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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 정 끝별 시 ‘모래는 뭐래?‘
[모래는 뭐래],창비, 2023.
귓속 고막에서 달팽이관 사이
귓속뼈를 이루는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라는 가장 작고 가벼운 뼈들이 가장 나중까지 듣는다기에
들을 때 속귀의 귓속뼈들이 움직인다기에
임종을 선고한 의사가 나가자
아직 따뜻한 엄마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의 가장 작은 뼈들을 내 작은 목소리로 어루만지며
엄마,
엄마가 돌아간 시간을 잘 기억할게
엄마도 잘 기억해서 그 시간에 꼭 찾아와야 해
- 정 끝별 시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ㅡ계간 《창작과비평》(2023, 겨울호)
남영동 굴다리를 건너자 함박눈이 쏟아졌다
왔던 곳을 향해
너는 삼각지로 나는 서울역으로
청춘이란 그렇게
파국을 향해 직진하는 것
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멀어지는 두 끝 사이에 함박눈이 쌓였다
끝으로 달려가던 버스가 쌓인 눈에 끊기고
끝으로 달아나던 발길이 쌓이는 한밤에 주저앉고
눈에 쏟아진 사이다처럼 자책이 움푹했다
눈에 파묻힌 맨발처럼 추억이 얼얼했다
그러니까 그때
함박눈만 아니었으면
나는 다시
청파동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다
너도 그랬을 것이다
청파동 폭설에
새파랗던 눈사람을 세워두고
반생을 하얗게 녹고 있다
- 정 끝별 시 ‘청파동 눈사람‘
[모래는 뭐래],창비, 2023.
허공에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종일 제 거미줄에 걸려 있는 거미처럼
모른 듯 모든 걸 걸고
내민 엄마 손을 잡는 아가손처럼
엄마 손을 놓고 달려가는 아가손처럼
모른 듯 모든 걸 놓고
벼락에 몸을 내준 밤나무가 비바람에 삭아내리듯
절로 터진 밤송이가 제 난 뿌리로 낙하하듯
남은 숨을 군불 삼아 피워올리겠습니다
매일 아침 첫 숨을 앗 숨으로!
*앗숨(Ad Sum) :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 정 끝별 시 ‘앗숨*‘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얼마나의 해저를
산 채로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다
두 눈이 불거지고 온몸이 투명해져 스스로 빛을 낼 때면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마침내 심해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다 언제나 너는
- 정 끝별 시 ’디폴트값‘
* 영어의 'Default value' 에서 유래한 말로, 별도 설정을 하지 않은 초기값, 즉, '기본 설정값'을 의미한다.
검은 물잠자리 한 쌍이 길을 내며 날았다
조심조심 날아도 연두 방아깨비가 튀었다
하얀 취꽃을 알려준 건 너였고
새빨간 떡맨드라미꽃을 일러준 건 나였다
헬리콥터가 하늘을 가르고 지나면
구름은 다른 몸이 되어 흘렀고
흰 모터배가 물살을 가르고 지나면
강물은 다른 쪽으로 물비늘을 눕혔다
잠시였다
갈라진 것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앞서 날던 검은 물잠자리 한 쌍이
서로의 긴 꼬리를 휘어잡고
강물과 구름 사이에 동그란 허공을 만들었다
우리 결혼할래요?
- 정 끝별 시 ‘늦여름 물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아이스커피 잔에 맺힌 물방울이 미끄러지자
하지의 저녁 창에 소나기가 들이쳤다
급히 닫힌 창 안은 꽃 속인 듯 깊고
창에 맺힌 빗방울이 폐포처럼 벌떡이다
물 끓는 소리를 내며 가쁘게 흘러내렸다
찬물에 해동되는 굴비가 비릿하고
한소끔 끓어오른 아욱국이 자욱하고
식탁엔 숟가락과 젓가락이 기다랗고
세찬 비는 흠뻑 젖은 귀갓길 신발들을
서, 서, 서, 창 안으로 다급히 쓸어 담고
- 정 끝별 시 ‘여름 이야기‘
[모래는 뭐래], 창비, 2023.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
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
- 정 끝별 시 ‘까마득한 날에‘
[와락], 창비, 2008.
꽃에 물을 주었다
꽃에서 물이 거두어지는 사이
가면 길은 뒤로 오고
가면 뒤가 환해지는 사이
유월 비 온 뒤
꽃 지고 너 가고 흰 꽃이 왔다
그 유월 또 비 온 뒤
눈물이라는 눈물 다 빠진 얼굴에
흰 꽃이 고슬고슬해졌다
수차가 모든 날의 바다를 뭍으로 끌어오면 하루 해는 바람에 제 몸을 태워 부지런히 흰 꽃을 피웠고
심장이 모든 날의 맥박을 너에게로 끌어 올리면 하루치 사랑도 군더더기 없이 증발했다
내게 물을 주었다
내게서 물이 거두어지는 사이
피웠던 꽃은 흰꽃으로 남으리
하지만 그건 조금 짠 이야기
- 정 끝별 시 ‘소금이 가고‘
[모래는 모래],창비, 2023.
