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61)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40) – 야고보서 강해(2)
야고보서 강해(2) – 야고보서 2장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지 않는다 (1-13)
수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그 피스티스를 받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 차별을 가질 수 있느냐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그대들이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끼고 들어오는 사람들과, 허름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차별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피스티스 안에서 풍요롭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들로 삼지 않으셨느냐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그때부터 성장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진도가 다를 뿐 성장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보하고 있는 클레로노모스들의 다양한 포지션이다.
수신자들도 싸르크스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시로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려는 싸르크스의 동기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라고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싸르크스의 유혹에 계속 휘둘리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피스티스 안에서 풍요롭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들로 삼으셨는데 왜 자기 중심적으로 사람을 차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겨 왔느냐고 하는 것이다. 도리어 부자들은 그대들을 지배하고 또 그대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을 위해서 일컬어지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모욕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서 부자들은 형제자매들이 아니고 세상의 부자들이다)
만약 그대들이 성서를 따라 "네 이웃(플레시온, 동료)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직설법 미래 -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야고보가 이 말씀에서 똑같이 명령형이 아닌 직설법 미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진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고 하신 뛰어난 법을 지킨다면 그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으로서, 그 법에 의해 그대들은 범죄자라는 질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단 하나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전체를 어긴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시고 또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만약 그대가 간음을 하지 않았어도 살인을 한다면 그대는 법을 어긴 범죄자가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613가지 조항으로 만들었다. 그 모든 것 중에 하나만 지키지 않아도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은 사람을 죄에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이 성취되면, 즉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면 그때부터 싸르크스의 힘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진보가 진행되는 것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신성의 사랑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 푯대를 향해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자들은 싸르크스에 휘둘리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 한 사례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확한 회개와 간구를 통해서 진도 나가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유의 법으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자답게 말도 실천도 그에 따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법은 자유케 하는 법이다. 그리고 심판은 처벌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는 것도 함께 포함된 것이다. 상급과 처벌을 갈라내는 심판인 것이다. 따라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은 심판의 날이 기쁜 것이다.
우리의 하나 됨을 보여줄 때 그리스도로부터 우리가 받은 피스티스가 입증되는 것이다 (14-26)
야고보는 형제들에게 누가 만약 자기는 피스티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설명하고 있다. (야고보는 종교적인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피스티스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형제나 자매가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양식이 부족한데 그대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물러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만 하고 정작 그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강조하면서 이와 같이 그 피스티스는 만약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그대는 피스티스를 가지고 있고 나는 행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함과는 별도로 그대의 그 피스티스를 나에게 보이십시오. 나는 행함으로 나의 그 피스티스를 그대에게 보여주겠습니다” 라고 지적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그대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벌벌 떱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의 결론도 행함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주장했다고 하지만 사도 바울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롬2:13) 야고보도 실천함으로 복을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다.(약1:23-25) 즉 예수님도, 야고보와 사도 바울도 동일한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에 의해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은 자들은 온전히 실천을 하는 자들로 점점 성장해 가는 것이다. 즉 피스티스는 행함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들 사이의 관계, 사랑의 행동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줄 때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피스티스가 입증되는 것이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자들의 이야기이지 측은지심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 하나됨은 공동체 이기주의가 아닌 열린 공동체이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재단에 올렸을 때 그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피스티스가 그의 그 행동과 함께 작동했고, 그 행함으로 비롯되어 그 피스티스가 온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한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우주적인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개인적인 약속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짜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해당되며 아브라함은 해당이 안 된다. 개별적인 관계에서 칭찬을 받은 것 뿐이다. 그래서 사도 공동체가 약속된 이삭의 후손이라고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 차원에서 그 피스티스가 온전하게 된 것일 뿐이다. 이삭을 바침으로 해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 현실에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 피스티스만으로는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생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들어간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그 피스티스 또한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 언약은 새 마음으로, 새 삶으로 존재의 이유가 바뀌는 약속이다. 그러니 회개와 간구에 집중하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허남회 전도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