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신종 코로나(COVID 19) 백신 접종을 놓고 분열 양상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EU 의약품 규제 당국인 유럽의약품청(EMA)의 권고에 따라 화이자와 함께 접종을 시작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최근 '혈전 색전증'(피 덩어리에 의해 혈관이 막히는 증상) 사망 사고에 휩쓸리면서 북유럽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접종을 일시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 백신 부족에 시달리는 헝가리 등 동유럽 일부 회원국들은 EMA의 사용 승인 결정과 상관없이 러시아 '스푸트니크V' 백신 구입 및 접종에 들어가고, EU 핵심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도 EMA와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EC의 몇몇 회원국,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 중단/얀덱스 캡처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덴마크와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보건당국은 11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백신 제조 번호 'ABV5300'를 맞은 접종자 일부가 '혈전 색전증' 증상을 보였다는 보고가 나온 뒤 예방적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로 전해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7일 오스트리아 남부에서 발생한 49세 여성의 사망 사고.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 여성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한 뒤 '심각한 혈액 응고 장애'로 사망했다"며 "백신과 직접적인 연관 관계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접종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ABV5300' 제조 번호 백신이 공급된 17개 회원국 중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룩셈부르크가 즉각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을 중단했고, 지켜보던 덴마크도 11일 그 뒤를 따랐다. 'ABV5300' 백신을 맞은 60세 여성이 오스트리아 사망자와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도 아스트라제네카 접종 중단/얀덱스 캡처
모스크바의 백신 접종 장면/사진출처:모스크바 시 mos.ru
덴마크 당국은 이날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2주간 사용 중단을 예방적 조치"라고 강조했지만, 주변 국가들에게 주는 영향을 적지 않았다.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가 곧바로 "추가적인 정보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백신 사용을 중단했다.
이탈리아 당국은 제조번호가 다른 'ABV2856' 백신 사용마저 중단시켰다. 시칠리아에서 두 건의 사망 사례가 발생한 데 따른 조치로 알려졌다.
EU 규제기관, 아스트라제네카 계속 접종 권유/얀덱스 캡처
EU, 존슨앤존슨의 (얀센) 백신 사용 승인/얀덱스 캡처
접종 중단 조치가 잇따르자 유럽의약품청(EMA)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사망사고를 낸 증상을 초래했다는 징후는 아직 없다"며 즉각 무마에 나섰다. 또 "이 백신의 접종 이익이 그 위험성보다 더 크다"고도 했다.
EMA는 "10일 현재, EU 지역에서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자 약 500만 명 가운데 30건의 '혈전 색전 합병증'이 보고됐다"며 "이는 일반적인 발병 비율을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관련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접종해도 된다는 게 EMA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EMA는 또 미국의 제약사 존슨앤존슨이 개발한 '얀센' 백신의 긴급 사용을 권고했으며, EU집행위원회이 11일 이를 최종 승인됐다. 이에따라 EU에서 승인받은 백신은 화이자와 아스트라제네카, 모더니와 얀센 등 4종으로 늘어났다. 어쩌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대체할 수 있는 백신 하나가 확보된 것인지도 모른다.
유럽내 백신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러시아 언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국의 '스푸트니크V' 백신 홍보에 나서는 느낌이다.
독일 백신접종위 위원장, 스푸트니크V 백신 인정/얀덱스 캡처
독일 튀링켄 주지사, 베를린(연방)에 스푸트니크V 사용 촉구/얀덱스 캡처
'스푸트니크Ⅴ' 백신에 대한 유럽의 평가도 EMA에 승인 신청을 낸 이후 달라지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토마스 메르텐스 독일 백신접종위원회(STIKO) 위원장은 10일 독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스푸트니크Ⅴ는 언젠가 EU에서도 승인될 좋은 백신"이라고 말했다.
구동독의 독일 '튀링겐'주 보도 라멜로프 주지사(주 총리)는 11일 연방정부를 향해 "러시아 스푸트니크V의 공급은 우리를 빠르게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것"이라며 "EU측에 구매를 촉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스푸트니크V 백신을 맞기 위해 모스크바를 찾은 독일의 한 보험회사 직원 스테판 하일리만 가족 이야기도 언론에 소개됐다. 세계적인 부호들이 화이자 백신을 맞기 위해 아랍에미리트(UAE)를 찾는다는 뉴스는 벌써 접했으나, 독일의 한 가족이 모스크바로 '백신 원정 접종'에 나섰다는 소식은 또 처음이다.
독일인, 스푸트니크V 백신 접종을 위해 가족과 함께 러시아 방문/얀덱스 캡처
모스크바의 백신 접종소/사진출처:모스크바 시 mos.ru
하일리만은 “검증된 방식으로 개발된 백신에 믿음이 간다"며 "mRNA 방식의 백신(화이자 등)보다 전통적인 벡터 기반의 백신(스푸트니크V)을 접종하기 위해 러시아로 왔다"고 말했다. 그는 "백신 접종 후 일시적인 발열 증상이 나타났지만,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며 부작용도 겪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가 어떤 경로로 러시아에서 백신 접종이 가능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전국민 백신 무료 접종을 시행 중인 러시아 보건당국은 자국 체류 외국인에 대한 접종을 배제한 바 있다. 대신 자국 주재 외교관들에게는 '스푸트니크V' 백신의 무료 접종을 제안했다.
개인 자격으로 접종을 맞은 이는 미 뉴욕타임스의 모스크바 특파원 앤드류 크래머 기자다. 그는 지난 1월 초 '스푸트니크V' 백신을 접종한 뒤 접종기를 썼다. 후속 기사가 없는 걸 보면, 부작용도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EU 회원국 중에서는 헝가리가 2월 중순 처음으로 '스푸트니크V' 백신 접종을 시작했으며, 슬로바키아와 북마케도이나도 최근 긴급 사용을 승인했다. 체코도 러시아측에 백신을 요청했다. 스위스 제약업체는 아예 오는 7월부터 이탈리아에서 '스푸트니크Ⅴ' 백신 생산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헝가리, 러시아 백신의 가격 장점 평가/얀덱스 캡처
헝가리 총리실은 11일 "백신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의 시노팜 백신에 대해서도 긴급 사용을 승인했지만, 스푸트니크V가 가격 등 가성비 면에서 월등히 좋은 백신"이라고 치켜세웠다. 러시아 측은 "스푸트니크V를 등록한 국가가 현재 50개국"이라며 "등록 국가 수로는 세계 2위"라고 주장했다.
코로나 백신을 둘러싼 유럽의 혼란은 슬로바키아 연립정부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슬로바키아 연정 주도 정당 출신의 총리가 백신 부족 현상 타개를 위해 '스푸트니크V' 백신 도입및 접종을 결정하자, 연정 참여 소수정당이 보건부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빚어졌다. 보건장관의 사임으로 갈등은 일단락됐지만, 스푸트니크V의 유럽내 승인은 앞으로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