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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남씨괴시파종택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5호. 영양남씨 남붕익(南鵬翼)이 약 300년 전에 창건했다 하고 1916년 증수하였으며 1984년에 일부 수리가 있었다.
안채와 사당채가 현존한다. 안채는 서향하였고 ㅁ자집이나 남쪽으로 사랑채가 부설되면서 날개가 형성되었다. 이는 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없었던 듯하다. ㅁ자 원래의 구조는 단순하다. 대문칸 왼쪽이 방, 고방이고 오른쪽이 사랑방이다. 사랑방 2칸 중 윗방으로부터 오른쪽날개가 형성되면서 책방 부엌, 이어 상방 그리고 왼쪽으로 4칸 반의 대청, 안방과 부엌으로 이어지던 것이나 지금은 사랑 뒤 책방부터 남쪽으로 방 1칸과 대청 2칸의 사랑채가 부설되었다. 안채 상방은 현재 2칸 반 규모인데 원래는 상방 1칸, 마루 1칸 반이던 것을 1984년 증수하면서 마루를 뜯고 방을 들여 변형하였다 한다. 집의 구조나 구성은 평범하다. 사당은 80여년 전에 건축한 것으로 남측에 따로 일곽을 만들고 정 3칸 측면 간반통 맞배지붕의 구조를 하였다. 역시 평범하다.
[참고문헌]
<경상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경상북도 1987.)
<盈德郡鄕土史>(盈德郡 1992).
영양남씨괴시파종택(英陽南氏槐市派宗宅)
소 재 지 :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333
건 축 주 : 남붕익(南鵬翼)
건축시기 : 17세기 말 경 건립
중건시기 : 1916년 중수
소 유 자 : 남병철
문 화 재 : 시도민속자료 제75호, 1987.12.29 지정
영양남씨 괴시파 종가로 17세기 말에 남붕익(南鵬翼)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곳 호지마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며,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의 ‘ㅁ'자형의 건물로 안채와 오른쪽 앞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려 사랑채가 돌출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당은 약 80년 전에 지은 것이다. 안채는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 우측에 상방과 부엌이 있는데, 상방은 원래 마루 반 칸이 있던 것을 방으로 고친 것이다. 사랑채는 재청방(齋廳房)인 1칸의 사랑 윗방과 2칸의 사랑마루로 꾸몄다. 사당은 정침 우측에 멀리 떨어진 위치에 따로 두었다. 내부에 약간의 개조가 있으나 조선 후기의 주택구조를 잘 보전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축 이야기
영양남씨 괴시파 종가로 17세기 말에 남붕익(南鵬翼)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1916년경에 전체적인 부재(部材)와 기와를 교체한 바가 있고, 1984년에도 일부 낡은 부재를 교체하는 등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사당은 약 80년 전에 지은 것이다.
건축 특징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으로 ‘리자형의 안채 오른쪽 앞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려 사랑채가 돌출해 있는데 흔하지 않는 모습이다. 사랑채는 사랑마루, 사랑윗방, 사랑방,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윗방은 재청방(齋廳房)으로 부른다.
안채는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 및 도장이 있으며, 우측에 상방과 작은 부엌이 있는데 상방은 원래 마루 반 칸이 있던 것을 1984년 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또 도장방과 상방 상부에는 각각 유산고를 설치하여 수장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내부에 약간의 개조가 있으나 조선 후기의 주택구조가 잘 보전되어있는 건물이다.
건축 구성
호지마을의 가장 중심 위치에 있으며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의 사랑방 앞쪽으로 원래 각 1칸 규모의 작은 사랑방과 대문간, 하인방 등으로 구성된 행랑 부분이 길게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입천 남붕익 선생
성명 : 남붕익(南鵬翼), 1641년~1687년
본관 : 영양(英陽)
자 : 자거(子擧)
호 : 입천, 회수(卄川, 晦叟)
출생지 : 盈德 寧海 槐市
분묘지 : 영덕 영해 탄동(炭洞)
입사경로 : 1673년 식년문과 합격
내관직 : 예조좌랑(禮曹佐郞)
외관직 : 영산현감(靈山縣監)
태생
공의 이름은 붕익(鵬翼)이요 자는 자거(子擧)이다. 성은 남씨인데 당나라 안렴사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의 후손이다. 공은 1641년 8월 22일에 괴시리 집에서 첫 번째 어머니인 오씨가 낳았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기상이 있고 온화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하는 사람으로 모부인을 섬길 때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음식을 제공하며 언제라도 그 뜻을 적합하게 하려고 하였다. 형제간에 지낼 때 굶거나 실컷 먹거나 걱정이나 즐거움이나 언제라도 함께 나누고 친족 간에는 언제라도 정성스럽게 하여 사람들이 감복하는 것이 많았다.
경력
1672년에 과거에 합격하였고 1674년에 참봉공의 상을 당하였다. 1679년 4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5월에는 서학교수(西學敎授)가 되었고 6월에는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禮曹住郞 兼 春秋館記事館)이 되었다. 1680년에 영산현감(靈山縣監)이 되어 자리에 임하여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여 조금도 누가 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오래된 폐단을 고쳐서 한 지역이 모두 편안하게 되도록 하였다.
영덕 괴시파의 뿌리를 내리다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고려 말 牧隱 李穡 선생(1328~1396년)이 문장으로써 원(元)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毆陽博士, 毆陽玄)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이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말에 함창 김씨(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하였고, 그 후 조선 明宗(1545~1567) 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 仁祖 8년(1630년)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시거(始居)하였다. 그 후 3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 남씨의 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괴시마을은 경북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통 건축이 매우 잘 보존되고 있으며,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되고 있다. 또한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 경북민속자료 제75호)을 비롯하여 여러 지정 문화재와 고가옥 30여 호가 밀집되어 있어 조상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전통 문화마을이다.
괴시촌의 북쪽은 어대(魚臺)와 붙어 있고 남쪽은 경악(鯨嶽)을 마주하고 있으며, 큰 들판을 당기는 듯한 모습이고 떨어지는 노을과 비구름이 아침저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해동(海東)에서 제일 빼어나고 기이한 곳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기거하시던 곳 옆에 작은 연못을 하나 파서 이름을 ‘침향(沈香)’이라고 하고, 못 위에 작은 집을 하나 짓고서 ‘침향정(沈香亭)’이라고 했다. 침향정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정사(精舍)를 하나 짓고는 이름 하여 ‘무가정(務稼亭)’이라고 했다. 무가정에서 조금 북쪽에 흙으로 향부자풀을 덮고서 이름 하여 ‘소요대(逍遙臺)’라고 했다.
