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0. 10;30
횡성호 둘레길 주차장의 분위기가 묘하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우리 또한 통행금지가 된 둘레길 들머리의 광경에
한숨이 나온다.
주차장 지킴이는 지난 금요일 횡성에 폭우가 내렸고,
미처 물을 빼지 못해 호수 둘레길이 몽땅 물에
잠겼으며,
물을 빼더라도 피해복구 및 안전점검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며 '숲 체원' 등으로 목적지를 바꾸면
좋을 거 같다고 말한다.
이번에도 여행은 미완성인가.
모처럼 잡은 일박 산행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국립 횡성 숲 체원'의 숲길을 걸을까 망설이다가
청태산 자연휴양림 잣나무 숲길로 행선지를 바꾸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누구의 잘못인가,
관리인은 홈페이지에 입장불가라고 공지를 하였다는데
그 공지를 보고 올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예전부터 능력 있는 목민관은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무릇 인심이란 치수에서 나오는 법,
민심이 천심이요, 민심은 바로 치수가 아닌가.
매번 헛발질을 하는 최고 권력자와 썩을 대로 썩은
정치인들과 이 지방 목민관은 무엇이 다를까.
이들은 아직도 군주민수(君舟民水) 즉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舟)이고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고사성어를 모르는 모양이다.
허(虛)한 사람이 산에 가면 산이 사람을 품어주고,
열받은 사람이 물에 가면 열을 식혀준다.
물과 산이 있어 호생지기(好生之氣)와 이완(弛緩)의
에너지가 충만한 횡성호 둘레길을 놓치다니 못내
아쉽다.
미리 물을 빼는 등 수해 예방대책의 매뉴얼을 실천
하였다면 피해가 없었을 텐데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인재(人災)라고 할 수밖에 없다.
10. 31 09;10
최근 두 개의 5년짜리 숙제를 했다.
운전면허증 갱신과 대장내시경 검사이다.
적성검사 안내장을 받고 아무 생각 없이 경찰서를
향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 한참만에 담당 경찰관이 호명을
한다.
뜻밖에 작년 건강검진 결과 왼쪽눈 시력이 기준에
미달해 1종 운전면허증으로 갱신이 되지 않는다며
병원에 가서 시력검사를 하던지 면허시험장에서
적성검사를 받으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순간 당황하고 가슴에 식은땀이 난다.
그것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운전을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운전이 직업은 아니지만 그나마도 못하면 사람
구실도 못하는 황혼 폐품 신세가 되는데 말이다.
황반변성으로 왼쪽눈 시력이 바닥까지 떨어졌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아직은 암기에 자신이 있으니 꼼수로 시력표를
외우고 적성검사를 받을까, 아니면 면허증 반납을
할까 생각이 많아진다.
시력검사표를 몇 번 보니 4, 2, 3, 5, 2, 7, 3, 4 등
숫자와 기호가 금세 암기가 되어 1.0이 나온다.
막상 병원에서 시력검사를 할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냥 보이는 대로 검사를 받았고 양안 시력이
0.9가 나와 1종이 아닌 5년짜리 2종 면허증으로
갱신하는 데 성공했다.
면허증 갱신 후에 또 걱정거리가 생겼다.
위장과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지긋지긋한
장정결제를 마실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전에도 시큼한 황산염 냄새로 반이나 토했기에
알약처방을 부탁하니 주치의는 알약이 신장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병원에서 주는 장정결제를
복용하라고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억지로 마시지만 결국
두 번째 병은 반이나 토하고 내시경검사를 받았다.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았는가,
해야 할 생각은 안 하고, 쓸데없는 생각만 많았으니
잠시 심유이병(心有二病)을 앓았나 보다.
마음이 있는 데서 오는 병은 유심지병(有心之病)이요,
마음이 없는 데서 오는 병은 무심지병(無心之病)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 않고 허튼 마음을 닦아내며
참다운 마음을 가지면 될 일을 마음이 제대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한동안 몸은 허깨비와 다름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 드는 나이만큼 깊어지는 것들이
많아진다.
군데군데 주름이 자리 잡아가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외모보다 내장이 더 먼저 늙어가는 모양이다.
작년에도 CT 조영제 부작용으로 얼굴이 많이 부어
큰 바위얼굴이 되는 일을 겪었기에 이번엔 알레르기
주사를 맞으며 CT 촬영을 하였다.
맞고보니 이번 조영제 주사의 부작용은 더 심해졌다.
한창 술을 마실 때 소주 서너 병을 마셔도 속이 쓰리지
않았는데 이번엔 15일 이상 잠을 못 잘 정도로 속이
쓰리고 아프다.
겨우 속 쓰림에서 벗어났다 싶더니 심한 두통이 왔다.
하루이틀이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며 버티었는데
가라앉지를 않고 점점 정신이 자몽 해진다.
부랴부랴 혈압측정기를 꺼내 재보니 혈압이 높다.
평생 꾸준히 운동을 하였기에 이 나이 되도록 혈압과
당뇨 걱정 없이 살았는데 참 난감하다.
3일간 시간시간마다 혈압을 재서 메모를 하는데
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머리는 여전히 무겁다.
이제부터라도 혈압약을 복용하면 머리와 마음이
편해지려나.
불편한 몸상태가 내 얼굴에 나타난 모양이다.
친구나 지인들이 별일 없느냐고 물어도 속마음
감추고 애써 웃고 만다.
모든 거는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덧입혀지면 된다.
아프지 않고 상처 한 조각 없는 사람이 그 어디에
있을까.
09;10
숙소에서 50여분을 달려 풍수원성당에 도착한다.
풍수원 성당은 1802년 이곳에 자리 잡았고,
1913년 우리나라에서 7번째로 지은 서양식 성당이다.
천주교 성체성지로 성당 앞마당의 느티나무 두 그루는
수령 130년 이상 되어 자못 신령스럽다.
풍수원 성당 경내의 분위기는 엄숙하다.
이곳에선 기침소리도 사치스러울 거 같아 나 스스로
침정(沈靜)에 빠지며 입을 다문다.
풍수원 성당길은 무아(無我)의 길이다.
나도 모르게 번뇌, 아픔, 잡념이 다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치유의 길이자 무아의 길을 걸으며 낯선 그리움
한 조각 걷어내고 뜨거운 눈물 펑펑 쏟아내며 엉엉
울고 싶다마는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건가.
유일신을 모시는 성당 장독대를 내려다본다.
우리 토속신앙에 의하면 장독대를 관장하는 신은
철융신(天龍神 또는 七星神)이요,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成主神),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竈王神), 화장실을 관장하는 정랑각시(측신
厠神), 우물을 지켜주는 신을 용왕신(龍王神)이라 했다.
예전에는 장독간 둘레에 백일홍을 심어 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는데 백일홍 사라진 장독대에 햇볕이
스며들자 나뭇잎이 가지를 떠나고 쪽빛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오늘 새벽에는 수없이 많은 별을 보았다.
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최소 450개 이상의
별을 한꺼번에 봐야 한다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지만,
여기 풍수원 성당의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길에서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사람소리,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적한 성당길을
걸으며 불교에서 많이 쓰는 무아(無我)를 말한다.
어차피 세상사 모든 것이 만류귀종(萬流歸宗)이
아니던가.
한참을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라는 단어 자체가
생각나지 않았고 그냥 발걸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나 스스로의 존재를 잊는 거도
잊었나 보다.
2024. 10. 31.
횡성 풍수원 성당에서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