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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25) 두려움(묵시 9,13-21)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욕구에 대한 숭배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간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손으로 행한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만이 숭배하는 우상을 끝내 움켜쥔다. 죽음의 재앙도 인간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다.
대개 재앙의 서사를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일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앙의 성격은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려 정의의 단호한 심판을 재앙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묵시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재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질만한 소재가 요한묵시록 9장 13절 이하에 눈에 띈다. 재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에서부터 그 질문은 시작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주어라.”(14절) 요한묵시록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등장을 알렸지만, 9장에서는 땅을 향한 재앙을 알리는 존재로 소개된다. 네 천사는 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다. 동쪽 끝을 가리키는 유프라테스는 미지의 무서운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창세 15,18; 신명 1,7; 1열왕 5,1; 에녹 56; 에제 38-39 참조)
네 천사는 인간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준비를 이제껏 해왔고 마침내 그 시간은 무르익었다. 네 범주로 소개되는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필연적이고 확실한 시간’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의 은유적 시간이다.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 건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삼분의 일의 죽음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은 품고 있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부터 오는 재앙은 인간들이 그렇다고 믿은,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을 먹이 삼아 커나간다.
이 두려움은 유다 사회가 오래전부터 믿어온 하나의 ‘민간 신앙’이다. 묵시주의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발판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다. 동쪽에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심판의 재앙, 그것이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재앙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심판하고 정제하고 다잡는 인생의 길잡이로 재앙을 쓰고 읽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다듬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잡이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선명하면 좋을 터. 제 삶이 더욱 반듯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절부터 기병대가 나타난다. 기병대는 ‘이억’의 숫자로 소개된다. 그리스말 본문은 ‘디스뮈리아데스 뮈리아돈’(δισμυριάδες μυριάδων)으로 되어 있는데, 굳이 직역하자면, ‘만(萬)들의 이만(二萬)’, 그러니까, 2×10,000×10,000= 200,000,000이 된다. ‘만’(萬)을 가리키는 ‘뮈리아스’(μυριάς) 는 ‘대단히 많은’ 혹은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숫자는 셈을 하기보다 셈을 하지 않는 게 맞다. 다만 우리는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내포하는 두려움의 극단을 읽어내야 한다. 인간이 삼분의 일이나 죽어가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두려운 만큼 황망한 일이라는 것. 그 옛날 소돔의 멸망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억의 기병대가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은 소돔이 종말을 맞닥뜨릴 때 결정적으로 등장한 상징체들이다.(창세 19,24.28 참조)
그러나 인간이란 참 질기고 억세다. 우리가 만든 것들,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 그리고 우리가 지탱해 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인간의 욕구는 숭배 대상에 정확히 투사된다.
숭배는 자기의 인정 욕구에 대한 숭배가 되어버린다.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숭배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숭배하는지 모른 채 그 무엇을 늘 찾아다닌다. 타자화해 놓은 것은 실은 자신을 투사시킨 지독한 교만과 이기(利己)의 신기루가 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다.
끝끝내 자기를 두고 숭배하는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다.(21절) 회개하지 않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전통적 인식 아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끝을 파멸이나 징벌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제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은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의 재앙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은 실은 복된 이들이기도 하겠다. 제 잘못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은 정의나 선에 대한 갈증이나 존중을 내포하고 있어, 죽어간 인간의 삼분의 일은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삼분의 일의 죽음은 그리하여 스스로 회개할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손짓이 아닐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행여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일까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 앞에 아무런 감정의 요동을 표하지 못(안)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얼마나 죽어야 그 완고함이 해제될까. 얼마나 참혹해야 저만이 옳다고 믿는 그 우상을 던져버릴까. 이억의 기병대가 오기 전에, 그리하여 또 다른 죽음이 닥치기 전에, 헛된 우상에 물든 이들에게 우리는 담대히 재촉해야 한다. 얼른 회개하라고…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7)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두 사람
1896년 10월, 인천의 교도소에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고종 황제. 당시 그 교도소에서는 일본군에 살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격투를 벌이다 일본인을 살해한 청년 김창수의 사형이 임박해 있었다. 죄수의 심문서를 보고받던 고종이 김창수의 ‘국모보수’(國母報讐: 국모의 원수를 갚다)라는 죄목을 발견하고, 교도소에 전화를 걸어 사형을 일단 멈추도록 명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설치된 것은 사형일로부터 불과 사흘 전으로, 역사엔 가정이 없지만 며칠 늦었으면 김창수는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김창수는 젊을 시절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이름이다.
