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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12월 8일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본당이나 교구의 경우처럼 한국천주교회 전체에도 주보가 있는데,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입니다. 1838년 12월 1일,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그때까지 주보로 모시던 성 요셉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주보로 인가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1841년 8월 22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1831-1846 재위)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명동대성당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는 가브리엘의 인사에서 성모님이 이미 어떤 은총 지위에 계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에페 1,3-14에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죄를 앞선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리의 핵심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신을 물려받고 성령께서 거처하신 마리아의 태중은 무죄하고 흠 없이 깨끗하다는 믿음입니다. 대축일의 본기도는 이 점을 잘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8세기 초반부터 동방 교회에서는 ‘마리아의 탄생’과 관련해 12월 9일에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의 어머니 성녀 안나의 잉태 축일을 지냈습니다. 10~11세기 영국에서는 12월 8일에 성모 마리아의 잉태 축일을 지냈고, 이는 곧 프랑스 전역에도 전해졌습니다. 중세 때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반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치열한 논쟁 중에도 이 축일은 교회 안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복자 비오 9세 교황(1846-1878 재위)은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Ineffabilis Deus)을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다”(DH 2803). 여기서 주의할 점은 교의(敎義) 선포가 새롭게 교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올해는 12월 8일이 주일과 겹쳐 전례일의 등급상 대림 시기의 주일이 성모님의 대축일보다 우선하기에, 이날을 하루 늦춰 12월 9일에 지냅니다.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을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합시다: “주님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어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 지극히 깨끗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저희 죄를 없애시는, 죄 없으신 어린양 성자께서 나셨으니, 주님께서는 동정 마리아를 모든 피조물 위에 들어 높이시고,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으로 미리 정하셨나이다.”
[가톨릭 신학] 난파 후 받게 되는 두 번째 뗏목
박사 학위 공개 심사를 앞두고 가장 많이 신경쓰였던 것은 다름 아닌 참석자들이었습니다. 내 이탈리아어가 어떻게 들릴까, 교수님들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심사 날이 다가왔습니다. 정신없이 교수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긴장된 마음으로 발표를 시작하려는데, 강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시선이 비로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광경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은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겠어.”라는 시선이었는데, 저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제발 잘 통과해야 할 텐데, 심사가 너무 깐깐하면 안 되는데⋯.”라는 걱정과 애정이 가득한 시선이었습니다. 공개 심사가 끝나고 얼마나 반성했는지 모릅니다. 혼자 마음의 문을 닫고 이유 없이 다른 사람들을 의심한 제가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고해성사가 부담스럽습니다. 좁은 공간에 들어가 심판받는 기분이고, 고해 사제가 내가 누군지 알아채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해를 미루거나 형식적인 죄만 간단히 고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학창 시절 어리석었던 저의 모습처럼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는 커다란 착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까지 보내시어 인간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그렇다면 우리는, 고해가 죄를 심판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라는 것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이 고해성사를, “은총을 잃어버리는 난파 후 받게 되는 두 번째 뗏목”이라고 정의합니다. 첫 번째 뗏목이 세례성사라면 두 번째는 고해성사입니다. 즉 고해성사는 세례성사 후 하느님과 사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놓치지 않고 이 뗏목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성사를 통해 우리는 죄로 잃었던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받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며, 영원한 벌(지옥 형벌)을 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약하며 종종 길을 잃지만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러한 어버이의 마음을 기억하시면서 죄를 지었을 경우, 혹은 분명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어린양을 되찾은 목자의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실 것입니다.
[저는 믿나이다] (4) 가톨릭교회 신앙
하느님을 따르는 길, 믿음 · 희망 · 사랑의 삶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지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십자가 수난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복음 선포와 이에 대한 교회의 성찰인 교의(믿을 교리),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일상으로 거행되는 전례와 성사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구원 사건을 소개하며 최초로 그 의미를 해석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은, 교회가 먼저 믿고 우리에게 그 신앙을 전해 주고, 키워 주고, 지탱해 준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먼저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교회이며,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저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도록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성사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교회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교회를 새로운 생명의 어머니로 믿는 것이지, 교회를 우리 구원의 창시자로 믿지는 않는다.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므로 또한 우리 신앙의 스승이기도 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9)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초자연적인 은총입니다.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돼야 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말씀에 자유로이 순종하는 인간의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0)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입니다.
