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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국내 국토종단 한적이 있는데...
딱히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걷기 여행은 정말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게 해주더군요~~~.
4번째 이야기를 올립니다.~~
- 어찌된 일인지 익스플로러에서는 글이 짤려보이네요. 첨부파일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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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예수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이다
Day 06~07
6월 18일~19일 : 에스떼야 → 로스 아르코스
평균적인 남자라면 ‘사랑이 전부’라든가 ‘사랑이 모든 것의 열쇠’와 같은 말에는 어색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사랑 따위는 여자들이나 목매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런 류의 말에 냉소와 불신을 느끼는 감수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은 세상 물정 모르는 여고생이나 입에 담을 말이지 알 것 다 아는 성인이 할 만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대화가 트이고 나니 신이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한 어조로….
“사랑으로 풀 수밖에 없다. 사랑으로 풀어라.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느껴라.”
“모든 것은 네가 아직 사랑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문제이다. 사랑을 알면 다 해결된다. 사랑을 알아라. 사랑으로 보아라. 사랑으로 보고, 듣고,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으로 행하면 된다.”
사랑을 알면 다 해결된다는 것, 내가 오랜 세월 앓아온 병도 오직 사랑으로만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 ―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말씀이었다. 의심과 피해의식이 가득한 내 정서에 부합하는 말씀은 아니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절실하게 치유를 원하고 있었고 치유만 된다면 그 어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랑’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사랑으로 보고, 듣고,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면 깊이 두려움과 분노가 축적되어 있던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걸으면서 끊임없이 상념이 떠올랐는데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았던 기억, 분노했던 기억, 억울했던 기억, 또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 이런 것들이었다. 애써 외면하며 지냈던 기억들까지 낱낱이 다 떠올랐다. 뭔가 감정이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돕기 위해서였는지 작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신과 대화가 트이고 난 그 다음 날, 그날도 하루 종일 사랑의 기운이 쏟아졌다. 그 기운으로 중단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걷다가 잠시 쉴 때마다 볼펜을 꺼내들고 문답을 주고받았는데 그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저녁 때 쯤 도착한 곳은 에스떼야라는 도시였다. 세월에 닳은 흔적이 역력한, 고풍스런 성당과 돌길이 인상적인 고(古)도시였다. 그곳에 있는 서너 개의 알베르게 중 가장 싼 알베르게를 찾아 갔다. 금발의 호리호리한 아가씨가 친절하게 등록해 줬는데 침대가 그리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화장실 문 바로 앞에 위치했기에 냄새도 냄새려니와 들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바로 내 옆 침대에서는 엄청난 코골이 아저씨가 밤새 드르렁거렸다.
밤새 한 숨도 못 잤고 아침이 되었는데도 쓰러질 듯 졸렸다. 다른 순례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정각 7시였다. 8시 이전에 알베르게를 떠나야 한다는 규칙이 떠올랐다. 한 30분만 눈을 붙이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깜박 잠에 빠졌는데…… 누군가 거칠게 내 침낭을 잡아당겼다. 눈을 떠 보니 험상궃은 눈매의 중년 남자가 스페인말로 거칠게 소리치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이곳 알베르게의 오스피딸레로인 듯 했다. “왜 아직도 안 나가고 있느냐?”고 윽박지르는 듯 했다.
내가 영어로 “나가는 시간은 8시이고 지금은 7시 20분이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말들을 “난 지금 너무 졸려요, 더 잘 거예요” 하는 변명과 생떼로 이해했는지 이제는 아예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내 물건을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쫓겨나다시피 알베르게를 나오는데 너무나 서러웠다. 숲길을 걷다가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평소 같으면 가슴을 부여잡고 억울해할 망정 눈물 같은 건 안 흘릴 나였지만, 그 때는 한참 중단이 녹아내릴 때여서 그랬는지 한없이 눈물이 나왔다.
이 사건 자체는 작은 것이었지만 상징성이 있는 사건이었다. 이제껏 살면서 반복적으로 겪어온 대인관계를 그대로 축약한 듯한 사건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상대는 그걸 변명과 생떼로만 받아들이는 상황,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처럼 소통이 안 되는 상황, 지난 20년 동안 수 없이 반복해서 겪은 일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이 일에 대해 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 오늘 아침 일어난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일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일부러 만들어 준 일인가요? 왠지 당신이 일부러 만들어준 사건인 것 같아 질문합니다.
