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Infinite)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한한(Infinite) 의식을 가져야만 할까요?
이해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아는 자와 아는 대상 간의 이원성을 암시할 것입니다.
실상(Reality)에서 그 둘은 같습니다.
무한(Infinite)은 그것이 전부(All)라는 사실 덕분에 알지요
좀 더 설명하자면, 의식은 두 개의 층이나 수준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묘사할 수 있습니다.
높은 층의 의식은 무한하며 모든 환상, 예컨대 변화, 일시성, 혹은 연쇄와 같은 것 너머에 있지요,
낮은 층의 의식에는 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낮은 수준들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자기의 모든 생각, 결정, 행동을 다 포함하는)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낮은 층으 의식은 또한 개인의 영적 의지에서 나온 모든 결정을 다 기록하는데,
개인의 영적 의지는 유한과 무한 사이의 과도적 매개체라 할 만한 것으로서 봉사합니다.
기계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엔진과 바퀴 사이에서 다양한 움직임이나 휴지(休止)를 동조시키는
자동차의 동력 전달 계통의 차동기어와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기본적 위치성을 내맡김에 따라,
이러한 기본 공리의 가면을 벗기고 신념들의 각 층 밑에는 더욱 깊은 층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마음이 뭔가를 안다는 걸 어떻게 믿는지,
혹은 마음은 자신이 안다는 걸 어떻게 믿기라도 하는지(인식론)에 관한 기초에 맞닥뜨리게 되지요,
결국사람은 '마음'이 뭔가를 실제로 알 수 있는 능력은 정말 없다는 것과,
마음이 알고 있다는 환상은 가식이며 허영이라는 놀라운 발견에 이르게 됩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망원경이 그것을 통해 보이는 것을 어떻게 알겠으며,
혹은 귀가 어떻게 음악을 아느냐고 물을 수 있는 것이지요,
컴퓨터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알까요?
마음은 그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존재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린 고양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지만,
오직 고양이만이 고양이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 있습니다.
생각은 대단한 실용적 가치를 지닌 처리 장치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자신이 데이터를 안다고 추정하지만, 알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이 사실상 없습니다.
신념이 내면의 가공적인 '아는자' 를 만들어 내고 그것은 '내'가 되지요.
이와 비슷하게, 신념은 가공적인 행위자, 활동자, 생각하는 자를 만들어 냅니다.
환상적 자기(에고)의 핵을 구성하는 '나'는
행위하는 가공적 행위자, 생각하는 생각하는자, 선택하는 선택자,
계획하는 계획자에 대한 기억의 합성물입니다.
생각이 이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은,
그것이 주체와 객체에 대한 추정을 가지고 이원적으로 처리하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작 이 가공적 행위자를 찾으려 들면, 그러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로그램들이 삭제되고 나면,
사람은 녹화 테이프는 공테이프고 그 모든 프로그램 뒤에 '나'는 없다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그토록 조심스럽게 방어해 온 소중한 '나'는 정교한 프로그램 층들의 연속이고,
그중에서 맨 밑에 깔려 있는 삭제되어야 할 프로그램은,
다른 프로그램 층들이 실재하며 그러한 것이 '나 자신'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발견과 함께, 순간적으로 에고/자기는 공포에 질립니다.
현실의 저자로서의 그 기만적인 가짜 권위가 베일을 벗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고, 뒤이어 죽음 자체에 대한 두러움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실제의 죽음을 겪는 것은 오직 확상적 지기뿐이니까요.
이순간,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핵심이자 저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최후의 공허한 신념에 매달립니다.
이 주장에서, 그것이 '에고'의 생명의 저자라는 점에서 그것은 진실입니다.
이 지점에서 헌신자는 이제 자신의 생명의 표면적 핵심을 신에게 내맡기는 일과 마주하지요,
이것은 깨달음을 가로막고 있는 최후의 궁극적인 중대한 순간입니다.
이 주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므로 별도의 장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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