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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 보네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 문 정희 시 ‘쓸쓸‘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아흔세 살 노모가 자리에 누운 지
사흘째 되는 날
가족들 서둘러 모였다
어머니! 지금 누가 젤 보고 싶으세요?
저희가 불러올게요
아들이 먹먹한 목청으로 물었다
노모의 입술이
잠에서 깬 누에처럼
잠시 꿈틀했다
엄마!
아흔세 살 아이가
해 떨어지는 골목에서
멀리 간 엄마를 찾고 있었다
- 문 정희 시 ‘보고 싶은 사람‘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민음사, 2022.
떠나는 순간에도
나 모르는 것투성이일까
숨 쉬고 산 것
그게 다일까
낮은 파도이고 밤은 조약돌인 것을
간신히 알까
좋아하는 것보다
부러워하는 것을 가지려고 했던 것
무엇이 되어야 한다며
머리 쥐어뜯으며 괴로워햇던 순간을
굳이 어리석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모르는 것투성이
그것이 얼마나 희망이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첫눈 같은 신비였는지
너와 나 사이의 악기였는지를
떠날 때 그때 간신히
소스라치듯이 알기는 할까
- 문 정희 시 ‘떠날 때’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민음사, 2022.
처음 만났는데
왜 이리 반갑지요
눈송이 당신
처음 만져보는데
무슨 사랑이 이리 추운가요
하지만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요
하늘이 쓴 위험한 경고문 같아요
발자국도 없이 내 곁에 온
하늘의 숨결
눈송이 당신
슬며시 당신을 좀 먹고 싶어요
당신의 눈부심을
당신의 차가움을 혀로 핥고 싶어요
이윽고 당신의 눈물과 함께
깊은 땅속으로 녹아들고 있어요
- 문 정희 시 ‘눈송이 당신 ‘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민음사, 2022.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 문 정희 시 ‘나무 학교‘
_《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
한탄과 감상의 곰팡이, 하수구에서 올라 온
흙탕물에서 헤엄쳐요
갑옷을 입고 비를 피해 서있는 겁쟁이들이
언어를 방귀처럼 내 질러요
대형 마트에 시를 납품한 후 기득상권 속에 서있는
을씨년스런 어깨들이
동네 장마당에서도 좀 팔려야 한다며
위로와 교훈의 호흡으로 응석을 떨어요
장사꾼의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날개들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 가지로 날라 다녀요
어떤 것은 과장된 가치와 역할을 강조하고
어떤 것은 난장에서 나온 민예품처럼 낡아가요
"이거 무슨 물건이죠?"
"그걸 모르시다니...꼰대...?"
블랙리스트 보다 블랙홀이 더 두려워요
독특하지 않으면 백지가 더 빛나요
활자를 겁내지 말고 날카로운 못으로 파세요
시는 충동이자 충돌
사랑이 그렇듯이 완벽할 수 없어요
이슬보다 땀이 더 뜨거워요
퇴폐 혹은 멸망, 여기는 상처 박물관
자 쏠 테면 쏴라! 홀딱 벗으세요
어떤 언어의 범람도 나체를 뚫지 못 하죠
제발 마실 물 좀 주세요
침묵과 보석을 꿰뚫는 눈알로
위트 앤 시니컬을 쓰세요
- 문 정희 시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시와편견, 2021 겨울호
작은 새처럼 파득이는 항구
음유시인의 비망록처럼
뿌우연 해안선을 따라가면
거기, T자 한 글자쯤이 꺼져버려
깃털같이 가벼워진 숙소
모엘(MO EL)이 있으리
모엘!
흰 파도를 솜이불처럼 내려놓고
충혈된 눈으로 사그라져가는 내 가슴의 폐항
아직 모텔이 아니어서 좋은 곳
무언가 하나를 빼버리면
이리도 부드러운 생의 하룻밤이 떠돌고 있는지
모스부호처럼 은밀히 깜박이는 신비한 추상어
그 곁에서 밤새 하모니카를 부는
겨울바다
적설을 쓰다듬는 나의 하룻밤이
끝내는 울부짖는 고래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불면의 몸을 뒤집을 때
모엘은 절벽사원처럼
바다의 성긴 눈발을
빈 가슴에 고스란히 받아들이리
모엘! 모엘!
무슨 성가처럼 따스한 기억을 채우리
- 문 정희 시‘모엘’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문 정희 시 ‘흙‘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목에 걸고 싶던 싱싱한 자유
광화문에서 시청 앞에서 목 터지게 부르던 자유가
어쩌다 흘러 들어간 뉴욕 빌리지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녔지
자유가 이렇게 쉬운 거야?
