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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좀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 입학하고, 일주일 중 최소 2일 이상(수요일, 금요일)은 강화 마리학교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늦은 밤 인천 근처에 나오는 차가 없을 경우에는 학교에서 자고 오는데, 그 때는 3일도 되고,
4일도 되고...
여튼 바쁘게 지낸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관심 있으신 분만 읽어 보세요.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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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고미숙(고전 평론가)
여기, 두 개의 낯익은 풍경이 있다. 하나는 오직 대학입시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학생들. 이들에게 공부란 일류대학을 가는 것, 아이비리그로 유학을 가는 것, 그리고 억대의 연봉을 받는 직업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공부란 오직 부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른바 대안학습을 받는 학생들. 이들은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학교로부터 탈주한 존재들이다. 근데, 놀랍게도 이 자율성에는 생명이 없다. 이들은 '뭘,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이것저것 체험학습도 하고, 해외여행도 숱하게 하지만, 그것들이 비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직 돈을 위해 공부하는 것과 뭘 공부 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공부의 기본 패턴이다. 둘은 아주 달라 보이지만, 다른 한편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공부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히.
이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거쳐서인가. 결과는 몹시 암담하다. 대학의 붕괴와 전사회적 부동산 열풍! 세계 최고의 학구열을 자랑하는 나라가 대학과 사회는 가장 천박한 자본주의에 긴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입시제도의 개선과 제도적 지원 따위로 극복될 수 있을까? 물론 없다. 이미 그러기에는 사태가 너무 악화되었다. 그런 어설픈 제도적 보완 이전에 바야흐로 학교와 공부에 대한 공리 자체를 바꾸어야 할 때가 아닌지.
고전의 지혜를 되살려야 하는건 바로 이 대목이다. 여기서 고전의 지혜란 근대 이전에 생산된 전위적 텍스트뿐 아니라, 그 텍스트가 생산되는 지식의 배치까지를 두루 포함하는 말이다. 그것이 지닌 차이와 열정을 '지금, 여기'로 불러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전에서 '미-래'를 탐색할 수 있을 것 이다.
<'꼬뮌'에 접속하라! >
상식적인 말이지만, 학교는 연령별 학습을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이런 패턴은 공부에 대한 몇 가지 통념을 만들어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부와 학교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공부엔 다 때가 있어" "이 나이에 왠 공부?"하는 말들이 다 그 같은 퉁념에 기초하고 있다. 즉, 학교는 학벌이나 지식의 독점만이 아니라, 공부는 오직 학교에서만 배워야 한다는 환상을 낳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사람들은 학교를 벗어나는 순간, 공부는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학교 밖에서 가능한 수많은 배움의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만다. '미-래'의 공부는 무엇보다 공부와 학교를 오버랩시키는 이 그릇된 망상을 떨쳐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근대 이전 학인들은 스승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다. 부처님을 따르던 무수한 제자들과 공자의 문도 3천명, 주자의 강학원을 찾았던 5천명에 달하는 학인들, 왕양명의 뜰에 모여든 개성 넘치는 문사들, 어디 그뿐이랴.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문파가 있었고, 그곳엔 가르침을 받기 위해 천리를 마다 않고 오는 학인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배움터란 기본적으로 '꼬뮌'이었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꼬뮌'. 여기에는 당연히 연령별 균질성이 존재할 수가 없다. 10년, 20년 차이가 나는 세대들이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었다. 학교 안과 학교 밖의 경계 또한 있을 수 없다. 뜻을 세우는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곳은 다 배움터였으므로.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해매었던가? 그 '꼬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이란 무엇인가? 길을 안내해 주는 자이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가는 자들이 바로 도반이다. 이렇게 스스과 도반을 찾아가는 배움의 여정과 같은 연령대에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학습을 받는 우리 시대의 학교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암송과 구술-아는 만큼 행복하다? >
고전 공부는 기본적으로 암송에 기초한다. 암송은 암기와 다르다. 암기가 묵독에 기초한다면,암송은 청각에 기초한다. 암기가 개별적 활동이라면 암송은 집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암기를 단체로 할 순 없지만, 암송은 많은 사람과 할수록 효과적이다. 암기가 두뇌 플레이라면,암송은 신체 운동이다. 암기를 많이 하면 신체가 허약해지지만, 암송은 신체 전체의 기운을 활발하게 소통시킨다. 그리고 이 두 공부법의 차이는 지식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이기도 하다.
근대교육이 강조하는 묵독과 암기는 지식의 사적 소유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개별적으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지식은 한 개인의 두뇌의 산물이라는 환상을 낳는다. 게다가 학교는 지식을 철저히 사적 생산물로 취급한다. 경쟁과 점수에 의해 그 성과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르는 불균형이나 모순은 분배의 합리성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유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식으로.
