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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묵상글 들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우리가 청하는 것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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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가 청하는 것은? 연중 1주 목요일-2016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신가? 선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주시는가? 선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악은 주지 않으시는가? 악도 주신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선의 외에 악의도 있으시다는 것인가? 아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며 제가 묵상한 내용입니다.
오늘 나병 환자는 자기를 깨끗하게 해주실 선의가 있으신지 여쭙니다.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주님께 있음은 굳게 믿고 있지만
깨끗하게 해주실 선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믿음이 참으로 깊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께 선의가 있는지 없는지 무엄하게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의에 자신의 병 치유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여쭙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계시지만
병의 치유보다는 다른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참으로 깊고 겸손한 나병 환자에게는
치유를 해주셔도 주님은 좋으신 분, 안 해주셔도 좋으신 분입니다.
더 나아가 나병 환자에게 하느님은 선의를 가지신 분일 뿐 아니라
그 선의가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에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런 사랑의 하느님을 나병 환자도 사랑합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좋으신 하느님일 뿐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이고 사랑하올 하느님이신 겁니다.
오늘 사무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이나 필리스티아인에게 패합니다.
싸움에 져 많은 희생자를 냈을 뿐 아니라 계약의 궤마저 뺏겼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잃은 것, 하느님을 뺏긴 것입니다.
계약의 궤를 모시고 나가면 전쟁에서 꼭 이길 것이라고 믿었는데
하느님께서 패하게 내버려 두신 겁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깨지고 무척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거두신 걸까요?
그럴 리 없지요.
사랑을 거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아니, 당시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사랑이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찾지도 않다가 전쟁이 나니까 찾은 거고,
살만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죽게 되니까 찾은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해서 찾은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서 찾은 것이고,
그들에게 하느님은 사랑하올 하느님이 아니라 필요한 하느님이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욕심을 채우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나의 승리와 성공을 이루어주시는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이유로 하느님을 찾으면 하느님은 응답치 않으시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을 피하고 멀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 계실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하느님께서 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을 밀어낸 것입니다.
욕심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실 곳이 없습니다.
하느님 대신 욕심이 거기에 있으니
그들 안에 하느님 계실 곳은 없을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은 우리의 욕심을 채워줄 선의까지는 없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살게 하실 선의만 있으시며,
그것도 영원히 살게 하실 선의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합니까?
사랑을 청합니까, 아니면 욕심을 채워주시기를 청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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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저기에게 접근해 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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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릎을 꿇어라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문제를 문제시하고 그 해결 방법을 찾아 행동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애정을 표현하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는 우리 모두가 언제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인간의 협력이 마주하여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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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병 환자의 치유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나병을 악성 피부병으로 불렀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죽음의 맏자식이 사지를 갉아먹는”(욥 18,13)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부정한 자’로 여겨져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하고 낫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마을로 복귀할 수 없는 저주를 받았습니다(레위 13,45-46).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회적 약자였던 셈입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대개는 가족들이 음식을 조달해 주었겠지만 어쩌다 그것도 어려워져서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와야 할 때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멀리 떨어지시오!” 하고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그 수치심이야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을 테지요. 예수님 당시에 어떤 나병 환자가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낫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무릎을 꿇고 치유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일로 손꼽히던 이 나병 환자 치유 사도직에 소명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적인 치유 능력이야 없었어도 가엾은 마음만은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던 용감한 사도들이었습니다. 가장 선구자는 프란치스코였는데, 그도 사실은 클라라를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12세기 이태리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는 아씨시 근처에 있던 나병 환자 마을에 음식을 날라다주는 일을 하며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보이신 가엾은 마음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지금도 프란치스칸 수도자들은 사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병 환자를 돌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은 20세기 벨기에 출신 다미안 신부입니다. 그는 미국 하와이의 몰로카이 섬에다 나병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고 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렸지만 치료를 받고자 섬을 떠나지 않고 함께 나병 환자로 살다가 생을 마치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다미안으로 불리던 사람은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입니다. 그는 1950년대 초부터 28년 동안 경기도 의왕에 라자로 마을에 들어가 28년 동안 나병 환자들을 전문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도움을 받은 나병 환자가 무려 52만여 명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채로 격리시키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던 1960년대 중반에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인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도그리스도 왕 시녀회 소속 평신도 선교사로서한국의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전남 고흥의 소록도에 들어가 40여 년간 월급도 받지 않고 도왔습니다. 생전에 이경재 신부는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나병 환자들의 심정을 대변한 바 있습니다: “나환자들이 제일 먼저 갈구하는 것은 몸을 낫게 해주는 약입니다. 환부가 좀 치료되면 다음으로는 음식과 옷, 편안한 잠자리를 원하지요. 세 번째로는 돈을 갖고 싶어 해요.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마지막으로 갈망하는 게 형제자매와 부부의 '정(情)' 입니다. 앞의 세 가지는 물질적 지원만 있으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네 번째 문제는 돈으론 풀 수 없는 사랑과 인정의 문제로 나환자 사목의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중앙일보, 1998.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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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동전 던지기를 했을 때, 숫자면과 그림면이 나올 확률은 각각 어떻게 될까요? 50:50으로 똑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림이 있는 면의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림이 있는 면이 숫자가 있는 면보다 더 볼록하게 도드라진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숫자와 그림은 분명히 다르므로 같은 확률이 나올 수 없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이 다름을 보지 않고 막연하게 같으리라 판단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쌍둥이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남들도 다 하는 것을 왜 못하니? 너는 사람도 아냐!!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등의 폭력의 말과 함께 그 다름을 틀렸다고 합니다.