신앙의 한 단면이 인간 행위라면 인간 스스로도 하느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려는 실천적 삶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향주덕’(向主德)이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덕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이 다른 모든 것의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 또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희망과 사랑으로 표현돼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께 희망을 두지 않고, 그분께서 바라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바로 ‘죽은 믿음’(야고 2,26)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을 간직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이를 담대하게 고백하고 확신으로 증언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16)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참된 믿음’ ‘산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하느님께서 주신 ‘행복을 갈망하는 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재림 이후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히 누리게 될 것이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현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넘어 영원을 희망합니다. 둘째, 구원을 보장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1티모 2,4) 기도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이처럼 희망은 기도 안에서 표현되고 지탱됩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요한 15,12 참조) 바오로 사도는 믿음과 희망, 사랑 가운데 으뜸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1코린 13,13) 사랑은 모든 덕의 바탕이며 완성입니다.
이처럼 가톨릭교회 신앙은 교회 구성원의 거룩함, 곧 성화(聖化)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선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르는 삶 곧 영성(Spiritualitas) 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28) 십계명(十誡命) ③
부모를 공경하고 인간 생명을 해하지 마라
제4계명 :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탈출 20, 12)
십계명의 넷째 계명은 하느님 다음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계명에서 자녀의 도리를 명백히 밝히는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가장 보편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정의 구성원인 가족은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며, 각자의 가정 안에서 책임과 권리와 의무를 가집니다.
부모는 생명의 전달자이고 양육의 책임자이며, 신앙의 전수자로서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며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또 사랑과 존경심으로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성실할 때 다른 모든 관계를 원만히 이어가는 가치가 부여됩니다. 그러기에 먼저 부모는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활에 대한 책임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서 귀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당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줘야 하며, 자녀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 영적인 생활에 관한 책임입니다. 부모는 자신들이 낳은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돼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데 커다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따라서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발달 단계에 맞는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지도해야 합니다.
제5계명 : 사람을 죽이지 마라 (탈출 20,13)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은 모든 인간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명합니다. 살인 금지는 남의 생명을 보호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육체를 손상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어떠한 국가권력도 죄가 없는 이의 생명의 끈을 자를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이가 죽을 이유가 없으며, 또 누구도 그를 죽일 권리가 없습니다.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탈출 23,7)
자기 자신의 생명에 대해
① 우리는 자기의 생명을 겸허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유지·발전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닮은 삶이어야 합니다.
② 자기의 생명을 자기 임의로 시작하지 못한 것처럼, 죽음도 임의로 단축하거나 연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순응해야 합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삶과 죽음을 하느님의 뜻에 맡깁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초조함도 극복해야 하고, 삶에 대한 애착에도 초연해야 합니다.
타인의 생명 침해에 대해
① 타인의 존재를 거부하고 타인의 생명과 인권을 빼앗는 것입니다.
②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생명에 대한 절대권을 찬탈하는 행위입니다.