소 눈이라든가
낙타 눈이라든가
검은 눈동자가 꽉 찬 눈을 보면
처진 눈의 내가 너무 눈을 굴리며 산 것 같다
남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겠습니다
타조 목이라든가
기린 목이라든가
하염없이 기다란 목을 보면
목 짧은 내가 너무 많은 걸 삼키며 사는 것 같다
남의 살을 삼키지 않고
남의 밥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펭귄 다리라든가
사막거북 다리라든가
버둥대는 짧은 사지를 보면
큰 대자 사지를 가진 내가 너무 긴 죄를 지으며 살 것 같다
우리에 갇혀 있거나 우리에 실려 가거나
우리에 먹히거나 우리에 생매장당하는 더운 목숨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무서운 사람인 것 같다
- 정 끝별 시 ‘동물을 위한 나라는 없다‘
[모래는 뭐래],창비, 2023.
능소화
담벼락에
뜨겁게 너울지더니 능소화
비었다 담벼락에
휘휘 늘어져 잘도 타오르더니 여름 능소화
꽃 떨구었다 그 집 담벼락에
따라갈래 따라갈래 달려가더니 여름내 능소화
노래 멈췄다 술래만 남은 그 옛집 담벼락에
첨밀밀첨밀밀 머물다 그래그래 지더니 올여름 장맛비에
능소화
그래 옛일 되었다 가을 든 네 집 담벼락에
- 정 끝별 시 ‘염천 ’
*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시 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이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첫 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오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물은 연둣빛이다
피어보지 못한 것들의 무연한 숨결
첫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어쩌다 활짝
따뜻한 물에서 꽃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까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 먹은 숱한 꽃봉오리들
적막히 입에 넣고 씹어본다
보랏빛 멍을 향기로 남기는 제 몸 맛처럼
안으로 말린 모든 꽃이 쓰리라
채 피우지도 못한 꽃일수록 그리 떫으리라
- 정 끝별 시 ‘장미차를 마시며‘
[와락], 창비, 2008.
혼자서는 느리거나 빠르다
둘이면 조금 빨라지고
셋이면 조금 더 빨라진다
사랑에 빠질 째도
사랑이 빠질 때도
둘의 박동은 심장을 건너뛰고
셋의 박동은 심장을 벗어나기도 한다
희망이 달려갈 때도
희망이 달아날 때도
셋이면 경쟁이 되고
넷이면 전쟁이 된다
여럿이 부르는 신음을
우리는 화음이라 한다
- 정 끝별 시 ‘합주 ‘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세간에서 약간 떨어진 산간으로
당분간의 좌우당간이 간당간당 간다
11시 30분이었던가 12시 30분이었던가
가깝거니 멀거니 시침과 분침이 간다
노간주 우듬지가 가고 열린 서랍 모서리가 가고 부푸는 직립의 반죽 덩이가 간다
문간에 걸린 젖은 수건이 미끄러져내려가고
바게트에 고르곤졸라 치즈가 녹아내려가고
스며들어간다 한순간의 한숨이
고집스러운 인간의 늑간 사이를 빠져나와
삽시간에 미간 사이로 흘러들어간다
새겨들어가면 거긴 천간과 지지의 간지
혹간은 2시 45분이었던가 3시 45분이었던가
처진 눈가에서부터 계란프라이처럼 타들어가고
땅으로 타들어간 근간처럼 누워서 간다
바닥을 가는 개간이란 조만간의 계절을 분간하는 것
노간주가 지팡이로 가고 서랍이 불쏘시개로 가고 형체도 없던 반죽 덩이가 새싹으로 가고
다시 막간의 절간 옆 항간으로 가고
어중간으로 가고 양단간으로 가고 여하간으로 간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던 잠깐들
얼마간의 그간들이
간다
간다
- 정 끝별 시 ‘시간의 난간‘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문학동네, 2019.
