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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어 리키가 서태지를 방문했을 때
서태지는 이미 짐을 꾸리고 있었다.
리키는 서태지가 여행을 그대로 감행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서태지는 밝게 웃으면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리키는 "그럼 북유럽은?" 하고 물었고
서태지는 거긴 다음에 가기로 했다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서울에 돌아온 서태지는 신철희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 것을 못박았다.
신철희의 입장에서야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신철희는 다만 리키에게 감사했을 뿐이다.
서태지는 다시 음악 작업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어디서부터 풀어 나가야 할지
방향이 잡히질 않았다.
신철희는 지난번에 자기가 건네 준 기획서를
다시 검토해 보라고 했다.
서태지는 읽지도 않고 치워 놓았던 기획서를 찾아
꼼꼼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기획서의 제목은
'디지털 우노 밴드 구상을 위한 마케팅 기초안'이었다.
'디지털 우노 밴드'라고?
기획서의 요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1. 서태지의 음악은 전기가 필요하다.서태지와 아이들이 그
첫단계였다면 첫 번째 솔로 앨범은 두번째 단계로 가기 위한
다리 역할이다
2. 서태지는 더이상 아이들이 아니며 아이돌도 아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는 끝났고 홀로서기가 필요하다.
3. 서태지와 아이들을 가리켜 댄서로 시작해서 아티스트가 된
아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아티스트는
제대로 된 뮤지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서태지 음악의
두번째 단계이다.
4. 서태지와 아이들을 사랑했던 팬들은 이제 더이상
10대가 아니다. 이들을 그대로 잡아 두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맞는 음악을 선물해야 한다. 그것이 디지털 우노 밴드다.
5. 밴드의 공룡 시대는 끝났다. 이글즈와 U2를 마지막으로
멸종 단계다. 디지털 우노 밴드는 밴드로서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고,밴드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편은
최소한으로 줄인 프로젝트 형식의 밴드이다. 마치 존 레논이
만들었던 플라스틱 오노 밴드처럼.
여기까지만 읽고도 서태지는 충분히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신철희와 함께 기획자들을 만난 서태지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일본에서
리키에게 들은 이야기와 자신이 이제까지 생각해 오던
고민들을 일시에 풀어 버렸다.
기획자들은 20대 후반의 두 명의 여성이었다.
한 여자는 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미인형이었다.
프로필을 보니 공부도 상당히 많이 했고
현장 실무 경험도 많았다.한국에서는 조금 빠른 감이 있지만
'각종 기획 및 이미지 메이킹'이 자신들의
주요 업무라고 밝힌 두 사람은 팀의 이름을 묻자
'한국 골상학 연구회'라고 대답했다.
신철희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었지만 서태지는 웃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그들은 인간의 유형론을 설정하고
각 개인의 유형에 따른 특징과 장단점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앞길을 점지해 주는 것이
골상학의 기본이라고 대답했다.
'싸이코 아니면 사이비 천재들이군.'
신철희는 그들이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신철희가 보기에도 두 사람의 감각은 동물적으로
발달해 있었고 음악적인 소양도 상당했다.
서태지는 기꺼이 그들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채용 대상이 아니라며 이를 거절했다.
대신 마치 그들이 제시한 디지털 우노 밴드처럼
서태지의 신작 프로젝트에 한시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해달라고 제안했다.
'가지가지야.대신 프로 흉내를 내는 건 맘에 드는군.'
서태지와 신철희는 눈빛을 교환하고 낄낄거렸다.
일주일쯤 지나 골상학 연구회에서는 제법 두툼한
세부 기획안을 들고 왔다.
그 안에는 서태지의 다음 앨범에 대한 모든 기획과 함께
이제까지의 서태지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일본 대중 음악계의 동향까지 상세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왜 미국은 빠졌죠?"
신철희가 물었다.
골상학 연구원 A가 대답했다.
"동양계와 골격이 달라서....."
신철희는 다시 물었다.
"그래도 미국 대중 음악계에 대한 분석은 들어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골상학 연구원 B가 대답했다.
"그건 이번 프로젝트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라서......."
골상학 연구원들은 말을 끝까지 맺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서태지는 신철희, 골상학 연구원들과
일주일에 3번 정도 회의를 했다.
엄청난 분량의 기획안이 쌓여 갔다.
회의를 하다가 지치면 골상학 연구원들은 신철희의
관상을 봐주기도 하고 점을 쳐주기도 했다.