그냥 제멋대로
카페 블루노트에, 빌리지 뱅가드에
재즈 속에 기타줄 속에
슬픔처럼 기쁨처럼 흐르는 거야?
내 고향 조악한 선거 벽보에 붙어 있던 자유
음흉한 정치꾼들이 약속했지만
바람 불지 않아도 찢겨 나가 너덜너덜해진 자유가
감옥으로 끌려간 친구의 뜨거운 심장도 아닌
매운 최루탄도 아닌
아방가르드, 보헤미안, 히피들 속에
여기 이렇게 공기여도 되는 거야
햇살이어도 되는 거야
청와대보고 여의도보고 내놓으라고 목숨 걸던 자유가
비둘기여야 한다고, 피 냄새가 섞여 있어야 한다고
목청껏 외치던 자유가
어쩌다 흘러 들어간 낯선 도시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녀도 되는 거야?
그것을 쇼윈도에 걸린 명품처럼
아프게 쳐다보며 속으로 울어도 되는 것이야?
* Bob dylan, 「Like a rolling stone」
- 문 정희 시 ‘구르는 돌멩이처럼* ’
* [작가의 사랑], 민음사, 2018.
유랑의 악보 속에
다리 하나 숨기고
붉은 죄 휘감고 치솟다가
풀고
풀어 주고
다시 뜨거이 휘감는다
가벼이 눕다
하르르!
피어나라! 불새
당신 입술 과일도 아닌데
파먹고 싶어
가쁜 숨결
맨발로
소나기 비통하게 땅을 두드리는 밤
당신은 탱고
슬픈 새의 춤
집시의 피가 속삭인다
당신은 카스카벨*
은방울 심장을 통통 두드린다
* cascabel: 스페인어로 방울, 맑고 쾌활한 사람
- 문 정희 시 ’탱고의 시‘
*<열린시학 여름호 > 특집
이유도 없이 가슴 미어지는
이 슬픔을 들어다가
오는 봄 곁에나 가벼이 앉히고 싶다
암소가 보리밭 너머 먼 산을 향해 일어서고
추위를 견딘 소나무가
청년의 어깨처럼 듬직해지는
봄날, 나의 슬픔은
초록의 블라우스를 입고
새로 핀 꽃들 속에 앉아
민주적으로 봄 회의나 했으면 좋겠다
오늘 회의 주제는
뜬구름 같은 사랑! 그런 주제 말고
푸른 눈썹을 달고 흔들리는 저 나무들처럼
말보다 몸으로 실천하자는 주제로 정하리
봄과 슬픔을 투시하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온몸으로 발언하리
- 문 정희 시 ‘봄 회의‘
[작가의 사랑], 민음사, 2018.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진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꼭꼭 싸매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랫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밝은 달 속의 흑점을 칮이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 문 정희 시‘유방’
그때, 뉴욕 7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자리 백인 남자가 읽고 있는 뉴욕타임스를 곁눈으로 읽다가
순간 날아든 강펀치에 나는 쓰러졌네
사우스코라아 헝그리 복서, 김득구 사망
인간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복싱은 스포츠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소리 질렀지만 나는 보았네
내 손에도 네 손에도 끼워져 있는 피묻은 권투 글러브
링에 올라가 싸우게 해줘
적어도 누가 때리는지는 알 수 있잖아
14세에 무작정 상경, 껌팔이구두닦이빵공장을 거쳐 올라선
사각의 링, 패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어
아예 관을 짜가지고 떠났던 스물세 살,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챔피언 맨시니의 주먹에 쓰러졌네
아니야, 그를 쓰러뜨린 건 맨시니의 주먹이 아니었다구
너였다구, 나였다니까
링에서 글러브를 낀 채 맞아 죽은 선수가
현재까지 6백 명이 넘는다고 활자는 말했지
하지만 이 스릴 넘치는 열광적인 게임을 중지할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었지
사우스코리아 헝거리 복서의 시신 위에는
대머리 독재자의 훈장이 수여되고
피 묻은 글러브가 날아다니는 사각의 링은
아직도 인간의 세상 어디에든 있지
물론 오늘 여기에도 있지
이것은 권투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 당신이 서 있는 四角사각의 링을 보라구
힘이 없는 것은 죽어야 하는 死角사각을 보라구
권투는 적어도 누가 무멋이 때리는지는
알 수나 있잖아
그리고 25년 후, 2008년 사우스코리아 청년
최요삼은 권투 그러브를 낀 채
사각, 사각, 사각의 링에서 또 뇌사당했네
- 문 정희 시 ‘사각의 링‘
*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묘비명을 "됐어!"라고 정해 놓은 사람을 안다
그의 아내의 묘비명은 "생긴 것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가다"이다
"됐어!" 씨와 "생긴 것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가다" 씨의
결혼 생활은 그런대로 행복했을 것같다
가을날, 허공에서 묘비명들이 떨어진다
"이곳은 영혼이 말을 갈아타는 역참"*
"말 탄 자여 지나가라"*가 뚝 뚝 땅에 구른다
"어쨌든 죽는 건 늘 타인들이다"*
응 응 응
노란 엉덩이들이 대답을 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손바닥들이 무원 삼매(無願 三昧)로 지상을 다둑인다
애쓰지 마라! 애쓰지 마라!
