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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목사
(요절) 잠언 3:12
(개역성경)“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쉬운성경)“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시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하신다.”
(NIV) “Because the LORD disciplines those he loves, as a father the son he delights in.”
7절 말씀에서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씀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씀은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무서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 땅을 거룩한 땅으로 알고 그 자리에서 신을 벗은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1:7)”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 혹은 지혜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는 “Fear of the Lord is the foundation of true knowledge”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undation은 기초입니다.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한다면 기초를 잘 다져야 집이 튼튼한 것입니다. 기초가 잘 된 집은 오래가도 기울어지지 않습니다. 기초를 무시하고 집을 지어 버리면 언젠가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집의 기초와 같습니다. 이 기초만 잘 가르쳐 놓으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잘 배운 사람이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잘 배운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우리 말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의 근본, 지혜의 근본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교만합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교만한 사람을 보거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군!”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를 가르쳤던 선생은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인데, 이스라엘에서 아주 영향력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가르친 선생이 사회에 명망이 있고, 학계에 영향력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죠. 그 사람 밑에서 공부한 제자는 덩다라 덕을 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충분히 자기 학력 내세우면서 충분히 교만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11:33-34에 이렇게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의 기초를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악한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운 사람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악한 일을 도모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악한 일을 생각하고, 악한 일을 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과 지혜의 기초를 제대로 배운 사람은 선한 일을 도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장차 어른이 되어서 악한 일에 연루되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사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을 부모는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식에게 가르칠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잘 가르치면 됩니다.
그 말씀이 디모데후서 3:16-17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개역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양약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약(良藥)은 좋은 약입니다. 우리 몸의 병을 치료하는 “good medicine”입니다. 모든 약이 다 좋은 약은 아닙니다. 어떤 약은 병을 오히려 키우는 약도 있고, 일시적으로 증상만 치료하는 약도 있고, 몸의 다른 부분을 해치는 약도 있습니다. 그런 약들은 좋은 약들이 아닙니다. 좋은 약은 병을 깨끗하게 치료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양약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잘 배운 사람은 잘못되었다가도 곧 바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아 줍니다.
7-8절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가르쳐 주고 있다면, 9-10절 말씀은 여호를 공경하는 삶의 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수확물의 첫 열매를 드려 여호와를 공경하여라.” 이 말씀에서 우리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 열매”라는 말입니다.
첫 열매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어서 거두어 드린 처음 열매가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려고 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어떤 사람을 우리가 귀하게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 귀한 것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잘 배운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첫 열매를 드리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이 “첫 열매”라는 말 속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영어로 이 첫 열매를 “firstfruits”라고 합니다. 첫 열매가 있으면 그 후에 거두어 드린 열매들이 있습니다. 이 “첫 열매”라는 성경적인 표현은 나중에 거두어 드린 열매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모든 죄인을 대표하고,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확물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그의 소유 전체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생각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3-5절).”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아벨이 귀한 제물, 정성이 들어간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처럼 그렇게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는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예. 그 말씀을 잘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는 말이고, 다시 그 말은 그의 나머지 소유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양의 첫 새끼의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양의 고기 중에서도 가장 좋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 집사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추수 감사절이었습니다. 갔더니 가족들이 모두 모였고, 터키를 구워 놓았습니다. 그 아들이 칼을 들고 터키를 잘라서 서브를 했습니다. 터키를 자르더니 제 접시에 하얀 가슴살을 올려 놓는 것입니다. 그 부분은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그 부분은 고기가 얼마나 퍽퍽하고 맛이 없습니까? 그런데, 제 접시에는 그런 고기를 올려 놓더니, 자기 접시에는 날개 밑의 맛있는 부분을 올려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 후에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아들은 저에게 기름이 적은 가장 좋은 부분을 준다고 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기름이 많은 brown meat를 먹은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 문화입니다. 요즘에 기름 많은 부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맛은 있지만, 기름이 많은 음식은 사양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그 때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최고로 맛 있는 부분을 기름이 많은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일년에 고기를 몇 번 못 먹을 정도로 고기가 귀했습니다. 명절 때가 되어야 겨우 한번 먹습니다. 그 때는 어머니가 돼지 고기를 사 오십니다. 소고기는 엄두도 못 냅니다. 고기를 사 오시면서 가게 주인이 줬다고 하얀 기름을 받아 오십니다. 돼지 비게입니다. 이것을 모아 놓았다가 단골 손님에게만 준답니다. 이 돼지 비게가 그 때는 그렇게 맛있었습니다. 이 비게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면 셋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릅니다.
아벨은 이렇게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릴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전체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드린 제사에는 그런 신앙고백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1-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언짢게 여기지 마라.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시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하신다.”
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금방 압니다. 이 말씀이 히브리서 12:5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신기하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아는 무슨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억하면 됩니다. 거기에 이런 설명까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7-10절).”
오늘 말씀 제목은 “특이한 삶”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특이한 삶입니다. Ordinary life가 아니라 extraordinary life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시련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으로 알고 기뻐합니다. 넌크리스천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번 주변에 넌크리스천들이 있으면 그렇게 말해 보세요. “시련을 받으시고 계시네요.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한번 그렇게 말해 보세요. Ordinary life를 살고 있는 그들은 그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extraordinary life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세요. 내 삶에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오히려 내가 부모가 없는 사생아가 아닌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를 징계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여러분, NIV 성경에 보면 징계라는 말을 “discipline”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discipline”이라는 말의 뜻은 “to teach and to train”이라는 뜻입니다. “discipline”을 통해서 가르치고 훈련을 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뭔가 가르칠 것이 있어서, 뭔가 훈련을 시킬 것이 있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
그리고, 여러분, 아시지요? 이 “discipline”이란 단어에서 “제자(disciple)”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discipline”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훈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징계는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무슨 시련이 있습니까? 무슨 고난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련을 통하여 나에게 뭔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을 통하여 뭔가 나를 가르치고, 나를 훈련 시키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모든 시련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시련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extraordinary life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런 관점에서 내 삶의 문제들을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뜻밖에도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