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내가 한 달 남짓 묵었던 금능리 77번지 양철지붕 집 양
선자 할망은 아침 일찍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떤 날은 소라며 미역을, 또 어떤 날은 흙 묻은 양파와
마늘을 한 아름 들고서 나를 볼 때마다 늘 웃기만 했지요 눈과 귀
와 코와 입이 부서졌다가 한순간에 모두 다 제자리에 새로 생기
는 그런 웃음이었어요 원체 말이 없어 벙어린 줄알았으나 이따
금 한밤중에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곤 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귀신과 싸우는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들으면 난데없이
내 이마엔 열이 끓어오르고 입술이 퉁퉁 붓고 팔과 가슴과 사타
구니엔 붉은 반점들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멀리 오긴 왔구나, 하
지만 아직 한참 멀었구나, 생각하면서 나는 바깥으로 나와 시커
먼 돌담 옆을 서성이며 심호흡을 하고 열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피가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겠다며 파도가 넘쳐나는 방파제 끝까지 걸어갔다 와
서는 새끼를 한 배 낳은 개처럼 잠들곤 했는데, 다음날 아침이면
보말죽 한 그릇이 방문 앞에 놓여 있었지요 흰 사발 가득 봄 바다
가 소스라치듯 출렁대는 그것이 마치 약 같고 독 같고 눈물로 부
서진 누군가의 눈 같아서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숟가락질을 해
야만 했는데요 어느 틈에 바닥까지 훔쳐 먹고 나면 내 귀 옆엔 작
은 아가미 하나 파르르 돋아나고 나는 사람으로 살아온 기억을
잃어버렸다가 저녁에야 간신히 되찾곤 했더랬습니다
월간 <시인동네> 2017년 02월호
첫댓글 보말죽이 보물죽 같아보이네요.
먹어본 적 없는 죽이지만 맛이 있을 것 같군요.
물미해안 끄트머리에서 먹었던 전복죽이나
통영에서 먹었던 빼때기죽처럼 평안을 가져다주는 그런 죽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