자기 시선이 잘못되었음을 왜 모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음에도 그 자체도 인정해주시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1)
당시에 나병 환자는 주로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나병이라는 병을 단순히 육체의 병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랍비만이 나병 환자를 깨끗이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 환자는 랍비가 아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랍비를 통해 어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나병 환자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대십니다. 나병 환자를 만지지 말라는 것은 율법에도 나와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도 손을 대신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넘어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사랑이 어떤 원칙보다 더 위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신의 상처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거나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혐오하고 업신여깁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하고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영혼이 죄에 오염된 것을 혐오하고 업신여겨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다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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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 무엇도 완벽한 것은 없다(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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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
우연히 유튜브에 있는 제 강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강의했던 것을 누가 영상으로 찍어서 올렸나 봅니다. 그런데 이 영상 속의 제 목소리가 진짜 제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계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제가 듣는 내 목소리와 녹음되어 들려진 내 목소리 중에서 진짜 제 목소리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녹음되어 들려진 자기 목소리가 더 진짜일 확률이 높다고 말합니다.
목소리는 성대의 떨림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목소리는 성대의 떨림이 뼈로부터 전달되어서 들리고, 입 밖으로 뱉어져 내 귀에 닿은 목소리로도 들리니 두 개의 통로를 들리는 소리가 합쳐져 불순물이 낀 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소리인데 진짜 자기 목소리를 모를 수 있습니다. 자신도 스스로 잘 모르면서 남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겸손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정확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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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개신교와 천주교는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회는 믿음의 방식에서 몇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말씀이 중심이 되지만 천주교회는 말씀과 성사(聖事)가 중심이 됩니다. 개신교회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성상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천주교회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기에 다양한 성상을 인정합니다. 집에는 예수님의 고상, 성모상이 있습니다. 성당에도 제단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성모상은 물론 성인들의 성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묵주’를 지니고 다닙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는 좋은 기도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세례를 받는 새 신자에게 대부, 대모는 성경책과 더불어 성물을 선물해 주기도 합니다. 차를 축성하면 차에 성물이나, 묵주를 걸어 놓기도 합니다. 성물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성물에 의지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생활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계약의 궤”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자주 전쟁을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하느님의 계약의 궤’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계약의 궤를 두려워하면서도 단결을 하였고,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웠고, 이겼습니다. “계약의 궤”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책’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계약의 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상징이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단결과 하나 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군사가 있었고, 계약의 궤가 있었지만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단합된 힘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계약의 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는 표징이나 부적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물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신앙을 지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표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표징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새가 좌와 우의 날개를 사용해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가듯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2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오늘 나병환자가 보여 주었던 예수님께 대한 확신과 믿음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그렇게 되어라.” 다른 하나는 믿음에 대한 실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집에 있는 성모상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에 걸린 묵주가 나를 사고에서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구하며 성모님께서 보여 주셨던 참된 신앙의 길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준법운전, 안전운전, 양보운전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성모상과 묵주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계약의 궤”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나의 신앙을 키우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온전히 주님께 마음을 열었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병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묵주반지를 끼고, 성호경을 하는 것은 선교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한 행동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신앙인인데, 삶은 하느님의 뜻과 다른 모습이라면 오히려 신앙에 대한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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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 당신이 되게 하소서 -
어제 참 오랜만에 의정부교구 서품식에 참석했습니다. 의정부주교좌 성당에 거의 17년 전, 그러니까 이한택 요셉 주교님 재임중에 방문후 처음이었던 듯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습니다. 젊었던 사제들의 검은 머리가 많이들 희머리로 변해 있었고 동안童顔의 얼굴들도 노년의 얼굴들로 변모되어 있었습니다. 이젠 저보다 나이 많은 사제는 주교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원래 젊은 사제들의 교구로 시작한 의정부교구였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정영훈 아브라함 수도사제를 비롯한 의정부교구 소속의 4분 사제품이, 7분 부제품이 있었습니다. 서품식 끝 무렵 부제품을 받은 7분이 부모님을 모신후, 또 사제품을 받은 5분이 부모님을 모신후 주교님의 소개와 더불어 격려와 축하의 박수가 있었습니다. 곱게 차려 입은 모든 부모들이 저보다 한참 다 젊어 보였습니다.
문득 이런 부부 사이에서 이런 잘난 사제와 부제 자식들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부모들이 정성을 다 기울였겠나, 결코 우연이 아닌 신비로운 하느님의 섭리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당시는 몰랐지만 세월 흐른후 삶의 뒤안길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면 굽이굽이 그리운 추억들과 더불어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힘들었을 때 주님은 태풍을 미풍으로 바꿔 주셨고, 태풍이 될 상황도 미풍이 되도록 지혜와 인내를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앞으로의 확실한 다짐은 주님의 도움으로 미풍은 결코 태풍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며, 태풍은 즉시 미풍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주님의 섭리를 제 대표적 기도문에서도 깨달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기도는 2012년 수도원 설립 25주년에 나왔고, 다다음해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됨과 더불어 저는 원장직에서 내려왔고, 그 이후 알게 모르게 힘들었던 상황에서 이 기도문이 저를 지켜줬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저에게는 우선적이 과제가 되었고 그리하여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쓰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 되었습니다.
