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증언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밖에(행26:13-32)
갈등
1. 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년간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자랑하며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공허함을 느꼈어요. 의사라는 명함이 주는 권위와 자신감 뒤에는 피할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수술복을 입은 채 멈춰 서서, 환자들의 소음과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막연히 천장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이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불면증을 겪던 중 자신이 의지하던 모든 것—돈, 명성, 직업적 안정감—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수없이 약물에 의존했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잠들기 위해 수십 알의 알약을 삼키지만, 어둠 속에서 고통이 더 커졌습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이 환자들을 치유할 수 있지만, 자신의 상처는 치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건넨 성경 한 권이 그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사도 바울의 회심 이야기에 깊이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박해했던 자였지만, 그분의 은혜로 새 삶을 얻었다는 바울의 고백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렸어요. 그는 자신도 바울에게 임한 빛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갈망 속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깊은 어둠은 놀랍도록 밝은 빛으로 바뀌었고, 그는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환자를 돌보는 진정한 치유자가 되었습니다.
2. 이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바울 역시 한때 자신의 지식과 열심으로 충만했던 사람이었지만, 다메섹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했어요.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울과 또는 소개해드린 의사처럼, 혹시 내면의 공허함과 불안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은 이 모든 것에 답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그 능력을 함께 발견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인권의 사각지대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국가의 법과 제도로 정한 규칙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말해요. 사도 바울은 유대계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이 로마 총독들에게 보호를 받지 못하게 방치되었습니다. 속물 정치인 총독들은 단지 바울에게 돈이나 받을까 하고 기다렸지만, 바울은 청결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뇌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헤롯대왕의 손자 아그립바 2세 왕이 여동생 버니게와 함께 호기심에서 베스도 총독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남매요 또 근친 관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 앞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굳이 이런 가치 없는 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야만 했을까요?
갈등 심화
3. 아그립바 2세 왕의 자세를 보십시오! 1절,“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그는 바울에게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어요. 사도 바울이 대단히 자존심 상할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자기를 비우고 오직 복음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의 웃음과 표정 뒤에는 권력과 부패의 악취가 진동했어요. 사람들은 그들을 왕과 여동생이라 불렀지만, 그들의 관계는 부끄러운 속삭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근친관계) 참 놀라운 모습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를 향하여 3절,“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안다.”고 인정해주었습니다.
아그립바 2세가 할아버지 헤롯 대왕 때부터 유대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풍속과 문제를 잘 알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은 7절,“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망은 부활 신앙과 메시야-그리스도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했고, 유대인들은 이 복음 이야기를 듣기 싫어했어요. 참 불행한 역사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한때, 유대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대제사장들의 신임을 받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다메섹에서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4. 복음 전도에서 간증은 감초와 같이 꼭 필요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이야기-체험, 실제 이야기가 힘이 있어요. 성경 이야기를 전하면서 내가 실제 경험한 것을 이야기할 때 효과가 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은 사도행전에서 세 번 나옵니다. 본 간증은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9장에서 나오고, 22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이 유대 군중들 앞에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다시 전했어요. 사도행전은 이 세 번의 간증을 요약하지 않고 세 번 반복해서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간증은 요약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바울의 간증을 요약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대로 전한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의 간증에서 오늘 처음 소개한 내용이 있습니다. 14절,“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가시채는 농사할 때 소를 모는 방법으로 사용한 도구입니다. 소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임의로 행동할 때 가시채로 인해서 몸이 더 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와 받은 소명 이야기까지 말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간증을 하면서까지 이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까요?
실마리
5.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2세 왕 앞에서 설교 또는 간증-복음 전도-을 보면 참 감동이 됩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에는 자기 간증이 반복되었어요.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객관적인 판단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않았어요.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긍휼히 여기는 자세입니다. 세계 역사는 아담 때부터 종말이 올 때까지 법으로 이뤄지지 않고 긍휼로 이뤄집니다. 죄를 범하고 나뭇잎으로 치마를 하고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일부터 긍휼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빛 가운데 만나주신 사건이 또 엄청난 긍휼의 역사였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려 했던 사울-바울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직접 찾아오셨어요. 다메섹 길 위에서 빛이 눈 앞을 가릴 때,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무시했던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신 것을 느꼈습니다. 그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그의 과거를 다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았습니다. 사울아, 너는 뛰어나고 잘 준비된 사람인데 너의 삶의 방향-orientation이 틀렸다. 이제부터 너의 삶의 방향을 바꾸었으면 좋겠다. 22-23절,“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6. 사도 바울은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강퍅함이 얼마나 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를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주님의 말씀에 따라 100% 순종했습니다. 그는 복음 전도를 훼방하는 자-박해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인생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선지자들과 모세-구약 성경이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을 전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곧 메시야-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십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일-부활이라고 요약해주었어요. 바울의 새 인생은 오직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신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도 그랬지만, 유대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며 거듭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앞에 복음을 듣는 이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았어요. 유대교인들과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남매, 모두가 구제 불능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들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수록 더욱 죽이고자 하거나, 아그립바처럼 호기심 가운데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보고 싶어서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7. 사도 바울이 이들의 마음과 상황을 알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그는 전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고전4: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20년이 넘도록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전도를 경험했어요. 전도는 지식을 통해서 설득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경험했습니다. 전도는 전도자인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요 성령님의 사역임을 알았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20여 년 영적 전쟁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을 전하고, 나머지 결과는 성령님께 맡겼습니다.
오늘날 전도학을 쓴다고 해도 사도 바울의 경우가 전도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바울은 기도학 박사에 전도학 박사였어요. 기도와 전도 전문가였습니다.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남매, 썩어빠진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무슨 가치와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최대로 존중해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이 모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딤전1:15)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 가운데도 동일한 긍휼이 임하기를 기대하며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그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 제시
8. 사도 바울은 29절,“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쇠사슬에 묶인 내 손목이 여러분의 눈에 보이겠지만, 사실 이 쇠사슬은 내 삶의 가장 큰 자유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는 보이지 않는 죄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지금 구원받은 복음 전도자가 되었는지 복음을 전했어요. 그는 복음 전도를 마치면서 결론으로 지금 자기의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구원받아 복음 전도자로 변화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딤전1:15-16,“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바울은 정말 진솔하게 자신이 누구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셨는지 잘 요약해주었었어요.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순간 말을 잃고 바울의 눈빛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함은 베스도의 재판정의 모든 침묵을 뚫고 울려 퍼졌습니다. 이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대
9. 성경 말씀은 어느 하나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왜 이렇게 서술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야 박수가 터집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지루해 보이고 반복되는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깨닫고 적용합니다. 오늘 우리도 나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복음 전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립시다.
그러기에 더욱,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데에 사도 바울과 같이 최선을 다하고 힘써 나갑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바울처럼 결박된 상태에서라도 빛을 전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빛이 어두운 밤하늘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꺼지지 않는 소망이 되어, 다른 이들의 삶에 비출 수 있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여러분의 결단은 어두운 골짜기 속에서 방황하는 누군가를 밝히는 횃불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 시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