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근 金宇根 (1896 ~ 1968】 "1920년 광복군 제1영 3대장으로 국내진공작전 수행"
1896년 11월 1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운곡면(雲谷面) 용택리(龍澤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동욱(東郁), 호는 화산(華山), 이명은 김기봉(金基奉)을 썼다.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하다 1917년 서간도 류허현(柳河縣)의 싼위안푸(三源堡)로 가서 이탁(李沰)·김동삼(金東三) 등과 교유하며 남만주지역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부민단(扶民團)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8년 10월 고향 안주로 돌아왔다. 부민단은 1912년 퉁화현(通化縣)에서 이상룡(李相龍)·허혁(許爀)·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으며, 자치행정을 통해 한인사회를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 4월에는 한족회로 개편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안주에서 목사 김찬성(金讚星)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다시 만주 싼위안푸로 피신하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는 한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토벌대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8월에는 광복군 제1영(營) 3대장으로 국내로 들어와 벽동(碧潼)·창성(昌城)·삭주(朔州) 등지에서 다수의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일제 경찰을 처단하는 등 일제가 배치한 한·중 국경지방의 침략기관에 타격을 가하였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자 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의 비밀경감(警監)에 임명되었다. 1922년에는 통의부(統義府) 독립소대장으로서 11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류허현 내의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와 하이룽현(海龍縣) 산성진(山城鎭)의 보민회(保民會)를 숙청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제 경찰과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1923년 도강두(渡江頭)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1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924년에는 참의부(參議府)의 참의장(參議長) 백광운(白狂雲)이 통의부계 문학빈(文學彬)·백세우(白世雨)·백병준(白炳俊)에게 피살되자 참의부 독립소대 대장에 임명되었다. 4월 1일에는 통의부와 참의부 사이의 대립을 끝내고 남만지역의 독립군이 임시정부 하에서 통일을 기하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고 대동통일(大同統一)의 선봉이 될 것을 선언하는 선언문(宣言文)과 경고문(警告文)의 발표에 참여하였다. 이 문건은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金承學)의 도움으로 남만(南滿)에서 인쇄되어 베이징(北京) 등지에도 배포되었다. 문건의 발표 주체는 육군군사의회(陸軍軍事議會)이며 이때 이영선(李永善)·허운기(許雲起)·현기룡(玄基龍)과 함께 독립소대의 대표 자격으로 서명하였다. 1924년 7월에는 평북 강계군(江界郡) 사서면(史西面)에서 일본수비대에게 포위되어 교전 중 부상을 당하였다. 1925년에는 참의부 경무원(警務員)이 되었으며, 1926년 진촨현(金川縣)에 200여 호의 농장을 개설하고 소학교를 설립 한인 자제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후 1928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조직되자 지방 책임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하이룽현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김탁(金鐸)·김보안(金保安)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28년 12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신의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36년 출옥하였다.
1937년 4월에는 한중연합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의 참모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 해 9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고문과 악형을 받다가 만주 경찰로 넘겨진 후 석방되었다. 1945년 일제 경찰의 구속으로 하이룽현 감옥에 있다가 일제의 패망으로 풀려났다.
같은 해 9월 남만주지구 한국인해방연합회 보안부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던 중 1947년 귀국하였다. 1949년 국민훈련원을 수료하고 농촌건설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68년경 대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