"여기 아내의 혀와 음부를 사랑한 만큼
아내의 배도 사랑하였던 돈 리고베르또 잠들다"**
묘비명들이 파릇파릇 또 태어나면 좋으련만
"흘러가는 물 위에 자기 이름을 쓰려고 한 자 여기 누웠노라"*
* 쉬페르비엘, 예츠, 마르셀 뒤샹, 니코스 카잔차키스. 키츠의 묘비명들.
** 바르가스요사의 소설 『새엄마 찬양』에서.
- 문 정희 시 ‘묘비명‘
* [응], 민음사, 2014.
마음을 파들어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내일 모래 저녁답쯤에는 지평선이 보일까.
그리움이 끝난 그곳에는
타버린 나무들이
무더기 무더기 쓰러져 있을까.
얼마나 까아만
화산재가 쌓여 있을까.
슬픔의 벼랑마다 누가 서 있어서
밤마다 이토록 시를 쓰게 하는 것일까.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는 이도 많건만
내 마음은 얼마나 깊어
그대 하나 묻기에도
한 생애가 걸리는 것일까.
끝 모를 모래 바람 부는 것일까.
- 문 정희 시 ‘채탄 노래‘
[남자를 위하여], 민음사, 1996.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 문 정희 시 ‘아들에게‘
올 여름엔 휘늘어진 버드나무 아래 앉아
부처처럼
부채처럼 바람을 배워야지
왜 부처를 배워야 하나
내가 부처라는데
그런데 나는 늘 뜨겁기만 해서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어서
부처처럼
부채처럼 시원한 그늘을 배워야지
노마드*도 한낱 유행이라
세계의 공항들은 이미 장터처럼 붐비고
나를 찾고 싶어 떠나왔다는 얼치기들이 버린 차표로
대도시 쓰레기 반을 채운다네
하나같이 닿은 곳은
아포리아**역
결국 은자(隱者)가 새로운 길일지도 모르지
올 여름엔 홀로 휘늘어진 버드나무가 되어
부처처럼 부채처럼
일가(一家)를 이뤄야지
앉아서 천리 길 당도해야지
* 자기를 부정하며 끝없이 떠나는 방랑, 유랑민.
**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 문 정희 시 ‘아포리아 역‘
* [응], 민음사, 2014.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 문정희 시 ‘동백’
나 떠난 후에도 저 술들은 남아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겠지
나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술에 취해
몸은 땅에 가장 가까이 닿고
마음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닿아
허공 속을 몽롱하게 출렁이겠지
혀끝에 타오르는 불로
아무렇게나 사랑을 고백하고
술 깨고 난 후의 쓸쓸함으로
시를 쓰겠지
나 떠난 후에도
꿀 같은 죄와 악마들은 남아
거리를 비틀거리며
오늘 나처럼 슬프게 돌아다니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 문 정희 시 ‘나 떠난 후에도‘
[다산의 처녀], 민음사,2010.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 문 정희 시 ‘살아 있다는 것은‘
* [카르마의 바다], 문예중앙, 2012.
어떤 물음에도 대답은
저 무덤!
그 하나야
종교보다 깊고 거대한 침묵
천년 사원보다 영원하고 쓸쓸한 발설
이것이 처음이자 끝이야
무(無)를 발명한 사람도 그랬어
잃어버릴 게 없다는 것!
지금 사랑할 일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시인은 사라져도 시는 계속 태어날 것이며
해는 여전히 뜰 거라는 것
아직도 모르겠어?
