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다툼의 시대
2026년 7월 13일 월요일
선경 정해균의 독서 노트.
◐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어느 날 공자 일행이 노자가 떨어져 끼니를 굶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제자중에 한 명이 주막을 찾아 남은 찬밥이라도 얻기를 청했다. 그러자 주인이 자기가 쓰는 글자를 알아 맞히면 공짜로 음식을 주겠다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자의 손꼽히는 제자요. 내가 모르는 글자는 없으니 어서 문제를 내 보시오.”
제자의 자신에 찬 말에 주인이 (참) ‘眞’이라는 글자를 써 보였다. 제자가 생각할 것도 없이 진(眞)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주인이 자네는 “무식한 바보요 엉터리 식자 구먼”하고 비웃음을 지으며 그를 내쫓는 것이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제자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공자가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주막으로 갔다. 이번에도 주인은 공자에게 똑 같이 (참) ‘眞’자를 써 보였는데, 공자는 망설임 없이 “이 글자는 직팔(直八)이라 읽는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인이 “당신이야 말로 참으로 훌륭한 선생님” 이라며 공자일행에게 음식한상을 거하게 차려주었다.
“스승님, 참’眞이 왜 ‘직팔(直八)이 되는 것 입니까?”
제자가 귓속말로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지금은 참 ‘眞’ 이 통할때가 아니다. 진실대로 살겠다면 굶어 죽기 딱 알맞다.”
-곽말약(郭沫若,1892-1978)의 실록소설 【공자】 중에서
♣곽말약은 중국의 시인, 사학자.
【선경의 독서 노트】
“현란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 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펴낸 김경일 저자가 ‘유교의 유효기간은 이제 끝났다’고 벌써 몇 년 전에 주장한 논리의 핵심내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김경일 저자와 저는 견해를 좀 달리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어는 읽는 사람에게 공자는 영원한 멘토의 메시지로 인간의 도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논어를 읽어 보면 ‘사람을 알라. 사람사이에 답이 있다’고 공자께서 침묵속에서 강조하시는 듯 합니다. 논어는 공자께서 제자와 나눈 대화의 집성 록입니다. 공자와 제자가 나눈 여러 대화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와닿는 말이 여러 한자 원문 중 외자 서(恕) 입니다.
논어(論語)에서 외자 ‘서(恕)’가 언급된 편명과 장을 정리해 봤습니다.
☞위령공 제 24장
자공이 물었다. “한마디말로써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게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결국 진심을 다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서(恕)’가 아니겠는가? ‘서(恕)’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안연 제2장
중궁이 인(仁)에 관해 묻자 공자가 이같이 대답했다. “문을 나서 사람을 만날 때는 큰 빈객을 맞이하는 듯이 하고 ….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이같이 하면 나라에는 원망이 없고 집안에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 중궁이 말했다. “저 염옹은 비록 불민한 인물이나 이 말씀을 받들어 반드시 실현하겠습니다.
☞공야장 제12장과 이인 제 15장.
공야장 제 12장에는 “서(恕)”가 “남에게 어떤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는 뜻으로 무가저인(無加諸人)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인편 제15장에는 인(仁)의 요체를 충서(忠恕)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용한 논어에 언급된 서(恕)와 관련된 해당 편명과 장의 번역은 신동준 지음 【교양인의 논어】에서 가져왔습니다. 원문은 지면관계로 생략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서(恕)의 취지와 일맥상통하는 인간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도리는 성경에도 각각 아래와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행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국과 구라파의 일류 호텔 머리맡 탁자에는 성경 책이 빠짐없이 비치 비치 되여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unto you. Matt. 7:12
☞루카복음 6장 31절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동양과 서양의 성인들 어록에서 비슷한 생각을 담은 경전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구절이 황금율(Golden Rule)이라고 불리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恕)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습관과 가깝습니다. 역지사지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어떤 사태를 파악하려는 배려의 습관입니다. 역지사지 습관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의 벽과는 반대되는 습관입니다. 인지부조화의 벽은 자신 만의 입장을 고려해서 어떤 사태를 파악하려는 배타의 습관입니다. 일상적인 갈등과 분쟁의 소요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배려의 습관을 실천하고 배타의 습관에 거리를 둘 줄 알아야 합니다.
