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 그늘에서 / 조은길
선덕여왕은 모란꽃 필 때 뭐했나
신라성 발칵 뒤집어놓은
꽃송이 꽃송이 보며 무슨 생각했나
피는 꽃 지는 꽃 촛농처럼 쌓이는 밤
금관 옥관 높은 머리 홀로 풀어놓고 뭐했나
국사를 읽었나 공자 맹자를 읽었나
성문 박차는 범나비를 기다렸나 뭐했나
속벙어리 내 이모는 모란꽃 필 때 뭐했나
냉가슴 발칵 뒤집어놓은
꽃송이 꽃송이 보며 무슨 생각했나
그리워 그리워 눈물 쌓이는 밤
피는 꽃 지는 꽃 손도 못 대어보고 뭐했나
늙은 십장 따라 현해탄을 건넜나
가물가물 돌아올 날짜를 세었나 뭐했나
장미 / 조은길
밤 사이 보슬비가 왔다갔을 뿐인데
담을 뒤덮은 붉은 장미 넝쿨
이 아침 불현듯 창문을 깨고 날아든 돌멩이같이
놀랍고도 황홀한 장미의 포즈
나는 눈이 찔린 듯 눈이 부시다
하지만 나는 시에 미친 여자
장미를 처음 본 듯 가슴에도 대어보고
코에도 비벼보고 가지를 흔들어보고
꽃을 빙빙 돌며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보는데
장미 꽃잎으로 목욕을 했다던 클레오파트라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장미만 그리다 죽은 화가
장미꽃바구니 장미예식장 장미아파트 장미모텔
장미미용실 장미의상실 장미향수 장밋빛머플러
장미쟁반 장미브로치 같은 언어들이
이미 머릿속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장미를 보았을 때
뒷걸음질치며 울었다던데
조금 커서는 장미를 꺾다 가시에 찔려 울었다던데
나는 이미 장미에게서 너무 멀리 온 것인가
하지만 나는 시에 미친 여자
장미는 추하다 시궁창이다 구더기이다
애꾸눈이다 눈물이다 사막이다 악마다 저주다
말을 바꾸어본다
눈을 씻어본다
멸치 / 조은길
바다를 조립하고 남은 못 부스러기
고래들의 오랜 군것질거리
널 두고 사람들은 뼈골에 좋다며
첨벙첨벙 그물자루를 던지고
무심한 운명론자들은
운이 나쁜 것들
꽃밭의 잡초 같은 것
광야의 하루살이 같은 것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발가벗고 흘레붙는 어미아비를 보지 못했고
제가 찢고 나온 피 묻은 어미자궁을 기억하지 못하니
납득할 만한 과거도 미래도 없다
다만 살고 싶고
천장에 거꾸로 처박혀서라도 살아남고 싶은
엄연한 현재만 존재할 뿐
폭풍이 와장창 부숴놓고 간 바다기둥에
못 꾸러미를 쏟은 듯
촘촘히 밀려와 박히는 멸치들
바다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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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길 시인
경남 마산 출생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노을이 흐르는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