= 일부러 만들어준 일이다. 그 일을 통해 배울 점이 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라.
- 그 상황에 대해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 그 사람의 마음의 크기를 상상해 보아라.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자리에서 사랑을 행하고 있다.
- 그 사람의 자리에서 사랑을 행하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 모든 것은 사랑이니라. 모든 것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그 사람의 방법으로 사랑을 행하고 있느니라.
- 그 사람의 방법으로 사랑을 행하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 모든 것은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니라. 모든 것을 좋은 의도로 보아라. 모든 것은 좋은 의도가 있느니라.
- 그 사람의 좋은 의도는 무엇인가요?
= 너를 훈육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 그 사람은 자원봉사자 치고는 너무나 난폭한 사람이라고 느껴집니다. 그 사람한테는 폭력성, 우월감, 이런 게 더 많지 않나요?
= 상당 부분 그러한 것도 있을 것이다. 사랑은 그러한 것을 포용하여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보기에 달렸다. 네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사랑으로 피어난다. 사랑으로 네 자신이 꽃피어난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러면 해결이 난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러면 해결이 난다… 그 말이 너무나 눈물겹게 느껴졌다. 나는 그걸 못 배워서 이제껏 쓸데없이 서러워하며 살았던 것일까?
살면서 많이 서러웠던 말 중의 하나가 “너는 왜 지 혼자 힘들어 하냐?”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사람한테 “너는 왜 지 혼자 힘들어 하냐?”고 말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잔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사람한테는 “너는 왜 지 혼자 힘들어 하냐?”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그리고 잔인한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에스떼야에서 있었던 일은 워낙 눈물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쉽게 상처가 아물었다. 눈물 흘릴 수 있으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나는 눈물 흘리지 못하는 게 병이라는 것을.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도 눈물은 한 방울도 안 나올 때가 많았다. 내 속사정을 잘 아는 도반도 그걸 느꼈는지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위해 많이 울어야 해요. 그런데 눈물도 안 나오죠?”
그 말 그대로였다. 사실은 지금도 눈물이 잘 안 나온다. 특히 자신을 위한 눈물은.
아무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행련 내내 나의 화두였고 그와 관련하여 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누군가가 떠오르면 바로 그 사람에 대해 문의하는 식이었는바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 도반 S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자 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그의 사랑스러운 점은 무엇인가요?
= S는 사랑스러운 점이 많다. S는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 사랑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으로 도반들을 돕고자 하나 모두 그의 지식으로 행하기에 사랑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아닌 지식으로 사랑을 행하려 한다. 허나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많다. 사랑을 보아라.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 있는 사랑을 보아라.
- 제가 그를 기피해온 이유는 그의 과시욕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과시욕, 권력욕, 상대를 자기 맘대로 재단하는 태도, 그런 것들에 마음이 다쳐서 그를 기피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사랑이 더 많다는 말입니까?
= 과시욕이나 권력욕도 상당히 있으나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 그 깊은 사랑을 보아라. 네가 그렇게 보면 그렇게 찾아질 것이다. 네가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변할 것이다.
- 이번에는 도반 K에 대해 문의드립니다. K에 대해서도 버거움을 많이 느끼는데 당신이 보기에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요?
= K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다.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나 사랑 자체는 넘치도록 많은 사람이다. 그녀의 사랑을 느껴보라. 그녀에게는 사랑의 깊이가 남다르다. 사랑으로 사는 그녀가 아름답지 않느냐? 그녀에게는 사랑의 향기가 있다. 그것을 배워라. 모두 너의 스승이니라.
- 저는 그녀가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사람이자 자아도취가 심한 사람이며 자기사랑을 위한 수단으로 타인을 이용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건가요?
= 타인을 수단으로 쓰는 면이 있으나 그것을 전적으로 자아도취라고 볼 수만은 없느니라. 왜냐하면 사랑은 오염된 속에서도 그 빛을 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보아라. 오염된 것을 보지 말고 사랑 그 자체를 보아라.
- 진정 그녀에게 사랑이 있는지요? 믿기 어렵습니다.
= 믿어보아라. 모든 것은 사랑이니라. 모든 것은 사랑이니라.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아라. 그 빛을 느껴보라. 사랑으로 보아라.
- 저는 인간들의 사랑은 믿을 게 못 된다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기주의의 변형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인가요?
