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스탄티누스1세
그리스도교도임을 공언한 최초의 로마 황제.
그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추진력 덕분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친 뒤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312), 이어서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324).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덕분이라고 평생 동안 믿었다.
그는 늦어도 313년까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귀의했고, 그해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했으며, 신학 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325)를 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옛 이름은 비잔티움)을 재건하고 확장시켜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거둔 마지막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도시는 그후에도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다.
그의 개종은 그후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종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일찍이 소수 종파였던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후계자들의 후원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교회는 재산을 늘렸고 교회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교회는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육군 장교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아내(또는 첩)인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집안은 3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군사 지배 계급에 속해 있었다. 293년 그의 아버지는 부황제(caesar)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서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 밑에서 부황제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289년 아버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과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했고,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랐다. 카이사레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어린 콘스탄티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싸우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력과 개종
콘스탄티누스가 동방 속주의 제국 궁정에서 겪은 경험은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양의 여러 도시와 궁정에서 그리스도교와 접촉했다.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정에서 비롯한 그리스도교도 박해가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특히 격렬하게 시행되고 있던 303년부터 그리스도교는 공공 정책의 주요쟁점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일가가 그리스도교도였을 가능성도 있다.
305년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그들의 부황제인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뒤를 이어 공동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동로마에서는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가 갈레리우스를 몰아냈고, 서로마에서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무시하고 콘스탄티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로마에 있는 아들을 보내달라고 갈레리우스에게 요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적대적인 세베루스의 영토를 가로질러 게소리아쿰(지금의 프랑스 불로뉴)에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갔다. 이들 부자는 함께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 306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지금의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주 요크)에서 죽을 때까지 브리튼 섬 북부에서 원정을 벌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잇달아 일어난 복잡한 내전에 전념했다. 퇴위한 서로마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동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를 몰아낸 세베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선언했지만, 세베루스는 다시 리키니우스에게 쫓겨났고, 반란을 일으킨 막센티우스는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의 도움을 얻어 세베루스를 진압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와 합류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누스를 배신하고 죽음을 맞았다(310). 307년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를 2번째 아내로 맞이한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이탈리아를 침략해 막센티우스를 무찔렀고, 리키니우스와 이미 맺고 있던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갈레리우스는 311년에 죽었음).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리키니우스는 경쟁자인 막시미누스를 무찔러 동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316년 발칸 반도의 영토를 빼앗았고 324년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에디르네)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켜 동·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을 그리스도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가 막센티우스를 무찌른 뒤에 로마에 세운 개선문은 이 승리를 그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라 '신이 준 영감' 덕분으로도 돌리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동상도 개선문과 동시에 세워졌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이 동상에는 "이 구원의 상징 덕분에 저는 당신의 도시를 폭군에게서 구했고, 원로원과 로마 국민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324년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도구로서 브리튼 섬 북쪽 끝에 있는 해안에서 왔다고 말했으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신의 신성한 힘의 도움을 얻어 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출처:브리태니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