- 문 정희 시 ‘아직도 모르겠어? ‘
[카르마의 바다], 문예중앙, 2012.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 문 정희 시 ‘성공시대‘
* <현대시 4월호> 2005
말벌처럼 허리 부러진 페닌슐라!
이 반도의 아래쪽이 나의 고향입니다
독재자들이 철따라 출몰한 땅! 초등학교 때는
수업을 전폐하고 대통령 할아버지라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탱크를 밀고 나온 군인들이 새로 길을 만들고
선거를 악용하며 버티는 사이
나의 젊음은 최루탄 속에 시들어갔어요
북쪽에는 더 미친 독재자가 있다고 겁주던
노회한 독재자들이었어요
문학을 했지만 문자옥(文字獄)*이 두려워
무사하게 사는 법부터 터득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서둘러 결혼 속으로 도망쳤지만
결혼 속에도 독재자는 있었어요
그는 더욱 난해한 모습으로 삶을 애무하며
지배와 행복의 명분을 세워나갔어요
혼자 때리고 혼자 깨어지는 무정란 같은 언어를 들고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가끔 모호한 시를 썼어요
속도와 물신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시간의 검푸른 이끼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요
이윽고 내 안의 늙은 독재자가 나를 덮쳤어요
* 문자옥(文字獄) : 지식인의 글을 꼬투리 삼아 탄압하는 것.
- 문 정희 시 ‘독재자에 대하여’
* <시인수첩>2014년 겨울호
잘 가요 내 사랑
나는 진흙 속에 남겠어요
나무와 나뭇잎이 헤어지듯
그렇게 가벼운 이별은 없나 보아요
당신 보내고 하늘과 땅의 가시를 홀로 뽑아내요
끝까지 함께 건널 줄 알앗는데
바람이 휘두르는 칼날에 그만 스러집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조차 때로 집어등(集魚燈)처럼
사람을 가두고 눈멀게 하네요
나 모르는 것을 숨기고 있다가
진흙탕, 가장 깊은 진흙탕에 넘어뜨리네요
더 이상 갈 곳 없어 광활한 심연
꽃도 죄도 거기 녹이며
검은 씨앗으로 나 오래 어둡겠어요
당신이 또 다른 이름이 되어 가는 동안
홀로의 등불을 호로 끄고 켜는
작은 토불 되어 뒹굴겠어요
- 문 정희 시 ‘토불(土佛)‘
[응], 민음사, 2014
가지 마 벌새
벌써 가지 마
여기 한번 만져봐
심장이 두 개일거야한 개는 네가 준 거야
그러니까 모두 네 것이야
너를 담고 조금 더 살게 해줘
낮과 밤과 숲과 얼룩말들, 악기와 찻잔들
다 함께 좀 더 살아
눈부시고 눈물겨워
너와 산다는 거
가지 마 벌새
벌써 가지 마
물 먹고 오줌 누고 숨 쉬고 사랑하고
좀 더 살다 가
- 문 정희 시 ‘벌새를 위한 아다지오‘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문 정희 시 ‘율포의 기억‘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문 정희 시 ‘찔레‘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 문 정희 시 ‘ 응’
* 계간 <미네르바>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 문 정희 시 ‘남편’
엄마에게 [문정희]
자밤자밤! 이건 밤비 오는 소리가 아니라
나물 같은 것을 손가락 끝으로 집을 만큼 한
분량을 말하는 것이란다
엄마는 늘 말했다
사람의 평생이 한 자밤도 안 되더라
꼭 도둑맞고 난 아침 같더라
무식한 우리 엄마! 이렇게 무섭고 뜨거운데
겨우 시작인데 죽고 싶은데, 이 사랑!
시대가 바뀐 것도 모르는 엄마
나물처럼 손가락 끝으로 한 번 집으면
그만인 게 사람이라니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쓰겠다고 대들었다
손가락 말고 도둑맞지 말고
내가 도둑이 되겠다고
무식한 엄마에게 대들고 대들었다
엄마는 지금 한 자밤도 벌써 아닌
일산 공원묘지, 밤비도 바람도 아닌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적멸로
잘해야 일년에 한 번이나 날 불러
자밤자밤! 아프게 속삭여 준다
알타미라 동굴속에 요즘것들은 어쩌구저쩌구 써 있었다고 했던가.
세대간의 차이는 분명 있는 것 같다.
언제나 구세대는 신세대가 못마땅하고
신세대는 구세대가 구닥다리 같고 고루하고 무식한 거다.
지나놓고 보면 거기서 거긴데도 말이다.
