 받들어서 공양합니다. 그 스님도 점잖고 빈틈없는 수행자이었기에 20년을 두고 하루 같이 섬겼습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암자에 모시고 보살폈는데, 보살은 열여섯 살 난 자기 딸을 시켜 스님에게 공양을 가져다드리게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딸에게 말합니다.
“오늘 공양을 가져다드린 뒤 스님을 끌어안고서 이렇게 물어보거라. ‘스님 이런 때 어떻습니까?’” 평범한 보살이 아니고 지견이 있는 보살입니다. 딸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스님을 껴안으며 묻자, 스님이 대답합니다.
“마른나무가 차디찬 바위에 기대니 한겨울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枯木依寒巖, 三冬無暖氣 고목의한암, 삼동무난기).”
예쁜 여자가 자기 품에 안기는데도 차디찬 바위처럼, 고목처럼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경지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화를 냅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20년 동안 겨우 속한(俗漢)을 공양했더란 말이냐.”
속한이라는 것은 속물, 사이비 중입니다. 보살은 당장 그 스님을 암자에서 쫓아냅니다. 그리고 암자를 불태워 버립니다.
②여기에 대하여 법정스님은 <일기일회>라는 수필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0년 동안 제대로 수행을 했다면 마른 나무가 되어서도 안 되고 차디찬 바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20년 동안 수행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와 도덕의 차이가 있습니다. 종교와 도덕은 다 같이 선을 추구하면서도, 종교는 상식의 틀에서 벗어납니다. 극복하고 뛰어넘습니다. 그것이 종교의 세계입니다. 도덕은 인간의 윤리를 그대로 짊어집니다.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남의 여인을 끌어안아서는 안 됩니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행자가 여인을 차디찬 바위와 고목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아닙니다. 그래서 보살이 그 스님에게 속았다며 당장 내쫓아 버리고 암자를 불태운 것입니다. 이 일화는 선의 역사에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는 화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주 밥이란 이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스무 해 동안 수행했다는 사람이 겨우 마른 나무와 차디찬 바위를 닮아선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각자 생각해보십시오. 보살님들은 남자에게서 시봉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럴 때 나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저 같으면 그 딸의 등을 토닥토닥 다독거려 주면서 이렇게 칭찬하겠습니다.
“그래, 20년 동안 나를 위해서 참 수고 많이 했다.”
③일진선사의 평: ‘파자소암-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라는 화두는 역대조사도 함부로 입을 대지 못한 난제입니다. 이야기 줄거리에 생각이 얽혀들면 곧바로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노파가 보낸 여인을 밀쳐버려도 안 되고 껴안고 있어도 안 되니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생각을 굴려서 답을 찾으려 든다면 이미 함정에 떨어져 헤어나오기 어렵습니다. 공안이란 말길과 생각을 끊는 교묘한 방편이라, 함정을 만들어 놓고 학자를 밀어 던져 어떻게 살아나오는지 보고자 함입니다. 꼼짝달싹 못 하는 난관을 한 방에 훅 날려버리는 말 없는 말을 한마디 척! 해야 눈 밝은 수좌라 할 것입니다. 꼭 입을 벌려 말로 할 것도 없습니다.
“노파에게 스님이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했다고 전해라.”
④황산곡(黃庭堅, 1045~1105, 호: 山谷)이 이 공안에 대해 붙인 송이 있다. <선문보장록>에 나온다.
海風吹落楞伽山, 해풍취락능가산
四海禪流着眼看; 사해선류착안간
一把柳條收不得, 일파유조수부득
和風搭在玉欄干. 화풍탑재옥란간
바닷바람 능가산에 불어오니,
사해의 선객이여, 눈을 뜨고 바라보라
한 줌 버들가지 손에 쥐기 어려운데,
살랑살랑 봄바람이 옥난간에 걸어놓네
황산곡의 詩 중 세 번째, 네 번째 구절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은 인구에 회자되는 천고의 명문이다. 黃山谷의 공부 깊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제방의 선지식이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이론이 분분하기도 하거니와, 해석이 신통찮다. 일진은 이렇게 해석한다.
