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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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자살 사건의 재구성
박제영
소문만 무성하던 “눈사람 자살 사건”의 진범이 22년 만에 잡혔다.
최승호 시인이었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그동안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다올 씨는 단지 하수인에 불과했다.
그의 은신처에서 발견된 시체는 놀랍게도 눈사람뿐이 아니었다.
그동안 미제로 남았던 사건들-깨진 거울 자살 사건, 황금털 사자 고양이 살인 사건, 개미 구덩이 추락사 사건, 흑암지옥 사건, 거지와 개죽음 사건, 고슴도치 동반자살 사건, 개똥벌레 낚시터 살인 사건, 구더기 해탈 사건, 망치뱀 자살 사건, 비단잉어 아사 사건 등-의 진범도 최승호 시인이었다.
검찰로 송치되는 순간 기자들이 지금 심경이 어떠냐고 범행 동기가 뭐냐고 묻자, 최승호 시인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았다.
“시를 가르친답시고 개뼈다귀 같은 소리만 하지 않느냐. 그 따위로 가르친다면 그건 가르침이 아니라 가래침이다. 우리말의 맛도 멋도 모르고 시를 논하는 그 혀를 자른 게 뭐가 잘못이냐.”
그가 가래침을 뱉는 모습은 고스란히 전국에 방송되었고, 이를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천년 후에 나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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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 『눈사람 자살 사건』(달아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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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입니다. 그래서 두 편을 띄웁니다.
지금까지 900편 넘게 시를 읽어드렸는데요. 그럼 이쯤에서 물어봐야겠습니다.
오늘 띄운 두 편은 詩입니까? 詩가 아닙니까?
시라고 읽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시가 아니라고 읽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900편 아니라 9,000편을 읽어도
우리는 결국
한 편이 될 수는 없을 테지요.
그럼 저는 어느 편에 손을 들어줘야 할까요?
시편지를 계속할지 그만둘지 이번주 내내 고민해보겠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시의 마침표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찍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언제나 시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시는 뜻밖에 뜻 밖에 있을 겁니다.
2024. 3. 11.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첫댓글 시라고 읽는 우리는 詩民입니다.
어디에도 편을 두지 않고 시와 시 아닌 것 모두 시라고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늘 시와 함께 하겠습니다.
그리고 박제영 시인의 노고에 늘 감사드립니다.^^*
시로 읽었습니다~^^
저도 詩民 맞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