= 모든 인간에게는 이기심과 이타심이 같이 있다. 이기심을 보면 그것이 무한히 확대되어 보이나 이타심을 보면 그것 또한 무한히 확대되어 보일 것이다. 사랑을 보아라. 이기심이 보이더라도 사랑을 보아라. 사랑을 보면 네가 꽃피어난다. 사랑을 보면 그녀가 꽃피어난다.
사랑을 보아라… 이기심이 보이더라도 사랑을 보아라… 사랑을 보면 내가 꽃피어난다… 사랑을 보면 상대가 꽃피어난다… 말씀과 함께 폭포수처럼 사랑의 기운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사랑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날은 걷다가 숲길에서 쉬는데, 울창한 나무와 풀을 보니까 갑자기 이유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에 대해 문의했다.
- 식물들의 왕성한 생명력, 번식력을 보는데 사랑스러움보다는 두려움이 더 많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요?
= 모든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바 마음으로 보면 식물들의 속사정이 보일 것이다.
식물들이라고 왜 애환이 없겠느냐? 그들의 애환, 그것을 느끼려고 노력해 보아라. 어렵게 어렵게 씨를 기르고, 어렵게 어렵게 꽃을 피우고, 어렵게 어렵게 열매를 거둔다. 그들이라고 쉽게 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너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아라. 그들의 애환, 그들의 환성, 그들의 울음을 들으려고 노력해 보아라.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느껴라. 마음으로 보아라.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느껴라… 마음으로 보아라… 눈을 감고 나무의 마음, 풀의 마음을 느끼고자 했다. 그들이 좀 더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한없이 자신에 대한 회의를 느낀 날도 있었다. 만물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내가 과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신에게 문의했다.
-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는 삶이 실제로 가능한지 의문이 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부조리, 폭력, 사기, 이기주의 등을 많이 겪는데 나는 사랑으로 살아도 타인은 이기심과 악으로 산다면 마음이 멍들고 한 맺힌 바보가 되지는 않을지 두렵습니다.
= 만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한 타인의 악심이나 이기심마저도 사랑으로 품는 것이다. 사랑으로 품기에 한 맺히거나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너의 경우 네 자신은 도저히 그런 삶을 못 살 거라고 불신하는 것이 문제이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자신이 그런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예수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믿어라. 내가 함께 하고 있다.
“너는 예수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이다” ― 어마어마한 말이었다. 만일 내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했다면, 내가 예수처럼 인류의 구세주가 될 사람이라고 이해했다면 나는 지금씩 과대망상증 환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그 말을 그렇게 이해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 말은 나 또한 예수님처럼 ‘사랑의 화신’이 될 수 있다고 믿음을 심어준 말임을 나는 알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도 자신을 박해한 이들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한 예수님처럼….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깨달아진 게 있다. “너는 예수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은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를 향해 신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지구 인류 모두를 향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처럼 될 수 있을 것인가? 지구 인류는 과연 예수처럼 될 수 있을 것인가?
평범한 인생, 지루한 고통
Day 08
6월 20일 : 로스 아르코스 → 비아나
신은 내게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라고, 사랑으로 품으라고 하였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스떼야에서의 사건 이후로도 과거의 아픈 상처와 기억들을 수시로 떠올랐고 걷는 내내 마음을 힘들게 했다.
나한테는 자기표현을 잘 못한 데서 오는 마음의 상처가 무척 많다. 살다 보면 ‘정당한 화’를 표출해야 할 때가 있다.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 언어적․비언어적 폭력을 당했을 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나한테는 ‘정당한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지금은 정당한 화를 내야 할 때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상으로는 그러한 화가 분출되지가 않았다. 마치 내면에 감정의 분출을 틀어막는 뚜껑이 있는 듯 했다.
분출되지 못한 분노는 자기혐오로 이어지곤 했다. ‘화내야 할 때 왜 화내지 못한 거야? 이 바보 같은 자식아!’ 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혐오는 죽을 것 같은 마음의 고통을 가져오게 마련이며, 그러한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대방에게 뒤늦게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없는 힘을 짜내어 어렵게 어렵게…. 그렇게라도 해야만 자기혐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바보 멍청이야, 너는 평생 그모양 그꼴로 살거야’ 하는 내면의 악마적인 목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감정표현 방식이 대인관계를 망칠 때가 많다는 거였다. 부당함을 느꼈을 때 바로 화를 내면 상대방과 치고받고 하는 과정을 거쳐 매듭을 지을 수 있으련만, 혼자서 속을 끓이다가 나중에 화를 표출하면 나는 나대로 속이 상하고 상대방의 감정도 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신에게 질문했다.
