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섬김과 봉사의 왕직
유승록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 기도사제)
교회가 오늘 기념하는 축일의 명칭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성부 하느님 오른편에 좌정하시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종말에 심판하러 다시 오실 임금이십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주 임금·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것이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루카1,33 참고)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헤로데를 찾았을 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2,2)라고 질문함으로써 헤로데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타나엘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왕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당신의 왕권을 분명히 하시면서도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오늘 복음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던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현세적인 왕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그들을 피해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요한6,15 참고)
사실 예수님의 일생은 일반적인 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멋진 왕관을 쓰신 적도 없고 화려한 궁전에 머물렀던 것도 아닙니다. 구체적인 영토나 군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평생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활 중에는 주로 가난하고 병들고 죄 많은 사람과 어울려 지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속에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으셨습니다.
보통의 세속 임금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권력으로 통치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10,43)라고 가르치셨고, 스스로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라고 하시며 섬김과 겸손을 통한 새로운 다스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만찬의 현장에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13,14-15)라고 하시며 참된 봉사와 사랑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의 실천은 한마디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9,22)이 되어 주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세상의 왕들과는 구별되는 진정한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섬김과 봉사의 직분이고 그리스도왕의 다스림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통치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왕직에 세례성사를 통해서 모든 신앙인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섬기고 나누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신앙인의 삶이야말로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올바른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리스도 왕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으로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왕의 모습을 닮아 서로를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며 돕고, 사랑으로 섬기는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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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