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수필】
『한국문학시대』 2022년 12월 겨울호 / 수필
누가 지팡이를 놓고 갔을까?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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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누가 지팡이를 놓고 갔을까?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부모님 산소 앞에서 낯선 지팡이를 발견했다. 누가 놓고 간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폰카로 지팡이 사진을 찍어 누님께 보내드렸다. 집안의 대소사나 오래된 과거사까지 총기 좋게 기억해 내시는 팔순 누님이다. 누님은 이렇게 추정했다.
▲ 삽화 출처 / 금강일보 <윤승원 칼럼> 「작지만 소중한 가치...」)
“아마도 큰 올케가 다녀가셨을 거야.” 하지만 큰 형수님 올해 연세가 94세다. 연로하여 거동이 힘드신 분이 부모님 산소를 다녀가시다니, 어떻게 가능하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누님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사위가 가까이 살고 있으니, 모시고 갔을 거야. 노인이 산에 오르실 때는 지팡이를 짚고 오르셨지만 내려가실 때는 혼자서는 어려웠을 거야. 가시덤불 우거진 비탈길이니 사위 등에 업혀 내려가시다가 지팡이를 깜박 두고 가신 것이 아닐까?”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에 부합하는 추정이어서 저절로 수긍이 갔다. 큰 형수님은 장형이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 제사도 제대로 모시지 못해 늘 죄송하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께 용서를 빌기 위해 지난해에는 사위와 함께 성묘하셨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누님의 상상력처럼 큰 형수님이 다녀가신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어 장조카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팡이 사진도 함께 보내면서 ‘혹시 큰형수님이 놓고 가신 것이냐?’고 물었다. 장조카는 아니라고 했다. 누구의 지팡이인지 모른다고 했다. 조카는 그러면서 지팡이 용도에 관해 말했다.
▲ 노인용 지팡이
“산에 오를 때 거미줄 제거용이나 멧돼지 호신용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장조카의 실용적인 지팡이 쓰임새를 듣고 보니, 산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지팡이 용도보다 ‘누가 지팡이를 짚고 내 부모님 산소에 다녀갔느냐’에 있었다.
이곳은 지형상 가파른 곳이라 등산길도 아니다. 설령 등산객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하더라도 지팡이 형태로 보아 접이식 등산용 지팡이가 아니다. 다리 힘 보조 역할을 해주는 노인용 지팡이가 틀림없었다. 다시 조카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팡이 임자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왔어. 아무튼, 이번 추석 성묫길에는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군. 올여름 청양 지역 큰 홍수로 조상님 잠드신 산소는 무사한지, 큰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산소는 무사하고, 멧돼지 피해도 적은 것 같아 안도하네. 그나저나 지팡이 임자가 누구 것인지 수수께끼가 영 풀리질 않네.”
연로하신 분들은 평지에서도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거동이 어렵다. 더구나 노인이 산에 오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단단히 벼르고 별러 큰마음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누군지 모르지만, 부모님과 깊은 연관이 있거나 남다른 인연을 맺고 살아오신 분이 아닐까?
동행했던 아들이 말했다. 언론사 기자 출신답게 다각도로 추정하면서 흥미로운 호기심을 보였다. “정말 미스터리 한 지팡이네요.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백발노인 지팡이처럼 신령스럽기도 하고요. 산소에는 CCTV도 없으니, 누구 것인지 더욱 궁금해지네요. 그렇다고 지문을 채취하여 유전자 감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아버지 돌아가신 지 47년, 어머니 돌아가신 지 33년 세월이 흘렀다. 가족 외에는 누구도 내 부모님 산소를 찾아 성묘할 분이 없는데, 어느 분이 다녀간 것일까? 부모님 생시에 어떤 깊은 인연을 맺은 분이기에 잊지 못하고 찾아뵌 것일까? 누님도 궁금증이 안 풀렸는지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내 초등학교 동창생이 선산 주변에 살 거든. 치매를 앓는다고 들었어. 혹시 그 노인이 우리 산을 헤매다가 지팡이를 놓고 간 것은 아닐까?”
온갖 추정을 다 해보다가 급기야 누님은 선산 아랫마을 기억장애를 앓고 있는 동창생까지 떠올렸다. 이 또한 그럴듯한 추리력이지만 가능성은 0.1%도 없다고 말씀드렸다. 왜 아니 그런가. 산세가 가파르고 숲이 우거져 팔순 노인이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누님과 나는 마치 미궁에 빠진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형사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끝내 확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했다.