가족관계
조부는 이름이 발(襏)인데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이름이 두원(斗遠)인데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을 지냈다. 어머니는 낙안오씨(樂安吳氏)인데 현감 오시준(吳時俊)의 손녀이자 주부(主簿) 오경직(吳敬直)의 따님이다.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아주 모범이 되는 분이었다. 계비(繼妣)는 평해황씨(平海黃氏)인데 응청(應淸)의 손녀이자 처사인 중미(中美)의 따님이다.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지복(知復)의 딸인데 공이 돌아가신 뒤 27년 만에 돌아가셨다. 묘는 영해부의 북쪽인 병곡(柄谷)의 자좌(子坐)에 있다. 아들 2명이 있는데 첫째는 여흠(汝欽)이다. 문장과 행실이 뛰어났지만 일찍 죽었다. 명흠(明欽)은 진사를 지냈는데 중부(仲父)에게 양자를 갔다.
여흠의 아들은 기형(紀衡)인데 생원을 지냈고 증직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받았다. 준형은 생원을 지냈다. 딸은 황세태, 김상덕에게 시집을 갔다. 기형의 아들은 육만(育萬)인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택만(澤萬)은 증직으로 좌승지(左承旨)를 받았으며, 득만(得萬)이 있다. 딸은 권용해와 이제신, 조준도에게 시집을 갔다. 준형의 아들은 식만(式萬), 극만(極萬)이고 딸은 김상동과 조정복, 안명윤에게 시집을 갔다.
후손
영양남씨 괴시문중은 두원공의 장남 붕익(鵬翼, 1641~1687)공이 현종 13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영산 현령을 지낸 이후 마을은 문한(文翰)으로 이어져 영남 유림에서도 뛰어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문집, 저술, 일기, 유고, 서화 등과 판목(版木)들이 전하고 있으며, 근대에는 기미년(1919) 영해 3․18 독립만세의거를 주동한 남계병(南啓炳, 신돌석 의병 후원, 협창학교 설립, 항일사상 고취, 만주망명 독립군모집, 건국훈장 애족장), 남진두(南鎭斗), 남효직(南孝直), 남응하(南應夏) 등이 구국과 항일운동에 이바지하였다.
영덕 괴시파 종중의 여러 유적
괴시남문은 영해부(寧海府)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한 지역 유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유교적 관혼상제의 예절이 근래에까지 전승되어 온다.
학문을 위해 건립하였던 입천정(卄川亭), 괴정(槐亭), 만서헌(晩棲軒), 침수정(枕漱亭),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이 잘 보존되어 있고, 문중 선조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齋舍 : 덕후재(德厚齋), 태창재(態倉齋), 추모재(追慕齋), 추원재(追遠齋), 영모재(永慕齋), 양걸재(洋乞齋)]에서 해마다 정해진 날에 제사를 모신다. 전통 민속놀이로서 윷놀이, 줄다리기 등과 농사와 관련한 세시풍속이 전래되어 왔으며, 儒家의 規範과 행의(行誼)를 엄수하는 문화와 예절이 이어지고 있다.
대은(臺隱) 권경(權璟)을 스승으로 모시다
9세에 참봉공께서 대은(臺隱) 권경(權璟) 선생께 공부를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대은 선생은 공을 아주 기이하게 여기고 공부를 가르쳐 주었는데 읽는 소리가 아주 낭랑하고 책 속의 내용을 해독하는 것이 아주 정밀하고 자세하였으며, 물러나고 나아갈 때 그리고 사물을 응대할 때 모두 성인처럼 하니 사람들이 앞으로 아주 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교유인물
일찍 벼슬을 한 것은 집이 가난하여 양친을 봉양할 수 없어서인데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으면 이로써 군수의 자리에 있어도 일찍이 조금도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뜻이 없었다. 또 바닷가 산이 있는 적막한 물가에서 지내고 있으면서 평생을 마치며 교유한 사람들은 한 시대의 유명한 분들이니 그분들을 보면 갈암 선생, 항재 선생, 괴애 선생, 이몽암, 김노주 등 여러분이니 전부 도의로 서로 애쓴 경우이다.
약관의 나이에 시를 쓰는 분야에서 뛰어나 과거시험장에서 명성을 날렸지만 경서를 공부하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입천정(卄川亭)에서의 생활
경신년에 영산현(靈山縣) 현감이 되어 자리에 임하여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여 조금도 스스로 누가 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오래된 폐단을 고쳐서 한 지역이 모두 편안하게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계비(繼妣)를 임소(任所)에 모시고 갔으나 풍토(風土)가 좋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동쪽으로 먼 길을 되돌아와 오직 경서 몇 권에만 전념하였다. 경신년 이후로 세상사를 잊고 두문불출하며 한가하게 지내며 다만 사서(四書)와 역사서를 가지고 스스로 즐길거리로 삼으며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산수 간에 다니면서 이십천(二十川)에 작은 정자를 하나 짓고 이름을 ‘입천(卄川)’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이곳에서 그저 만년을 보내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입천정의 유래
지난 숙종 때 우리 고을의 선생 좌랑동공(佐郞東公)은 묘년(妙年)부터 영명을 날렸으나 세속과는 취향이 달라서 관계(官界)에는 부앙(俯仰)하지 않고 좌랑현관(佐郞縣官)의 사이에서 저회(低徊)하다가 경신년에 사변을 보고는 그만 낭관(郎官)의 직에 염증이 나서 그 본 집의 뒤 입천(卄川)의 위에다가 두어 칸 집을 짓고 그 방명에 의해서 입천정이라고 제명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공이 산림에 높은 은사라는 이름을 표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미의(微意)를 속어(俗語)의 이치에다가 부치어서 그것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만 쌓아서 세상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유유(悠悠)하게 자적하셨으니 그의 무위(無爲)한 데서 위하는 뜻을 이에서 가히 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정년이 단촉(短促)해서 그 중에서 끝내 수양하지도 못하고 만년에 지은 정자도 또한 따라서 퇴폐해서 빈터만 남은 지가 지금에 200년이나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 실전된 유지를 일찍이 괴서(槐西)의 구장(舊庄)으로 이전해서 입천정(卄川亭)이라고 써서 걸려고도 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해서 수의(遂意) 하지 못한 지도 또한 수 세대가 지나왔다.
그런데 내손(來孫)에 흥수(興壽)가 입천을 돌아보고 비탄해서 여러 친족과 합의하고 모의하여 그곳에 가 상하로 수색(搜索)하여 마계(磨溪)란 곳을 찾아내니 밖은 좁아도 안은 넓어 회합(回合)하고도 통망(通望)한 곳에 사람 사는 집이 멀지 않아도 또한 진세(塵世)를 격절(隔絶)해서 심울한 마음을 펴서 펼칠 만하니 비록 구지(舊址)를 적확(的確)하게는 알 수가 없어도 요는 춘산(春山)의 사초(莎草)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금을 모아 건축을 하여 이년 만에 준공하니 창헌(窓軒)이 명상(明爽)하고 주방(廚房)도 실비(悉備)해서 구제보다는 조금 큰 것이다. 그러니 족히 여러 종친의 거업(居業)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삼은 것이다.
著作이야기
<槐庄世稿>
<괴장세고>는 영양남씨 12명의 유고를 모아놓은 것이다. 후손 남곤수(南崑壽)가 편집하였다. 김도화(金道和)의 서문과 호조(澔朝)의 발문이 있다. 저자는 남붕익, 명흠, 기형, 준형, 택만, 극만, 일운, 상운, 경악, 화수, 기수, 곤수 등이다.
