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좀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꼼꼼하게 조사하는 바람에 재료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때도 있다.
정리란 실제로 해보면 굉장히 힘든 작업임을 알 수 있다. 그 번거로움에 애먹은 사람은 정리하거나 글로 정리하는 것을 점점 멀리 한다. 그리고 그저 열심히 책만 읽는다. 읽으면 지식은 는다. 머지않아 재료는 늘지만 그만큼 정리하기가 더욱 골치 아파진다. 이렇게 해서 공부의 양은 엄청나지만 정리된 것을 거의 남기지 않은 사람이 탄생한다.
“생각을 좀 더 다듬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졸업논문을 쓰려는 학생들이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꾸물거리다가는 시간에 쫓기고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초조해하는 두뇌에서 좋은 생각이 나올 리가 없다.
그럴 때는 “일단 써봐”라고 나는 조언한다. 어쩌면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구실을 만들어 쓰는 것을 하루하루 미룬다. 다른 한편에서는 마감이 닥쳐온다는 초조함도 큰 영향을 미친다.
머릿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혼란스럽다. 특히 꼼꼼하게 조사해서 재료가 넘칠 정도로 있으면 혼란은 가중된다.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쓰기 시작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더 구상을 명확히 한 후에 쓰려고 한다. 이것이 논문 작성을 앞둔 학생이 흔하게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쓰자. 너무 위대한 논문을 쓰려고 과욕을 부리지 말자. 힘이 들어가면 역작이 되기는커녕 수박 겉핥기식처럼 피상적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원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런 기분을 버려야 잘 써진다. 보고서, 리포트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에는 글씨를 또박또박 잘 썼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어째서 이 꼴일까 의아할 정도로 글씨를 애처롭게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릴 때는 무심하다. 잘 쓰려고 애쓰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솜씨가 눈에 띄게 늘어 글씨를 잘 쓴다. 조금만 칭찬을 받거나 자신이 생기면 이번에는 잘 써서 창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면 뜻대로 써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욕심을 내면 역효과가 난다.
글을 쓰려면 아직 멀었다는 마음이 들어도 잘 쓸 수 있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일단 쓴다. 쓰기 시작하면 쓴 것이 남지 않는가. 재미있게도 쓰다 보면 머릿속에 절차가 세워진다. 머릿속은 입체적인 세계로 이루어진 것 같다. 여기저기서 많은 지식이 동시에 자기주장을 한다. 수습해야 한다는 느낌은 거기에서 생긴다.
글을 쓰는 것은 선을 그리는 것과 같다. 한 번에 하나의 선밖에 그을 수가 없다. ‘A와 B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A와 B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느 한 쪽을 뒤로 미루지 않으면 안 된다.
거꾸로 말하면 글을 쓰는 작업은 입체적인 생각을 선이라는 말 위에 태우는 것이다. 익숙해질 때까지 다소 저항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 너무 오래 준비하지 말고 일단 써 보자. 그러면 엉킨 실 뭉치를 한 오라기의 실 끝을 잡고 조심조심 풀어가듯이 생각이 점점 명확해 진다.
막상 쓰려고 하면 자신의 머릿속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깨닫곤 한다. 그런 경우에도 어쨌든 써보면 조금씩이지만 조리가 잡힌다.
다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표현되기를 기대하며 그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면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써내려가자. 어떤 순서로 쓰면 좋은지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에 신경을 쓰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써보는 것이 우선이다.
쓰면 쓸수록 뇌가 맑아진다. 앞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사전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이 글을 쓰는 동안에 불쑥 떠오른다는 점이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나면 그것은 잘 쓰인 논문이 되리라고 짐작해도 좋다.
쓰기 시작하면 멈추지 말고 목적지까지 서둘러 가야 한다.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에 연연하거나 오타에 연연하면 기세를 잃는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는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어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다. 하지만 자전거는 작은 돌멩이에도 절려 넘어질지 모른다. 속도가 빠를수록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인 자이로스코프는 더 잘 작용한다.
아무리 논문이라고 해도 쓰다가 지우고, 지우고 쓰는 것을 되풀이하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일사천리로 쓰자.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전체를 다시 읽는다. 이렇게 하면 이제 정정, 수정을 느긋하게 할 수 있다.
퇴고할 때는 부분적인 수정이 아니라 한가운데에 있던 글을 첫머리로, 혹은 말미에 있던 문장을 처음으로 가져오는 구조적인 변경, 즉 대수술을 해야만 한다. 다만, 제출할 때까지 시간이 있으므로 여유를 갖고 궁리할 수 있다.
1고가 만신창이가 되었다면 2고를 작성한다. 이때 1고를 정정하는 것에만 그치면 재미없다. 되도록 새로운 생각을 많이 넣겠다는 자세로 2고를 완성한다. 다시 퇴고한다. 그래서 눈에 띄게 개선된 것 같으면 3고를 작성한다. 이제 더 이상은 손을 댈 여지가 없을 듯한 지점에 이르렀다 싶으면 드디어 원고가 완성된다. 다시 쓰는 노력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쓰다 보면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다시 쓰다 보면 처음의 생각을 승화시키는 방법도 저절로 체득한다.
써보는 것 외에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상대를 골라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는 방법도 머릿속의 정리에 도움이 된다. 때로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그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리하려면 표현해보는 편이 좋다.
원고로 쓴 것을 퇴고하는 경우에도 말없이 쓰지 말고 소리 내어 읽으면 읽는 동안에 생각이 흐트러진 부분을 금세 포착할 수 있다. 소리도 생각을 정리할 때 도움이 된다.
《헤이케 이야기》는 12세기 후반 일본의 패권을 놓고 두 가문의 전쟁을 그린 소설로,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원래 구전된 이야기였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동안에 표현이 순화된 것이리라.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가지런하고 질서 있게 머릿속에 들어온다. 작자는 아무리 봐도 두뇌가 명석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것은 작자 한 명의 공적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이야기를 들려주던 집단의 공적으로 봐야 한다.
생각은 되도록 많은 경로를 빠져나와야 가지런히 정리된다.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잘 정리되지 않던 지식이 글로 써보면 명확해진다. 재차 써보면 더욱 그렇다. 《헤이케 이야기》가 ‘머리가 좋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생각의 틀을 바꿔라(도야마 시게히코·전경아, 책이있는풍경, 2015)’에서 옮겨 적음. (2019.06.11.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