저잣거리 기름 장수의 기름 줄기가 창공에 호(弧)를 그리며 춤추다 좁디좁은 호리병 구멍에 들어가는 걸 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다시 입산했다지 거듭 겨눈 검(劍)이 겨자씨를 가르고 그냥 같은 겨냥이 백전불패의 겨룸이 될 때까지
나는 내가 말한 나보다 더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수피 시인 루미는 대장장이 망치질을 보다가 오른손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왼손으로 땅을 누른 채 우주가 도는 방향으로 시간에 시간을 더해 빙빙 돌았다지 되돌이는 춤이야 지랫대야 거듭이 그를 들어올릴 때까지
나는 네가 생각하는나와 다르게 돌 수 있지
나무 말구유에 나서 나무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리스도는 나무를 다스리는 대대로의 목수셨지 세상의 지게를 자르고 밀고 깎고 파다 못 박히셨어 비아 돌로로사 두 팔 벌려 거듭 피는 봄 나무들이 부활의 캠프 아니 구원의 웜홀이 될 때까지
나야말로 누가 아는 그 누구도 아냐
포정이라는 백정은 단칼로 소의 멱을 잡고 획획 쐐쐐 뼈 마디마디와 살 사이사이를 켰다지 거듭의 칼날이 활처럼 움악 소리를 낼 때까지
사랑을 노래하는 카사노바의 입술도그러할진대, 그게 시라면, 뭇칼질에 건너뛴 일획이, 거듭이 생략된 노래가, 가당키나 할 것인가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는가
- 정 끝별 시 ‘일파 만파 답파‘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시월은 구름 발정기다 마파람에 게눈이다 게눈 따라 수
구름도 쏜살이다 나이아가라 구름까지 따라붙는 털쌘구름을 품으려는 게눈구름의 밀당법이다 말달리는 구름이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하늘 아래 말들이 살이 찌는 이유다
하늘이 낮아지는 동짓달 구름은 느릿느릿 떼로 몰려다니다 흩어질 때면 너무 외로워 제 그림자를 눈사람처럼 세워 놓는다 그때쯤 눈물계곡을 빠나온 얼룩구름이 제 몸에 맞는 눈사람을 골라 입고 긴 밤에 든다 그때쯤 또 눈은 올 듯 말 듯
춘삼월 구름은 햇구름, 솜털보다 솜사탕보다 화안하다 갑빠처럼 알통처럼 헛꿈을 불린다 허파도 가빠 까르르 뒤집힌 후란넬 치마 속 흰 빤스처럼 온몸이 궁둥이다 오금이랑 겨드랑이가 가려워지는 중구난방의 알러지다
물 만난 장마철에 구름의 상열지사는 다반사다 한 구름은 또 한 구름 늑골에 고인 눈물을 짜준다 온도와 염도와가 맞으면 제 눈물을 흘려 넣는다 상처가 아물 즈음 이 구름은 그대로 저구름이 된다 오뉴월 비가 잦고 비늘구름 뒤에 먹구름이 따라오는 이유다
- 정 끝별 시 ‘사랑은 간헐 ‘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문학동네, 2019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지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
꽃이 피리라 기약지 않으리
숲 기슭에 오리처럼 앉아 있네
비가 많이 내리네
- 정 끝별 시 ‘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_《자작나무 내 인생》( 문학동네, 2021)
내 숨은
쉼이나 빔에 머뭅니다
섬과 둠에 낸 한 짬의 보름이고
가끔과 어쩜에 낸 한 짬의 그믐입니다
그래야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내 맘은
뺨이나 품에 머뭅니다
님과 남과 놈에 깃든 한 뼘의 감금이고
요람과 바람과 범람에 깃든 한 뼘의 채움입니다
그래야 점이고 섬이고 움입니다
꿈만 같은 잠의
흠과 틈에 든 웃음이고
짐과 담과 금에서 멈춘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두 입술이 맞부딪쳐 머금는 숨이
땀이고 힘이고 참이고
춤만 같은 삶의
몸부림이나 안간힘이라는 겁니다
- 정 끝별 시 ‘춤 ‘
* 문학동네 시인선 123 정끝별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마른 웅덩이에 붐비는 봄빕니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연어 치어떼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몰려드는
바람의 앞니가 웅덩이 낯에 잇자국을 만들고 갑니다 딱 그만큼만 떨 뿐 비명처럼 함부로 넘쳐나지 않겠습니다 상처의 구원을 구걸하지 않듯 기억의 반전도 완성하지 않겠습니다 더디더라도 더 더 더 아프고 나면
잎눈들처럼 여름을 품겠습니다 그때까지 낙타 누룩 누르하치 누나 늦별 기다리겠습니다 해찰하던 오후의 해가 손을 담그면 금세 말랑말랑해지는 웅덩이는
숨겨진 악기입니다 발군의 바람이 발굴한 한숨 한숨의 소용돌이, 딱 그만큼의 소란한 소식입니다 그렇게 터져야 할 침묵입니다 웅덩이에 입술을 그려넣고 그 둥근 꽃술 끝에
하늘을 열어놓겠습니다 잃어버린 일침처럼 천창에 병똥별이 내리꽃히기도 합니다 다르더라도 더 더 더 가까워져야 할 때입니다 북두칠성과 한몸된
세상 깊은 당신의 모어입니다 낮게 내려앉은 당신의 물비린내입니다 머나먼 밤을 건너 다시 당신께 닿겠습니다
- 정 끝별 ‘시’
[은는이가], 문학동네, 2014.