이어 칠순이 되던 2018년에는 ‘행복기도’가 나왔고, 나이 70부터는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이 당면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2월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에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기도시가 선물처럼 탄생되었고, ‘2022년 새해 소원’ 기도문이 되었습니다. ‘아 이 기도시는 죽음을 앞둔 선종을 위한 기도구나!’ 어제 서품식 도중 벼락같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대부분 나이 90전후로, 85-90사이에 세상을 떠나니 이제 남은 햇수를 헤아려 보니 많아야 15년입니다. 일일일생으로 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위치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살아 가는 일이 절실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당신이 되게 하소서-’로 정했습니다. 계속 추가 하다보니 기도시가 길어졌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이 되게 하소서” 와 “당신의 뜻이 되게 하소서” 또 2개가 추가되었습니다. 잠깨면 일어나 읽고 잠들기 전에 읽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시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칩니다. 바로 이 기도시가 오늘 말씀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무참히 패배한 일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어찌하여 만군의 주님의 계약궤까지 모셔왔는데 참혹하게 패배하였느냐 말입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대패하여 자기 천막으로 도망칩니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
바둑 프로 고수高手들은 바둑을 두면 꼭 복기復棋를 하며 승패의 원인을 연구합니다. 실수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삶의 복기復棋’도 필수입니다. 이런 삶의 복기란 관점에서 이스라엘 패배의 원인을 규명합니다. 주님의 계약궤 자체가 승리의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계약궤에 의존함은 미신행위이자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이러면 하느님은 떠나고 이런 계약궤와 같은 성물은 유명무실해집니다. 성물聖物을 대할 때는 견월망지見月忘指,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는 말씀을 꼭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물 넘어 하느님을 보라는, 관상觀想하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실 때 계약궤도 권능의 원천이 되는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의 죄가 결정적 패착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지 못했고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이 패인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깨달음이 부족했고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에 많이 미흡했습니다. 100% 하느님께 달린 듯이 기도해야 되고 100% 나한테 달린 듯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철저한 회개의 복기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계약궤가 좋고 기도 많이 해도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주님의 뜻대로 삶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 좋은 성물도, 기도도 완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버립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 않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꾸준하고 한결같은 말씀공부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훈련이 절대적입니다. 이래서 ‘2022년 새해 기도시’가 절실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우리가 대패한 이스라엘의 처지에서 복기해 볼 때,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께 치유받은 나병환자가, 또 나병환자를 고쳐준 예수님이 우리에겐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나병환자처럼 주님 앞에 완전히 자기를 비운 겸손과 경청, 환대와 순종과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나병환자의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나병환자의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말씀하시니 나병은 가시고 그는 깨끗해 집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죄의 용서는 물론 나병의 육신의 치유는 물론 영혼까지 치유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도 ‘1.가엾이 여기는 마음, 2.사랑의 스킨쉽, 3.권능의 말씀’의 삼박자 구원의 치유 원리를 배웁니다. 이어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떠나가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니 복음 선포자가 되었고, 완전한 치유의 구원이 이뤄졌음을 증거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이 참 신속하고 지혜롭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선동적이지도 않고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지도 않습니다. 노자의 말씀대로 생이불유生而不有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입니다. 생은 과정이니 공을 이루면 결코 거기 머물지 않고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노자의 말씀대로 공을 이루면 거기 머물지 않고 곧장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남의 자리인 외딴곳으로 피신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어디 계시나 우리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파스카의 주님께서 계시니 주님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마태28,20ㄴ)고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며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드릴 짧은 기도는 ‘오소서, 주 예수님!’ 하나 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시편44,27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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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1,41b-42)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도 내일도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이 외침을 들으시고,
그를 나병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외침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 주님께로 향한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나자렛 예수가 나의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참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은 참으로 많은데, 비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참으로 많아 보입니다.
왜 일까?
나의 믿음이 약한 때문이고,
나의 간절한 호소가 약한 때문은 아닐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너무나도 부족함이 많은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해야만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하게 청합시다!
그래서 다시 깨끗한 영혼, 다시 구원 받은 영혼이 되어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의 삶'을 살아갑시다!
어제 독서에서 "사무엘, 사무엘아!" 하고 사무엘을 부르신 주님께서 오늘은 "루카야, 루카야!" 하고 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려고.
그 부르심에 우리도 사무엘처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라고 응답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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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을 보면,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죽음의 맏자식이 사지를 갉아먹는”(욥 18,13)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부정(不淨)한 자’로 여겨져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마침내 단절되어야 하는 고통을 받습니다(레위 13,45-46 참조).
‘부정한 사람’이라 외치며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하는
나병 환자가 용기 내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은 그의 간청에서 신뢰와 확신이 느껴집니다.
‘접촉해서는 안 되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며,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놀랍습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는 부정(不淨)을 정(淨)으로 바꾼 기적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나병을 고치는 것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능력으로,
죽은 이를 살리는 것과 맞먹는 능력입니다(2열왕 5,1-7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지만,
나병 환자는 놀라움과 기쁨을 혼자 간직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이 문장은 직역하면, ‘그 말씀을 널리
선포하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입니다.
어쩌면 마르코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만난 뒤,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가 되었음을 전하려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양한 고통과 단절의 상황에 부딪힙니다.
그럴 때마다 용기 내어 예수님께 다가가 엎드려 청합시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갑시다.
그분께서는 간절히 청하는 우리를 자비의 손길로 깨끗하게 하시고,
고통과 단절에서 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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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하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나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티토 1,15)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 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나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나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가족들도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또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천사들도 많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이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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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 42)
사랑이란
이름의
뜨거운
치유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가엾고
괴롭고
안타까운
이들이
참으로 많다.
예수님의
사랑법은
언제나
아픈 이들을
치유하시는
깨끗한
사랑이다.
너무 아파서
돌보지 않는
이들을
주님께서
돌보신다.
죽은 사람으로
취급받던
이들을
깨끗하게
치유하여 주신다.
삶을 되찾아
주시는 치유의
주님이시다.
아픈 맛이
살맛으로
바뀐다.
삶을
치유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치유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아픈 시간들을
주님께 의탁한다.
치유하여 주시는
주님을 향한다.
건강한 삶을
만나게 된다.