대개 신세대는 구세대보다 더 많은 지식을 얻는다.
학교도 더 다닌다.
부모세대가 잘해야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신세대는 거의가 대학을 나온다.
그러니 부모가 무식하게 보일만 하다.
게다가 스마트폰이니 컴퓨터니 사용법을 몰라 쩔쩔매는데 신세대는 척척이다.
그러니 부모가 무식하게 보일만 하다.
그래, 나 무식하다. 내 부모에게도 무식하다고 느꼈었으니 무시 당해도 싸다.
그래, 나 무식하다. 그래도 한 자밤 지나고 나면 늬들도 무식해진다.
자밤자밤! 그게 한 자밤이란다.
- 문 정희 시 ‘무식한 엄마에게‘
너는 책이다. 바다여
네 한 장의 유랑
네 한 장의 은유
네 한 장의 시퍼런 성욕
너는 지금 표현의 광란*을 즐긴다
새로 태어난 물시계와 돌고래 사이
네가 발명한 불안이
난파한 해적선 속에서 녹슬고 있다
너는 책이다. 바다여
네 한 장의 취기
네 한 장의 난수표
죽는 날까지 내 앞에 펼쳐진
끝내 다 읽지 못한 한 페이지다.
* 프랑시스 퐁주
- 문 정희 시 ‘너는 책이다‘
[카르마의 바다], 문예중앙, 2012.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나의 자리인가요
탑처럼 서서 듣는 저 종소리가
나의 시인가요
종소리 속의 쇠 울음, 짐승의 순간
애달픈 육체
기꺼이 길을 떠나
기꺼이 길을 잃어버린 대낮
시간이 탕약처럼 졸아든 고도(孤島)의 한가운데
길이 물이고 물이 길인가요
길을 잃기도 쉽지 않아
미로와 수로 사이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길*인가요
나는 외로움 부자, 자유 부자, 가난 부자
온몸으로 꽃 한 송이
눈부신 노숙
오직 허공을 머리에 인
가벼운 허영의 깃털인가요
* 지관타좌(只管打坐), 일본 조동종의 창시자 도겐(道元)의 말.
- 문 정희 시 ‘길 잃어버리기‘
* [카르마의 바다], 문예중앙, 2012
꿈결같이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 송이 흰 찔레 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쪽한 가시로
꽃 속에 메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 문 정희 시 ‘찔레꽃’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문 정희 시 ‘한계령 연가‘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이 눈썹을 만져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 정희 시 ‘키 큰 남자를 보면’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사람, 너는 누구냐
밤하늘 가득 기어 나온 별들의 체온에
추운 몸을 기댄다
한 이름을 부른다
일찍이 광기와 불운을 사랑한 죄로
나 시인이 되었지만
내가 당도해야 할 허공은 어디인가
허공을 뚫어 문 하나를 내고 싶다
어느 곳도 완벽한 곳은 없었지만
문이 없는 곳 또한 없었다
사람, 너는 누구냐
나의 사랑, 나의 사막이여
온몸의 혈액을 짜서 너를 쓴다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별처럼 내밀한 촉감으로
숨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너는 얼마나 짧기에 이토록 아름다우냐!
