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8년 5월 20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아주 예전에 한겨울에 도시가스가 끊긴적이 있어
가스공사에 전화를 했더니 연체되어 자동으로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연체한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얼마 연체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조금 후 20원 연체 되었다고 해서
20원 연체되었다고 한겨울에 가스공급을 끊느냐며 호통쳤습니다.
또 예전에 신용카드가 있을 때
물건을 사면서 카드로 결제했는데 신용불량자라서 카드를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카드회사에 전화해서
왜 신용불량이냐고 물었더니 오랫동안 텔레콤 500원을 결제하지 않아서
신용불량자로 등록 되었다고 했습니다.
텔레콤 쓴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냐니까
국제 전화라고 해서 알아보니까 중국 선교사가 수신자 부담으로 텔레콤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전화요금과 별도인 것을 알았습니다.
20원 때문에 가스공급이 중단되고
500원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쓰라린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후 집 전화를 버리고
휴대폰과 신용카드를 모두 버렸습니다.
사역하면서 휴대폰을 사줄려는 사람도 많았지만
오늘날까지 도심속 자연인으로 아주 미개하게 살고 있습니다.
휴대폰과 전화 요금 염려없이 살지만
북한 인권과 지하교회에 대한 회복의 기도를 합니다.
전화와 휴대폰이 없다보니
유튜브를 비롯한 일체의 웹사이트에 가입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한 때 웹 마스트와 그래픽 유저로 활동하였지만
소셜네트워크 시대 원시인의 조건을 제대로 갖추었습니다.
전화가 없으니 아무도 연락할 수 없고
또 전화 문화를 버렸으니 누구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고 삽니다.
전화 문화를 일찍 버렸기 때문에
전화로 인한 시비는 일체 없습니다.
전화로 안부받고 전할 일도 없고 협박받을 일도 없고
보이스 피싱을 당할 염려도 전혀 없습니다.
필자를 매주마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출석하는 교회 담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담임은 매주 얼굴을 보면서도
인사와 대화할 수 없다고 불만인 것 같습니다.
축도 후 뒤를 보이지 않고 바로 예배실을 나서기 때문에
누구와도 만나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과 그 문화에 익숙합니다.
간혹 출사를 갈 때면
출사의 장소가 축제장이어서 인산인해의 대중을 만납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동안 쌓인 이야기를 하자면 아주 많이 어색하지만
낯선 사람을 만나면 아주 편합니다.
대중의 한 사람으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면서
세상의 진실을 추적하지만 누구와도 얽매이지 않는 삶으로 초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중동의 초연한 삶을 살지만
유튜브의 열린 창으로 세상을 관찰합니다.
그렇기에 필자의 일거수일투족은
특별할 수 밖에 없습니다.
1원의 절감효과라는 카페의 제목을 붙였는데
화장지와 물수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연애인 가운데 가장 절약형의 인물은
군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김종국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탁월한 절약 정신은
연애인으로 불가해한 생활 패턴을 가졌습니다.
TV를 보지 않아 연애인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김종국의 절약형 삶의 비화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화장지 세 컷으로 뒤처리를 다하라고 해서
손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늘 노트북 앞에 앉아 컴터를 사용하는데
탁자 위에 화장지를 갖다 놓으면 어떤 형태로든 사용하게 되고 휴지가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화장지를 대신할 물수건를 사용하면
휴지통의 휴지는 쌓이지 않습니다.
늘 주방을 담당하다 보니 음식을 하면
음식물 쓰레기가 배출됩니다.
주로 무와 양파와 당근과 파 등 식재료의 껍질이어서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지 않고 물기를 없애고 말려서 아령으로 몇 번 밀면 가루가 됩니다.
그 가루를 화분의 흙과 섞으면
아주 훌륭한 유기농 거름, 자연산 퇴비가 됩니다.
최근 최신 믹서기를 구입하면서
옛날 믹서기로 음식물 쓰레기를 분쇄합니다.
서민의 삶으로 다이소와 마트를 자주 이용하는데
비닐 봉투 값 20원을 받습니다.
10원짜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20원하는 비닐 봉투값을 50원, 혹은 100원을 지불하지만
다이소에 물건을 사고 마트를 이용하면 비닐 봉투 하나 값으로 충분합니다.
다이소에서 주로 구입하는 물건은 원예용 자갈이요,
마트에서는 두부와 고추와 양파와 무우와 파 등 식재료입니다.
원예용 자갈은 백령도의 콩돌이어서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고
신비스럽게 계곡과 해변의 자갈, 그 서정을 베란다에서 느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원예용 자갈로 장식된 베란다의 허브 동산은
항상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계곡과 바다의 향을 느낄 수 있어
디테일한 서정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생활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조각한다면
이렇게 카페의 엉뚱한 글이 되어 글의 여백을 생각의 여운으로 가지게 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서와 성경의 차이점에 대한 분석을 하다가
성서와 성경의 차이점, 그 쓰레기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아 과민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성서라고 하면 천주교적이요, 성경이라고 하면 기독교적인가?
성서라고 하면 자유주의적이요, 성경이라고 하면 보수적인가?
성서의 Bible은 성경의 Canon보다 권위가 떨어지는가?
창세기 등 모세오경을 율법서라고 하면 격이 떨어지는가?
성서를 성인들의 서적을 총칭한다면
불경과 유교의 경전은 성경과 동급인가?
하나님은 성서적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성경적인가?
성서는 문학적이고 성경은 종교적 경전인가?
성서라고 하면 인본주의요, 성경이라고 하면 신본주의인가?
이렇게 볼 때 성서와 성경의 차별은 없으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서와 공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은
믿음과 신념, 은혜와 영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차이에서 나는 쓰레기는 없습니다.
성서공회는 익숙하지만 성경공회는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성서와 성경의 차이를 두는 것은 본질에 대한 글자의 이데올로기, 그 편향된 시각일 뿐입니다.
성서와 성경의 차이에서 1원의 절감효과도 없으므로
카페의 글을 쓸 때 성서와 성경을 혼용해서 차이를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한 줌이 흙이 태산이 되고 한 홉의 물이 바다가 되고 한 올의 실이 비단이 되듯
작은 것에 충성되면 큰 것에도 충성될 것입니다.
이 한편의 글로 필자의 은둔적인 작은 삶이
화려한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