“한 줌 버들가지 잡으려 해도 잡기 어려워
살랑살랑 봄바람이 옥난간에 걸려있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두 곳이 있다. 첫째 왜 버들가지를 잡을 수 없다 하는가? 收不得의 목적어는 柳條버들가지다. 가늘고 부드러운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버들가지를 손으로 잡았다 하면 벌써 손안에 쥐어진 한 묶음의 박제된 물건이 되고 만다. 생생한 생명을 죽여 버린 것이다. 봄바람은 본성(자성)을 상징한다. 봄바람은 잡을 수 없다. 잡으려 하면 잡을 수 없고, 찾으려 하면 찾을 수 없다. 찾지 않으면 지금 이대로 생생하다. 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 그러나 지금 이렇게 분명하여 활발발 생생한 것,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둘째 ‘搭在탑재-걸다, 매달다’를 해석하는 문제이다. 봄바람을 옥난간에 걸어둔다고 번역한다면 이는 살아 움직이는 봄바람을 붙잡아 마른 명태 마냥 옥난간에 묶어 걸어두는 꼴이 된다. 그래서 나, 일진은 ‘살랑살랑 봄바람이 옥난간에 걸려있네’라 번역한다.
⑤원담 덧붙임: 봄바람에 대한 영시가 있어요.
영국의 여류시인 로세티(Christina Georgina Rossetti, 1830~1894)의 <Who has seen the wind> 바람을 본 사람 있나요?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I nor you:
But when the leaves hang trembling,
The wind is passing through.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나도 당신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뭇잎 살랑거릴 때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you nor I:
But when the trees bow down their heads,
The wind is passing by.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당신도 나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무들 고개 숙일 때
그 곁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감상: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잎과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바람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體(본성, 空)는 보이지 않으니 用(작용, 色)을 통하여 體가 드러난다. 그래서 卽體卽用즉체즉용이다.
⑥<파자소암>에 대한 잇큐소준(一休宗純, 1394~1481)의 게송(출처: 광운집(狂雲集))
老婆心爲賊過梯, 노파심위적과제
淸淨沙門與女妻; 청정사문여여처
今夜美人若約我, 금야미인약약아
枯楊春老更生稊. 고양춘로갱생제
노파심에서 도적에게 사다리를 건네주고
청정한 스님에게 젊은 여자 주었구나
오늘 밤 미인이 내 품에 안긴다면
마른 버드나무에 새움이 돋아나리
*일진선사 감상: 나는 파자소암에 대한 게송으로 잇큐선사의 것을 최상으로 칩니다. 내 집안의 물건을 도둑질해 간 놈이 담을 넘어가다가 다칠세라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노파의 자비심이 아닌가? 도둑에게 사다리 놓아주듯 청정한 스님에게 처녀를 주었으니, 스님은 어찌해야겠는가? 잇큐선사는 눈먼 퇴물기생을 연인으로 삼아 함께 살았다. 모든 틀에서 벗어나 임운등등하였던 것이다. 고목에 개화로구나! 잇큐선사는 게송처럼 그렇게 살다 갔다.
5. 임제의 사료간에 대한 대혜의 주석
극부도자(克符道者)라는 사람이 임제선사에게 물었다.
①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如何是奪人不奪境]
임제가 말했다.
“봄볕이 왕성함에 땅을 뒤덮은 비단 같고, 어린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하얀 실타래 같구나.”
煦日發生鋪地錦 후일발생포지금, 嬰孩垂髮白如絲 영해수발백여사.
(대혜가 말한다. 여러분은 알겠는가? 봄볕이 왕성함에 땅을 뒤덮은 비단 같다는 것은 경계이고, 어린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하얀 실타래 같다는 것은 사람이다. 이 한 마디는 경계를 그냥 둔 것이고, 한 마디는 사람을 빼앗은 것이다)
②어떤 것이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如何是奪境不奪人]
“왕의 명령은 이미 천하에 두루 시행되었고, 장군은 국경 밖에서 전쟁을 멈추었도다.”
王令已行天下徧 왕령이행천하변, 將軍塞外絶煙塵 장군새외절연진.
(대혜가 말한다. 왕의 명령이 이미 천하에 두루 시행되었다는 것은 경계를 모조리 빼앗은 것이고, 장군이 국경 밖에서 전쟁을 멈추었다는 것은 사람은 놓아두고서 빼앗지 않은 것이다)
③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입니까? [如何是人境兩俱奪]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을 끊고, 각기 따로 독립하여 있도다.”
幷汾絶信 병분절신, 獨處一方 독처일방.