신철희가 보기에 골상학 연구원들이 하는 이야기는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상당히 과학적이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항상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손금을 보아 줄 때도 그랬다.
다른 경우와는 달리 골상학 연구원들은 두 손을 다 보았다.
나중에 이유를 묻자 그녀들은 '비밀인데....'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가령 오른손잡이의 경우라면 왼손은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타고난 손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오른손은 성장하면서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을 하기 때문에
손금이 변한다는 것이다.따라서 두 손을 다 봐야 제대로
손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신철희는 그들이 과학에 기초한 현대판 무당 같다고 생각했다.
서태지의 골상-관상이 결코 아니다-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흥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서태지는 스타가 된 이후로 별별 소리를 다 들었지만
골상학 연구회의 이야기처럼 흥미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야기는 장난처럼 시작되었다.
"내 골상 좀 봐줄래요."
서태지의 요청에 골상학 연구원 A가 대답했다.
"원래 그건 잘 말해 주지 않는 것인데........"
"복채는 듬뿍 드릴께요."
서태지는 장난처럼 얘기했고 골상학 연구원 B가 말했다.
"우린 원래 많이 받아요......."
두사람은 구질구질하게 돈 사양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을 줄 알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정도의 명확함을 가진
사람도 세상엔 별로 없었다.
둘은 이미 공통된 분석을 끝냈는지 이야기는
골상학 연구원 A가 대표로 했다.
그녀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놓더니 그림부터 한 장 그렸다.
언뜻 보기에는 별 모양 같았지만 그건 평행한 두개의 선이
존재하는 주택 모양 5각형을 엎어놓은 모양이었다.
"재능과 권력 그리고 카리스마를 나타내는 얼굴형은 대개
이런 골상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도 그래요. 그리고
이 5각형 위에 왕관을 그려 볼께요. 어떤 것처럼 보이는지."
5각형 두 개를 바닥이 마주보게 붙여 놓자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보석 모양이었다.
골상학 연구원 A가 계속 설명을 해 나갔다.
"왕관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반드시 이런 골상과
결합을 해야 완전한 왕관이 되는데.그렇지 못한 사람이 쓰면
바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한 셈이 되는 거죠."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많은가요?"
"몇 사람 안돼요. 조용필,전영록 그리고 요새
'다 함께 손을 잡아요(빛)'라는 노래를 부르는 팀의
장우혁이란 사람이 이런 골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죠.
서태지는 골상학 연구원 A가 이야기한 이름들과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과연 그랬다.
골상학 연구원 A의 말이 이어졌다.
"같은 5각형이지만 눈이나 코 같은 이목구비와 각각의
비율에 따라 카리스마의 정도가 달라요."
"나는 어느 정도죠?"
"그건 말해 주면 안돼요. 직접 생각해 보세요."
서태지는 재미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듣는군.
자신을 북유럽의 왕자라고 이야기한 알골 카페의 여자가 생각났다.
서태지로부터 골상학 2인조가 한 얘기를 들은 신철희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타당성이 있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런식의 선과 도형을 이용한 분석은 다른 분석론에서
가끔 사용되는 것들이라고 했다.
가령 주식 관련이라면 황금 분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식의 적정 투자 시기를
도형으로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흥미 있는 얘기들이었다.
골상학 연구회가 추천한 이미지 메이킹 디자이너들도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인간들은 아니었다.
분명 남자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여성적인 취향들이 아주 강했다.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남자들이 종종 양성적인 취향을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성의 역할과 구분을 넘어서 있는 그 디자이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패션 디자인과 이미지 메이킹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내놓았다.
서태지의 것은 아닌 것 같아 파기해 버린 디자인들도
보통의 사람들이 보면 입을 떡 벌릴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두 달여를 씨름한 결과 기본적인 계획안이 나왔다.
계획안은 크게 디지털 우노 밴드의 구성과
앨범의 내용으로 나누어졌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태지는 디지털 우노 밴드가
자신이 찾던 문제의 해결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리키가 말한 대로 서태지의 음악은 마치 금은 보화를
잔뜩 싣고 항구에 정박한 배였는지도 모른다.
디지털 우노 밴드는 그 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골상학 연구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스키모토 시게루의 음반을 들고 왔다.
세번째다.
신철희가 처음 권했고 리키가 언급했으며 이번에는
2인조가 제시한 것이다.
