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검은 건 [주민현]
밤에는 자신을 구별하기가 힘들어지고
서로의 실루엣을 가볍게 통과하고
밤이 검은 건 우리가 서로를 마주 봐야 하는 이유야
어둠 속에서 이야기는 생겨나고
종이 한장의 무게란
거의 눈송이 하나만큼의 무게이겠으나
무수한 이야기를 싣고 달리는 선로만큼 납작하고
가슴을 가볍게 누르는 중력만큼이나 힘센 것
한 장의 종이는 이혼을 선언하는 종지부이거나
사망신고서
찢어버린 편지이기도 하지
내가 한 장의 종이를 들고
전봇대 위로 올라가 홀로 전기를 만지던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면
백만 볼트의 전기가 흘러 당신의 입술과 함께 덜덜 떨리면
세상이 몹시 외롭고 이상한 별처럼 보이겠지
아주 깜깜한 밤은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외딴 우주 같아
하지만 밤을 뒤집어보면
무수히 많은 빛들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고
밤과 새벽 사이 무수한 빛의 스펙트럼을 밟고
오늘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무겁다지만
이야기를 품은 인간의 무게만 할까,
어떤 종이에는 불법 점거의 위법 사항이나
파산에 대한 위협적인 말들이 적혀 있고
법률 서적을 성실히 교정보는 오후에
위법과 과실에 대해, 어떤 치사량에 대해
세상은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지
그러나 낮과 밤 그 사이 시간에는 이름이 없고
떠난 사람의 발자취에는 무게가 없고
외주의 외주의 외주가 필요했던
치사량의 노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홀로 이야기의 성을 맴돌며
잠들 수 없는 한 사람의 고독한 뒷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밤에도 어떤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어.
-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