(대혜가 말한다. 바로 여기에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태도가 있다)
④무엇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如何是人境俱不奪]
“제왕은 보배 궁전에 오르고, 시골 노인은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王登寶殿 왕등보전, 野老謳歌 야로구가.
(대혜가 말했다. 알겠느냐? 법은 법의 자리에 머물러 있고, 세간의 모습도 늘 변함없이 머물러 있다.
是法住法位 시법주법위, 世間相常住 세간상상주)
이것이 극부도자라는 분이 임제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공안(公案)인데, 이것을 사료간(四料揀)이라고 일컫는다. 나, 일진은 임제선사의 삼현, 삼요, 사료간, 사조용과 같은 法數법문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간명직절한 선의 맛이 나지 않고 번쇄한 교학적 냄새를 풍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의 선학자들은 임제록의 이런 점에 착안하여 서양철학적 방법으로 선을 학문화한 禪學을 발전시켰다. 그 영향은 긍정적이지만 부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그런데 대혜종고 스님도 이런 풍조를 경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오조법연(五祖法演)스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이렇게 알면, 곧 옳지 않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옳다.”
나의 이 禪은 여러분이 듣는 것은 허락하지만 許你衆人聞, 여러분이 이해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不許你衆人會. 위와 같이 풀어서 주석한 이 사료간(四料揀)을 여러분들은 다 같이 듣고서 다 같이 이해하였지만, 임제 스님의 뜻이 과연 이와 같을까? 만약 단지 이와 같다면, 임제 스님의 종지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르렀겠는가?
여러분은 내가 말한 귀결점을 듣고서, 단지 이와 같구나 하고 오해하지만, 내가 진실로 그대들에게 말한다. 내가 했던 이 말은 가장 나쁜 말 第一等惡口이다. 만약 내가 했던 말에서 기역자 뒷다리라도 기억한다면 若記著一箇元字脚, 이것은 곧 살고 죽는 뿌리가 될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곳저곳에서 배운 것이 현(玄)한 가운데 더욱 현(玄)하고 묘(妙)한 가운데 더욱 묘(妙)한 것이라면, 이 무슨 더러운 똥같은 禪인가,是甚麽屎禪? 한결같이 가죽 포대기 속에 막혀서 이러한 일이 진실로 있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여러 스님이여! 그대들이 진실로 나 묘희(妙喜; 대혜종고의 호)의 禪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이곳저곳에서 배운 것들을 싹 쓸어서 저쪽으로 내버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함 없이百不知, 百不會, 마음을 비워 버려야虛卻心來, 비로소 그대들과 함께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共你理會.
*제가 구산선사를 시봉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일본에서 유명한 다도협회 총재 되는 분이 송광사를 참배 와서 구산스님을 위하여 차를 다려서 내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구산스님이 묻되 “다도에 정진하신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60년 됩니다.” 그러자 스님이 종이 위에 글을 써서 다도의 대가에게 보여주었다. “欲知茶味, 除念虛心.” 차의 맛을 알고자 하면, 망념을 제하고 마음을 비우라. 이 글귀를 본 다도 대가는 대경실색을 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무문관>
제43칙 수산죽비
[고칙]
首山省念 스님이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는 말했다. “여러분이 만약 이것을 죽비라고 부른다면 법에 저촉될 것이요,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리에 위배될 것이다. 여러분은 말 해보라.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일진: 이른바 背觸배촉의 모순이다. 함정이다. 여기에 걸리지 않고 한마디 일러야 한다.
[무문의 송]
죽비를 들어서 죽이고 살리는 명령을 행하는데, 拈起竹篦, 行殺活令,
위배와 저촉이 오락가락하니 背觸交馳
부처와 조사도 목숨을 비는구나! 佛祖乞命
[군소리]
죽비라 해서도 안 되고
죽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럼 무엇이라 해야 되는가?
딱!(죽비로 때림)
제44칙 파초의 주장자
[고칙]
芭蕉慧淸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에게 주장자가 있으면 주장자를 줄 것이고,
그대에게 주장자가 없으면 그대에게서 주장자를 뺏으리라.
[무문의 말]
다리 끊어진 물을 이것에 의지하여 건너,
달도 없는 캄캄한 마을로 이것과 함께 돌아온다.
만약 이것을 주장자라고 부른다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들어가리라.
扶過斷橋水, 伴歸無月村; 若換作柱杖, 入地獄如箭.