- 제 가슴 속에 설움과 울분이 많아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가 힘듭니다. 저는 왜 이렇게 부당한 일을 당해서 화를 못내는 바보 같은 성격이 됐을까요?
= 네가 그런 성격이 된 것은 성격 형성 과정에서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격을 형성함에 있어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인바 네 경우 가정 내에서도 밖에서도 누구도 네게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성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가족들이 네게 지나친 정신적인 간섭을 하면서도 네 말은 전혀 들어주지 않았기에 마음의 병이 형성되는 틀을 만들었다 할 수 있다.
- 예전에 최면요법가를 찾아가 최면치료를 받을 때 목이 졸려 죽는 체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왜 그런 체험을 하게 된 건가요?
= 전생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생에 네가 목이 졸려 죽은 적이 있는바 그 경험이 아픈 상처로 남아 있기에 그런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전생의 기억은 무의식에 남아 있다가 최면퇴행을 통해 활성화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전생의 체험이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제가 자기표현을 잘 못하는 것도 전생과 관련이 있나요?
= 전생과 관련이 있으나 제한적이며 이번 생에 비롯된 바가 더 크다. 너의 경우 가족에게서 비롯된 고통과 한계가 많으며 이것들은 모두 네게 주어진 공부 과제이다.
- 제 가정은 폭력이나 이혼 등이 없는 ‘정상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게 그렇게 고통과 한계를 주었나요?
= 정상 가정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폭력이나 이혼에 있기보다는 얼마나 가족 구성원들 간에 따뜻한 소통이 있느냐이다. 너의 가정은 그 점에서 메마름의 극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마음을 읽지 못하고, 오직 생각과 자기 위주의 사랑으로 서로 대하는 가정이었으니 거기서 오는 상처가 결국은 너에게서 폭발했다고 볼 수 있느니라.
- 자기표현을 잘 못하는 데서 오는 울분과 자기혐오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요? 이것 또한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게 답인가요?
= 사랑의 눈으로 보아라.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사랑의 눈으로 보아라. 너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푸는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고통을 껴안고 더 많이 울어야 한다. 너의 고통을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는 것, 그것 또한 너에게는 너무도 큰 고통이 아니었더냐? 그러나 이제는 내가 있으니 나를 믿어라. 내가 네 곁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라. 내가 네 곁에 있다. 내가 너의 고통을 모두 알고 있다.
여기서 잠시 내 인생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자라왔는가를 전해야만 그 다음 대화들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만 서른일곱 해의 내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표현이 떠올랐다.
평범한 인생, 지루한 고통.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 지루한 고통의 연속이었던 내 인생 이야기를 간략히 하고자 한다.
나는 1974년 5월 2일, 전남 광주에서 평범한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전라도 토박이시다.
고향에서 수재 소리를 들으면 자란 아버지는 명문중, 명문고를 거쳐 명문대를 다니다가 집안이 가난하여 중퇴하셨는데 평생 그걸 한으로 여기셨다. 집안이 넉넉하여 대학만 졸업했어도, 박사 학위만 땄어도 유명한 학자나 교수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듯 했다.
대학을 중퇴하신 후 아버지는 도청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그만두시고 동양화를 시작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이름을 날리는 유명 화가가 되지는 못 하셨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그림을 손에서 놓으셨다.
어머니는 시골 아낙네 같은 분이셨다.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중학교 졸업 이후 부모님 농사짓는 것을 돕다가 중매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다.
형제자매는 3살 터울의 형이 있다. 형은 천성이 장난꾸러기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했다. 그 성격 자체는 변하지 않되 다른 한편으로 나이가 들수록 기죽고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변하는 걸 보았다.
