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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2월 18일 수요일
[(자) 재의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재의 수요일에는 단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킨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는 재의 예식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이제라도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오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라며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 때, 기도할 때,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시며 사람들이 아니라 숨어 계신 아버지께 보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희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 요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2-18
12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13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14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16 백성을 모으고 회중을 거룩하게 하여라.
원로들을 불러 모으고 아이들과 젖먹이들까지 모아라.
신랑은 신방에서 나오고 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여라.
17 주님을 섬기는 사제들은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아뢰어라.
“주님, 당신 백성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소유를 우셋거리로,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로 넘기지 마십시오.
민족들이 서로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말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18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20─6,2
형제 여러분, 20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6,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Ecce homo.”(에체 호모) 매를 맞으시고 초라해지신 예수님을 빌라도가 군중 앞에 내보이며 던진 이 말은, ‘이 사람을 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이 사람이다.’로 옮깁니다. 라틴 말 ‘ecce’가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라 존재의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법이 아니라, 이 말이 가리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입니다.
과연 무엇이 사람이라는 것일까요? 상처투성이가 되신 예수님, 아무 힘도 없이 조롱당하시는 그분을 두고 “이것이 사람이다.”라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결코 자신의 힘만으로는 완전에 이를 수 없지만, 완전을 꿈꾼다는 점에서 더욱 좌절할 수도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넘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 돼.”라며 자책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넘어질지라도 우리가 당신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십니다. 넘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cce homo.”(이것이 사람이다)
자신이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 존재인지 절실히 깨닫는 그 순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는 하느님의 물음에 비로소 진심으로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넘어지는 사람으로서, 처절히 자신을 마주한 사람으로서 맞이해야 합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머리에 재를 얹으며 듣는 주님의 말씀에 깊이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주님 안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다시 시간이 흘러 사순 시기 첫 순간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은 참회와 속죄의 상징인 재를 교우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입니다. 작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성한 종려나무 가지를 불에 태워 만든 재를 만듭니다.
사제는 그 재 위에 성수를 뿌리고 축성한 다음 교우들 머리에 얹어주며 이렇게 외칩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세 3,19) 혹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마르 1,15)
저는 민망하지 않게 살짝 재를 머리에 얹어주는 편인데, 심신이 강한 선교사 신부님들께서는 재 위에 성수를 듬뿍 부어 진흙처럼 만들어, 이마 위에 아주 크게 십자가를 그어주시곤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신심 깊은 한 신부님께서는 아직도 당신 이마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십자가를 하루 내내 지우지 않으시며, 사순 시기 동안 회개와 참회를 다짐하곤 하십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또 다시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하등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동시에 우리 각자의 고통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백번 천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이유를 모르겠는 십자가를 짊어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와서 아주 조금이나마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통, 내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 잘못 산 것도 아닌데 와닿는 신비로서의 고통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 앞에서는 세상적인 논리로 따지지 말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로 헤아릴 것도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다가온 고통이니 그분 안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께 부르짖고, 그분께 아뢰고, 그분께 매달리며, 그분 안에서 답을 찾고자 발버둥 쳐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듭하는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반드시 정답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 고통은 그분께서 더 가까이 그대를 부르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당신의 심오한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시려고 그 고통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우리를 더 큰 세상, 더 큰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그 고통을 보내셨다는 것을.
사순의 목적: 눈에서 비늘이 떨어짐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영적인 개안 수술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느 성격 급한 남자가 새로 산 슈퍼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시보드에 빨간 경고등이 들어오고 보닛 사이로 검은 연기가 풀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남자는 차를 세우고 엔진을 점검하는 대신, 차 안의 온도를 낮추려고 에어컨을 가장 강하게 틀고 창문을 다 열었습니다.