시방 사회의 비상 해소는
소비가 보시
알바의 물가는 아랍보다 가물고
당일의 일당이 담긴
알바의 바랑을 메고
저기 거지처럼
사라다를 다 사라로 읽는
박리다매의 갈비마대처럼
성장에 쓸어담긴 정상
얼룩진 얼굴로
자소서와 조사서
사이를 이사하면서 매일 매일
대박전문 앞에서 문전박대당하는
두엄 속 어둠에 안긴 인간의
지지 않는 지지
비굴한 굴비에게도
미개한 개미에게도
온다, 돈아
다 돈다, 단도다!
자살자살자살자
여기를 이겨!
- 정 끝별 시 ‘긴급한 시급‘
* 시로여는세상』 2016 여름
당신을 말하자말자
당신에게서 달아나는 당신 말은
말이 되는 순간 죽는다
죽은 빈말이 빈 말이 되어 달아날 때
당신 말은 당신을 말하면서
당신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하지 않는 말에 숨는다
당신과 교합할 수 없는 당신 말은
누구와도 교합하지 않는
희대의 도망자다
당신을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당신 말 뒤에는 당신이 있지만
한 말과 할 말이 모두 당신 말이지만
말이 되자마자 죽는 당신 말은
당신을 앞서고 당신을 배반한다
당신의 창공을 구걸하는
사랑에 빠진 음유시인이여,
귀뚜라미를 잠시 거쳐
귀뚜라미가 없는 공터에서 울리는
귀뚜라미의 울음은 어떤가
당신의 노래와 다른가
당신의 당신 말과 다른가
- 정 끝별 시 ‘빈 말 ‘
* 계간 <문학과 사회> ,2008년 봄호
다섯번 째 피를 돌린다
이렇다 할 도박력도 없이
이렇다 할 판돈도 없이
발바닥에 젖꼭지가 돋거나
손바닥에 닭살이 돋거나
- 정 끝별 시 ‘시인의 말’
[은는이가], 문학동네, 2014,
침은 밥에서 나온 물
꿈은 침에서 나온 불
숨은 꿈에서 나온 바람
살은 숨에서 나온 흙
헛바퀴를 덜컹거리는 꿈아 너는
흙으로부터 멀어졌구나
무릎이 깨지겠구나
살에서 자란 터럭을 붙잡고 있는
땀아 너도 외마디구나
몸은 잠에서 나온 물
혀는 몸에서 나온 불
말은 혀에서 나온 바람
뼈는 말에서 나온 흙
침에서 젖은 새빨간 혀야 너는
젖은 가락을 가졌구나
불같은 도끼날을 가졌구나
뼈와 함께 흙으로 덮일 피야
아직 뜨겁니? 술처럼
- 정 끝별 시 ‘몽상의 시학‘
* 은는이가 / 문학동네, 2014. 10. 28.
죽을 때 죽는다는 걸 알 수 있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야?
죽을 때 모습 그대로 죽는 거야?
죽어서도 엄마는 내 엄마야?