참된 치유는
건강한
소통이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건네는 우리들
일상이 곧
치유의
현장이다.
사랑은
말씀으로
시작되고
치유는
말씀으로
사랑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먼저 깨끗하게
되어야 할 것은
우리의 마비된
소통이다.
소통의
첫걸음은
주님과의
소통이다.
병든 관계를
주님과의
관계로
건강한 관계로
되돌려
놓으시는
주님은
건강한 말씀이며
건강한 소통이며
건강한 사랑이시다.
"저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바꾸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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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격리, 거리두기>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예나 지금이나 ‘악성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항상 ‘강제 격리’ 대상이 됩니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서, 또 병자들과 건강한 사람들을 모두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독재 국가에서는 ‘강제 격리’가 인권 탄압으로
변질되고,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병자에게 손을 대신 것은,
‘강제 격리’보다 ‘자비’가 먼저라는 가르침입니다.
자비와 사랑 없는 강제 격리는 죄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병자의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간청인데, 예수님의 ‘병을 고치는 능력’은 믿고 있지만,
예수님의 의향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이 바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병자의 믿음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고, 그의 ‘믿음의 부족함’은
예수님의 지시를 어기는 ‘불순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45절).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어떤 조건을 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면 ......을 바치겠습니다.”,
또는 “......을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바치는 기도는 ‘나쁜 기도’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흥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도와주십시오.’ 라고 한 마디만 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예수님 말씀의 원문은 “나는 원한다.”인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당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내가’ 원하고 있는 그것을
‘나보다 더’ 간절하게 원하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청하기도 전에 먼저 알고 계시는 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고 계신다.’는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신다.’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주시는 그것을 잘 받기 위해서 합니다.
(안 주셔서 받아내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3-45).”
여기서 ‘단단히 이르셨다.’ 라는 말과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라는 말은,
지금 예수님의 지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단히 엄중한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납득이 되지 않아도, 꼭 지켜야 하는 명령.>
그런데 그 병자는 예수님의 지시를 바로 어깁니다.
물론 그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불순종이고, 배은망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 때문에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시게 되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병자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지시를 어긴 그의 행동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일하시는 주님을 외딴곳으로 밀어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지 않은 그 사람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람들과 당신 사이에 ‘거리두기’를 실행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신 것은
‘몸의 치유’에 관해서만 소문을 퍼뜨리는 짓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병자가 퍼뜨린 소문은 “예수님은 몸의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몸의 치유’만을 원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과 반대되는 이야기가 뒤의 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마르 5,18-20).”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널리 알리라고 명령하실까?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람의 ‘그릇’과 ‘신앙심’의 차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기 전에 그들을 충분히 훈련시키셨고,
여러 가지로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아무에게나 복음 선포 임무를 맡기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또 신앙심이 부족한 상태라면,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또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자기만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복음 선포가 아니라,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죄가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사도 15,24).” 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시에 사도단과 일치를 이루지도 않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거슬러서,
자기만의 생각을 교리인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큰 혼란과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와 계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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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치유와 하느님의 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마르 1,41)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전도여행의 전형적인 본보기인 정화(淨化)에 대해 전해준다. 나병은 성서와 유대교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재액(災厄)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나병은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그 환자는 격리되어 신앙공동체에도 낄 수 없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 나환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로 간주되었다(민수 12,12).
나환자는 무릎을 꿇고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간청하였다(1,40). 그의 간절한 청은 자신의 신앙을 예수님께 알리는 것이었으며, 상처입은 그대로 그분께 나아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41) 하시며 깨끗하게 해주셨다. 손을 내밀어 하느님의 사랑의 힘, 치유능력으로 정화시켜주신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들었을까? 그것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능력, 곧 사랑과 자유와 해방의 힘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바꾸고 치유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다. 나는 다른 이를 치유하고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랑을 지니고 있는가? 사랑이야말로 모든 병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치료제가 아닐까? 나는 상처입은 치유자인가 상처를 덧내는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치유 받은 나환자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1,44)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렇게 하신 까닭은 그 치유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드러내는 표징이자 메시아 시대의 은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유 받은 이들은 치유 받은 사실을 널리 알리고 퍼뜨렸다(1,45). 치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이 확산되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좋은 일은 알려지게 마련이고 알려져 공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좋음은 좋음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주시고 원하시는 선(善)이 아니라 내 기준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들어대고, 그것을 통해 은연중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는가?
랍비 신학은 나병은 저지른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보아, 나환자를 죄인으로 여겼다. 꿈란 공동체에서도 인간을 부정하게 하는 것들에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QSa 2,3-4).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면서 동시에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1,44) 하고 말씀하신다. 나환자가 다시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관에게 치유되었음을 인정받고서 제사를 바쳐야 했다(레위 14,2-32). 우리도 영혼의 어둠에서 다시 빛으로 이끌어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주시며,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때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겠다.
어둠과 죄와 아픔 중에서도 나환자처럼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깨끗하게 해주시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사랑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 서로를 치유하고 해방시켜주도록 하자. 그분의 능력을 굳건히 믿고 영혼의 어둠과 상처와 고통 중에도 감사하며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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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손길이 가련한 인간의 상처에...
자비의 해를 보내며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대해 자주 묵상합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하느님의 자비를 손에 잡힐 듯이 설명하고 있는 교과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시간이 사실 너무 짧았습니다. 공생활 기간이 딱 3년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체험한 바처럼 어물쩍하다보면 어느새 5년 10년이 후딱 지나가지 않습니까?
세월이라는 것 마치 손에서 떠난 화살처럼 그렇게 빨리 지나갑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께 허락하신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루 한 순간이 아까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침식까지 잊어가며 그렇게 복음 선포를 위한 당신의 발길을 재촉했던 것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여러분들, 혹시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겐가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습니까?