<입천정유고>의 체제
<괴장세고>의 첫 부분에 있다. 그다음에는 만사 및 시, 서, 제문의 순서로 편집되어 있다. 부록에는 행장과 묘갈명이 실려 있고 그 외에 공이 돌아가셨을 때 주위에서 지어준 만사 20편과 입천정 관련 상량문과 중수기문 등이 실려 있다.
영양남씨 시조 이야기
영양남씨의 시조 영의공(英毅公)은 중국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충(忠)이었으며 벼슬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 憲宗(778~820)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일본에 안렴사(按廉使)로 갔다가 소임을 마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동ㆍ남해에서 풍랑을 만나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훼손된 배에 의지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표류하다가 신라 유린지(有隣地)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 명당산(明堂山) 죽도(竹島)에 표착하게 됐다.
그 당시 당나라는 安史의 亂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이고 표착지 축산항은 바다와 경치가 좋고 인심이 유덕하여 신라 경덕왕에게 신라에 살게 해주기를 청하여 경덕왕이 그 일을 당나라 천자(天子, 헌종)에게 알리니 헌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기를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을 신하에 대한 예로서 불러올 수가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신라에서 살게 하라”고 허락하였다.
그 후 신라 경덕왕이 공(公)을 불러 이르되 “군(君)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니 사성(賜姓)함이 마땅하리라. 성(姓)은 남쪽에서 왔고 본고향이 여남이라 남씨(南氏)로 하고, 거동을 살피고 언행을 들으니 민첩하고 화용(和容)함이 가히 법(法)다운지라.” 이름은 민(敏)으로 개명(改名)하게 한 후 고은현(古隱縣)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영의공(英毅公)이란 시호를 내리니 이때 나이 40세이었다.
영양남씨 괴시파
영해 지방에 터를 잡은 영양남씨 입향조는 송정(松亭) 남수(南須, 1395~1477)이다. 남수는 당시 영해 5대 성씨 가문 중 하나였던 대흥백씨(大興白氏) 가문과 혼인하면서 1420년경부터 영해 인량마을(나라골)에 살았다. 그 후 자손 남벌(南橃)의 남두원(南斗遠)이 1630년 경 괴시마을에 처음 입향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양남씨족보>에는 남두원이 처음 괴시에 주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양남씨 괴시파가 괴시에 세거한 것은 약 4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벌(南橃)의 두 아들인 남두건(南斗建)과 남두원의 후손들은 모두 괴시에 살고 있는데, 남두원의 후손들이 괴시파의 실질적인 중심을 형성하여 왔다. 남두원은 남붕익(南鵬翼), 남붕한(南鵬翰), 남붕구(南鵬九) 등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남붕익과 남붕한의 후손들이 아직도 괴시에 살고 있다. 현재 장남 남붕익의 후손들은 괴시파종택, 물소와고택, 주곡댁, 사곡댁, 영감댁, 경주댁, 천전댁 등에서 거주하며, 차남 남붕한의 후손들은 대남댁 종가와 영은고택, 해촌고택, 구계댁 등에서 거주한다.
정승 6명 등 배출…조선조 20대 명문 門閥
대구 경북 씨족사 13. 영양 남씨(英陽 南氏)
영양남씨 영해 입향시조인 송정공 후손들이 인조8년(1630)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에 이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 민속마을로 지정된 괴시마을은 전통성이 아직도 고스란히 잘 보존된 마을로 특히 경북지방에서 볼 수 있는 한국 반가(班家) 건축의 대표적 형태인 리형 가옥이 14채 남아있어 그 당시 마을의 배치, 가옥의 좌향 및 공간특성을 보면 상류주택의 시대적 사회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영남남씨 집성촌인 괴시마을 내의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민속자료 75호로 지정된 영양남씨 괴시파종택과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괴시동 태남댁, 괴시동 물소와 고택, 괴시동 해촌 고택, 영덕 천전댁, 영해 입천정, 영해 주곡댁, 물소와 서당, 영해 경주댁, 영해 구계댁, 괴시리 괴정, 영덕 괴시리 사곡댁, 영덕 괴시리 영감댁, 영덕 괴시리 영은고택, 영덕 스므나골 재사 등 총 15개소가 위치하고 있다
영양 남씨의 시조
영양남씨의 시조 영의공(英毅公)은 중국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 여남(汝南) 사람으로 본래 성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충(忠) 이었으며 벼슬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 14년 당나라 헌종의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일본에 안렴사(按濂使)로 갔다가 소임을 마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동ㆍ남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훼손된 배에 의지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표류하다가 신라 유린지(有隣地)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항 명당산(明堂山) 죽도(竹島)에 표착하게 됐다.
그 당시 당(唐)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이고 표착지 축산항은 바다와 경치가 좋고 인심이 유덕하여 신라 경덕왕에게 신라에 살게 해주기를 청하여 경덕왕이 그 일을 당나라 천자(天子, 헌종)에게 알리니 헌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기를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을 신하에 대한 예로서 불러 올수가 없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신라에서 살게 하라”고 허락 하였다.
그 후 신라 경덕왕이 공(公)을 불러 이르되 군(君)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니 사성(賜姓)함이 마땅하리라 성(姓)은 남쪽에서 왔고 본고향이 여남이라 남씨(南氏)로 하고, 거동을 살피고 언행을 들으니 민첩하고 화용(和容)함이 가히 법(法)다운 지라 이름은 민(敏)으로 개명(改名)게 한 후 고은현(古隱縣)을 식읍(食邑)으로 하고 영의공(英毅公)이란 시호를 내리니 이때 나이 40세이었다.
영양남씨의 연원과 분파
영양남씨는 시조 영의공으로 부터 연원(淵源)이 되었으며 시조로부터 약 550년간 세계(世系)를 알지 못하다가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장남 홍보(洪輔)는 영양군(英陽君), 차남 군보(君輔)는 의령군(宜寧君), 삼남 광보(匡譜)는 고성군(固城君)으로 봉해져 3형제가 분관하여 세보가 형성되었으며,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3본이다.
3본관의 후손들은 전국에 흩어져 세거지 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정승 6명과 대제학 6명, 판서 24명, 문과 급제자 140여명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조선조 20대 명문 문벌(門閥)이었다.
영양남씨의 인물
영양남씨 중시조(中始祖, 1世) 대광공(大匡公) 남홍보(南洪輔)는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고 어지러울시 정치적 및 군사적으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상의회의 감사라는 벼슬에 올라 영양군으로 습봉됐다.
영해(寧海) 입향 시조로 최초로 헌거사(軒居士) 하신 분은 영양남씨 8대손 송정공(松亭公) 남수(南須)로 태종17년(1417년) 문선에 올라 세종 때 직장(直長, 종7품), 승훈(承訓,정6품), 판관(判官, 종5품), 사헌부 감찰어사, 용담현령사 최고참 수령으로 재직했고, 후손들은 문과 급제 11명, 무과 28명, 생진과 28명을 배출했으며 지난 1993년에 간행된 영양남씨 계유보에 의하면 송정공파는 영양남씨 중 80%를 차지하고 있다.