계절을 가늠하는 나무의 말로
여섯 살 딸애가 묻다가 울었다
입맞춤이 싫증나도 사랑은 사랑일까
반성하지 않는 죄도 죄일까
깨지 않아도 아침은 아침일까
나는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흐름을 가늠하는 물의 말로
마흔넷의 나는 시에서 묻곤 했다
덜 망가진 채로 가고 싶다
더이상 빚도 없고 이자도 없다
죽어서야 기억되는 법이다
이젠 너희들도 나를 사는 거다
어둠을 가늠하는 흙의 말로
여든다섯에 아버지는 그리 묻히셨다
제 짐을 제 집에 들앉은
말간 물집들
- 정 끝별 시 ‘묵묵부답‘
* 시집 ‘은는이가’
무와 콩나물과 미더덕에 휘감긴 채
냄비 바닥에 남은 동태 머리 한 토막
아버지는 유난히 동태 머리를 좋아하셨다
아가미와 눈알, 곤이라는 내장도 달게 드셨다
남편과 아이들은 동태 머리를 먹지 않는다
남기려는데 밀랍처럼 봉인된 저 낯익은 눈빛
국그릇에 떠와 발라먹는다 빨아먹는다
처음 살맛은 무능처럼 무르다
골육을 휘감던 수압이든 어둠이든
마지막 숨처럼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고
쌕쌕 소리를 내던 아버지의 벌린 입
속풀이에 그만이라는
천 갈래 아가미는 모독처럼 쓰다
파도든 해일이든 벌건 눈으로 맞으며
핏줄의 피로랄까 연명의 연속이랄까
냉동과 해동을 거듭 오가다 병상에 누워
안 보여야, 셋째 아들한테만 귀뜸한 채
그리 부릅뜨고 계셨던 아버지의 먼눈
끝내 입에 넣을 수 없는
젓가락이 들어올린
허공을 삼킨 동공
- 정 끝별 시 ‘동태 눈알‘
*은는이가
나는 늘 가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는
못할 게 많은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곤 했다
남편은 못할 게 많은 사람이다
처자식의 이름 앞에서 아버지는 못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교사라 했던가, 못할 게 없는 아버지 그늘에서 나는 못할 게 많은 사람으로 자라
유유상종했던가, 못할 게 많은 남자와 살며 자꾸만 못할 게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걸 부전여전이라 해야 하나
못할 게 많은 남편의 그늘에서 자란 딸은
하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딸이 못할 게 없는 남자를 만나 못할 게 많은 사람이 된다면
근묵자흑의 부전여전이라 해야 하나
못할 게 많은 남자를 만나 못할 게 없는 사람이 된다면
어쩌나 그건, 상극즉통의 모전여전이라 해야 하나
- 정 끝별 시 ‘ 삼대‘
*은는이가(문학동네)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 정 끝별 시 ‘은는이가’
[은는이가], 문학동네 ,2014
쓸 말은 많으나 다 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다 오르지 못한 계단이라 하였습니다
꿈에 돋는 소름 같고 입에 돋는 혓바늘 같고 물낯에 돋는
눈빛같이 미처 다스리지 못한 파문이라 하였습니다
나비의 두 날개를 하나로 접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안아 겹이라든가 그늘을 새기고 아침마다 다른 빛깔을 펼쳐내던 두 날개. 다 펄럭였다면 눈멀고 숨 멎어 돌이 되었을 거라 하였습니다
샛길 들목에서 점방(店房)처럼 저무는 일이라 하였습니
다 봉인된 후에도 노을을 노을이게 하고 어둠을 어둠이게
하는 하염총총 하염총총, 수북한 바람을 때늦은 바람이게
하는 지평선의 목메임이라 하였습니다
때가 깊고 숨이 깊고 정이 깊습니다 밤새 낙엽이 받아낸
아침 서리가 소금처럼 피었습니다 갈바람도 주저앉아
불선여정 불선여정 하였습니다
- 정 끝별 시 ‘불선여정(不宣餘情)‘
[은는이가], 문학동네, 2014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그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나무의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하나로 꿰는 이치를 일관一貫이라 한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손님처럼 나를 주고 너를 받는 기미가 일격이고
흙 없이 뿌리 없듯 뿌리 없이 가지 잎새 없듯 너 없이 나 없는 빌미가 일관이라면
너를 관觀하여 미지의 틈을 일으켜 너를 통通하는 한 가락이 일격이고
나를 관觀하여 쉼 없는 지극함으로 나를 통通하는 한 마음이 일관이다
일격은 일순의 일이고 일관은 일생의 일이다
일관이 일격을 꽃피울 때
일 푼 숨이 멎고 일 푼 바람이 부푼다
무인이 그렇고 달인이 그렇고
전설 속 설인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
너를 통과하는 외마디를 들을 것도 같다
단숨에 내리친 단 한번의 사랑
나를 읽어버린 첫 포옹이 지나간 것도 같다
굳이 시의 병법이라고도 말하지 않겠다
내가 시인인 까닭이다.
- 정 끝별 시 ‘사랑의 병법‘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 없이 컹컹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무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 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 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 걸요!