③ 인간 생활의 기본 구조인 공동생활을 거부하는 태도로서 서로의 협력과 존경으로 살아가야 할 근본 의무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안락사도 낙태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35) 성령의 상징과 선물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면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미사 중 성령칠은 카드를 하나씩 뽑습니다. 불이나 비둘기 모양의 카드를 하나하나 오리고 성령칠은 가운데 하나의 은사를 일일이 써넣으며 준비하던 기억도 나고, 학생 때는 공부 잘하는 데 도움이 될 줄 알고 ‘지혜’나 ‘지식’을 뽑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업체에서 대량으로 인쇄하는 제품들이 많이 나오는데, 성령칠은과 더불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도 같이 인쇄되어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령칠은 카드의 모양에서도 그렇고, 교회 미술 안에서도 성령은 불이나 비둘기 모양으로 주로 그려집니다.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은 다양한 상징들을 사용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 세례 때의 비둘기, 성령 강림 사건에서의 불길 같은 혀의 모양,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의 바람과 같은 상징을 볼 수 있으며, 세례 때 부어지는 물이나 세례와 견진에서 인호가 새겨지는 기름부음, 변화시키는 힘으로서의 불, 하느님의 등장이나 영광스러운 변모 때의 구름과 빛, 안수, 하느님의 손가락 등 다양한 상징들이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94-701항). 다양한 상징들을 통하여 교회는 성령께서 우리를 온갖 악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며,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키고 정화하여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태초부터 세상 끝날까지 아버지의 ‘말씀’(성자)과 ‘영’(성령)의 공동 사명은 숨겨진 상태로 계속 활동하고 있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02항). 창조에서 말씀과 숨결(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 창세 2,7)은 모든 피조물의 기원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03항). 성경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늘 함께하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완성된 구원의 마지막 때에 제자들에게 주어졌고, 마침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그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교회의 활동에 함께하시며 세상을 ‘마지막 때’로,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31-732항).
성령칠은이나 성령의 열매와 같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하느님의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먼저 사랑은 으뜸가는 선물로서 다른 모든 선물을 포함합니다. 이 사랑에서 죄의 용서가 나오며,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새로운 생명이 주어집니다. 성령칠은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은사들입니다. 학생 때의 저처럼 세상의 지식, 머리가 좋아져 공부를 더 잘하는 뭐 이런 형태의 은사가 아니라 슬기(지혜), 통달(깨달음, 이해), 의견, 지식, 용기(굳셈), 효경, 경외심(두려워함)이라고 하는 일곱 가지 은사는 하느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분께 대한 진리를 깨닫게 하며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판별하게 하고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등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러한 성령의 선물들을 통해 다양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라고 하는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위 순서대로 3개씩 묶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열매들로 나누어 볼 수도 있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대림초와 대림환
오늘부터 대림 시기가 시작됩니다. ‘대림’(待臨)은 ‘오시기를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말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매해 전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한 해의 전례 주년이 시작되기에,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이 됩니다.
대림 시기의 대표적 상징이라면, 바로 대림초와 대림환입니다.
대림초는 4개로 구성되는데, 숫자 4는 그리스도의 빛이 동서남북 네 방향, 곧 세상의 모든 곳을 두루 비추게 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구약 시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천 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천 년은 과학적 계산법이 아니라 성경의 연대 계산법에 따른 상징적 시간입니다. 대림초는 가장 짙은 보라색부터 시작해 점차 밝은색으로 매주 한 개씩 늘려 켜갑니다. 이는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대림 시기를 보내는 우리의 죄가 점차 씻겨 깨끗해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각각의 대림초에는 진한 색부터 다음과 같은 명칭과 의미가 있습니다:
① 예언의 초 :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실 거라 알린 예언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전한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의미
② 베들레헴의 초 :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믿음을 나타내며, 예수님을 낳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기억하는 의미
③ 목자의 초 :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까웠기에 느끼는 기쁨과 희망을 의미
④ 천사의 초 :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전해준 수태 소식으로 누리는 참 평화를 의미
또한 대림초를 사철나무로 둥글게 감싸는 대림환이 있습니다. 사실, 대림환은 대림 시기의 전통 중 비교적 근래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독일 루터교 목사 요한 비헤른(1808-1881)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33년 독일 함부르크에 세운 무의탁 청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에서 이를 처음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20년대 독일 가톨릭교회로, 1930년대 북미 가톨릭교회로 전해져 오늘날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림환의 둥근 모양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하신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고, 늘 푸른 사철나무는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라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우리는 기쁨 속에 구세주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회개와 보속 그리고 희망의 마음으로 이 복된 은총의 시기를 경건하게 보내도록 합시다.