무릎 꿇는다는 것 이것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이지 특별한 표현입니다. 마지막 남아있는 알량한 자존심,
사람들의 이목, 수치심... 다 내려놓고 간절히 청하는 절박함의 표현이 무릎 꿇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과는 달리 당시 나병환자들은 인간세상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 확진과 동시에 나병환자들은 죽은 사람 취급을 당했습니다.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인간 사회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성 밖에서 움막을 짓고 짐승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저 모진 목숨 떨어지지 않아 하루하루가 괴로웠던 사람들이 당시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런 나병환자의 측은함, 안쓰러움, 절박함 앞에 예수님의 마음이 자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내면은 금방 상대방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나병환자가 오랜 세월 겪어온 그 끔찍한 고통이 내 일처럼 여겨진 예수님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자동으로 나병환자의 환부에 가 닿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런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이 한 가련한 인간의 냄새 진동하는 환부에 가 닿습니다.
정말이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며 너무나 송구스런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은혜롭고 축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민 가득한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한 나병환자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나병으로 인해 스스로를 학대하고 저주하던 그는 어디로 사라지고 순식간에 무장해제 되어 예수님 앞에 갓난아기처럼 변합니다.
그분께서 풍기는 한없이 따뜻한 분위기 앞에 서러웠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큰 위로에 힘을 얻은 나병환자는 ‘바로 이 분이구나!’하는 확신을 가지고 간곡히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 1장 40절)
오늘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기도는 바로 이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환자의 간곡한 기도, 열렬한 기도,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꼭 나아서 보란 듯이 한번 새 삶을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마음, 반드시 살아서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내 온몸으로 외치겠다는 간절한 기도는 하늘마저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으십니다.
주님, 저를 이 나태함이란 중병에서 건져주십시오.
주님, 저를 이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함, 우유부단함에서 일어서도록 고쳐주십시오.
주님, 죽을 때 까지 계속될 것만 같은 이 악습에서 저를 빼내주십시오.
주님, 제 뿌리 깊은 이 영혼의 상처를 당신 사랑의 손길로 고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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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모든 은총은 하나의 ‘시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이 받은 은총을 전하는 것이 더 주님께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퍼뜨립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신분으로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총을 받는 것이 중요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물론 은총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은총은 좋은 만큼 모두가 하나의 ‘시험’입니다.
세상에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시험을 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일류 대중 선동가이며 히틀러의 악행을 정당화하려 노력했던 ‘악마의 재능’이라 불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기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입니다. 괴벨스가 모든 면에서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 않았고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소아마비로 오른발이 마비되어 여러 차례 수술하였지만
결국 평생 발을 절룩거려야 했습니다.
1차대전 때 독일군 입대를 신청했지만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가족의 굉장한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키는 163cm였습니다. 매우 작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열등감을 영웅을 찾아 극복하려 하였고 그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만나기 전 쓴 소설이 있었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렸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반유대주의와 소설가적 재능을 보고 그를 자신의 목소리로 사용하였습니다.
나치 선전 책임자로 세워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영화와 팸플릿을 만들고 책을 쓰는가 하면
다른 책을 불태우고 독일인에게 유대인이 적이라고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그는 거짓말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세뇌할 수 있는지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영화산업을 장악하여 지독한 반유대주의를 담은 영화를 상영하고 언론을 통해 조장하였습니다.
역시 대중은 그의 거짓말을 듣다가 결국엔 믿게 됩니다.
1938년 기회가 옵니다.
유대인 망명자가 나치 외교관을 암살한 것입니다.
괴벨스는 이 사건을 유대인의 반란이라 날조하였고 열광적인 연설을 통해 잔혹한 복수를 요구했습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어느 날 밤 폭동을 일으켰는데,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된 조직적 폭력이었습니다.
이날을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부릅니다.
한 나라의 사람들을 일제히 선동하여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재능은 정말 천재적인 재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재능을 좋은 일이 아닌 히틀러를 위해 썼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히틀러를 위해 쓴 게 아닙니다.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쓴 것입니다.
히틀러도 외국의 비판이 거세지자 ‘깨진 유리의 밤’을 조장했던 괴벨스에게 화를 냈습니다.
괴벨스는 열등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며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속하려면 교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나의 뜻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겸손해진다는 뜻입니다.
순종이 바탕이 된 안에서 은총이 와야 그 은총이 나를 망치지 않습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2003)는 한 지방 방송국 앵커인 브루스가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브루스는 쫓겨난 직장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물론 잘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잃게 되는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였습니다.
잘 나가다 보니 지금까지 사귀던 여자는 그냥 소모품처럼 여겨집니다.
그렇게 바람을 피우다 헤어집니다.
세상 것을 다 얻었지만 한 여자의 마음은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얻어도 허전하기만 합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얻는 것도, 교회에 머무는 것도 내 뜻을 봉헌하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준비 없이 받는 능력은 우리를 저절로 교만하게 만들어 누구도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공부할 때도 항상 ‘겸손과 사랑의 증가’에만 초점을 맞추어야지 저는 공부를 많이 해서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모든 은총은 교회에 순종해야 함을 잊을 때 은총이 아닌 저주로 변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2장 전체를 은총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쓰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러며 제13장에서는 은사 중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겸손과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청해야 할 전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위해 이 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루터는 이 은총을 교회를 벗어나는 것을 위해 씁니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은총을 구합시다. 그러나 은총이 나에게 시험이 되지 않으려면 교회를 사랑합시다.
교회에 유익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합시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은 그 은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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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역사 책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표현은 이스라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도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한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지향하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하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인간의 역사와 이건 공통점입니다. 그외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는 다른 이유도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사례도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인간의 역사이든 사람의 역사이든 교훈과 경종은 조금 성질을 달리합니다. 얼핏 보면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은 차이가 납니다.