- 정 끝별 시 ‘안개 속 풍경‘
한밤을 가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밤을 맨발로 달려가자 모든 죄를 싣고
검은 야크의 눈에 서른 개의 달을 싣고
강그라 가르추를 가자 가다 갇히면
덧창문 안으로 강된장을 끓이며 몇 날 며칠
오랜 슬픔에 씨앗만 해진 두 입술로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숨죽이며 가자
얼음 냄새 밴 발꿈치를 어루만지며
몇 날 며칠을 가자 버리고 도망 온 것들이
가랑가랑 뜨물처럼 갈앉는 꿈에서야
눈보라에 튼 붉은 뺨을 씻으며
처마 밑 고드름 녹는 소리에
겨울 순무의 푸른 귀가 돋는 곳으로
가자 도망 온 것들이 그리워지는 곳으로
가까스로 도망 온 도망갈 곳으로 가자
강그라지듯 가자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너라는 천산산맥 나라는 만년설산을 넘어
가도 가도 강그라 가르추를 다시 넘어
- 정 끝별 시 ‘강그라 가르추‘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정 끝별 시 ‘등뼈 ’
흘러내리는 네 눈의 윙크
흘러내리는 네 어깨의 머리카락
가을강물을 흔드는 바람아 끈적끈적하잖니
흘러드는 내 귀의 노래
흘러드는 내 손가락 사이의 설탕물
끈적끈적 채웠으니 시절아, 따라갈까 붙어갈까
저 입이 움켜쥔 군침
밀크와 딸기가 섞인 백 개의 강이 흐르고
채워지지 않는 입은 저 둥근 허공을 쭉쭉 빨고있는데
화공(畵工)은 어딜 갔다니,
달콤한 혀로 천 개의 침을 찍어
노는 물결 위에 한 생으로 그리고 그려야 하는데
오, 살랑대는 추파(秋波)
춥스! 이제 곧 앙상한 겨울 막대만 남을 텐데
가까스로 가을인데
- 정 끝별 시 ‘추파,춥스(Chups Chups)’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 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정 끝별 시 ‘밀물‘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게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 정 끝별 시 ‘밥이 쓰다‘
* [삼천 갑자 복사빛], 민음사, 2005
* 정끝별의 밥시 이야기 밥], 마음의 숲, 2007
참새는 천적인 솔개네 둥지 밑에 몰래 집을 짓는다
무덤새는 뜨거운 모래 밑에 제 몸 수백 배 집을 짓는다
고릴라는 잠이 오면 그제서야 숲속 하룻밤 집을 짓는다
너구리는 오소리 집을 슬쩍 빌려서 잔다
날다람쥐는 나무의 상처 속 구멍집을 짓는다
꿀벌과 흰개미는 집과 집을 이어 끝없는 떼집을 짓는다
수달은 물과 물 중간에 굴집을 짓는다
물거미는 물속에 텅 빈 공기집을 짓는다
바퀴벌레는 사람들 집 틈새에 빌붙어 산다
집게는 소라 껍데기에 들고다니는 집을 짓는다
세상 모든 짐승들은
제 몸을 지붕으로 덮고
제 몸을 벽으로 세워
제 몸에 맞는 집을 짓고 산다
제 몸이 원하는 대로
제 몸이 기억하는 대로
큼직한 집을 짓는다 살아 있는 하루가 끔찍하다
하나 더 들여놓고 한 평 더 늘리느라 오늘도 나는
- 정 끝별 시 ‘ 고집’
물만 보면
담가보다 어루만져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억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 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엿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새어 나가는 것이라고
무연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본 적 언제였던가
- 정 끝별 시 ‘물을 뜨는 손‘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것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속을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 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속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게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모질다
- 정 끝별 시 ‘그만 파라, 뱀 나온다‘
똥을 누며
이건 어제 점심에 먹은 비빔밥
이건 어제 저녁에 먹은 된장찌게
오줌을 눌 때마다
이건 새벽 갈증에 마신 생수 한 컵
이건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
늘 손익분기점 제로를 유지하려
개진하는 몸
반성하는 몸
몸을 부린 만큼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프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헛바람이 들고
몸에 겨운 사랑 앞에서는 늘 신열이 난다
몸에 넘치는 것들은
몸을 불리는 독이 되고
몸에 부족한 것들은
몸을 파고드는 못이 된다는 걸
몸은 늘 먼저 안다
- 정 끝별 시 ‘ 바로 몸‘
삼십년을 한 여자와 희희낙락 살 맞대고 살다
삼십년을 한 여자와 티격태격 지지고 볶고 살다
삼십년을 공중부양하듯
삼십년을 산 집으로부터 홀연 이륙하며
삼십년을 향해 달랑 편지 한장 남겼다지
단 두 마디 남기고 날라버렸다지
안녕, 여보!
남겨진 단 두 마디 때문에
남겨진 여자 허겁지겁 날아다니며
나흘 만의 남자 동해안 민박집에서 체포해 왔다지
다시 삼십년을 기약하며 잘살고 있다지
안녕, 여보!
변명 없는 단 두 마디
안녕, 여보!
비난도 없는 단 두 마디
두 마디 넘겼다면 지금쯤 남 되었을 거라지
아니, 여보!대신
안돼, 여보!대신
상쾌한 단 두 마디
장쾌한 단 두 마디
안녕, 여보!