김구 선생은 가장 상징적인 독립운동가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될 때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임시정부를 운영해 대한민국의 적통성을 지켜냈다. 김구 선생은 8·15 광복 후 귀국해 한반도 분단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남북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1949년 경교장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생전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했던 김구 선생은 언제든지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피격 당시 박병래 성모병원장(요셉, 1903~1974)은 경교장에서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줬고, 간호 수녀들이 그의 시신을 염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 사형수 두 명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중 한 명이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며 조롱했다. 인간의 이런 심리는 무엇일까? 다른 쪽의 사형수는 그에게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며 예수님을 옹호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자,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다”라고 화답했다. 어떤 학자는 이를 성경에 있는 가장 극적인 회개의 장면이라고 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기회를 주신다.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했다. 두 사형수의 태도는 죽음을 맞이하는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골고타 언덕의 두 사형수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매 순간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큰 은총이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비문에는 감동적인 글이 적혀있다. “나는 바오로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의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 하느님, 나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주셨던 은혜를 구합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벳사이다와 오병이어의 기적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중심지로 삼으셨던 곳입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유다인 마을이 크게 세 군데 있었는데요, 카파르나움과 코라진 그리고 벳사이다입니다. 이 가운데 벳사이다는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으로서(요한 1,44) 그 지명 뜻은 ‘어부의 동네’ ‘사냥꾼의 동네’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곳이 ‘그수르’ 땅에 해당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외가가 있던 곳이지요. 압살롬은 다윗이 헤브론 임금이던 시절 셋째 아들로 태어나는데(2사무 3,3), 그의 어머니가 그수르 임금 탈마이의 딸 마아카였습니다. 당시 그수르가 이스라엘의 봉신 국가여서 다윗이 정략 결혼을 한 듯합니다. 압살롬은 친누이 타마르가 이복 형 암논에게 욕을 당하자 형을 죽이는데, 이때 도망간 곳이 그수르입니다(13,37).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끝내 아버지를 거슬러 반역하다가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되지요(18,15).
예수님 시대에는 이곳이 벳사이다로 일컬어지게 됩니다. 지명 뜻이 ‘어부의 동네’이듯 배가 드나드는 고장이었다고 합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 모두 어부 출신이지요. 다만 벳사이다는 이스라엘의 다른 성지들에 비해 상당히 늦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벳사이다 유적지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2,00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각 변동을 겪으며 내륙으로 바뀐 걸로 추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셨다는 기적의 장소도 바로 벳사이다입니다. 사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념하는 성당이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 ‘타브가’라는 곳에 따로 있지만, 루카 9,10에 따르면 벳사이다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셨듯이(탈출 16장),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에서 빵과 물고기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것입니다. 요즘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진 탓에 ‘먹고사니즘’이라는 말이 돌지만, 몇십 년 전에도 우리나라에는 보릿고개가 있었지요.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자녀를 보며 파종할 씨앗으로 배고픔을 달랠지, 다음 농사를 기약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이 비슷하여, 주린 배를 부여잡고 씨를 뿌린 이들이 수확하며 기뻐한다는 내용이 시편에 나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126,5-6).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늘 측은지심입니다(마태 14,14; 마르 1,41 등). 여기서도 예수님은 일상화된 배고픔에 시달리는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어 배불리 먹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미리 맛보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상 만민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늘의 빵과 음료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며 이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24) 재앙의 정체(묵시 9,1-12)
재앙 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하느님 섭리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떨어진 별’이 등장한다. ‘떨어진 별’을 두고 타락한 천사, 혹은 사탄이나 악마로 해석한다. 그 별에게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다.’ 별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별에게 열쇠를 주었다. 학자들은 이런 수동태 형식을 ‘신적 수동태’라 부른다. 요한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휘두르는 힘을 묘사하기 위해 대부분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온다.
요한묵시록의 악은 힘이 있어도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리거나 무너져 버린다. 악은 그렇게 무능력하다. ‘신적 수동태’의 주체는 감추어져 있으나 대개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달리 말하자면, 참된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셔서 악은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하느님을 대적할 힘 따위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이 ‘신적 수동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렇다면, 하느님은 기쁨, 행복, 성공 그리고 정의, 진리, 평화 등의 단어들 틈에서만 사유되어서는 안된다. 재앙, 고통, 불행, 나아가 사탄과 악마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그분의 섭리에 대해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그러므로, 사탄이나 악마의 폭력이나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다시 되새기는 메타포가 된다.
