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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外編 17篇 秋水篇 第2章-1(장자 외편 17편 추수편 제2장-1)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합니까? 내가 사양하고 받고 달려가고 그만둠을 나는 마침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도道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으니〉 무엇을 귀하다 하고 무엇을 천하다 하겠는가. 이것을 일러 반언反衍(구별이 없는 혼돈渾沌)이라 하니, 너의 뜻을 〈귀천을 구별해야겠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게 할지어다. 〈만약 구애되면〉 도道와 크게 어긋나고 말 것이다. 무엇을 적다 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것을 일러 사이謝施(경계境界 없는 도道의 모습)라 하니, 너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만 한정하지 말지어다. 〈만약 한정하면〉 도道와 일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엄연嚴然하게 나라에 군주가 있는 것처럼 사사로운 은덕 없이 공평하게 다스리며, 넉넉히 마치 토지신土地神이 제사에 강림하듯 사사로운 복을 베풀지 않고 공평하게 복을 내려 주며, 넓디넓게 마치 사방이 끝이 없는 것처럼 한정된 구역을 만들지 말지어다. 만물을 모두 포용하는데 그 누구를 사사로이 비호庇護하고 도와줄 것인가. 이것을 일러 어느 한쪽으로 구애되지 아니한 무한정無限定이라고 한다. 만물은 구별 없이 동일한 존재인데 어느 것을 짧다 하고 어느 것을 길다 할 것인가.
도道에는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그러나 사물事物에는 사멸도 있고 생성도 있는지라 사물事物은 성취成就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공허하게 비었다가는 가득 차기도 하여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지 못한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며 시간의 추이는 멈추게 할 수 없는지라 소멸消滅하였다가 생식生息하고(쇠衰하였다가 번영하고) 가득 찼다가 텅 비게 되어 마치게 되면 곧 시작이 있으니 이것이 〈작은 절의節義를 뛰어넘는〉 커다란 정의正義의 방도方道를 말하고 〈개개의 사물事物이 아닌〉 만물 전체의 이치를 논하는 것이다. 사물의 생성은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은지라 늘 움직여서 변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어느 때고 옮겨 가지 않음이 없으니 무엇은 하겠으며 무엇은 하지 않겠는가. 본디 스스로 변화하는 법이다.”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도道는 무엇 때문에 중시합니까?”
河伯曰 然則我何爲乎 何不爲乎 吾辭受趣舍 吾終奈何
(하백왈 연즉아하위호며 하불위호오 오사구취사를 오종내하오)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합니까? 내가 사양하고 받고 달려가고 그만둠을 나는 마침내 어떻게 해야 합니까?”
北海若曰 以道觀之 何貴何賤 是謂反衍 無拘而志 與道大蹇
何少何多 是謂謝施 無一而行 與道參差
(북해약왈 이도로 관지컨댄 하귀하천이리오 시위반연이니 무구이지어다 여도대건하리라
하소하다리오 시위사이니 무일이행이어다 여도삼차하리라)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도道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으니〉 무엇을 귀하다 하고 무엇을 천하다 하겠는가. 이것을 일러 반언反衍(구별이 없는 혼돈渾沌)이라 하니, 너의 뜻을 〈귀천을 구별해야겠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않게 할지어다. 〈만약 구애되면〉 도道와 크게 어긋나고 말 것이다.
무엇을 적다 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것을 일러 사시謝施(경계境界 없는 도道의 모습)라 하니, 너의 행동을 한 방향으로만 한정하지 말지어다. 〈만약 한정하면〉 도道와 일치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이도관지以道觀之 하귀하천何貴何賤 : 도道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다는 뜻.
☞ 시위반연是謂反衍 : 이것(귀천貴賤)을 일러 반연反衍이라 함. 반연反衍은 〈제물론齊物論〉편 제4장에 보이는 “변화에 자기 자신을 맡긴다[인지이만연因之以曼衍].”의 만연曼衍과 같은 뜻인데, 인因은 맡긴다는 뜻이고 만연은 변화 또는 무극無極의 뜻이다. 여기서는 ‘끝없는 변화’ ‘한정限定이나 구별이 없는 끝없는 혼돈渾沌’, 또는 “반反은 복귀復歸하는 것이고 연衍은 반대로 펴지고 넓혀지는 것으로 ≪노자老子≫의 서逝와 원遠에 해당한다. 즉 인생人生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반연反衍은 귀천貴賤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연스런 순환循環에 맡기는 것이다.”(赤塚忠) 등의 해석이 있다.
☞ 무구이지無拘而志 : 귀천을 구별해야겠다는 생각에 구속되지 말라는 뜻. 이而는 이인칭 대명사.