영양남씨 대광공 14대이며 송정공 6대손인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 선생은 조산대부(朝散大夫) 판관공 남의록(南義祿)의 장남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영해부 의병장이 되어 7년간 경주성 및 영천성, 복성 등 다섯 곳의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진(陳)에서 승전책(勝戰策)을 작성했으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영양남씨 중 유일하게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다.
영덕=강석구 기자 ksg@idaegu.com
풍랑에 밀려온 남씨 시조
신라 경덕왕 때 축산면 축산항 해안에 풍랑으로 인하여 표류하던 두 사람이 발견되었다. 두 사람은 심한 파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의식이 없었다. 이들을 발견한 어부는 그들을 극진히 간호하고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그래서 그들은 며칠 후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두 사람은 살아난 기쁨에 눈물을 흘리며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사람들이 표류되었다가 깨어난 정황을 설명해주자, 두 사람은 더욱 감격하여 살려준 은혜에 감사하였다. 두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들어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여 표류하게 된 까닭을 물어보자 그 중 한 삶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당나라 여남 사람으로,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에 있다가 이번에 임금의 명으로 일본에 당안렴사(唐按廉使)로 갔다 돌아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탔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저 사람은 나의 아들입니다. 아들은 내가 먼 일본국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따라왔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배가 부서져서 침몰할 때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정신을 차려 살펴보았더니 아들이 판자 한 조각에 의지하여 표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급히 물에 뛰어들어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나 판자 조각 하나로는 두 사람이 살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는 죽어도 좋으니 너만은 살아야 한다고 하자, 아들은 아버지가 살고 저는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부자가 서로 죽을 것을 결심하다 정신을 잃고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오다 여러분이 우리 부자를 구해 주신 덕에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하늘같이 높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부들은 이 사실을 고을 원님에게 알리니, 원님은 즉시 와서 부자를 위로하고 지내온 일들을 자세히 물었다. 두 사람 중 아버지의 이름은 김충(金忠)이며 아들은 김석중(金錫中)이었다. 원님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김충 부자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다.
김충 부자는 기골이 장대하고 학식이 뛰어났으며, 모든 행동이 남달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김충 부자는 신라의 임금에게 청하여 신라에 계속 살게 해주기를 간청하였다.
왕은 김충 부자를 극진히 대접하는 동시에, 당나라의 현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현종은 “김충 부자는 평소 짐이 아끼고 사랑하던 신하이다. 신라인들의 구원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본인들이 그곳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어찌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허락하였다.
신라 경덕왕은 김충 부자에게 남쪽에서 왔다하여 남씨(南氏)의 성을 내리고 시호를 영의공(英毅公)으로 봉(封)하였으며, 영양을 식읍으로 주어 살게 하였다. 이 사람이 영양남씨의 시조로, 후에 이름을 민(敏)이라 고쳤다.
남민은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슬하에 삼 형제를 두었다. 맏아들 남홍보(南洪甫)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양남씨를 계승하였으며 둘째 아들 남군보(南君甫)는 의령남씨의 시조이며, 셋째 아들 남광보(南匡甫)는 고성남씨의 시조이다. 같이 온 김석중(錫中)은 그대로 본국의 성을 따서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시조가 된다.
영해에서 동남쪽 15리에 있는 축산항 축산도는 남민이 표류하여 닿은 곳이라 하여 이곳을 이부동(吏部洞), 김이부동(金吏部洞), 혹은 통사동(通使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남민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남민은 망제단(望祭壇)을 만들어놓고 명절이 다가오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다. 또한 망향대(望鄕臺)라는 대를 만들고 올라가 머나먼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그 후 정조 22년(1793)에 영해와 영양에 살고 있던 많은 자손이 공의 유덕을 길이 남기고자 유허비를 세웠다. 축산항 북쪽 산마루 양지바른 곳에는 자손들의 정성어린 비석이 지난 일들을 말해 주듯 동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참고]
괴시유사지(槐市遺事誌)
단구(丹丘)의 동쪽 몇 리쯤에 이른바 괴시촌(槐市村)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옛 이름은 바로 호지(濠池)이다. 옛날에 함영김씨(咸寧金氏)들이 대대로 살던 곳인데 목은(牧隱) 선생께서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세상에 전하기를 ‘가정공(稼亭公)이 함영으로 장가를 들어서 그의 아들인 목은 선생은 함영의 옛집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여지도(輿地圖)를 가지고 보면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선생이 모두 단구의 인물편 가운데 있고, 또 점필재(佔畢齋) 선생의 시에 ‘선생이 한번 나오니 덕 있는 분이 되고 이로부터 단양(丹陽)의 초목이 시들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고, 또 선생께서 남긴 문집을 보면 ‘어대(魚臺)와 사정(沙亭) 같은 건물이 모두 단구의 여러 빼어난 경치에서 베껴 나왔다.’고 하니 선생께서 괴시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는 것이 역력하여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전설인 것만은 아니다.
호지(濠池)를 고쳐서 괴시라고 한 것은 선생께서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학사방(學士坊)의 괴시라는 두 글자를 취하여 돌아오셔서 그것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수구풍연(水丘風煙)이 중국의 괴시라는 동네와 합치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시에서부터 물을 건너가면 마을이 하나 있는데 이곳을 하천(霞川)이라고 하며 또 송천(松川)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또한 그 당시에 같이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지금 여러 문적에 적어 놓은 것을 봐도 과연 괴시촌에는 학사방의 그 유풍토(儒風土)가 옮겨와서 우뚝하게 한 시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선생께서 취하여 이름을 붙인 것에 또한 감동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승람(勝覽) 속에 또 ‘10리 누대(樓臺)는 모두가 그림 속의 집이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괴시촌을 전체적으로 성대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 문물이 잘 갖추어져 우리나라 초기에 아주 유명한 마을이 된 것이다. 비록 중국의 학사방이라는 동네와 우열을 다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몰라도 선생께서 이름을 붙인 것은 어찌 우연이겠는가?
괴시촌의 북쪽은 어대(魚臺)와 붙어 있고 남쪽은 경악(鯨嶽)을 마주하고 있으며, 큰 들판을 당기는 듯한 모습이고 떨어지는 노을과 비구름이 아침저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해동(海東)에서 제일 빼어나고 기이한 곳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기거하시던 곳 옆에 작은 연못을 하나 파서 이름을 ‘침향(沈香)’이라고 하고, 못 위에 작은 집을 하나 짓고서 ‘침향정(沈香亭)’이라고 했다. 침향정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정사(精舍)를 하나 짓고는 이름 하여 ‘무가정(務稼亭)’이라고 했다.