별이 구렁을 연다. 거기서 큰 용광로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연기는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 혼돈으로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그러니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 서술이다.(창세 1,2 참조) 하느님의 손길이 빚어내는 모든 ‘있음’ 이전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없음’과 동의어다. 떨어진 별로 시작하는 재앙의 서사는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없는 것들의 이야기다. 없는 것들을 아무리 자세히, 기묘하게 묘사한들, 그것은 사탄과 악마를 그려내는 ‘수동태’의 힘처럼 하느님 앞에선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다.
부질없는 것들은 메뚜기, 땅의 전갈과 같은 것들로 형상화된다. 이것들의 폭력은 땅의 풀과 푸성귀,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도 아닌,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다. 단번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 버릴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나쁜 이들을 향한 경고라고. 그러나 이런 선악 구도의 결과론적 징벌이 요한묵시록의 재앙이라면 굳이 하느님과 어린양까지 언급하며 심판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나쁜 일에 공분을, 선한 일에 기쁨을 지니는 건 인간 일반의 현상이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5절부터 재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차근차근 펼쳐나간다. 다섯 달, 한계가 명확한 그 다섯 달 동안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이들은 재앙의 희생자가 된다. 그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메뚜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사람들은 죽기를 바란다.
한낱 메뚜기가 사는 시간이 다섯 달이고, 신약성경은 ‘다섯’을 ‘몇 안 되는 것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14,19; 루카 12,6; 마태 25,2 참조) 그렇게 허무한 다섯 달인데, 그 짧은 시간을 버틸 재간이 사람들에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메뚜기, 그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가.
이제 메뚜기를 적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메뚜기는 그야말로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같다. 종말의 위기를 다루는 요엘서의 서술과 흡사하여(요엘 2,4 이하 참조) 메뚜기를 종말론적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뚜기의 서술은 허망하다. 메뚜기에 관한 모든 서술은 실재하지 않는, ‘~같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금관 같은 것’, ‘머리털 같은 것’, ‘사자 이빨 같은 것’, ‘마차들의 소리 같은 것’, ‘전갈 같은 것.’ 이런저런 ‘~같은 것들’은 실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9장이 시작될 때 구렁에서 나온 연기와 같다. 모든 것을 어둠 속에 집어삼켜 무엇 하나라도 제 본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나지 못하게 만드는 연기 말이다. 금관이든, 사자 이빨이든, 떠들썩한 마차 소리든, 모든 것은 메뚜기를 향하지만 메뚜기를 비껴가서 메뚜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니 메뚜기는 히브리 말로 ‘아바똔’(אֲבַדּוֹן), 그리스말로 ‘아폴리온’(Ἀπολλύων)이라 부르는 ‘지하의 천사’(우리말 번역은 ‘지하의 사자’로 되어 있다)를 임금으로 모실 수밖에. ‘아바똔’은 ‘파멸의 공간’이란 뜻이고, ‘아폴리온’은 파괴자란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생명에 반하는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를 소재로 서술된 재앙과 고통의 끝이 죽음이라니. 전투사의 모습으로 꾸며진 메뚜기가 전투 한번 해보지 않은 채, 죽음의 메타포 ‘지하의 천사’를 제 임금으로 섬겨버렸으니, 잔뜩 긴장한 채, 이를 깨물며 재앙과 고통의 끝을 탐험하고 그 정체를 묻는 우리의 읽기는 허무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질 것은 명확하다. 죽음은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섯 달로 한계 지워진 시간, 사람들이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그 시간의 주인공 메뚜기는 사람들을 해치고 죽일 만큼 대단한 힘이 없다는 것. 모든 재앙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어 재앙은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
재앙과 고통의 끝에서야, 그 허무함의 민낯이 드러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지 모른다.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조차 죽음 같은 재앙은 징벌이 아니라는 희망 말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못남을 탓하며 죄책감에 빠질 때가 많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나는 늘 왜 이럴까’ 하는 좌절과 패배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겠지만 우린 다시 한번 그 고통의 정체에 대해 최대한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그 고통의 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무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주눅 들어 미리 단정 짓고 후회하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6) 예수님 대신 석방되어 목숨을 구한 바라빠
2004년 개봉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열심한 가톨릭신자인 할리우드 스타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였다. 많은 이는 그의 영화가 과거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전혀 다른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의 첫 대사에서부터 현실감이 다가오도록 예수님이 말하던 당시의 언어인 아람어와 라틴어를 사용했다.