이런 계몽과 시혜의 구조를 깨뜨리려면 공부법 자체가 '개인의 밀실'에서 '대중의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암송은 바로 그 점을 환기시켜주는 공부법이다. 암송은 개념적으로 어려운 지식을 집단적 힘으로, 소리의 힘으로 주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송의 배치 속에선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원대한 지혜의 바다를 유영할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이전, 모든 교육은 소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단 암송한 다음 뜻을 배웠다. 소리를 통해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함과 동시에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는 지식과 신체의 소외가 일어나지 않는다. 두뇌보다는 몸으로 익히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앎의 신체성!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장 단순한 학습법이라는 점이다. 경전을 터득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외국어를 습득하는데도 암송보다 더 좋은 방법은 드물다. 기타 다른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도 이보다 더 유효한 방법은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교육에선 이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주입 암기식에 대한 거부 반응에다 복잡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교수법만이 더 효과적이라는 환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교한 프로그램, 고도화된 서비스에 길들여지게 된다. 결과는? 신체적 무능력.
요즘 청소년들이 독서의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독서능력은 지식의 토대이자 평생의 자산이 된다. 이 능력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건, 그리고 어떤 종류의 학문이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서의 능력에서 중요한 것이 구술의 테크닉이다. 구술이란 어떤 상황이나 문맥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문장으로 연결되면 글쓰기가 되고, 생활에 적용되면 리더쉽으로 연결된다. 믿기 어렵겠지만 리더쉽의 많은 부분은 상황을 '서사화하는'능력이다. 요즘 같은 지식 검색 시대에는 이 능력이 더더욱 절실하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들을 서로 연결하여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술능력이기 때문이다.
<공부해서 남 주자! >
"도인이 어느 날 한가하게 시장을 걷고 있다가 우연히 어느 가게의 뱀장어를 보았다. 포개지고 뒤얽히고 짓눌려서 마치 숨이 끊어져 죽을 것 같았다. 이때 홀연히 그중에서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나타나서 상하좌우전후로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니 마치 신룡과 같아 보였다. 뱀장어들은 미꾸라지에 의해서 몸을 움직이고 기가 통하게 되었으며 생명의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뱀장어의 몸이 움직일 수 있게 하고 기를 통하게 하여 뱀장어의 목숨을 건진 미꾸라지의 공인 것이 틀림없으나 그 역시 미꾸라지들의 즐거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코 뱀장어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또 뱀장어의 보은을 바라고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 '본성에 따른'것에 불과하다."
왕양명의 수제자인 왕심재의 <추선부-미꾸라지에 대한 노래>에 나오는 대목이다. 자신의 본성대로 움직일 뿐인데, 다른 이들에게 절로 생명의 기운을 전파에 주는 존재. 충만한 능동성으로 약자들을 비호해 주는 존재. 훈계 하고 가르치는 계몽적 교사가 아니라, 직관과 열정으로 타인들에게 삶의 지혜와 힘을 나누어 주는 존재, 이것이 근대 이전, 지식인들이 추구한 이상형이다.
그에 반해, 근대교육은 분석과 비판을 주요방법으로 삼는다. 공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지식이란 대상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이거나 자신과 다른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에는 지식이란 오직 언어, 곧 논리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작동한다. 말하자면, 논리 바깥의, 언어 외부의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개인의 다양한 차이나 이질성은 무화되어 버린다. 오직 동일한 규준 위에서 서열화만 가능할 뿐이다. 그와 더불어 신체를 통해 터득되는 직관와 충동, 잠재적 열정 등은 봉쇄되어 버리고 만다. 직관이 결여된 비판력? 이것으론 결코 새로운 주체 혹은 리더가 되기 어렵다.
리더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스승과 친구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용기, 언제 어디서건 학습망을 조직할 수 있는 힘,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이, 학별, 국적, 성별을 넘어 어디서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언제 어디서건 '앎의 꼬뮌'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 얘기치 않은 사건들을 즐기며 삶의 경이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 도인이나 대인의 경지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들에게 공부란 결코 부귀공명의 수단이 아니다. 남을 지배하기 위한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럼 공부는 뭣 때문에 하냐고? 남들에게 퍼 주기 위해서다! 허공에 가득 찬 앎의 흐름을 나를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갈 수 있다면,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더 큰 세상과 마주칠 수 있을 터. 고로 공부해서 남 주자!
첫댓글 고전읽기모임에서 천자문을 읽을때 하늘~천~ 따~지~ 하던 암송의 과정이 없었을때 뭔가 빠졌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그 느낌의 의미를 알겠군요.
고미숙씨 글 좋아하는데 내용도 좋군요....고전읽기도 모두 섞여서 진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자왈 소리내어 읽고 그 다음에 뜻풀이를 한번 해볼까?
제 생각엔 둘이 아니라 그 틈새에 끼어 있는 여러 부류가 있다고 보아요. 공부를 하고 있는 그 많은 아이들은 딱 두부류로 나눈다는 건 좀 그래요.
고미숙 씨는 그 둘 속에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둘을 "뛰어넘는" 공부법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나이, 학별, 국적, 성별을 넘어 언제 어디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