교훈도 하나의 경종이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강도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역사가 남기는 어떤 교훈이 있다고 해도 그 교훈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그런 상황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인식을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나간 하나의 역사로서만의 가치가 있고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는 인식 때문에 그런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경종은 하나의 경고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를 지나간 하나의 역사로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예언자와 같은 말처럼 예언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역사적인 내용이 있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단초로서의 역할은 이것만 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이런 관점을 배경으로 해서 오늘 복음을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줄거리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치유 기적으로 낫게 되어 환자에게 예수님께서 단단히 일러주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것을 말씀하십니다. 근데 사제에게는 하나의 증거가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강조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환자는 이런 사실을 널리 알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유명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외진 장소에서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됩니다. 복음에는 '그래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백 번 양보해서 설령 예측을 할 수 없으셨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부도난 수표가 아닐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낭중지추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사실 잘 곱씹어봐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라는 말 때문에 뭔가 자신이 나팔을 불어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판단입니다. 형태는 스스로 자발적인 모습을 취하긴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끝이 뾰족하기 때문에 당연히 돌출될 수밖에 없는 형상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기려고 하신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드러내지 않으시려고 하셨지만 그런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론적으로 보면 드러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생색을 내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상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의도는 말하지 말라고 해도 그 환자가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사자성어 낭중지추와 연결해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묵상합니다. 우리 보통의 사람은 선이나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나면 그걸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세상에 자신의 행위가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도 예수님의 이런 점은 닮아야 하는 하나의 교훈도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하나의 교훈으로 그칠 게 아니라 하나의 경종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또한 한 가지 더 묵상한다면 세상에는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걸 하나의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걸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걸 당신께서 하신 치적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이중 인격자의 속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건 당연히 아니겠죠. 그럼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증거가 되게 하라는 뜻은 어떤 뜻일까요? 사실 제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는 잘 모릅니다.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묵상입니다. 저는 이게 서두에 제가 말씀드린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의 그 모습은 단순히 당신의 치적을 인간처럼 드러내시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세상에 전하시기 위해서 일 겁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역사의 한 단면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증거'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여러 다양한 것을 묵상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도 많겠지만 가장 핵심은 선을 행하는 것 외에도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보다는 정말 하느님만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해도 충분히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결과는 하느님만 아실 수도 있지만 저는 진실로 그런 의도가 백프로라고 한다면 자신이 드러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낭중지추의 사자성어가 말해주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드러내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제가 하느님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하느님이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인간인 저 역시도 그런 마음인데 하느님께서는 두말 해야 무엇하겠습니까?
오늘 복음묵상의 결론을 단 하나의 표현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선을 행하고도 선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 선행은 단순히 하나의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선행으로 하늘나라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 세상에 남기는 역사는 인간 세상에만 남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언젠가 영원의 세상에서 보면 사라지는 역사이지만 우리는 멀리 바라본다면 영원한 영원의 세계에서 영영세세 무궁토록 남는 선행으로 하늘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으려면 굳이 제가 결론을 내지 않아도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게 잘 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고 영원을 갈망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지금 받는 어떤 명예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명예라면 모를까 단순히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명예를 추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자기가 받을 상이 아주 초라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나라에서 받을 큰 상을 생각하고 영원히 남을 영광을 생각하며 이 세상을 산다면 그처럼 영예로운 삶도 없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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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사무4,1ㄴ-11)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 주님의 계약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 (4~5)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에서 '좌정하신'에 해당하는 '요세브'(yosheb; is enthroned; dwells)는 '앉다', '머무르다'라는 뜻의 동사 '야샤브'(yashab)가 분사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커룹'과 같은 단어와 함께 사용되면, '커룹들 위에 좌정하시다', '커룹들 사이에 좌정해 계시다'와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갖게 된다(2사무6,2; 시편99,1). 새 성경이 번역한 '커룹'은 복수형 '케루빔'(kerubim)이 단수형 '케루브'(kerub)를 한글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케루빔'은 천사의 한 이름으로 묘사되는데, 얼굴과 날개를 가졌다고 하는 것 외에 성경이 그들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있는 것은 없다(탈출25,20).
이들의 역할은 계약 궤를 보호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느님의 어좌를 떠받치는 것인데, 성경은 두 커룹 사이에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거나(탈출25,22; 민수7,89) 좌정하신다고(2사무6,2) 묘사하고 있다.
사무엘서 상권 4장 3절에서는 단순히 '주님의 계약 궤'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여기 사무엘서 상권 4장 4절에서는 저자의 관점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라는 수식어가 첨가되었다.
'만군의 주님이'에 해당하는 '예흐와 체오바트'(yehwa tsebaoth)에서 '만군의'로 번역된 '체바오트'(tsebaoth)는 '군대들' 혹은 '많은 군대'를 뜻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대개 이것을 '주인', '군대'를 의미하는 'host'와 같은 명사를 사용하여 'hosts'로 번역하거나 '전능하심'이란 뜻으로 이해해서 'almighty'로 번역한다.
사무엘서 저자는 '만군의 주님'에 해당하는 '예흐와 체오바트'라는 표현을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용할 뿐 아니라 사무엘서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만군의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보여진다.
이 표현은 또한 사무엘서의 실질적인 중심 인물인 다윗이 위대하게 된 것이 그를 인도하신 '만군의 주님' 때문임을 알게 하는데 쓰여진다.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노래인 사무엘서 하권 22장 18절에서 "나의 힘센 원수에게서 나보다 강한 적들에게서 나를 구하셨네"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용사는 자신이 아니고 주 하느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군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사무엘서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중심 단어들 중에 하나이며, 이것은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만물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판관4,2; 1열왕22,19; 신명4,19).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
계약 궤가 실로에서부터 도착하였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사제로서 계약 궤와 동행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거기에 엘리의 아들 둘이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있었는데, 호프니와 피느하스였다' 이다.
