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박물관 석문 13품 전시광경
석문송
삼도헌 정태수의 서예이야기 4. 서라벌신문 연재
1900년 전 절벽 바위에 새긴 글씨
현대그룹을 창설했던 정주영 회장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중국여행을 하다보면 길을 낼 수 없는 절벽 낭떠러지에 길을 만든 걸 보게 된다. 바위 절벽에 구멍을 뚫어 나무를 박아 선반처럼 나무판을 깔아 만든 길이 잔도(棧道)이다. 진시황 때부터 국책사업으로 시작된 잔도는 최근 황산이나 장가계 등 유명관광지에 400미터 길이의 유리잔도까지 만들 정도로 진화했다.
잔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촉잔도(蜀棧道)이다. 여러 잔도 중 포사도(褒斜道, 혹 포야도)의 총길이는 235km, 이를 건설하는데 76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진나라 말기 초한전쟁 때 초나라 패왕 항우가 천하를 제패한 뒤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한중을 포함한 촉(蜀)을 영지로 주고 한중왕으로 임명한다. 유방은 한중으로 갈 때 책사인 장량의 조언에 따라 잔도를 불태워 자신이 관중을 넘보지 않겠다는 뜻을 항우에게 전한다. 그 뒤 한중에서 세력을 쌓은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잔도를 수리하는 척 적장을 속인 뒤 우회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한나라를 건국한다.
이후로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촉도는 험난한 길이나 고단한 삶의 대명사가 됐다. 이태백도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에서 “촉으로 가는 길 어렵구나 / 하늘 오르는 길보다 더 어렵네” 라고 읊조렸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잔도 절벽 곳곳에 새겨진 글씨이다. 이렇게 깍아지른 절벽이나 바위에 글씨를 새긴 것을 마애각석(磨崖刻石)이라 한다. 동한시대 마애각석이 집중된 곳은 섬서성 포성현의 석문이다. 잔도가 이어진 석문에는 중원에서 서쪽으로 도로를 낸 것을 칭송하는 예서체 글씨들이 새겨졌고, 자연석의 형태에 따라 문자는 웅장하고 질박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외의 형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컨대 ‘개통포사(야)도각석開通褒斜道刻石’은 동한의 영평 6년(63) 포사곡 석문 절벽에 새겨져 있고, 서체는 고예(古隸)의 형태이며, 한중의 태수인 축군이 석문에 길을 개통한 업적을 칭송한 내용으로 예스럽고 굳센 필의가 돋보인다.‘석문송石門頌’은 환제 시대(148) 새겨졌고, 양맹문이 또 한차례 석문을 보수하여 개통한 공적을 칭송한 내용으로 정방형의 결구와 간혹 길게 뻗어 내린 획이 이채롭다. ‘양회표기楊淮表記’는 영제 2년(173)의 마애각석으로 내용은 석문송에 나오는 양맹문의 장손인 양회와 그의 아우인 양필의 공적을 칭송하고 있고, 졸박한 서풍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석문의‘개통포사도각석’과 ‘석문송’ 및 ‘양회표기’를 ‘삼애각석三崖刻石’으로 부른다. 이 삼애각석을 포함한 석문(石門) 13품이 현재 한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도 주목받는 마애각석이 있다. 1970년 울주에서 발견된 국보 147호 천전리각석으로 높이 약 3m, 너비 약 10m의 장방형 바위에 선사시대 암각화와 신라시대 명문 등이 새겨져 있다. 바위가 15도 정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1500년이 지나도 마모가 적은 편이다. 이 각석에서 가장 주목되는 곳은 중간 아래쪽에 있는 책 모양에 새겨진 명문이다. 신라 법흥왕(525년) 때 새겨진 것은 원래 있던 글씨라는 뜻의 원명, 539년에 새겨진 것은 추가됐다는 의미의 추명으로 불린다. 원명에는 사부지 갈문왕(법흥왕의 동생)이 이곳에 놀러 와서 골짜기 이름을 서석곡이라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14년 뒤의 추명은 사부지 갈문왕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인 지몰시혜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아들 심맥부지(진흥왕), 부걸지비(법흥왕비) 등과 함께 천전리 각석을 방문했다는 내용으로 6세기 신라의 소박한 서풍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마애각석은 돌에 새겼기 때문에 종이, 간독, 백서보다 내구성이 높다. 또한 역사적 사실과 현장성으로 인해 과거사실을 고증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고, 바위의 특성에 따른 독특한 문자미로 서예인의 관심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