- 문 정희 시 ‘ 사람에게‘
* 다산의 처녀 / 민음사, 2010. 9. 24
만지지 말아요
이건 나의 슬픔이에요
오랫동안 숨죽여 울며
황금 시간을 으깨 만든
이건 나의 것이에요
시리도록 눈부신 광채
아무도 모르는
짐짓 별과도 같은
이 영롱한 슬픔 곁으로
그 누구도 다가서지 말아요
나는 이미 깊은 슬픔에 길들어
이제 그 없이는
그래요
나는 보석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 문 정희 시 ’ 보석의 노래‘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 문 정희 시 ‘가을 우체국‘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무언가 확실히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문 정희 시 ‘치마'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도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 임 보 시 ‘팬티’
* ‘쿵짝’이라 문 정희 시에 덧붙임. ^^~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 문 정희 시 ‘늙은 꽃‘
<서정시학> 2009 가을호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조금 울게 된다
너는 물보다도 불보다도
기실은 돈보다도 더 많이
말을 사용하며 살게 되리라
그러므로 말을 많이 모아야 한다
그리고 잘 쓰고 가야 한다
하지만 말은 칼에 비유하지 않고
화살에 비유한단다
한번 쓰고 나면 어딘가에 박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무성한 화살 숲 속에
살아있는 생명, 심장 한가운데 박혀
오소소 퍼져가는 독 혹은 불꽃
새 경전의 첫 장처럼
새 말로 시작하는 사랑을 보면
목젖을 떨며 조금 울게 된다
너는 물보다도 불보다도
돈보다도 더 많이
말을 사용하다 가리라
말이 제일 큰 재산이니까
이 말을 할 때면 정말
조금 울게 된다
- 문 정희 시 ‘화살노래‘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 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
눈에 뛸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 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 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 버린 것은 누구일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게 휘말려
한평생을 던져 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 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주앙, 변학도, 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들이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 문 정희 시 ‘다시 남자를 위하여‘
[남자를 위하여] 민음사.1996.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아무 것도 못 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사랑을 갈비처럼 뜯어먹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 문 정희 시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 네루다 풍으로,
* [사랑은 詩가 되었다] 모아드림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미당의 시
** 매릴린 옐름, [아내]
- 문 정희 시 ‘나의 아내‘
[제5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중 최종후보작
사랑은 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잎새에 머무는 계절처럼
잠시 일렁이면
나무는 자라고
나무는 옷을 벗는
사랑은 그런 수긍 같은 것임을
그러나 불도 아닌
사랑이 화상을 남기었다
날 저물고
비 내리지 않아도
저 혼자 흘러가는
외롭고 깊은
강물 하나를
- 문 정희 시 ‘사랑은 불이 아님을‘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 문 정희 시 ‘러브호텔’
아직도 쓸데없는 것만 사랑하고 있어요
가령 노래라든가 그리움 같은 것
상처와 빗방울을
그리고 가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어머니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요
밥보다 시커먼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몇 권의 책을 끼고 잠들며
직업보다 떠돌기를 더 좋아하고 있어요
바람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홀로 가는 별과 사막을
미친 폭풍우를 사랑하고 있어요
전쟁터나 하수구에 돈이 있다는 것쯤 알긴 하지만
그래서 친구 중엔 도회로 떠나
하수구에 손을 넣고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단 한 구절의 성경도
단 한소절의 반야심경도 못 외는 사람들이
성자처럼 흰옷을 입고
땅 파며 살고 있는 고향 같은 나라를 그리며
오늘도 마른 흙을 갈고 있어요. 어머니
- 문 정희 시 ‘커피 가는 시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아침에 샤워를 하며
알몸에게 말한다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마라
내가 시인이라 해도
너까지 시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제 나는 하루에 세 살을 더 먹었다
문득 그랬다
이제 백 년 묵은 여우가 되었다
그러니 알몸이여, 너는 하루에 세 살씩 젊어져라
너만큼 자주 나를 배반한 것은 없었지만
네 멋대로 뚱뚱해지고
네 멋대로 주름이 생겼지만
나의 시가 침묵과 경쟁을 하는 사이
네 멋대로 사내를 만났지만
그래도 그냥 너는 알몸을 살아라
책상보다 침대에서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싱싱하게
나의 방앗간, 나의 예배당이여
- 문 정희 시 ’알몸에게‘
*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2004.5
산다는 것은
거미줄을 타고 허공을 오르는 것
곡예를 하듯 오르고 또 올라가 보면
아무 것도 없지
허공뿐이지
시를 묻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답장을 써서 보내고
돌아서서 또 시를 쓰네
산다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은
거미줄을 타고 허공을 오르는 것이라고
거미줄에
이슬 몇 알이
내가 가진 전부
하지만 그 거미줄과 이슬이
어느 거대한 건축보다 부동산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저주받은 비극의 눈을 나는 가졌네
나는 그 축복을 쓰네
나는 거미줄을 쓰네
나는 사네
- 문 정희 시 ‘나는 거미줄을 쓰네‘
*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 2018)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적이 있다
늙은 코미디언이 맨 땅에 드러누워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어린 날이 있었다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 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 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늙은 코미디언처럼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 문 정희 시 ‘늙은 코미디언‘
* 시집『작가의 사랑』(민음사, 2018)
* EBS 발견의 기쁨, 동네책방
**문 정희: 1947년 5월 25일, 전남 보성군 출생.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현대문학 박사. 1969년 월간문지학 시 '불면' 2022.10.~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2015.
-수상내역
2015. 제8회 목월문학상
2015. 제47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학부문
2013. 제10회 육사시문학상
2010. 제7회 시카다상
2008.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문학부문상
2004. 나지나만 문학상
2004. 제16회 정지용 문학상
2000. 제14회 동국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