스키모토 시게루에 대한 연구에 앞서
디지털 우노 밴드에 대한 확정을 지었다.
2인조는 타이핑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정리되어 있었다.
디지털 우노 밴드
1. 밴드의 중심인 서태지가 모든 노래를 만들고 편곡까지
담당한다. 단 스트링 부분은 경우에 따라 클래식 전문가에게
위임할 수도 있다.
2. 기타 중심의 밴드가 아니라 키보드 중심의 음악을
전문으로 한다. 키보드는 2대를 기준으로 하되 필요한
경우 한 명 정도를 더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기타의 영역을 축소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3. 여성 코러스는 3인으로 제한한다.
4. 보컬은 서태지가 중심이 되어 처리하되 전문 보컬리스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성량은 코러스 등으로 커버한다.
5. 곡에 따라 백 댄서들을 쓸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도
서태지는 지나친 율동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6. 밴드의 구성원은 라이브 중심의 연주인들이 아니라
스튜디오 세션맨들을 선정하여 정교한 연주가 될 수 있도록 한다.
7. 디지털 우노 밴드에서 서태지의 역할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밴드 리더의 중간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1차 시안을 확정한 서태지와 신철희는 서울 근교에 임시
스튜디오를 만들고 본격적인 음반 제작 작업에 들어갔다.
앨범의 컨셉은 골상학 연구회가 주장한 대로
'신뢰(confidence)' 로 결정했다.
어쩌면 앨범 타이틀이 될지도 모르는 이 컨셉으로
서태지는 모두 열 곡의 노래를 만들기로 했다.
# 그 무렵 한국의 음반 시장은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군웅할거(群雄割據)라는 말이 어울리게 한달 단위로
스타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동요의 가장 큰 요인은 해외 진출과
해외 아티스트들의 한국 시장 공략이었다.
특히 일본 아티스트들의 한국 진출 움직임은 날로
가시화 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맞설 만한
한국의 아티스트는 없었다.
노쇠한 중견 음악인들 말고는 실력으로 그들과
견줄 만한 가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서태지의 앞길은 바로 이 부분의 해결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노래를 만드는 작업은 알바트로스에서 [윤회]를
제작할 때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태지가 마케팅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고
언어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기도 좋았다.
서태지가 곡을 쓴 숀 레논의 신작 앨범이 준비중이었고
제이콥 딜런 역시 그의 신보에 [윤회]앨범의
타이틀 곡을 수록했다.
가사를 만드는 작업에는 골상학 연구원들도 함께 참여했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분량의 노래말을 준비했고
절반 정도는 그들의 것을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서태지가 음반 작업에 매달리는 사이 신철희는
음반사를 물색하고 있었다.
서태지의 신작이라는 하나만으로도 흥행성은 충분했지만
음반사를 만나고 다닌 신철희는 한국 음반 시장에서도
서태지의 이번 앨범을 그의 흥망을 가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번째 솔로 앨범과 [윤회]에서 보여준 불안감이
차츰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철희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세상 일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단정짓거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한 의미에서의 21세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거대한 1천 년이 끝나는 한 해였다.
사람들의 마음 속엔 불안과 희망이 겹치고 있었다.
1998년부터 한국을 강타한 경제난은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낙관할 수는 없었다.
경제난이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였던 일본 내수 시장은
오히려 1998년 당시보다 어려워지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난은 알려진 것처럼 한국 정부의 외한 괸리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멀게는 월 스트리트의 상황 악화가 영향을 미쳤고
가깝게는 일본 내수 경제의 파산이 불러온 대규모의
엔화 이탈이 한국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일본이 1998년 때처럼 자국 경제의 희생을 위하여 다시
대규모의 엔화를 한국에서 빼간다면 상황이 악화 일로로
치닫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 면에서 앨범의 컨셉을 신뢰로 한 것은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경제 위기를 오로지 경제적인 해법만으로
극복하려 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강화시켜 풀어야 한다는,보다 진보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골상학 연구회의 마케팅과 예지 능력이
얼치기 무당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레코딩 작업이 시작되고 앨범의 발매 시기도
1월 말로 잠정 확정되었다.
레코딩 작업에는 그야말로 국내 최고의 세션맨들이 모두
참여하다시피했다. 녹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 사이 신철희는 부지런히 일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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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것을 가질 권릭가 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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