형과 달리 어렸을 적부터 다분히 폐쇄적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친구들과 어울려 논 기억이 거의 없다. 온종일 방안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찰흙 공작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좀 철이 없는 아이여서 엄마한테 장난감 사달라고 졸라대는 게 일이었다. 문방구 앞에서 장난감을 빤히 쳐다보며 앉아 있다가 엄마가 와서 그 장난감을 사주면 들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유명 인사나 문인들의 에세이를 보면 어릴 적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조숙하게 의식이 깨였다는 얘기가 많은데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나는 감탄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내가 조숙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기 때문이다. 또래에 비해 여러 모로 세상 물정도 늦게 알고 대인관계도 미숙하고 부모님 입장에 대한 배려심도 없는 그런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컴퓨터를 사달라고 줄기차게 졸랐던 기억이 난다. 특별히 컴퓨터가 필요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가 귀한 시절이었는데 반 친구 중에 컴퓨터를 갖고 있는 친구를 보면서 ‘나도 갖고 싶다’는 욕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올라갈 무렵에 드디어 컴퓨터를 사주셨고 그걸로 줄기차게 게임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잠자기 직전까지 게임만 했고, 방학 기간에도 게임만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갑자기 게임을 뚝 끊고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계기는 역시 '친구' 때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내가 동경하던 P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내 부모님에 비해 P의 부모님은 공부에 대한 극성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중학생인 아들에게 “너는 죽어도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다짐을 받고, 성적이 좀 떨어졌다 싶으면 심하게 닦달한 후 학원에 보내는 그런 부모였다.
P는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소위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친구를 사귀어도 자기보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하고만 사귀고, 공부를 못 하는 아이는 상대도 안 하는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P가 공부도 잘 하고 반장도 곧잘 하는 ‘잘난 아이’였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P가 좋았고 P처럼 되고 싶었다. P처럼 되기 위해서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됐다.
그토록 좋아하던 게임도 뚝 끊었다. 그전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잠자기 직전까지 게임만 했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확 변해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뭔가에 씐 것처럼 갑자기 그렇게 변했다.
P와 나는 같이 과학고에 가자고 결의했다. 과학고를 나와서, 과기대를 나와서, 놀랄만한 과학적 업적을 남기든가 아니면 발명품을 만들어서 성공하자고 결의했다. 같이 독서실에 다니며 학기 내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P와 나는 둘 다 과학고 시험에 떨어지고 만다. 입시 준비를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이었다. P와 나는 그 후 각기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사이가 멀어졌고 P와의 우정은 그걸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에게서 받은 영향은 사그라들지가 않아서 나는 P보다도 더 심하게 공부에 집착하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병적일 만큼 심하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공부한 만큼 충분히 성적은 잘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내 목표는 단순히 좋은 성적을 얻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출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만인에게 인정받는 일종의 ‘영재’가 되고 싶었다.
왜 그렇게 특출난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소위 성공을 하기 위해서? 그걸 원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뭔가 다른 걸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전교 1등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들이 나한테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관심이 부담스럽기만 할뿐이었다. 제발 관심 좀 안 가져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부담감이 지나쳤는데 그 다음 시험에서는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잠을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성적이 떨어진 충격도 있었거니와 잠을 많이 자면 내가 원하는 ‘특출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나 체력이 약한 나로서는 잠을 줄이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목표는 잠을 4시간 정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체력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잠을 적게 자면 적게 잔만큼 낮에 졸음에 시달렸다. 오늘 4시간을 자면 그 다음날에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느라고 8시간, 9시간을 자기 일쑤였다.
그런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체력이 약한 나 자신, 의지력이 약한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잠을 적게 자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서 생긴 우울증이었다.
단지 성적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잠을 그렇게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잘 거 다 자면서 공부해도 얼마든지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 이상의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특출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잠을 적게 자고자 한 것도 성적보다는 특출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였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 비난했다. 너는 왜 그렇게 욕심이 많으냐고 했다. 그런 비난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내가 꼭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심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궁색했다.
점점 학교가 싫어졌다. 내가 느끼기에 학교는 참 교육을 하는 곳도 아니었거니와 그렇다고 대학 입시를 위해 최적화된 교육을 하는 곳도 아니었다. 고1 때는 겨우겨우 학교를 다녔으나 고2로 올라가자 더 이상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아졌다.
고2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들의 좌석 배치에 무한 경쟁 제도를 도입했다. 일찍 등교하는 순서대로 자신이 원하는 좌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우울증이 심했던 나는 겨우겨우 잠자리에서 일어나, 지각 직전에야 학교에 도착하곤 했다. 그러면 칠판이 잘 보이지 않는 제일 가장 자리 혹은 맨 끝 자리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시력이 몹시 나쁜 나로서는 그런 자리에 앉고서는 제대로 수업을 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런 사정에 대한 배려를 받을 수는 없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한 차례 말씀드려봤지만 “니가 빨리 와서 좋은 자리에 앉으면 될 거 아니냐?”는 핀잔만 받았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냥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점점 싫어졌기에, 조만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물러선 점도 있었다.