한자 ‘용서할 서(恕)’는 부수 마음 심(心)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의 조합으로 구성된 낱말 있습니다. 말그대로 ‘서(恕)’는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의 주파수를 맞춘다’는 뜻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합니다. “내로남불”은 우리사회의 도처에서 창궐하는 고질적인 병폐로 반드시 척결해야 할 최악의 사회병리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입장과 처지에서 헤아리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서 헤아린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도 관대 해질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잠시 기분 전환을 위하여 퀴즈 문제를 하나 풀고 오늘 칼럼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래 인용문에 나오는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하인이고, 실패한 사람들의 주인입니다. 위대한 사람들도 실패한 사람들도 내가 만들어 준 것. 그러니 성공하고 싶다면 나를 택하라. 나를 엄격하게 대하라. 그러면 세계를 제패하게 해주겠다. 나를 가벼이 여기면 당신을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자기도 모르게 나를 얽어 매는 (나쁜)습관입니다.
한자 낱 글자 관(慣)은 버릇이란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버릇은 긍정적인 뜻으로 보다 부정적인 뜻으로 더 많이 쓰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와 같이 나쁜 버릇이 눈송이 굴리듯이 커지면 급기야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고 경고하는 글이 한때 sns를 통하여 떠돌아다녔습니다.
“생각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의 행동이 될 수 있다.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의 습관이 될 수 있다.
습관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의 성격이 될 수 있다.
성격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 될 수 있다.”
세상에는 세부류의 사람이 있다고들 합니다. 【난】 사람과 【든】 사람 그리고 【된】 사람이 그들입니다. 【난】 사람은 잘난 사람이고, 【든】 사람은 철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럼 【된】 사람은 어떤 사람 일 까요. 【된】 사람은 참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상론을 펼치자면 “잘난 사람” 보다 “철든 사람” 이 또 “철든 사람” 보다 “참된 사람” 이 우리사회에 많았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곽말약의 실록소설에 나오는 공자의 태도는 필자의 바램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논어를 읽고 난 후 독자들의 머리속에 남은 공자의 잔존 이미지와 소설가 곽말약이 소설에서 묘사한 시류 순응형 공자의 이미지가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곡즉전(曲則全)즉 ‘굽히면 온전 해 진다’ 는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노자의 역설적 철학은 우리의 올바른 선택을 더욱 어렵게 합니다.
노자 도덕경 제 22장 “곡즉전(曲則全)”의 해당 부분 글을 공유합니다.
“굽히면 온전해지고(曲則全)
구부리면 곧아지고(枉則全)
파이면 채워지고(窪則盈)
낡으면 새로워진다(敝則新)
-장치청 지음 오수현 옮김 【도덕경 전해】 중에서
살다 보면 불시에 닥치는 딜렘마(dilemma) 상황에 빠질 때는 잔꾀를 부리기 보다 큰 그림을 머리속에 그리며 겸손 해져야 합니다. 참 순진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효과적인 방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자 겸손은 겸손할 겸(謙)에 겸손할 손(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겸(謙)자와 손(遜)를 파자 해서 어원으로 겸손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겸손할 겸(謙)은 말씀 언(言)과 겸할 겸(兼)의 조합입니다. 그리고 겸손할 존(遜)은 손자손(孫)과 갈착(辶)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겸손(謙遜)을 인수분해해서 구성요소의 뜻을 연결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겸손(謙遜) “반드시 (공손한) 말과 (행동) 두가지를 겸해야 하며 그리고 손자가 (도움을 거절하고)달아난다 즉 사양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겸손은 “공손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 도움을 사양한다” 뜻입니다. 스스로에게 만 초점을 맞추면 균형 잡힌 시각을 잃게 됩니다. 겸손하면 자신에 대한 생각을 덜하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 해지면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찾게 해 줍니다. 따라서 겸손은 서(恕)와 역지사지(易地思之)정신과 궤를 같이 합니다. 반면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만한 인물로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습니다.
주역 건괘(乾卦)의 괘사에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나옵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높이 올라간 용이니 후회함이 있다”입니다. 올라갈 때까지 올라가면 내려오는 것이 자연의 이치 아니 겠습니까. 천문현상으로는 “달도 차면 기운다”는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발전을 할 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한마디로 오만한 사람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자리의 정상에는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살면서 계속 발전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종사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아닌 것이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 할 것 같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즐거움이 더디 오도록(delayed gratification)” 의도적으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절제하며 살아 갑니다. Delayed gratification의 이면에는 “아무리 좋은 일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집단지성이 집약 되여 있습니다. Delayed gratification에 비추어 보면 자화자찬(自畵自讚)은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형용입니다. Delayed gratification 관점에서 보면 자화자찬은 순간의 즐거움을 취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입니다. 건강한 사람의 뇌속에는 절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가설은 결코 가짜 뉴스가 아니라고 필자는 확신합니다.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이번주 15일은 초복입니다. 폭염이 예보된 가운데 혹서의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탈수가 되기 전에 짬짬이 수분을 넉넉히 보충하고 평소보다 자주 휴식을 취하며 시원하게 혹서기를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