무가정에서 조금 북쪽에 흙으로 향부자풀을 덮고서 이름하여 ‘소요대(逍遙臺)’라고 했다. 그 유허지는 완연하여 어제인 듯한데 다만 침향이라는 연못은 변해서 화전(禾田)이 되었고 사방이 작은 언덕인데 이 정전(井田) 사이에 오목 팬 곳에 가끔 샘물이 솟아 물고기가 나온다. 간혹 봄날 물이 많아지면 학이 소리를 지르며 무리를 이루니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곳을 지적하여 침향 옛터라고 말하고 있다.
가정(稼亭)과 소요대(逍遙臺)는 수북한 향부자풀 속의 어지러운 풀밭에 묻혀서 남은 주춧돌만 너절하게 있다. 소요대 위에는 잔디가 무성하여 아낄 만한데 나무하고 소를 치는 아이들이 날마다 그 위에 올라와서 노래하고 노니 그 노랫소리를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서글퍼지고 만다.
아, 앞 시대의 경물(景物)은 징험(徵驗)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고 강물은 흘러가며 변하고 있고 구학(丘壑)도 바뀌고 있다. 그러나 괴시촌에 남아 있는 그 흔적은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왕왕 시인과 뛰어난 선비들이 그 명성을 듣고서 그 물과 그 언덕을 지점하여 모두가 선생께서 감상하며 즐기던 곳이라고 알고 있고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켜 시를 이곳에서 짓고 있다.
선생의 자손 가운데 동남쪽으로 지취관(地嘴官)이 된 사람은 앞뒤로 계속 이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유허지에서 말에 내려 온종일 배회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소요대에 올라서 그 당시의 옛 흔적을 드러내어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해마다 잘 지키고 더 장식하게 하니 그 뜻이 자못 비통하도다.
아, 나는 훗날 사람으로 괴시촌의 옛일의 경우에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잘 기록하겠는가마는 가만 생각하니 일찍이 나의 부친에게서 들은 이후로 벌써 나의 머리는 흰머리가 듬성듬성하게 되었다. 장차 수백 년은 앞에 있고 수천 년은 뒤에 있으니 지금 이후부터는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 더욱 오래될수록 사라지게 될 터이니 앞으로 옛 성현이 평소 기거하시던 곳과 또 그 전해오는 이야기로 하여금 증거를 삼을만한 것이 없으니 후배가 옛 선현을 추모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 어떠하겠는가?
옛말에 ‘졸필이 단청(丹靑)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마침내 문적 가운데 기록된 것과 부노(父老)들의 전설을 취하여 훗날 고증할 수 있도록 할 뿐이다.
(출전 : <괴장세고> )
영양남씨 시조
남민 유허비(南敏 遺墟碑)
南敏 遺墟碑 原文
維南有三籍曰英陽曰宜寧曰固城皆以英毅公爲始祖猶魯衛之分封而同出於周其後世亦新羅高麗今千餘年於此矣英毅公名敏初名忠姓金氏汝南人仕唐爲按廉使天寶十四年使日本還過大風漂泊于新羅之有隣 公遂願居焉景德具奏聞天子天子許之王謂公以自南來賜姓南氏封英毅公以英陽縣爲食邑子孫仍居焉有諱翼襲封英陽君其後又分封宜寧固城遂有三貫之別德業文章之士蔚然踵武何其壯也按國誌有隣初屬辰韓今爲嶺南之寧海府雰十里有丑山島者世傳公下船於此有吏部洞通仕者世傳公築室於此又有所謂望祭壇者公離父母邱墓而去國萬里時節望祭以寓霜露之感卽此地也有所謂望鄕臺者公雖來仕屬國意未嘗一日而忘唐故登臨覽中國山川慨然有遊子故鄕之思者亦此地也公之官閥事蹟史無載錄此皆出於後世傳疑設然南氏之所自起實本於此公之平生忠孝大節有亦可見其一二焉可不敬歟昔孔子聖人也嘗曰吾欲居東夷天寶之亂極矣玄宗在位旣久荒于政楊國忠與貴妃用事士大夫不樂仕官而及祿山反帝奔蜀西江南海之間連年用兵諸國貢獻之路絶矣公之居東不返抑或有慕於聖人之意也耶古者天子建德因生而賜姓謂若舜由訥故陳襲姓如禹之錫土姓是也諸侯不得賜姓而命族春秋隱公八年無該卒羽父請諡與族衆中曰官有世功則有官族邑亦如之請取其舊官舊邑之希以爲族也然則公之受姓於王者此乃因舊邑 命族之意也而天子之所以許之者又與昨土而賜姓者無以異也王不敢自專而爲有禮請命於天子而尤有光此又後人之所當知者也乃者宗人之居寧海者相與鳩財謀竪公遺墟之碑僉樞景宅幼學景烈甫使一運千里走書屬公轍以辭僉宗追遠之誠可謂勤且厚矣遂感其事而樂爲之述如右盖自唐之亡五代作亂五十年而宋興又三百年而爲元又八十年明興又二百餘年而爲淸中州之士君子髮而左者數矣獨南氏居於東方者誦習詩書禮樂之說而不改衣冠此 英毅之遺澤也於乎豈非天也哉 銘曰 於赫南氏肇基 于唐有德有勳亦有文章歷羅 麗逮于本朝冠冕圭璋令聞孔昭執其始祖曰英毅公惟此英毅自南來東時維天寶帝在于蜀萬里浮海君命不辱王曰天下莫非王土羅服唐禮比周之魯稽首請命願爲陪臣王曰矣南方之人予敢自專具奏天子錫姓加伯因邑命氏乃安玆土子孫保之旣昌而熾英固宜自唐後元淸相傳赤縣神州今爲腥西江左今爲髮獨我諸南衣冠之閥以文以武爲公爲卿千有餘年安享太平子孫之慶先祖之賜寧海之東島山長翠想公初至如聞船謠山有時磨水有時消後千百世易失其處我庸作銘永垂令譽
後孫大提學公轍撰 判書曺允亨書
남씨는 본관이 셋이니 영양, 의령, 고성이며 모두 영의공(英毅公)을 시조로 하니 노(魯)나라와 위(衛)나라가 분봉(分封)하여도 같은 뿌리인 주(周)나라에서 나온 것과 같다. 그 후세에 신라와 고려를 거쳐 이제 천여 년이 넘는다.
영의공의 휘(諱)는 민(敏)이요, 초명은 충(忠)이며, 성은 김씨이니 여남(汝南) 사람이다. 당(唐)나라에 벼슬하여 안렴사(按廉使)로 천보(天寶) 14년에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태풍을 만나 신라의 유린(有隣) 고을에 포박되었다. 공이 그곳에 살기를 원하자 경덕왕(景德王)이 천자(天子)에게 아뢰니 천자가 허락하거늘 신라왕이 공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로 사성하여 영의공으로 봉하고 영양현으로 식읍(食邑)을 삼게 하니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휘 익(翼)이라는 분이 영양에 습봉(襲封)되고 그 후에 또다시 의령, 고성으로 분봉 되어 드디어 삼관(三貫)이 되었으며, 덕업(德業)과 문장의 선비들이 울연히 뒤를 이으니 그 번성함이 비할 데가 없다. 도지(圖誌)를 살펴보면 유린 땅은 처음 진한(辰韓)에 속했다가 지금은 영남의 영해부이다.