서양 동화에는 곧잘 ‘요술 지팡이’가 등장한다. ‘마법의 지팡이’다. 모두가 신묘한 힘을 가진 지팡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 요술 지팡이는 아니더라도 내 부모님 산소에서 발견한 ‘낯선 지팡이’는 잠자고 있던 이런저런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마법을 지녔다.
문득, 큰 매형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 인연이 단절된 채 살아가는 매형이다.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른다. 내 큰 누님은 30대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누님의 금쪽같은 다섯 살 아들마저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미가 데려간 것’이라고 했다. 매형에게 잇달아 찾아온 불행은 곧 우리 집안의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딸자식과 어린 외손자를 잇달아 잃고 통곡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우리 형제들은 가슴으로 슬픔을 삼켜야 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을 잃은 매형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하지만 매형은 곧바로 재혼했고, 이역만리 독일 광부로 떠났다. 우리 집안과는 그렇게 인연이 끊겼다.
누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던 날, 아버지 얼굴에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자식들 앞에서 근엄하기만 하셨던 아버지가 그렇게 섧게 우시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버지는 “돈이 무엇이길래 사람이 죽어가는데 병원 문턱에도 데려가지 않았다”라면서 통곡했다. 사람의 목숨이 중하지, 돈이 중하냐면서 사돈댁을 원망하는 목소리였다.
불쌍한 내 누님의 넋은 누가 달래 주었나. 제사는 제대로 모시고 있을까? 잇단 비극을 뒤로하고 홀연히 서독 광부로 떠난 매형이 원망스러웠다. 그 후 매형의 가정 형편은 넉넉해졌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내 누님의 가난한 영혼은 편히 잠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았다.
그렇다면 혹시 매형이 내 부모님 산소에 다녀간 것은 아닐까? 억장 무너지는 큰 슬픔을 안고 한평생 남모르는 가슴앓이로 살아온 한 많은 내 부모님. 매형이 재혼했다고 해서 잊고 살았을까, 돈을 많이 벌어 잘살게 됐다고 해서 잊고 살았을까.
매형도 생존해 있다면 구순(九旬) 노인이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연로한 매형이 ‘지팡이 짚고’ 내 부모님 산소에 ‘용서’를 빌러 온 것일까?
부모님 생시에 우리 집안에서 누님의 비극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은 금기어(禁忌語)였다. 아버지의 엄명이었다. 누구도 아픈 상처를 더는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버지의 명’이었다. 지금 나는 그런 아버지의 엄명을 어기고 있다.
세월이 가도 좀처럼 아물지 않은 상처. 60년 세월 묻어 두었던 아픔의 가족사까지 더듬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매형과 인연을 끊고 ‘망각의 세월’을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아는가. 세상일이란 상상을 뛰어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을 바꿨다. 오늘의 수수께끼는 일단 여기서 덮어두기로 하자. 다음 성묘 때 부모님께 직접 여쭤보기로 하자. ‘영혼은 영생(永生)’이니, 저 높은 곳에서 부모님은 누가 다녀갔는지 다 알고 계시리라. ‘지팡이 임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분께 꼭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
※ 참고 / 본문 삽화 관련 일간지 칼럼(윤승원의 세상풍정) :
■ 충청권 일간지 금강일보 / 윤승원 칼럼 / 바로가기
작지만 소중한 가치는 가정에서 찾는다 < 세상풍정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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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날 한국의 전통적 가정윤리는 많이 해체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전근대적 산업구조에서 근대적 산업구조로 변화함에 따라 일어난 역사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슴속에는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을만큼
아름다운 전통의 뿌리가 배어 있고 거기서 인간의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선생님의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전통적 가정적 혈연적 맥락에서 연원하는
아름답고 끈끈한 가족윤리와 가치관과 그 속에 배어있는 인간다움과 행복감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미가 흐르는 아름다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분당에서 청계산)
지난 추석 때 자식, 손자와 함께 선산에 성묘하면서 그 어느 해보다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 산소가 홍수와 멧돼지로 인하여 훼손될 것을 걱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름철 홍수 등 자연재해도 무섭지만, 멧돼지 떼가 유난히 극성을 부려
장조카는 조상님 산소마다 망을 씌워 놓았습니다. 매년 멧돼지와의 전쟁입니다.
둘째는 부모님 산소에서 <낯선 지팡이>를 발견하고 어느 분이 다녀갔는지 헤아려 보는
일이었습니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다가 <슬픈 가족사>까지 더듬게 됐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젊은 나이에 불행하게 돌아가신 누님 생각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젊은 자식을 잃고 한평생 가슴앓이로 살아오신 부모님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 흘렸습니다.