"아니, 차가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에어컨을 18도로 맞추면 좀 식겠지!" 그는 시속 100km로 계속 달렸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분 뒤, 차는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화려한 불꽃놀이를 하며 폭발해버렸습니다. 엔진 오일이 샌다는 근본 원인은 무시한 채, 겉으로 느껴지는 열기만 식히려고 애쓰다 결국 전 재산을 날려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이 남자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고통의 연기가 나고 경고등이 들어오면, 그 원인인 삼구(三仇), 즉 내 안의 탐욕과 정욕과 교만을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문제만 해결하려 듭니다. 하느님께 "돈 더 주시고, 남들보다 잘나게 해주시고, 내 몸 편하게 해주시면 행복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폭발 직전의 엔진에 에어컨을 트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마다 작심삼일로 끝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그 삼구가 나의 눈을 가려 내 곁에 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독약'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구는 우리를 눈뜬 소경으로 만듭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그 절절한 눈빛과 사랑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오직 돈에 눈이 멀어 남편이 가져오는 월급 봉투의 두께만 확인하고, 계속해서 "나를 사랑한다면 명품 가방이나 아파트로 증명해봐!"라고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이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그 어마어마한 행복을 앞에 두고도 지옥을 삽니다. 탐욕이라는 비계가 그녀의 눈을 가려 남편의 영혼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리사이적 종교 행태가 낳은 폐해는 실로 무섭습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세르게이 신부』를 보십시오. 주인공 스테판은 전도유망한 장교였으나 약혼녀의 배신으로 수도원에 들어가 세르게이 신부가 됩니다. 그는 누구보다 엄격하게 단식하고 기도하며 성인이라는 칭송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인정받고 싶은 교만'이라는 마귀와 '들끓는 성욕'이라는 육신의 원인을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방탕한 여인이 유혹하러 오자 그는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고통으로 유혹을 견디며 외쳤습니다. "보시오! 나는 이 육체의 고통으로 당신의 유혹을 이겼소!" 사람들은 이 소식에 열광했고 세르게이는 속으로 흐뭇해했습니다. '역시 나는 다르다. 나는 이 정도로 거룩하다.' 그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행을 잘하는 자신을 보며 행복해했습니다.
결국 수년 뒤, 자기를 찾아온 불쌍한 소녀를 치유해주려다 들끓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범해버린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습니다. "나는 성자가 아니라 짐승이었다!" 원인을 모르는 고행은 영적 백내장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삼구로 가득 차서, 눈앞에 계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눈을 가린 삼구를 제거하고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진짜 행복을 얻기 위한 영적 피트니스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인을 절실히 깨달아 성인이 된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16세기의 성 프랑수아 보르지아입니다. 그는 스페인의 고귀한 공작이었고 권력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평생 흠모했던 아름다운 이사벨라 왕비가 서거했을 때 관을 열고 그 시신을 마주했습니다. 며칠 만에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기는 왕비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평생을 바쳐 추구했던 육체의 아름다움과 세속의 영광이 이토록 허무한 것이었구나! 나는 이제 결코 썩지 않을 주님의 아름다움만을 보겠다." 그는 삼구라는 독배를 쏟아버림으로써 영원한 임금님의 얼굴을 볼 눈을 얻었습니다.
또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결정적인 회개 순간을 보십시오.
토마소 다 첼라노가 쓴 『생애』(Vita Prima)에 따르면, 젊은 시절 프란치스코는 귀족적인 자만심(교만)이 강했고 아름다운 옷과 향연(육신)을 즐기던 이였습니다. 특히 그는 나병 환자를 극도로 혐오하여 그들을 보면 코를 막고 멀리 돌아갔습니다. 삼구라는 두꺼운 백내장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한 나병 환자를 마주쳤습니다. 예전 같으면 도망갔겠지만, 그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돈을 건네주는 '자선'을 베풀었고, 혐오감을 이겨내는 '단식'의 정신으로 그의 썩어가는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완전히 낮추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흉측한 고름과 악취로 가득했던 환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광채가 나는 만왕의 임금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전에 나에게 그토록 쓰게 느껴졌던 것이, 이제는 영혼과 육신의 감미로움으로 변했다." 삼구라는 장막을 걷어내자, 이미 그곳에 계셨던 하느님의 눈부신 행복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 시기는 하느님께 점수를 따는 기간이 아닙니다.
내 눈을 가리고 있는 삼구라는 암세포를 도려내어 주님을 다시 보게 되는 치유의 기간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모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 독을 이길 수 없기에, 주님의 생명을 내 안에 받아들여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함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그냥 남들이 하니까 하는 숙제는 끝냅시다.