- 정 끝별 시 ‘안녕, 여보! ‘
당신 오른팔을 베고 자는 내내
내 몸을 지탱하려는 내 왼팔이 저리다
딸 머리를 오른팔에 누이고 자는 내내
딸 몸을 받아내는 내 오른팔이 저리다
제 몸을 지탱하려는 딸의 왼팔도 저렸을까
몸 위에 몸을 내리고
내린 몸을 몸으로 지탱하며
팔베개 돌이 되어
소스라치며 떨어지는 당신 잠에
내 비명이 닿지 않도록
내 숨소리를 죽이며
저린 두 몸이
서로에게 밑간이 되도록
잠들기까지 그렇게
절여지는 두 몸
저런, 저린 팔이 없는
- 정 끝별 시 ’저린 사랑‘
* ‘와락’ 창작과 비평사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시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시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 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 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 정 끝별 시 ‘설렁탕과 로맨스‘
[제23회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08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박깜박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통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봉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 정 끝별 시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사, 2005
무성히 푸르렀던 적도 있다.
지친 산보 끝 내 몸 숨겨
어지럽던 피로 식혀주던 제법 깊은 숲
그럴듯한 열매나 꽃도 선사하지 못해, 늘
하얗게 서 미안해하던 내 자주 방문했던 그늘
한순간 이별 직전의 침묵처럼 무겁기도 하다.
윙윙대던 전기톱날에 나무가 베어질 때
쿵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그리고 한나절 톱날이 닿을 때마다
숲 가득 피처럼 뿜어지는 생톱밥처럼
가볍기도 하고, 인부들의 빗질이 몇 번 오간 뒤
오간 데 없는 흔적과 같기도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베어 넘어지는 기억의 척추는
- 정 끝별 시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1‘
* [제2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08
그 나무에 꽃 없다
피우지 못하고 꺾어버렸다
가슴에 더 할 말 없다고
사랑에게 뻗어가는 어깨 잘라버렸다
마음 다 펼칠 수 없다고
사랑에게 달려가는 발 묻어버렸다
문자 밖에서야 쓰여지게 될 것이라고
터져 나오는 꽃들 삼켜버렸다
그 나무에 숨 없다
뿌리처럼 비틀린
빈 목숨만이 붙어
옆얼굴이 울고 있다
- 정 끝별 시 ‘허공의 나무-박수근 풍(風)으로‘
반 평도 채 못 되는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 번을 내리치던 이 생生의 벼락
헐거워지는 네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 자락
- 정 끝별 시 ‘와락’
[제23회 2008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2008.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 정끝별 시 ‘늦도록 꽃‘
그는 좀체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월간 문예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니
그는 분명 시인인데,
자장면도 먹고 싶고 바바리도 입고 싶고
유행하는 레몬색 스포츠카도 갖고 싶다
한번 시인인 그는 영원한 시인인데,
사진이 박힌 컬러 명함도 갖고 싶고
이태리풍 가죽 소파와 침대도 갖고 싶다
그러니 좀체 시 쓸 짬이 없다
그가 시를 쓸 때는
눅눅한 튀김처럼 불어 링거를 꽂고 있을 때나
껌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결에 없을 때
오래 길들였던 추억이 비수를 꽂고 달아날 때 혹은
등단 동기들이 화사하게 신문지상을 누빌 때
그때뿐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때마다
절치부심 그토록 어렵사리 쓴 시들은
그러나
그 따위 시이거나
그뿐인 시이거나
그 등등의 시이거나
그저 시인
시답잖은 시들이다
늘 시 쓸 겨를이 없는 등단 십 년의 그는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다 나가는
그 잠깐 동안만, 시를 쓴다
그가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기둥 삼아
그가 편애하는 부사 몇 개를 깎아놓고
그가 환상하는 행간 사이에
납작 엎드려
평소에는 시어 하나 생각하지 않았음을
참회하며
시 속에서야 비로서 쉰다
- 정 끝별 시 ‘시 속에서야 쉬는 시인‘
그래? 내 입과 두 눈에
네 손가락들을 깊숙이 박아봐!
그래? 날 던져봐!
잘 굴러갈 거야
네 빗장뼈를 타고 코불쏘뿔처럼 달려가
네 심장의 핀들을 모조리
으스러뜨려 놓을 거야
그래 너!
지금은 날 요리조리 애무하고 있지만
그래 나?
아직은 아직은 터질 듯 도사리고 있지만
그래 너?
언젠가 날 내던지고 말걸, 그 순간
그래 나!
네 검은 허파속을 돌진해
뚝 끊긴 지평선 너머까지 돌진할 거야
온옴으로 끝장내줄 거야
어때?