부의 동쪽 십 리에 축산도가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이 이곳에서 하선(下船)하였다 하고, 이부동(吏部洞) 통사동(通使洞)은 세상에 전하길 공이 여기에 집을 지었다 하고, 또한 망제단(望祭壇)은 공이 고향을 떠나 부모의 묘소로부터 만리타국에서 시절(時節)로 망제를 올려 쓸쓸함을 달래던 곳이 이곳이다. 망향대(望鄕臺)는 공이 비록 속국에서 종사하나 하루도 고국인 당(唐)나라를 잊지 못하는 까닭에 산에 올라 멀리 중국의 산천을 바라보고 개연히 멀리 떠나있는 사람이 고향 생각에 잠기던 곳이 이곳이다.
공이 벼슬한 사적은 역사에 기록이 없고 이 모두가 후세의 전설에서 나온 말이나 남씨가 생겨난 것은 바로 이곳이니 공의 평생 충효대절(忠孝大節)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하나 둘이겠는가? 어찌 공경하지 않을 건가?
공자는 성인이로되 일찍이 동이(東夷 : 朝鮮 땅을 말함)에서 살고 싶다 하였으니 천보 연간의 난이 극에 달하였고, 현종(玄宗)이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어 정사는 거칠고 양국충(楊國忠)이 귀비(貴妃)와 더불어 정사를 그르치니 사대부가 벼슬길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안록산(安祿山)이 모반하여 황제는 촉(蜀)으로 달아나니 서남 강해지간(江海之間)이 연이어 병란이 일어나서 여러 제후의 나라들이 공헌(貢獻)하는 길마저 두절되었으니 공이 신라에 거류하여 돌아가지 않음이 성인의 뜻을 사모하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겠는가? 옛날 천자가 건덕(建德 : 王位에 오름을 말함)함에 출생한 곳을 따라 사성하니 순(舜)임금이 규예(潙汭)를 연유한 까닭에 규씨를 진습(陳襲)한 것과 우(禹)임금이 토성(土姓)을 준 것과 같은 것이다.
제후(諸侯)는 사성하고 일족(一族)을 명할 수 없으나 춘추(春秋)시대인 은공(隱公) 8년에 무해(無駭)가 죽자 우부(羽父)가 시호(諡號)와 사성(賜姓)을 청하거늘 중중(衆仲)이 말하기를 벼슬함에 세(世)로 공이 있으면 관족(官族)이 있고 세읍(世邑)에도 또한 이처럼 하니 청컨대 구관(舊官) 구읍(舊邑)으로 인하여 사성을 받은 뜻이며 천자(天子)가 허락한 것이니, 천자가 식읍을 주고 사성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왕이 감히 스스로 전결하지 못하는 것은 예(禮)가 있어서 이고 천자에게 청하여 명(命)을 받음은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니, 이는 후인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다.
이에 영해에 사는 종인들이 서로 의논하여 돈을 모으고 공의 유허비를 세울 것을 계획하여 첨추(僉樞) 경택(景宅)과 유학(幼學) 경렬씨(景烈)가 일운(一運)에게 서찰을 주어 천 리 길을 달려와서 공철(公轍)에게 글을 부탁하니 첨종들의 추원(追遠)하는 정성이 두텁도다.
드디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쓰노라. 대개 당나라가 망한 후 오대(五代)가 난을 일으켜 50년 후에 송(宋)나라가 일어나고 또 300년이 지나서 원(元)나라가 되고 또 80년이 지나서 명(明)나라가 일어서고 또 200년 후에 청(淸)나라가 되었다. 중국 땅의 사대부(士大夫)와 군자(君子)들이 머리를 깎고 옷깃을 돌려 입은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남씨는 동방(東方)에 살면서 시서(詩書)를 외우고 예악을 논하면서 의관(衣冠)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 모두 영의공이 남기신 유택이로다. 아! 이 어찌 하늘의 도움 아니겠는가? 명(銘)하여 말하노라.
빛나도다! 남씨여 당(唐)에서 터전이 비롯되었네.
덕업(德業)과 공훈(功勳)도 있고 또한 문장도 있네.
신라를 거쳐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 관면(冠冕)과
규장(圭章)의 영광된 소문이 밝기도 하여라.
어느 분이 시조인고 영의공이 시조로다.
영의공은 남쪽에서 동국으로 오시었네.
때는 천복년간이요 황제께서 촉(蜀)에 계셨네.
바닷길 만 리에서도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네.
공께서 말씀하길 천하는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였네.
신라의 옷을 입고 당나라의 예를 행함은 주(周)나라의 옷을 입고
노(魯)나라의 예를 행함과 같도다.
머리를 숙이고 명(命)을 청하여 신하 되기를 원하였네.
왕이 말하기를 먼 중국 사람을 내 어찌 마음대로 할쏘냐?
천자에 주청하여 벼슬도 내리고 식읍도 주었으며 사성도 하였네.
이 땅에 편히 살며 자손을 보존했네.
그 자손 창성하고 빛이 나니 영양과 의령, 고성이로다.
당나라 뒤로 원나라 청나라로 변하였고 중국땅은(赤縣神州) 비린내 나는 외국 사람의 천지로 변하였고 농서강(西江) 왼쪽은 이제 모두 오랑캐가 되었으나 홀로 우리 남씨만은 의관(衣冠)의 문벌(門閥)이라 문무(文武) 양반(兩班)에서 공(公)도 되고 경(卿)이로세
천 년을 넘기면서 태평(太平)을 누렸으니 자손의 경사는 선조께서 내린 것이라
영해의 동쪽에는 도산(島山)이 길이 푸르도다.
공이 처음 오신 것을 생각하니 뱃노래가 들리는 것 같구나.
산도 때로는 마멸되고 물도 때로는 소진하거늘 후세 수천 년의 그곳을 잃을까 봐 내 비록 용렬하나 명(銘)을 지어 길이 영예를 전하리라.
(출전 : <영덕군지> 남공철)
남붕익 묘갈명(南鵬翼 墓碣銘)
공의 이름은 남붕익(南鵬翼)이고 자는 자거(子擧)이다. 영양남씨는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이 시조이다. 8세조는 이름이 남수(南須)이며 용담(龍潭)으로 처음 영해에 땅을 골라 살았다. 고조는 이름이 천석(天錫)이고 증조는 이름이 정방(靖邦)이며 조부는 이름이 발(橃)인데 무과급제를 하였다. 아버지는 이름이 두원(斗遠)인데 참봉을 지냈고 어머니는 낙안오씨(樂安吳氏)인데 처사(處事) 오경직(吳敬直)의 딸이다. 두 번째 어머니는 평해황씨인데 응청(應淸)의 증손녀이다.
공은 숭정(崇禎) 신사년(164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주 두각을 나타내고 9세에 대은(臺隱) 권경(權璟)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책을 읽는 소리가 밝고 화창하였으며 문장의 의미는 훤하게 꿰뚫었다.