대신 내 안의 삼구를 똑똑히 대면하십시오. "내가 이 돈 때문에 주님을 못 보고 있구나! 내가 이 자존심 때문에 내 곁의 천사들을 못 보고 지옥을 살고 있구나!" 이 원인을 절실히 깨달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기쁘게 굶고, 기쁘게 나누고, 기쁘게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머리에 얹는 재는
"너는 죽을 존재이니 썩어질 것에 눈멀지 마라"는 하느님의 간절한 충고입니다. 내가 사라진 그 제로의 자리에 주님의 눈부신 얼굴이 비치는 은총의 사순 시기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롬비아 보고타엘 다녀왔습니다. 6월에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이 보고타에서 있습니다. 최종 점검하러 다녀왔습니다. 사제 모임 때 점심 식사할 예정인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라파엘, 미카엘라, 안젤라 가정입니다. 천사의 세례명처럼 가족 모두가 방문했던 저희를 따뜻하게 환영했습니다. 샌디에고에서 온 부부, 달라스에서 온 부부, 뉴저지에서 온 청년, 사제 둘이 함께 미사를 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문화가 달랐지만, 주님 안에 모두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한 부부는 결혼 34년 되는 기념일이었습니다. 한 부부는 결혼 4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라파엘 부부는 결혼 42년 되었다고 합니다. 식사하면서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딸은 스페인어를 영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딸은 스페인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서품 17년이 되었고, 저는 35년이 되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도, 사제로 사는 것도 모두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와 화해’의 시간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지었어도, 카인이 죄를 지었어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신다.” 우리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순시기는 ‘화해’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화해란 내가 잘못했다면 마음을 다해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화해란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자캐오는 잘못한 것을 뉘우쳤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
잠시 후 우리는 이마에 재를 얹을 것입니다. 재는 불을 지나고 남은 것입니다. 한때는 푸르던 성지였고 생명이 있었지만, 불을 지나며 재가 되었습니다. 재는 우리에게 인간의 유한함을 일깨워 줍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여라.” 이 말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진실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재는 끝이 아닙니다. 재는 땅에 스며들어 다시 생명을 준비합니다. 농부는 재를 거름으로 씁니다. 불을 지나온 재가 오히려 땅을 살찌우듯이, 우리의 실패와 상처, 죄와 눈물도 하느님 손에 맡겨질 때 새로운 생명의 거름이 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이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먼지이지만, 하느님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 40일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께 상처를 준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한 이들, 두려움 때문에 도망친 제자들, 조롱하고 침 뱉던 군중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 위로드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함께한 여인들, 십자가를 대신 진 키레네 사람 시몬, 주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모든 슬픔을 가슴에 안고서 계셨던 성모님, 예수님의 장례를 정성껏 치러드린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입니다. 2026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이 40일을 살아갈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을 아프게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위로드린 사람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절제의 삶으로 단식하며, 이웃을 향해 자선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도록” 이번 사순시기를 은총의 시간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늘의 성인
성 시몬(Simon)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 +107년경
같은이름 : 사이먼, 시메온, 시므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촌으로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시몬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마르 6,3; 마태 13,55) 명단에서 등장한 시몬인 듯하다. 카이사레아(Caesarea)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에서 성 시몬이 “주님의 삼촌인 클레오파(Cleopha)의 아들”이었으며, 주님의 형제 야고보(Jacobus, 5월 3일)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가 노년에 순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 순교록”에서는 “주교이자 순교자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성 시몬은 클레오파의 아들이며, 구세주와 육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전해진다. 그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 다음에 예루살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트라야누스의 박해 때 많은 고문을 받고 120세의 나이로 용감하고 당당하게 십자가 형벌을 견디어내는 것을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과 재판관 자신까지 놀라워하는 가운데 순교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에 기초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던 여인들을 언급할 때 등장하는 “이모,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요한 19,25)는 성 시몬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 시몬은 예수님의 외사촌 형제였을 것이다. 성 시몬이 예루살렘의 주교로 임명된 것은 성 야고보가 순교한 62년으로 여겨진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중요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였다. 또 야고보가 순교한 이후 예루살렘에는 반로마 메시아니즘이 등장하였다.
유대 민족주의를 거부한 대부분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요르단 강 서안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결별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성 시몬이 예루살렘의 주교로 활동한 기간은 많은 박해와 어려움들로 얼룩진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시메온(Simeon)으로도 불리는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인 열성당원 시몬과 동일 인물로도 여겨진다(마태 10,4; 마르 3,18; 루가 6,15; 사도 1,13).
성 테오토니오 (Theotonius)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코임브라(Coimbra)
활동연도 ; +1162?/1166년?
