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정(情)과 공사(公私)를 구분 못한 공민왕과 리어왕의 말로 !!
독일 출신 역사학자이며 저명한 평론가인 에블린 피예에(Evelyne Pieiller)는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가 쓴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라는 고전(古典)을 인용하여 루이 16세 노릇을 하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철이 없다”고 질타했다.
“철이 없다”는 표현은 어른스럽지 못하고 행동이 미숙하다는 뜻이다
주로 나이에 비해 성숙하지 않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위에 “왕의 두 신체(The King’s Two Bodies)”란
보통 사람인 자연인(自然人)의 신체(身體)와
한 국가 권력의 최고 위치인 통치자(王)의 신체(身體)다.
왕도 보통사람과 똑같은 신체(身體)를 가진 보편적인 사람이지만
동시에 한 나라의 통치자다.
몸은 하나인데 두 가지 신분이므로 그 몸의 위치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항상 생긴다.
왕(王)의 영혼(靈魂)은 공인(公人)과 사인(私人)이 싸우는 거센 격투장이다.
공(公)이 사(私)를 이기면 나라가 산다.
그 반대면 나라가 망(亡)한다.
▶우리는 셰익스피어 대표작중 하나인 리어왕(King Lear)을 안다.
“리어왕(King Lear)”이 그런 사례다.
리어왕에게는 딸이 셋 있었다
리어왕이 늙어 나라를 삼등분하여 세 딸에게 상속하려 했다
상속 조건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다.
상속을 조건으로 하는 사랑은 불순하다며 막내딸 코델리아가 거부했다.
분노한 리어왕은 두 딸에게만 상속한다
반대한 막내딸 코델리아는 추방했다.
그러나 리어왕은 상속을 받은 첫째 둘째 두 딸에게 버림을 받는다.
버림받은 리어왕은 황야(荒野)를 떠도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전쟁이 일어났다
모두가 죽었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나라를 사유화한 탐욕이었다.
이 불행의 첫 불씨가 된 건 리어왕의 착각이었다.
한나라 통치자의 사랑을 공적 문제가 아닌 개인적 문제로 잘못 생각했다
▶우리 역사에도 아니 지금 이 나라 현실 정치에도 리어왕이 재현되고 있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은 총명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王)이였다.
고려에 군림하던 친원(元)파를 제거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우리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사랑하는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출산(出産)중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은 슬픔을 못이겨 실성(失性)까지 했다
공민왕은 공주가 묻힌 묘(墓)를 무수히 배회(徘徊)했다
초상화(肖像畵)를 품에 품고 끝없이 흐느꼈다.
밤이면 술에 취해 내시(內侍)들을 매질하다 결국은 자신이 암살당했다.
공민왕은 고려 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개인적 슬픔에 빠져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더 깊은 수렁에 빠트려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운 건국자(建國者)다
태조 이성계는 일본의 집단 해적 왜구(倭寇)의 만행에서 백성을 구한 영웅이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개국 1등 공신 이방원을 내치고,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세웠다.
이방원(李芳遠)은 이성계와 정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방석(李芳碩)은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소생이다
정부인과 형제의 서열로 보아도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
일개 무사(武士) 이성계가 왕이 된 공(功)은 계비(繼妃)인 강씨의 역할이 컸다
이성계는 강씨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소생을 세자(世子)로 세운 원인이다.
본래 정당(正當)한 왕권(王權) 계승법(繼承法)은 본처(本妻)의 자식들을 순서로 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성계는 공평성(公平性), 정당성(正當性)을 모두 잃었다.
결국 제1차 왕자의 난(亂)이 일어났다.
이방석은 죽음을 당하였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방원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인 조사의(趙思義)로 하여금
난을 일으켰다.
그리고 30여 년 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패(無敗)의 장수였던 이성계(李成桂)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조사의(趙思義)를 내세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 이방원에게 패배하였다.
아버지와 자식과의 싸움이었다.
사사로운 가족의 권력 다툼에 국가(國家) 안위(安危)는 안중에 없었다.
늙은 이성계는 깊은 밤 궁궐에서 슬피 울었다.
태종 이방원의 손은 피로 얼룩졌다.
정몽주를 죽이고,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형제를 죽였다.
친형과는 칼을 겨누고, 아버지와 싸웠다.
패륜을 넘어섰다.
외척의 화를 우려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생사를 같이한 처남 4명도 모두 죽였다.
그 충격으로 왕비 원경왕후 민씨가 쓰러졌다.
태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스스로 칼을 들고 일어선 여장부였다.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언행이 이탈되자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웠다.
태종이 죽었을 때, 조선창업 개국공신 101명 중 20여 명만 생존했다.
이방원이 세종대왕 정치에 거림돌이 되는 사람은 다 죽인 것이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일어난 패륜이었다.
세종대왕은 아버지 이방원의 피 묻은 손에 의하여 세워진 성군(聖君)이다.
반면에 태종 재임기간에 건국 30년도 안 된 조선은 확고한 국가적 안정을 다졌다.
그 뒤를 이어 위대한 세종의 시대가 꽃피었다.
태종은 세종(世宗)의 처가(妻家)도 도려내었다.
세종의 장인은 영의정 심온(沈溫)이다.
그 장녀가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沈)씨다.
태종은 강상인(姜尙仁) 옥사(獄事)에 연루시켜 심온(沈溫)을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심온(沈溫)의 아내와 자녀는 관노(官奴)로 만들었다.
세종은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사랑했다.
하지만 태종의 잔인한 처사에 대해
"내가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하였다"고 회고했다.
세종 즉위 8년 뒤에야 신하들이 요청하자 비로소 처갓집 사람들의 노비를 면제시켰다.
▶고종(高宗)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는 대한제국말의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조선 외교대표인 미 공사관 서기관 샌즈(W F Sands)는 명성왕후에 대하여
“시대를 앞섰고, 여성을 초월한 정치가”였다고 민비를 평가했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대의 대한제국 파병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외국군에게 백성이 죽고, 일본도 파병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조정 대신들은
반대했다.
청(淸)나라 군인이 들어오자, 일본도 파병(派兵)했다.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싸움터로 변했다.
조선 왕조는 그렇게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왕(帝王)시대의 왕(王)과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은 다르다.
그러나 왕(王)이든 대통령(大統領)이든 모두 개인을 초월한 공적인 자리가 되어야 한다
나라를 위해서는 때로 본의 아니게 악인(惡人)이 되는 길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국정책임자의 자리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사상가이며 정치철학자 군주론 정치고전을 쓴
마키아벨리는 충고하고 있다.
통치자란 인간(人間)과 야수(野獸)의 경계에 선 존재다.
인간의 따뜻함과 거리가 먼 사사로운 관계를 끊는 위치다.
태종이 그랬다.
성군 세종도 인간적 연민(憐愍)을 누르며 인내했다.
박정희도 그랬다.
진정한 통치자의 국가를 위해 꼭 걸어가야 할 길은 가장 가혹한 시련이다.
진정한 국가와 국민에 대한 헌신은 종교적(宗敎的) 순교(殉敎)보다 어렵다.
대통령 아내들의 부적절한 처신이 나라를 흔들고 국민을 한숨 쉬게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의 중동전쟁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에 국민은 불안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당선이 대한민국 안위에 미칠 걱정이 깊어지고 있다.
예부터 내려오는 선인(先人)의 충고가 있다
妻不治者无能治國(처불치자무능치국)
아내를 못 다스린 남자는 나라도 못 다스린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