이 영화는 개봉 초기부터 예수님의 수난을 너무 잔인하게 묘사했다는 점이 논란거리가 되었다. 예수님이 유다인과 로마 군인의 무차별 구타로 눈이 퉁퉁 부어있는 장면, 로마 군인의 채찍질에 살점이 터져 나와 피가 흥건한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과거 영화에서 예수님은 수난 중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이 여과 없이 그려졌다. 일부 평론가들은 인간의 폭력성은 실제상황에서 더 참혹할 것이라며 인간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영화라고 했다.
유다인에게 중요한 유월절(유다인들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에는 죄수 중 한 사람을 석방하는 전통이 있었다. 마침 바라빠라는 사형수가 있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바라빠를 데려와 군중에게 예수와 바라빠 중 누구를 풀어주겠냐고 물어본다. 바라빠는 반란에 가담해 로마에 대항하다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였다. 바라빠는 로마제국에 반대한 폭력투쟁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군중들은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했다.
사슬이 풀린 바라빠가 당혹감 속에서 한쪽 눈이 거의 감긴 예수님과 마주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어 보였다. 예수님 대신에 극적으로 석방되며 목숨을 건진 바라빠는 가장 운이 좋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빠는 풀려 난 후 무엇을 했을까? 성경은 바라빠의 이후 행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 상상력이 더해진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바라빠」라는 책에서 바라빠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상상의 이야기를 저술했다. 어쨌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예수님에 대해 바라빠는 궁금해졌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도 접했을 것이다. 예수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바라빠의 인생에는 그분이 이미 깊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2002년 일본에서 <미션 바라바>라는 한일 합작 영화가 개봉됐다. 영화는 회개한 야쿠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야쿠자들은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후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속죄하는 의미로 바퀴 달린 십자가를 지고 일본 전국을 일주하였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바라빠들이다. 덤으로 생명을 연장한 바라빠의 이후의 삶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천사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경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창세 18장에 먼저 암시됩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 마므레의 참나무 아래 천막을 치고 살 때 길손 셋이 방문해온 일입니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광야에 인접한 도시입니다. 지명의 뜻은 ‘연합하다’ ‘묶다’로 추정되는데요, 주변의 정착촌 넷이 연합했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헤브론의 옛 이름을 “키르얏 아르바”(창세 23,2; 여호 14,15)로 소개하는데, 이는 ‘넷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일화에서는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하나는 세 길손이 참나무 아래 천막을 친 아브라함을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상수리나무인 참나무는 우리나라에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도토리를 제공해준 나무라 ‘진짜 나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엘론]인데, 이름에 하느님을 뜻하는 ‘엘’이 들어 있어 고대에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습니다(판관 9,37의 “점쟁이 참나무” 참조).
다른 하나는 길손들이 방문해온 때가 “한창 더운 대낮”(1절)이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길손은 바깥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존재였지만, 더운 날의 오후 시간은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고 낮잠을 자던 때입니다. 이런 시간에 방문해왔다는 것 자체가 일단 범상치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귀찮은 기색 없이 손님을 맞아들이고 발 씻을 물을 내놓습니다(4절). 광야를 오래 걷다 보면 발이 금세 더러워지기 때문에, 발을 씻고 피로를 풀도록 물을 제공하는 건 큰 환대였습니다(창세 24,32; 루카 7,44). 또한 아브라함은 빵을 좀 가져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가 풍성한 식사를 준비해 나옵니다. 세 손님이 어디서 온 누군지는 모르지만, 먼 길 오느라 시장했을 마음을 헤아린 것입니다. 이런 환대에 보답하듯 세 길손은 사라의 잉태 소식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의 정체를 알아챈 것도 이때입니다. 늙은 나이에 수태고지를 접한 사라가 숨어서 웃는 걸 길손이 꾸짖자(창세 18,12-13) 그들이 천사들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를 암시하듯 2절에는 길손이 “세 사람”으로 나오지만, 13절에서 호칭이 “주님”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손님 가운데 둘은 이후 소돔으로 갑니다(창세 19,1). 소돔의 악행 때문에 원성이 하늘까지 닿자, 주님께서 ‘내가 직접 내려가 확인해 보겠다.’(18,20-21) 하신 데에 따른 행보일 것입니다. 다만 손님 하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그는 18장 후반부에서 아브라함과 대화하신 하느님인 듯합니다. 말하자면, 세 천사 가운데 둘은 소돔으로 가고, 나머지 한 분이신 성부께서 아브라함과 협상하시며 그곳에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그들을 보아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소돔은 결국 그 열 명이 없어 망하지만, 헤브론은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길손에게서 성부와 성자, 성령의 신비를 미리 알아보게 해준 소중한 성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