호프니와 피느하스를 강조적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문장 구조를 통해 엘리의 아들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극적인 긴장감을 갖게 한다.
또한 '거기'에 해당하는 '샴'(sham)과 '함께 왔다'에 해당하는 '임'(ym)은 주님의 계약 궤를 가져온 이 사건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 암시를 주고 있다.
사무엘서 상권 2장 12절에서 저자는 호프니와 피느하스를 '불량한 자들'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불량한 자들'에 해당하는 '뻬네 벨리야알'(bene belliyaal)은 '무가치한 자의 아들들' 혹은 '사악한 자의 아들들'을 의미한다.
또한 사무엘서 상권 2장 17절에서 그들의 죄가 주님 앞에서 매우 커진 것은 그들이 주님의 제물(제사)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불의한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궤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불결함이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해 준다.
만약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위해 계약 궤를 앞에서 전진하게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의 이스라엘의 거룩함과 순결함일 것이다(여호3,15).
그런데 호프니와 피느하스와 같은 부정한 자가 스스로 거룩함을 회복하지 못한 채
불결하게 주님의 계약 궤와 '함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모욕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 지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사무엘서 상권 4장 5절의 큰 함성은 하느님의 궤는 있지만, 사실상 하느님의 개입은 전혀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땅은 온 이스라엘의 함성으로 뒤흔들렸지만,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신다.
따라서 본 단락은 주님의 계약 궤의 출현으로 승리를 확신하는 이스라엘의 떠들썩한 분위기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 궤를 빼앗기고 온 성(城)이 패배를 부르짖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1사무4,13).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안인들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주님의 계약 궤를 빼앗기는 이야기이다.
엘리 사제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의 범죄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그 결과 주님의 궤를 빼앗기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소홀히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제의 신분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경멸했고, 하느님께 드려야 할 제물을 먼저 빼앗아 먹었으며, 만남의 천막 어귀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음란한 죄를 범했다.(1사무 2,11-17.22-25)
그들은 아버지 엘리의 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 중재하여 주시지만, 사람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그를 위해 빌어 주겠느냐?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그들을 죽이실 뜻을 품으셨기 때문이다." (25)
이스라엘은 이제 에벤 에베르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배하고,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나 죽었다.(1-2)
그래서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패배 원인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고 대책을 내놓는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패배가 전혀 뜻밖이라는 탄식조의 발언을 하며, 필리스티아인들에 비해 병력이나 군비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었음에도, 무참하게 패배한 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엘리 사제와 그 아들들에 대한 심판이 전쟁의 패배로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하느님께도 책임이 있다는 말투를 드러낸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3)
이들은 지금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은 무조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심판하시는 분임을 모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인 동시에 정의의 하느님이신대도 말이다.
바로 <실로>에 있는 주님의 <계약 궤>를 진중으로 가져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서 패한 원인이 주님의 <계약 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님의 <계약 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3-4)
그런데, 그 <계약 궤>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이 바로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였다.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인 그들이 거룩한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계약 궤>를 지킨다는 것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계약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 (5)
이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함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떠나버린 <계약 궤>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상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히브리인들의 진영에서의 함성 소리를 듣고, 주님의 궤가 진영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우리는 망했다! 이런 일은 일찌기 없었는데~" (8) 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전쟁 중에 <계약 궤>를 가지고 온 것이 처음이라는 뜻도 되고, 필리스티아인들이 처음으로 전쟁 중에 공포를 느꼈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은 히브리인들의 포로와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나이답게 싸우자"고 격려하며 대담하게 싸워서, 이스라엘의 보명 십만명을 죽이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는다. (9-11)
우리 주님께서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심으로, 어떤 장소나 어떤 상징적인 물건에 구속받지 않으신다. 주님의 임재가 떠난 <계약 궤>는, 아무런 힘도 소용도 없는 나무 궤짝에 지나지 않는다.
범죄한 백성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은 전혀 방패와 도움이 되어 주시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사건은 바로 엘리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징계이다.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대한 징계인 동시에,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1사무 2,34)
<계약 궤>는 하느님이 임재하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계약 궤>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 상징이 의미하고 있는 본질을 바로 알지 못함으로, 미신적인 신앙으로 흘려 버렸다. 무조건 <계약 궤>만 있으면, 거기에서 능력이 나와서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하느님의 놀라운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이 그 특권을 누리려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죄는 그대로 품은 채, <계약 궤>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계약 궤>가 진중에 도착한 것을 보고, 함성을 지르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 주님은 겉이 아니라 속(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눈에 보이는 성전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면 무엇하는가? 그 성전 안에,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가? 가 중요하다. 겉만 잘 포장된 위선적인 신앙인 말고, 인격의 중심에 항상 주님을 모신 자녀,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하고 거룩한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자.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독서묵상(1사무 4,1ㄴ-11)
(1사무 4,1ㄴ-11)
1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 2 필리스티아인들은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에게 맞섰다. 싸움이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하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벌판의 전선에서 이스라엘 군사를 사천 명가량이나 죽였다. 3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4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 5 주님의 계약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
6 필리스티아인들이 이 큰 함성을 듣고, “히브리인들의 진영에서 저런 함성이 들리다니 무슨 까닭일까?” 하고 묻다가, 주님의 궤가 진영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 필리스티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하였다. “그 진영에 신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망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8 우리는 망했다!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저 신은 광야에서 갖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친 신이 아니냐!