같은이름 : 테오토니우스, 테오또니오, 테오또니우스, 떼오또니오, 떼오또니우스
성 테오토니우스(또는 테오토니오)는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의 주교인 크레스코니우스(Cresconius)의 조카로서 어릴 때부터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된 뒤에는 주로 본당사목을 하였는데, 매우 엄격한 생활과 높은 성덕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후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고, 포르투갈의 황녀와 백작이 그를 주교로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자신이 항상 이를 거절했다.
두 번째로 성지를 순례한 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가 코임브라에 세운 새 수도원에 입회하여 장상을 역임하였다.
그를 지극히 존경하던 국왕 알폰수스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 많은 선물을 희사하였다.
그는 80세까지 30여 년 동안을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167년 포르투갈의 주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 1740-1758년 재임)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안질베르토 (Angilbert)
신분 : 수도원장, 시인
활동지역 : 첸툴라(Centula)
활동연도 : +814년
같은이름 : 안질베르투스, 안질베르또, 안질베르뚜스, 안길베르토, 안길베르투스, 앙길베르트
성 안길베르투스(Angilbertus, 또는 안질베르토)의 별명은 '호머'(Homer)인데, 그의 라틴 시가 매우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샤를대제(Charlemagne)의 궁중에서 자랐고,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 안길베르투스는 샤를대제의 딸 베르타(Bertha)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정치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덴마크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를 늘 기도했는데, 폭풍우가 덴마크 군인들을 몰아내자 수도 생활을 꿈꾸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내인 베르타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자신은 첸툴라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으며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원에서 성가 부르는 것을 도입하여 그의 수하에 있던 300명의 수도자들이 늘 애용토록 하였다.
그는 샤를대제의 절친한 친구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궁중 사제, 고문관, 외교관의 직책도 역임하였다.
그 당시 그는 황제에게 진언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성 콜만노 (Colman)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린디스파른(Lindisfarne)
활동연도 : 605-676년경
같은이름 : 콜만누스, 콜만, 콜먼
아일랜드 북서부 코노트(Connaught) 태생인 성 콜만누스(Colmannus, 또는 콜만노)는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의 지도아래 이오나(Iona)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성 피난(Finan, 2월 17일)을 계승하여 린디스파른의 세 번째 주교로 임명되었다.
663년에 개최된 휘트비(Whitby) 시노드에서 그는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와 성 아길베르투스(Agilbertus, 10월 11일)를 반대하여 켈트(Celtic) 교회 전례의 주요 옹호자로 활동하였다.
국왕 오스위(Oswy)가 성 발프리두스와 로마 전례를 주창할 때, 성 콜만누스는 자신의 주교직을 사임하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England)의 수도자들과 함께 린디스파른 섬을 떠나 코노트 해안의 이니쉬보핀(Inishbofin) 섬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켈트 전례를 계속하였다.
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 수도자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여 어려움에 처하자 그는 마요(Mayo)에 또 다른 수도원을 세우고 두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큰 공헌을 하였다.
복자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신분: 신부, 화가
활동지역: 피에졸레(Fiesole)
활동연도: 1400?-1455년
같은이름: 안젤리꼬, 안젤리꾸스, 안젤리쿠스,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 근방 비키오(Vicchio)에서 태어나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프라 안젤리코는 1417년 형 베네데토(Benedetto)와 함께 피렌체의 한 필사본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그는 20세에 피에졸레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기도생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이때 안젤리코는 조반니 다 피에졸레(Giovanni da Fiesole, 피에졸레의 요한)라는 수도명으로 작품 활동을 했고, 1436년부터는 그의 절정기에 속하는 작품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1445년에는 교황의 부름으로 로마(Roma)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내의 여러 곳에 프레스코화를 제작하였고, 1447년에는 오르비에토(Orvieto) 주교좌성당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의 이름이 프라 안젤리코로 널리 알려진 것은 유명한 시인이자 라틴어 학자인 코렐라의 도미니코(Domenico da Corella) 신부가 그를 ‘천사 같은’(angelic) 화가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프라’는 수도자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프라테’(frate)의 약어이다.
그는 재능 있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안젤리코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청렴한 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가 자신을 피렌체의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을 때 극구 사양하였다.
1450년경 피렌체로 돌아와 피에졸레 수도원 원장을 역임한 뒤 1453년경 다시 로마로 왔고 그곳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1455년 2월 18일 선종하여 인근의 산타 마리아 델라 미네르바(Santa Maria della Minerva)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82년 10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와 동등한 전례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이어 1984년 같은 교황에 의해 예술가와 미술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