약관의 나이에 시를 쓰는 분야에서 뛰어나 과거 시험장에서 명성을 날렸지만 경서를 공부하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종 임자년(1672)에 과거에 급제하고 숙종 기미년(1679)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5월에 서학교수(西學敎授)가 되었고 6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경신년(1680)에 영산현감(靈山縣監)이 되었는데 발령을 받아 가서는 청렴하고 검소한 것에 힘을 기울이고 숙두(宿蠹])의 폐단을 일신하여 백성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공께서 계비(繼妣)인 황부인을 봉양하고 있었는데 풍토(風土)가 마땅하지 않아서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에 못하다고 생각하여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먼 길을 돌아와서 경서(經書) 몇 권만 짊어지고 왔다.
읍내에 집이 없고 들판에는 밭도 없이 다만 옛날 마을인 괴시리(槐市里)에는 대나무만 무성하니 경신년 이후로 세상일에 대하여는 그만두고 두문불출하면서 서적을 가지고 스스로 즐기면서 거친 밥과 반찬 그리고 나물국으로 지내며 사람들은 그 고통스러운 삶을 감당할 수 없는데도 잘 견디었다. 어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면 응하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또한 다시 불러주지 않았다.
정묘년(1687년)에 노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7세였다. 영해부의 서쪽 탄동(炭洞) 좌계(坐癸)의 언덕에 묘를 썼다.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장령(掌令)을 지낸 돈복(敦復)의 동생인 박지복(朴知復)의 딸이다. 공보다 27년이나 뒤에 돌아가셨는데 영해부의 병곡(柄谷)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2명을 두었는데 맏이는 여흠(汝欽)이고 차남은 명흠(命欽)인데 진사를 지냈고 작은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여흠의 아들은 기형(紀衡)과 준형(峻衡)이 있는데 두 분 모두 생원을 지냈으며 준형은 작은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딸은 황세태(黃世泰)와 김상덕(金尙德)에게 시집을 갔다. 기형은 아들이 육만(育萬), 택만(澤萬), 득만(得萬)이 있고 딸은 권용해(權龍海), 이제신(李濟臣), 조준도(趙浚道)에게 시집을 갔다. 준형은 바로 괴정공(槐亭公)인데 아들은 식만(式萬), 극만(極萬)이 있으며 딸은 진사를 지낸 김상동(金相東), 조정복(趙鼎復), 생원을 지낸 안명윤(安明允) 등에게 시집을 갔다.
명(銘)에 말하기를
낭잠(郎潛)을 지내다가
만년에 남쪽으로 돌아왔다네
문득 1년 만에
초복(初服)으로 돌아왔다네
거친 밥과 나물국으로 살면서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네
검소하고 절약한 생활을 하면서
글공부에만 즐거워하였다네
자손들은 먹고살기를
이곳 괴시리로구나
목은선생과 가정선생의 유허지에서
치여(菑畬)하고 산다네
(<만곡선생집> 조술도)
南鵬翼 墓碣銘 原文
公諱鵬翼,字子擧,英陽人,胄於英毅公諱敏,八世祖諱須,始以龍潭,令卜宅于寧,高祖諱天錫,曾祖諱靖邦,祖諱橃,武科,考諱斗遠,參奉,妣樂安吳氏,處土敬直之女,繼妣平海黃氏,大海應淸之曾孫女也, 公生崇禎辛巳,幼頭角秀,九歲學于臺隱權公,璟音讀朗暢,文義已洞然矣,弱冠詞藻夙進,有場屋聲, 兼肄經業,崇陵壬子,登第,明陵己未,除成均館典籍, 五月,除西學敎授,六月,除禮曹佐郞,庚申,出爲靈山縣監,約已莅官,務尙淸儉,宿蠧弊瘼,一皆新之, 民以爲便,時公,奉繼妣黃夫人之任,風土不幷以北, 公以爲榮養不如便養,遂浩然投紱,而歸槖裝如洗, 惟經書數擔而已,無宅於邑,無田於野,惟舊里槐市, 竹樹蕭然,自庚申以後,目見時事,已不可爲杜門屛居,以書籍自娛,糲飯菜羹,人不堪其苦,澹然自如人, 或勸之仕,則不應朝廷,亦不復召用也,丁卯,寢疾考,終于第,享年四十七,葬于府西炭洞坐癸原 配務安朴氏,掌令敦復之弟知復女也,後公二十七年而沒, 葬于府北柄谷子坐之原,生二男,汝欽,命欽進士,出后季父,汝欽男,紀衡生員,峻衡生員,出后季父,女黃世泰,金尙德,紀衡男,育萬,澤萬,得萬,女權龍海,李濟臣,趙浚道,峻衡卽槐亭公也,男式萬,極萬,女金相東進士,趙鼎復,安明允生員,銘曰,
迴翔郞潛, 晩出南麾, 淹一朞兮, 歸歟初服,
糲飯菜羹, 時不丁兮, 斂而就約, 自娛書籍,
子孫食兮, 槐市之村, 稼牧之墟, 種菑畬兮,
(<晩谷先生集> 趙述道)
남기형 행장(南紀衡 行狀)
공의 이름은 기형(紀衡)이고 자는 진백(鎭伯)이며 성은 영양남씨인데 그의 원래 계보는 당나라 때 안렴사를 지냈던 영의공 남민이 영양을 식읍으로 하여 유래되었다. 중간에 대광공(大匡公) 이름 남홍보도 영양으로 봉해졌다. 조선 초기에 남수(南須)는 문선으로써 감찰로 임용되어 비로소 영해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그 후 5대조에 남정방(南靖邦)은 유일재 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참봉으로 천거되어 임명되었고 또 2개가 흘러 남두원(南斗遠)은 참봉이다. 이 분이 남붕익을 낳았는데 문과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는데 공에게는 조부가 된다. 부친의 이름은 여흠(汝欽)인데 통덕랑을 지냈는데 문장의 행실로 칭송받았고 어머니는 공인 함양박씨이니 사인 박시순의 딸이다. 고요한 성격에 맑은 마을오로 현숙(賢淑)하여 군자의 배필이 되어 부인의 도로서 모성으로 학사(學士)에서 칭송을 받았다.
공은 숙종 26년 경진년(1700년) 1월 9일에 괴시리 집에서 태어났는데 천성이 순수하고 조심성이 많아 어릴 때에도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5세에 선공(先公)의 상을 당하여 슬퍼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선부인을 모시고 시키는 대로 하여 조금도 거슬리는 일이 없었으니 효성은 그의 천성이었다.