결국 나는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 안 나갔다.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학교에 그만다니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용기도 없었던 나는 그저 어느 날부터 학교에 안 나가는 선택을 했다.
“고등학교는 당연히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학교에 가서 휴학계를 제출하고 왔다. 줏대도 없고 용기도 없던 나는 속으로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고 생각했다. ‘휴학계를 냈더라도 다시 학교에 돌아가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워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평소 말이 없으시던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나는 너한테 좋은 대학 가는 건 안 바란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다녀야 한다. 고등학교를 다녀야 평생을 같이 할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 내가 살아보니까 대학 때나 사회생활하면서 사귄 친구는 진짜 친구가 못 되더라.”
아버지의 지론은 평생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들뿐이라는 것이다. 대학 때나 사회생활하면서 사귄 친구는 서로 이용해 먹으려고 머리나 굴리지 순수하게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못 된다는 거였다.
줏대도 없고, 용기도 없고, 그저 두려움만 많았던 나는 그 얘기를 듣자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의 말씀이 왠지 내 귀에는 ‘고등학교를 안 나오면 평생 친구도 없는 외톨이, 인생의 실패자가 된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고민 끝에 나는 복학하기로 결심했다. 가족들 중 아무도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하여 나만의 길을 가는 것을 지지해 주지 않았던 데다가 아버지의 한 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렇듯 내가 고등학교로 다시 복학하기로 결심한 시점이 바로 20년 가까이 지속된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 시작된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복학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오는 일시적인 장애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고등학교에 복학하면 아픈 게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복학 후에 통증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몇 배나 더 커졌다. ‘이유 없이 휴학한 아이’라는 낙인까지 찍힌 상태에서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엄청 힘들었다.
고3으로 올라가면서 처음 정신과의 문을 두드렸다. 대학병원 1년 가까이 면담 치료를 받았으나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왜 나한테 이런 극심한 고통이 시작됐는지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들어갔으나 제대로 된 대학 생활은 하지 못 했다. 그 당시의 내 모습은 그야말로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이었다. 지금도 조금 그렇지만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모습이었고, 옷은 거의 항상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 다녔다. 집중력이 극도로 약해서 책을 펼치면 글자가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대학 1학년 때는 모든 학점이 D학점, F학점이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몇 번 얘기했듯이 매일매일 너무나 아팠다.
대인관계 또한 절망적이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에 대해 순진한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내가 진심을 다해서 얘기하면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줄 거라는 기대. 누군가 나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기대. 누군가 나의 고통을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 누군가 내 병을 치료해 줄 거라는 기대. 그런 기대들이 순진한 환상임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무수한 상처와 좌절을 겪고 난 후에야 세상의 참맛, 그 쓴맛을 알았던 것 같다.
뼈 속 깊이 외로웠다. 내가 아무리 죽을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해도 어느 한 사람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막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막막했다. 대학병원의 정신과 의사에게 2년 넘게 면담 치료를 받았으나, 내 병의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원인을 모르니 치료법 또한 나오지 못했다.
부모님은 몇 년이 지나도록 이유 모를 병에 시달리는 나에 대해 넌더리를 내셨다. 내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허우대가 멀쩡해 보이는 아들이 가슴이 아파 죽겠다고 만날 신음소리를 내니까 이해가 안 되고, 안타까우면서도 짜증이 나고, 나중에는 거들떠보기도 싫어지고, 그러신 듯 했다.