9 그러니 필리스티아인들아,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히브리인들이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가 그들을 섬기지 않으려거든, 사나이답게 싸워라.” 10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11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
= 하느님의 궤의 의미도 모르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섬기고 의지하는 행위, 하느님의 진노를 살 일입니다.
그래서 그랬던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궤를 빼앗아 갔던 필리스타인들 또한 그 때문에 하느님께 벌을 받자 궤를 돌려보냅니다.
(1사무6, 13) 13 그때에 벳 세메스인들은 골짜기에서 밀을 거두어들이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는 기뻐하며 나가 맞았다. 19 그런데 주님께서는 벳 세메스 사람들이 주님의 궤를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치셨다. 그 백성 가운데에서 일흔 명과 오만 명을 치신 것이다. 주님께서 그 백성을 그토록 크게 치셨기 때문에 그들은 애도하였다.
= 하느님의 궤를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 보면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모든 것은, 구원의 헛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오늘 그 하느님의 궤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탈출25, 17-22) 17 너는 순금으로 속죄판을 만들어라. 그 길이는 두 암마 반, 너비는 한 암마 반으로 하여라.
=순금-하늘의 왕께서 속죄 제물로 오신 그 대속의 의미인 속죄판 입니다.
18 그리고 금으로 커룹 둘을 만드는데, 속죄판 양쪽 끝을 마치로 두드려 만들어라.
= 금- 왕의 심판권을 갖는 커룹입니다.
19 커룹 하나는 이쪽 끝에, 다른 하나는 저쪽 끝에 자리 잡게 만들어라. 그 커룹들은 속죄판 양쪽 끝에 만들어야 한다. 20 커룹들은 날개를 위로 펴서 그 날개로 속죄판을 덮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게 하여라. 커룹들의 얼굴은 속죄판 쪽을 향해야 한다.
= 커룹이 속죄판을 향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속죄(대속)판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21 너는 그 속죄판을 궤위에 얹고, 궤 안에는 내가 너에게 줄 증언판(십계명)을 넣어라. 22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나고, 속죄판 위, 곧 증언 궤위에 있는 두 커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내가 너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일러 주겠다.”
= 증언판(십계명)위에 속죄판(대속-용서)이 있고 그 속죄판 위에 커룹(심판) 둘이 있는 모습입니다.
다시- 1 맨위에 커룹 2 그 밑에 속죄판 3 그 밑에 증언판- 하느님의 계약의 궤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권을 갖은 커룹(천사) 둘이 증언판 곧 십계명으로 심판을 하려고 하지만 중간에 속죄판이 가로 막고 있어 심판을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궤위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를 위한 모든 명령(계명), 말씀을 주신다. 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명령(계명) 그분의 말씀을 어겨 반드시 죽어야만 될 우리 죄인들을 속죄판 곧 대속의 죽음으로 만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죄 제물의 그 대속의 죽음은 모르는체 보이는 그대로, 그 궤의 형상만을 섬기게되면 우상의 행위가 되니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20,12)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 우리의 죄를 증언할 그 계명판을 가로 막고 계시는 속죄판 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위에 두 천사, 두 커룹이 있습니다. 속죄판 그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 때문에 심판권을 가진 천사(커룹)가 심판을 못합니다.
(루카12,8-9)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커룹 둘)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 십자가의 예수님, 그 나께서 당신의 대속으로 나의 무죄를 증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십계명을 열 개의 법으로 받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그 죄를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로 대신 죽으신 그 무죄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 십계명 각 계명 안에는 속죄 제물로 죽으신 그 대속의 죽음 그 사랑 하나가 들어있는 하나의 계명인 것입니다.(마태 223,38참조)
그 하느님의 뜻, 그 구원의 계명, 십자가의 의미는 모르면서~~ 내 뜻을 위한 섬김, 십자가 경배 등 그 종교행위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니 불법, 죄입니다. (마태7,23. 20,28참조)
그래서 그 열심한 종교행위로 영적으로 죽어가지만 고통을 모르는 그 나병에 걸리는 겁니다. 오늘 복음의 그 나병 환자가 바칠 예물이 바로 어린양의 죽음, 그 속죄판임을 깨닫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레위14,11참조)
성경 속에서 그 대속으로 얻는 용서, 생명, 구원, 그 하느님의 약속을 찾아 내안에 간직하면 됩니다. 그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 아멘 -*^ㅇ^*-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1,40~45)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4)
여기서 '모세가 명령한 예물'이란, 모세의 율법에 부정한 이가 정결함을 입었을 경우에 사제에게 가서 바쳐야 할 제물들을 가리킨다.
정결례에 관해 기록된 레위기의 규정을 보면, 이것은 살아있는 정결한 새 두마리, 향백나무, 다홍실, 우슬초였고(레위14,4), 다시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바쳐야 하는 것으로는 흠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 곡식 제물로 바칠 기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삼 에파와 기름 한 록이었다(레위14,10).
또한 마르코 복음 1장 44절 전반부에 기록된 것처럼, 그 제물을 바치기 전에 자신이 병이 나았음을 먼저 사제에게 보이고 정결한 이로 선언을 받아야 한다(레위13,16.17).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사가 바쳐지던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고(마태12,6), 당신 자신이 임금같은 대사제인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르신 대사제이시므로, 반드시 구약의 제의적 행위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다(히브6,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치유받은 나병 환자에게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거나 부정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고 완성하러 오셨다(마태5,17)는 사실을 확인하여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치유의 완전성을 보여 준다.
당시 나병 환자의 완치를 공적으로 확인해 주던 사제에게 보여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치유는 완벽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환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유대인 공동체 안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우리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아무런 하자없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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