취학(就學)을 해서는 재주와 지혜가 발달하여 천마(天馬)처럼 큰 걸음을 하였다. 일지기 서당에 모여 공부를 하는네 그에 따를 사람이 없었으니 그때 이웃에 사는 권씨 어른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고을에서는 첫째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치헌 김덕오 공에게 수학하여 수기(修己)하는 도리를 듣고 알아서 두문불출하고 정좌하여 경서와 역사서로 스스로 즐기는데 따라서 세간의 영화는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원래 가세는 청빈하여 식사가 제대로 되지도 않았을 때도 있었으나 하나뿐인 아우에게 우애가 매우 독실하여 무엇이 있든 없든 같이 하고 부모에게 순종함을 임무로 하고 그 외의 일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님 상을 당하여서도 슬퍼하는 마음이 과도하여 매일 성묘를 하는데 비록 풍우가 내몰아쳐도 빠뜨리지 않았다. 삼년 상을 마치고는 80운의 시를 지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는 뜻을 드러내었으니 그의 시 하나를 예로 들어 본다.
인간은 어머니에게 특별하거니
태양도 그 빛이 없는 듯 하다
슬프다 어머님의 무거운 은공을
백 천년에 하나도 갚지 못했다
살아 계실 때에는 봉양을 다 못했음은
황생(黃生) 부채에 부끄러웠고
돌아가신 후에 애통함이 다 못하여서
민자(閔子)의 현금(絃琴)만 안고 있노라
그의 뜻이 간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겹게 한 것이다. 언제나 어릴 때에 배우지 못했음을 매우 원통하게 여겨서 매년 제사 날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여 그 날은 종일토록 다시 뵙는 듯이 사모하였다. 그래서 숙부를 섬기는 데는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기를 마치 유중영(柳仲郢)이 그의 숙부 공권을 섬기듯이 하였던 것이다.
과거공부를 하여 시험장에 가서도 명성이 있었으나 실패한 후로는 일체 단념하고 탄식해 말하기를 “부모님이 안 계신데 누구를 위해서 벼슬을 할까?”라 하였다. 영조 경신년 (1740년)에 증광시를 보일 때 친지가 권장하며 말하기를 “선공(先公)이 원한을 품었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라 하였으니 그것은 선공이 복판 위에 굳게 않아서 공부만 하여 그 무릎이 닿인 곳이 다 썩도록 근면하고 애를 써 공부하다가 이른 나이에 불행하게 돌아가셨으니 그의 아들이 되어 무궁한 통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은 한참동안 비통해 하면서도 손으로 그 썩은 목판을 만지면서 그 아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늦은 나이네 과거 시험장에 나가는 것이 비록 나의 소원은 아니지만 선인의 뜻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고서는 마지못하여 일어나 응시하여 뜻을 이루고 돌아온 뒤에 합격됐다는 좋은 소식을 듣던 날에는 사치품은 모두 버리고 도리어 슬퍼하여 *풍수부정의 감이 그의 얼굴색에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추원(追遠)하는 정성이 독실하여 왕고 좌랑공께서 남기신 정자가 무너져 없어지게 되어 중수하지 못했던 것을 괴시리 마을로 이건하려 하였음은 재력이 부족하여 성취하지 못했으나 시조 영의공의 제단에는 오래도록 표석도 없어서 여러 종친을 설득하고 달래어 비석을 세워 의물(儀物)을 비치하였다. 그리고 사문(師門)의 후사(後事)에도 힘을 다하여 계획해서 유고를 수집하여 편성하고 또 제사 의식을 의논하여 정하고 부록을 붙여서 한 가지를 섬기는 그의 정성스런 뜻을 다 하였다.
그런데 삼릉 이귀한 공과 심안 남진만 공과는 불변한 교분이 있어서 혹 만나서 소요하기도 하고 혹 편지로 토론하기도 하여 서로 더불어 후진을 교훈하고 본실을 돈독히 하고 문학을 숭상하여 자못 대성할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 32년 병자년(1756년) 5월 25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7세로서 그해 가을에 영해부의 서쪽 인아리(仁雅里)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한양조씨이니 중의위 조최(趙最)의 딸로서 유순하고 아름답고 은혜로워 능히 부인의 도를 다 했으나 공보다는 15년 전에 돌아가셔서 공의 묘 오른쪽에 장사를 지냈다.
3남 3녀가 있으니 아들 유만(有萬)은 첨중주부사이고 택만(澤萬)은 증좌승지이며 또 득만(得萬)이 있다. 세 딸은 권용해, 이제신, 조준도에게 각각 시집을 갔고 유만의 맏아들은 경석(景奭 )이고 딸은 유신휴, 이동위, 이우상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택만의 5남 가운데 맏아들 경석은 양자로 갔고 경천, 경위, 경춘, 경괄이 있는데 경괄은 증호조참판이다. 득만의 아들은 경은, 경화이고 딸은 이택정, 황치중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경석의 아들은 범수이고 경천의 아들에 해수, 곤수, 이수가 있고 딸은 안효성, 이상현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경위의 아들에는 기수와 규수가 있는데 규수는 양자를 갔고 딸은 이기찬, 이재임, 신도흠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경춘의 맏아들은 규수이고 경괄의 아들은 호수, 영수, 흥수인데 흥수는 동지중추부사이고 딸은 이지상, 박치인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경은의 맏아들은 봉수이고 딸은 정상오에게 시집을 갔다. 경화의 아들 봉수는 양자로 갔고 갑수, 태수가 있다. 딸은 박기찬. 신치완에게 시집을 갔으며 이 외는 생략한다.
아, 공은 순후(醇厚)한 자질로서 어머니의 교훈을 받아 효도와 공경으로 그의 지행(知行)을 넓히고 부모 섬기는 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여 조금도 해이하지 않아도 그의 몸 가짐을 가지는 데에는 언제나 어긋남이 없어서 언제나 근본을 심어 그를 바탕으로 하여 강습하는데 소홀하지 않고 족친에게는 언제나 돈목하고 마을 사람에게는 반드시 공손하였다.
종적을 숨기고 덕행을 닦아 남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소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치헌옹이 일찍이 임종할 때 특히 논어 중에 ‘무릇 책임은 자신만 지고 상대에는 지우지 않는다.’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교훈으로 삼으니 공은 그것을 평생에 실행하였음이 대게 여기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만약 조금 더 수명을 얻었다면 드디어 만년에 더욱 많은 공부를 해서 아마 기치를 세워 우뚝하게 마을에 모범이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으로 그쳤도다.
하루는 공의 증손인 흥수씨가 그의 종증손 효순으로 하여금 유사 한 권을 가지고 수 백리를 직접 찾아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우리 증왕고의 당시의 사행을 덮어 두어서는 안 되는데 시세는 매우 변해도 아직 행장을 받지 못했으니 원하건대 그대는 이것을 써 주십시오.”라 하였다.
돌아보건대 나는 늙고 쇠잔하여 글도 잘 짓지 못하는데 어찌 이것을 지어서 자손들의 원하는 바에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사양해도 되지 않아서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선조인 매은공과 공의 선조인 침랑공은 사실 동문수학한 형제의 의가 있었으니 이 일에 감히 사양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삼가 유사에게 한두 가지를 모으게 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여 붓 잡는 군자들의 채택을 기다리는 바이다.
(주: 風樹不靜- 나무는 가만 있으려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려 해도 양친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을 말한다.)
(출전 : <척암집> 김도화)
*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