[무문의 송]
여러 곳 공부인들의 깊고 얕음이 모두 손아귀 속에 들어있으니,
하늘을 받치고 땅을 지탱하면서 가는 곳마다 宗風을 떨치네!
[군소리]
옷 입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헐벗은 사람에게서 옷을 벗겨라.
파초는 잘 속였다고 좋아했겠지만
비웃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 하리.
*일진선사 평: 참 말 잘했다. 파초선사가 주장자를 들지 않고 그렇게 말했을 때 나 같으면 “스님, 주장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리라. 만일 주장자를 들고 그런 말씀을 했다면 주장자를 딱 잡고 밀치면서 “스님, 이것이 어디서 온 무슨 물건입니까?”
*원담 덧붙임: 예전 운문암 선원에서 공부할 때 이런 말이 회자 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본래부터 있던 것은 더 보태줄 수 없고, 본래부터 없던 것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일진선사의 평: 무게가 좀 나가는 말이네.
제47칙 도솔의 세 관문(兜率三關)
도솔종열(兜率從悅, 1044~1091) 선사가 도를 배우는 이에게 세 가지 통과해야 할 법문을 물었다. 이런 종류의 관문이 선종에 유행하여 운문삼관, 황룡삼관, 미륵삼관 등이 나왔다. 이 같은 방편 법문은 깨달은 사람이 학인을 다룰 수 있는 機權기권(임기응변, 살활자재, 종탈자재하는 禪智)을 열어주게 함이다.
①撥草參玄 只圖見性 卽今上人 性在甚處?
발초참현 지도견성 즉금상인 성재심처
번뇌의 풀을 헤치고 깊은 이치를 참구하는 것은 다만 견성(見性)하기 위한 것이니
지금 그대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일진선사: 본성 아닌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 묻는 건 용납지 않겠다. 再犯不容재범불용
②識得自性 方脫生死 眼光落時 作麽生脫?
식득자성 방탈생사 안광낙시 작마생탈
자성(自性)을 알았다면 곧 나고 죽음에서 해탈했을 것이니 눈빛이 떨어질 때
어떻게 해탈하려는가?
*일진선사: 죽음 또한 자기의 망녕된 생각인 줄 알면 생사에서 해탈하니 마니 물을 필요 없겠지.
③脫得生死 便知去處 四大分離 向甚處去?
탈득생사 변지거처 사대분리 향심처거
나고 죽음에서 해탈했다면 가는 곳을 알 것이니, 지수화풍이 각기 흩어지면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가?
*일진선사: 오고 감이 사라진 곳에 생사네, 해탈이네 하는 말 모두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
가고 옴이 없는 데 산자는 무엇이며 죽는 자는 무엇인고?
*원담 덧붙임: 해안선사(海眼, 1901~1974)의 임종게에 “生死於是, 是無生死”,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으나, 여기에는 본래로 삶과 죽음이 없다고 하였다.
*일진선사:
①말이 나온 김에 말을 덧붙인다면 해안선사가 평소에 하시던 법문이 있어요. 한 도둑이 부자로 소문난 대가 집을 털려고 겹겹의 담을 넘고 문을 따고 광에 들어가 보물이 숨겨진 뒤주의 자물통을 따고 열어보니 아뿔사, 뒤주가 텅 비었네! 천신만고 끝에 허탕 친 도둑의 심경이 바로 깨달은 소식과 같습니다. ‘깨달음’ 하면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고 덤벼들어 한바탕 애써서 깨닫고 보면 본래로 텅 비어 아무 일도 없어 허허로운 일상, 지금 여기 이대로 돌아옵니다.
②조주선사가 無!라 했을 때 그대로 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걸 ‘어째서 無라 했는고?’ 라든지, ‘어째서 ’없다!’ 했는고?’라고 의심을 지어서 공부해가야 한다고 여기면 조주선사의 뜻과 어긋납니다. 마찬가지로 ‘이뭣고?’가 그대로 답이지 그것을 의심하고 의심해가서 화두일념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건 생각으로 조작하는 공부이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무문의 송]
한순간에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루 보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일이 바로 지금이다.
지금 이 한순간을 확실히 파악하면,
지금 파악하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다.
一念普觀無量劫,
無量劫事卽如今;
如今覰破箇一念,
覰破如今覰底人.
*覰破처파: 확실히 파악하다, 엿보아 정체를 파악하다.