의심에 질린 맞수들의
스트-라이크 사랑
- 정 끝별 시 ‘게임의 법칙‘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뇌프 연인들의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감자를 곁들인 피리지엔 스테이크였다가
벗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
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
당신 사는 상계동쯤의 아파트였다가
앤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려보낸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미라보
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
간곡히 비어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가
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
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
얼마나 멸렬한가
- 정 끝별 시 ‘미라보는 어디 있는가‘
* 시집『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 2005.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아
맨발이었다
벗어놓는 신발이 웃는다
- 정 끝별 시 ‘소금호수‘
* 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현대문학, 2005, 8, 12.
흐르는 것들에서는 묵은 쌀겨 냄새가 난다
갓 담근 술항아리에서 포도알을 훔쳐 먹고
얼굴을 파묻던 한마당의 쌀더미는 따뜻했다
누렇게 좀먹던 스무 살 페루의 하늘도
쏟아질 듯 무겁기만 하던 원산도 별밭도
비어 있던 대성리 철둑길도 그늘 무성해
소나기 퍼붓고 세상은 선뜻 변했다
쌀벌레들은 다시 쌀더미에 향기로운 집을 짓고
푸른 들판에 누워 한 백년쯤 자고 싶어,
지친 男子는 잎도 지기 전 창백한 女子를 떠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서늘한 질투도
이만큼 지나쳐서야 눈치채는 것인데
이 늦은 저녁 쌀을 씻으며
치댈수록 부예지는 쌀뜨물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쌀벌레 껍질처럼
어제가 낙낙히 뜰 수 있다는 것은
부박했던 노래가 떠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촤르르 촤르르 말갛게 씻겨진 마음이
잘 익은 밥 냄새를 피워올릴 수 있다는 것은
- 정 끝별 시 ‘얼굴을 파묻다‘
敵진에 나가
敵을 보며
敵과 섞여
敵의 손을 잡을 것
개는 때린 손을 핥는다
敵을 품에 안고
敵과 동침할 것
敵과 한몸된
敵일 것
진드기는 더운 피맛을 본 후에야 떨어진다
내 품에 안긴 나를 위해
젯밥을 지을 것
- 정 끝별 시 ‘정글 1‘
* 흰 책 / 정끝별 시집 / 민음사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 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 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
- 정 끝별 시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2004.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피어라, 석유>
물고기는 물 속에 두더지는 땅 속에
거미는 허공에 집을 세우건만
저 달팽이는 유독 제 살 속에 집을 세운다지
둥그렇게 병든 제 몸뚱이를 아我집이라 부르며
죽을 때까지 제 집을 지고 다닌다지
수십만 번 같은 밥을 먹고
수만 번 똥을 만들어내며
폐가임에 틀림없는 제 살림 속에서 나와
망집 임에 틀림없는 제 살집 속으로 들어간다지
줄도 없고 빽도 없이 없는 길을
희망이라 여기며 가랑잎에 알을 깐다지
그러니 아집인 게지
수만 개의 혀가 빠지며
수십만 개의 똥집을 쏟아내며 번번이
없는 길을 온 몸으로 밀어붙인다지
그래봐야 저 길에 묶여
저 길에 의지할 밖에 없을 텐데
저 길을 벗어나는 길은
층층이 쌓인 제 살집을 관棺통하여 쏘옥
빠져나가는 길뿐인데
저 길고 슬픈 혀
저리 처진 괄약근 하나로 말이지
- 정 끝별 시 ‘아我집을 관棺통하다‘
세 끼 밥벌이 고단할 때면 이봐
수시로 늘어나는 현 조율이나 하자구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한 악기에 정박한 두 현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
세상과 화음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주앉아 내공이 힘쓰자구
내공이 깊을수록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지
모든 현들은
어미집 같은 한없는 구멍 속에서
제 소리를 일군다지
그 구멍 속에서 마음놓고 운다지
- 정 끝별 시 ‘현 위의 인생‘
* 흰 책/민음사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에
춘백(春栢)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꽃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들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 비껴 서있던 당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가 이제야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거늘 가슴에 서로를 묻는 일이야 만장(輓章)처럼 당신쪽으로 누운 풀자국에 내내 가난할 것입니다 모란 냄새 선명한 하마 흔하디흔한 세상 봄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 정 끝별 시 ‘강진 편지‘
시집<흰 책>.민음사. 2000.5
** 정 끝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데뷔 1988년,
1991.~1996.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87.~1989.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1983.~1987.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 학사
~1983. 명지여자고등학교
경력사항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 교수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수상내역
2021. 제22회 현대시작품상
2008. 제23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4.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유심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