부모님한테 용돈 받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기에 뭔가 일을 해야만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장에서 부품 조립하는 일 뿐이었다. 집중력 장애가 심한 내가 과외 같은 걸 할 수도 없었거니와 반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내가 서비스 관련 알바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노동을 하고도 정규직 노동자의 1/3의 월급 밖에 못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였지만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만 3년을 일체의 대인관계를 끊고 지냈다. 어느 누구도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 섞인 비난만 늘어놓는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대인관계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와 공장에 출근, 하루 종일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은 채 묵묵히 일하다가, 퇴근하면 오락실에서 또 혼자 게임을 하다가, 밤 12시가 넘어 집에 돌아와서 잠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에 모든 희망을 걸었었다. 왜 이렇게 원인 모를 통증이 지속됐는지, 왜 이렇게 온 몸이 뻣뻣하게 굳고 집중이 안 되는지 밝혀내 주길 바랬다. 정신과 의사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그러하듯이, 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서 기적적인 치유를 이루어주길 바랬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면담치료가 만 2년에 이르자 의사 선생님이 먼저 포기 선언을 했다. 나로서는 당신을 치료할 수 없으니 다른 의사를 찾아가든지 아니면 통증을 감수하며 살라는 거였다. 이런 식의 좌절은 그 후로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최면치료에서도, 예술치료에서도, 집단 치유 프로그램에서도….
근본적인 치유에는 실패했지만 면담치료가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관계에 대한 통찰이 좀 생겼다. 우리 가정이 겉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얼마나 황폐하고 외로운 가정인지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각자 마음의 벽을 쌓은 채 외롭게 사는 가정이라는 것, 진정한 이해와 관심은 없이 피상적인 훈계만 주고받으며 사는 가정이라는 것…, 그전에는 그런 사실조차 몰랐었다.
그 피상성을 절감하고 나니까 웬일인지 통증이 좀 줄었다. 통증의 강도가 예전보다는 약해졌고 어느 정도는 책 읽고 공부하는 게 가능해졌다. 4년여의 긴 휴학을 마치고 대학에 복귀할 수 있었다.
예전에 명상학교 내에서 ‘고마움’ ‘미안함’을 주제로 백일장이 열린 적이 있었다. 도반님들은 주로 자신의 가정사를 배경으로 글을 쓰셨는데 그 글들을 읽으며 많이 감탄스러웠다. 어려운 가정환경과 역경을 딛고 여기까지 왔다는 얘기, 그 과정에서 고맙고 미안한 분이 있었다는 얘기….
그분들에 비하면 나는 가정사에 대해 쓸 게 없었다. 힘든 환경을 딛고 여기까지 왔다는 식의 감동적인 스토리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내 인생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얘기해 봤자 본전도 못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살면서 인연을 맺었던 분들에 대해서도 고마움만으로 기억되기보다는, 고마우면서도 화나고 원망스럽고, 이렇게 애증이 함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경우, 내가 대학 진학을 잘 하도록 도와주셨다는 면에서는 고마우나, 반 아이들 앞에서 내가 정신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놀림거리 삼아 공개한 점은 두고두고 상처로 기억되는 식이다.
서른이 넘은 이후로도 대인관계는 늘 힘겨운 과제였다. 주위 사람들이 내가 아픈 걸 안 알아준다고 서러워하고, 배려해 주지 않는다고 서러워하고, 과도한 자의식 때문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이런 적이 많았다.
아무튼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조건을 부여받아 태어난 사람이다. 평범한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평범한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자라나, 평범한 한 남성으로 성장했다. 유일하게 평범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오랜 기간 이유 모를 정신적인 병을 앓았다는 점뿐이다. 허나 그것은 나한테는 지루하고 남루한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오랜 세월 나는 ‘무의미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내가 욕심이 많고 멍청해서 정신병에 걸렸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품고 있지 않다고 느꼈고, 그럴 때면 심한 절망감과 자기혐오에 몸서리치곤 했다. 이런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나중에 신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너를 통해 거듭남의 모델을 보이고자 하는 하늘의 뜻을 깊이 헤아려 보아라. 너무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 훌륭하게 크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사람들에게 특별히 희망을 줄 거리가 없다. 또한 너무 힘든 환경에서 자란 이가 빼어난 재능을 드러내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 또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는 못한다. 너무 힘겨운 환경이란 다시 말하면 너무 훌륭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조건일 수 있기에 이 또한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너의 경우 아무 것도 특별날 게 없는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 특별날 것 없어 보이는 마음의 병을 앓고, 특별날 것 없어 보이는 고통을 겪는 가운데 극한의 고행을 하는 스케줄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평범함 속에서 거듭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이 얘기를 듣고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내가 그동안 겪은 고통들이 무의미한 게 아니었다는 것, 지리멸렬하다고만 여겼던 지난 날들이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는 것, 평범함 속에서 사랑으로 거듭나는 모델을 보이고자 하는 하늘의 뜻이 있었다는 것 ― 이보다 큰 위로가 있을 수 없는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