이 글은 눈물로 쓴 글입니다.
존경하는 지교헌 교수님께서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승원 드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둘째 누님에게도 이 글을 보내 드렸더니,
유년시절 저를 유난히 예뻐해 주셨던 큰 누님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함께 눈물 흘렸습니다. 누님이 수화기를 통해 흐느끼면
동생은 보이지 않는 눈물을 더 많이 흘립니다.
슬픈 가족사를 언급하여 마음 무겁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누님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드러내는 모습인 동시에 남매의 아름다운 정이 교류하는
지고지순한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누님이 있고 동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청계산)
누님과 함께 울다가도 통화를 끝낼 때는
서로 위로하며 웃어 보이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고보니 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누님이 계셔서 함께 울 수도 있으니
이것이 진정한 행복인가 봅니다.
누님도 늘 동생이 있어 행복하다고,
동생과 속 터놓고 얘기 나눌 수 있어
정말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씀하시지요.
동생으로서도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위안합니다.
이 시대 큰 어르신인 지 교수님으로부터
동기간의 정과 다름없는 따뜻한 위로를
받으니 졸고를 세상에 소개한 보람을
느낍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ㅡㅡㅡ 윤승원 올림
저의 둘째누님은 현재 92세이신데 아주 자상하시고, 어려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자랐습니다. 요즘 전화를 하면 서로 지난 온갖 이야기를 나눕니다.
언제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한번 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시는데 여름이나 봄에 한번 모시고자 합니다. 그 둘째 아들이 할아버지 이장에 참여하여
도와주었고, 정종 두 병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읽은 축문을 누님에게 대충 이야기 했더니 누님도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회상하시더군요. 효가 서로 남매 간에
서로 전달될 때에 우리는 모두 어린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장천선생의 누님 이야기를 접할 때 마다 저는 나의 둘째 누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이는 마치 회광반조와 같은
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두 분의 아름다운 추억이 길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부모님 산소 앞에서 절을 하면서 저는 용서를 비는 일 70%,
대견해 하실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 30%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불가에서 말하는 ‘108 참회문’과 같은 것입니다.
부모님이 생시에 소망하셨던 것을 다 충족하지 못하고 살아가니
용서를 비는 일의 비중이 크고, 그러나 능력이 부족한 자식이 이만큼이나
많은 것을 누리면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은 조상님 음덕이라 믿으니,
그나마 대견해 하지 않으실까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두 아들과 손자를 생각합니다.
가족 채팅방에도 그대로 올립니다.
누님 역시 카톡도 잘 하시니, 동생의 글을 죄다 보십니다.
정 박사님의 따뜻한 격려 댓글도 캡처해서 보내드리지요.
저 높은 곳에 계신 부모님께서도 다 보시면서 흐뭇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 대전문인총연합회[대전문총] 카페에서
◆ 김명아(시인, 대전문인총연합회장, ‘한국문학시대’ 발행인) 22.12.15.14:56
누가 다녀가셨을까?
노인이 다녀가셨다면
분명 집안 어른 중 한 분 일터인데
노인이 혼자 오기는 힘들었을 테고
동반한 사람이 있을 테니
얼마 안 가 밝혀질 일입니다.
남은 세월 맘 편히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지요.
서로 얼굴 마주하면 웃어 반기는 삶이
시를 쓰고 글을 쓰는 것보다
소중한 일이지요.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 답글 / 윤승원
김 회장님의 말씀 속에 정답이 들어 있습니다.
서로 얼굴 마주하면 웃어 반기는 삶
그것이 바로 시를 쓰고 수필을 쓰는 것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지요.
인정과 성심이 담긴 김 회장님 댓글이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 페이스북에서
◆ 박영진(수필가, 한남대학교 총동창회장, 전 대신고 교장) 22.12.17. 15:20
윤 회장님의 효심을 엿볼 수 있는 글 고맙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태어나 살면서 부모님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기도 하지요.
우리 세대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핵가족시대에 살아서
우리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 안타까울 때도 있어요.
지팡이는 어느 어른께서 윤 회장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자녀들에게 업혀 내려가신 것 같군요.
어른에 대한 고마움의 뜻을 담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답글 / 윤승원
감사합니다. 박 교장 선생님께서 공감해 주시고 안타까운 현실도 잘 진단해 주셨습니다.
지팡이 임자에 관해서도 대단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분석을 해주셨습니다.
늘 힘과 용기를 주시는 박 교장 선생님 따뜻한 인정에 감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