*‘사람을 파악한다’ 에 대한 김태완의 덧말: 사람이라니 무슨 헛소리인가?
[군소리]
본성은 어디에 있나? 오늘은 춥구나.
죽음을 어떻게 벗어나나? 오늘은 춥구나.
<식당에서 원담 설>
①정치란 最善을 달성하기 위해 次善을 도모하며, 最惡을 피하기 위해 次惡을 선택하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정치란 차선과 차악이 대화하고 협상하여 이뤄내는 의사결정과정입니다. 무엇이 효과적인 의사결정입니까? 역사를 통틀어 살펴보면 공동선을 지향하는 진보세력이 선두에 서서 사회를 이끌고, 사회의 질서와 안정에 방점을 두는 보수세력이 후방을 지킵니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는 두 발과 같아 왼발과 오른발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수인들은 피해의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보다 더 약한 약자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면서 분노를 배설하려 합니다. 그들은 다 함께 악해지고 다 함께 망하자는 쪽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지요. 이때 깨어있는 시민은 소수인들의 심리와 처지를 이해하여 정치적으로 최선을 지향하기는 하되 기대수준을 낮추어 차선으로 만족하면서 최악이 벌어지기 전에 차악을 포용하면서 점진적 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보시와 지계, 인욕과 정진, 선정과 지혜, 보리심의 실천을 요구하는 작업이죠.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인 시민이 해야 할 일은 육바라밀입니다. 그렇기에 민주시민이 된다는 것은 결국 보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②악한 일을 하자고 모이라 하면 잘 모이지만, 착한 일을 하려고 뭉치자고 하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인간이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악한 일 하기는 쉽고 선한 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요? 엔트로피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엔트로피 entropy란 원래 열역학에서 쓰였던 개념인데 인간의 사회적 행동, 특히 집단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합니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무질서의 정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일정한 온도를 띤 한 병의 고압 가스통을 열어놓으면 가스가 빠져나와 점차로 흩어져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질서가 잡힌 상태는 해체되어 무질서의 정도가 높아진 상태로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인간집단이 악을 행한다는 것은 사회의 무질서도(the degree of freedom 자유도)가 증가하는 방향이기에 자연스레 놓아두면 자발적으로 그쪽으로 치달립니다. 집단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은 무질서도가 감소하여 질서도(the degree of order)가 높은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촛불 혁명이 이뤄지기 위해서 100만 시민이 몇 달 동안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질서를 지키면서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를 구현하려는 집단의지를 행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촛불 혁명이란 정치적 사건이 완수되려면 얼마나 많은 변수가 필요한지 생각해보십시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을 지경입니다. 일본 같은 집단주의적인 경향의 국가에서는 시민의 정치적 운동이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습니다. 북한이나 중국, 러시아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더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적 질서를 만들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동하여 성공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미국에서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현상이 일어나면 삽시간에 미국 전역 곳곳에서 무작위적으로 유색인 증오범죄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갑니다. 흡사 끓는 기름 솥에 뜨거운 물을 한 국자 붓는 것처럼 더 치성하게 됩니다. 집단적으로 악을 행하기는 그렇게 쉽습니다. 인간의 집단적 행동은 무질서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국지전과 테러는 세계적으로 어디에나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 무질서도를 낮추고 질서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집단적 폭력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빈부격차, 계급갈등, 지역갈등, 민족갈등, 종교갈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행정적 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둘째, 집단의 폭력성을 순화하려면 집단지성을 공유하는 언론과 교육, 연예, 스포츠활동을 장려해야 합니다.
셋째, 인간 심성의 정화를 위해서 예술, 문학, 철학 등 인문-소양적 교양 활동을 증장 하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의식의 성장을 위해 종교적 활동, 명상, 심신수양을 해야 합니다.
넷째, 영적인 각성을 일깨우는 명상이 사회적으로 보급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적 명상, 특히 선불교의 역할이 기대됩니다. 한 사람의 영적인 각성은 인류의 집단지성이란 큰물에 청정한 샘물 한 방울을 보태는 것과 같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이 큰물로 떨어져서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인류의 집단의식은 전면적으로 혁명적인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無我大我, 出家大家. 나-없음으로 전체가 나입니다. 집을 나옴으로써 전체가 자기 집이 됩니다. 모든 존재를 우주적 생명 가족으로 대하여 공존공생하면서 眞善美聖을 구현하면 무한시공을 유희하는 우주적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