[저는 믿나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들음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9-10)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라고 가르칩니다.(로마 10,17)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홀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하느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들음’은 하느님께서 세우시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의 전례와 성사 그리고 교리교육 안에서 보호받고 보존되고 전승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기록된 복음서들과 독립적으로 주님의 말씀과 행적뿐 아니라 그의 모든 역사를 온전하게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도 시대에 점유된 것은 가르침과 설교의 토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교회의 신앙 고백의 기원뿐 아니라 스스로를 ‘기쁜 소식’의 한 표현으로 이해했던 기록된 복음서들의 원천을 이루었다.”(「교부들의 그리스도론」 276쪽)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사도 신경을 통해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지만 아직 신약 성경 정경조차 선정되지 못했던 초대 교회 때에는 우선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신약 성경 또한 사도 시대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자들로 인해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오고 있지요.
주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이끌던 초대 교회 때부터 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혼란을 겪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달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그래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이전의 예수와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해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신약 성경이 알려주고 있듯이 사도 시대 초대 교회 구성원들은 세 부류였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유다교를 믿다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 유다인이지만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헬레니즘화된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 헬레니즘 문화에서 살아온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지요. 그들은 각기 구약 성경의 율법을 기반으로, 유다교 전통과 헬레니즘 사고를 융합한 문화를 배경으로,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부활 이전의 예수에서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로’, ‘역사의 예수에서 신앙의 그리스도로’, 나아가 ‘사람의 아들(인성)에서 하느님의 아들(신성)로’ 넘어가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포, 이에 대한 교회의 성찰인 교리 선포, 교회 공동체의 신앙 체험을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진심으로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 세 부류의 구성원들과 누구보다 친숙했고 네 번째 복음서를 쓴 요한 사도만큼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5-20)
바오로 사도는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사도들이 들려주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입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27) 십계명(十誡命) ②
주님 이름을 모독하지 말며 주일을 거룩하게
제2계명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탈출 20,7)
명하는 법
①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흠숭과 공경을 갖춰 불러야 합니다.
②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개인적으로 하느님에게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금하는 법
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아야 합니다.
② 그릇된 맹세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명예와 성실, 진실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이름으로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을 하거나 맹세를 하고 이행하지 않는다면,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거짓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진실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잘못입니다.
구약 시대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고(탈출 6,2-8), 예언자와 사제들은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전하고 백성을 축복했습니다.(신명 10,8)
신약 시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줬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의 이름을 존경할 것을 명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의 청원과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영광으로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나쁘게 말하거나 하느님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짓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제3계명 :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탈출 20,8-9)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오는 계명입니다.
①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켜라”라고 하신 성경 말씀에 따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주일 미사뿐 아니라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낼 것을 명합니다.
②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과 당신 백성을 위한 구원 업적을 찬미하고 기리는 거룩한 날, 곧 주님의 날입니다. 하느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듯이, 사람들도 일상의 일을 멈추고 쉴 수 있도록 마련됐습니다.
③ 주일은 휴식의 날입니다. 하지만 주일 미사 참여와 자선의 실천·적당한 휴식에 방해되는 일이나 활동은 삼가야 합니다. 주일에 일 때문에 충분한 여가 시간이 없다면 기도와 정성으로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④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성찬례(미사)를 거행하며 주일을 경축했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경축하는 날로, 교회는 가장 중요한 의무 축일로 지킵니다. 주일 미사는 교회 신앙생활의 중심이기에 성실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다만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미사 참여에서 면제되며 고해성사에 임하지 않아도 됩니다.
△ 감옥에 있을 때 △ 군 복무 중 외출이 자유롭지 못할 때 △ 병석에 있거나 병석에 있는 환자를 간호할 때 △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직장에서 허락을 받아야 할 때) △ 자연재해로 성당을 올 수 없을 때 △ 수해나 화재를 당한 사람을 급히 도와줘야 할 때 △ 자신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큰 범죄나 재난을 방지할 수 있을 때 등입니다.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특별한 기도로 주일을 거룩히 보내야 하는 의무는 있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나온 ‘공소 예절’ ‘묵주기도 5단’ ‘그날의 복음과 독서를 읽고 묵상하기’ ‘선행과 봉사’ ‘주님의 기도 33번’ 등 주교회의에서 결의한 기도문을 바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