☞ 여도대건與道大蹇 : 만약 귀천을 구별하는 생각에 구애되면 도道와 어긋나게 된다는 뜻.
☞ 하소하다何少何多 시위사이是謂謝施 : 사이謝施는 위의 반연反衍과 마찬가지로 경계境界 없는 도道의 모습을 뜻한다. 사謝는 교대한다는 뜻으로 변화를 의미하며 이施는 뻗어간다는 뜻으로 이移와 같다. 따라서 사이謝施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인위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대상이 있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뜻.
☞ 무일이행無一而行 여도삼차與道參差 : 이而는 이인칭. 이 문장文章의 작자作者는 세계의 제동성齊同性(천지 만물에 귀천貴賤과 소다少多가 없는 것)을 도道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池田知久)
嚴乎若國之有君 其無私德 繇繇乎若祭之有社 其無私福 泛泛乎
其若四方之無窮 其無所畛域 兼懷萬物 其孰承翼
是謂無方 萬物一齊 孰短孰長
(엄호약국지유군이라 기무사덕이며 유유호약제지유사라 기무사복이며 범범호
기약사방지무궁이라 기무소진역이어다 겸회만물이어니 기숙승익이리오
시위무방이라 만물일제어니 숙단숙장이리오)
엄연嚴然하게 나라에 군주가 있는 것처럼 사사로운 은덕 없이 공평하게 다스리며, 넉넉히 마치 토지신土地神이 제사에 강림하듯 사사로운 복을 베풀지 않고 공평하게 복을 내려 주며,
넓디넓게 마치 사방이 끝이 없는 것처럼 한정된 구역을 만들지 말지어다. 만물을 모두 포용하는데 그 누구를 사사로이 비호庇護하고 도와줄 것인가.
이것을 일러 어느 한쪽으로 구애되지 아니한 무한정無限定이라고 한다. 만물은 구별 없이 동일한 존재인데 어느 것을 짧다 하고 어느 것을 길다 할 것인가.
☞ 유유호繇繇乎 : 유연悠然히, 만족하게, 넉넉히의 뜻.
☞ 범범호泛泛乎 : 널리 존재하는 모양. 노자老子 제34장의 “대도는 넓게 흘러서 왼쪽으로 흐를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흐를 수도 있다[大道氾兮 其可左右].”고 한 표현과 관계가 있다.(福永光司)
☞ 겸회만물兼懷萬物 기숙승익其孰承翼 : 대의는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만물을〉 모두 포용함이요, 사사로운 편애가 없음이다. 그래서 ‘그 누가 사사로이 비호하고 도와줄 것인가’ 라고 말한 것이다. 승익承翼은 두 손 맞잡고 붙들어 주는 것이니, 이 두 글자는 사애私愛하는 뜻을 형용한 것이다.”(林希逸)
☞ 만물일제萬物一齊 :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의 한 표현이다. 〈제물론齊物論〉 제1장의 ‘도통위일道通爲一’에 유래由來한다(福永光司).
道無終始 物有死生 不恃其成 一虛一滿 不位乎其形
年不可擧 時不可止 消息盈虛 終則有始
是所以語大義之方 論萬物之理也
(도무종시어니 물유사생이라 불시기성하며 일허일만하야 불위호기형하며
연불가거며 시불가지라 소식잉허 종즉유시하니
시소이어대의지방이며 논만물지리야라)
도道에는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그러나 사물事物에는 사멸도 있고 생성도 있는지라 사물事物은 성취成就함이 있더라도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공허하게 비었다가는 가득 차기도 하여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지 못한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며 시간의 추이는 멈추게 할 수 없는지라 소멸消滅하였다가 생식生息하고(쇠衰하였다가 번영하고) 가득 찼다가 텅 비게 되어 마치게 되면 곧 시작이 있으니
이것이 〈작은 절의節義를 뛰어넘는〉 커다란 정의正義의 방도方道를 말하고 〈개개의 사물事物이 아닌〉 만물 전체의 이치를 논하는 것이다.
☞ 불시기성不恃其成 : 물物의 세계에서 사물事物의 일시一時적 성취成就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뜻.
☞ 일허일만一虛一滿 불위호기형不位乎其形 : 한 번 비었다가 한 번 찼다 하여 한 가지 모습으로 정착定着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뜻.
☞ 연불가거年不可擧 : 거擧는 歫(막을 거)의 借字. ‘거歫’는 거拒와 통용된다.
☞ 종즉유시終則有始 : 유有는 우又(또 우)로 읽는 것이 타당한 견해이다.
☞ 대의지방大義之方 논만물지리야論萬物之理也 : 대의지방大義之方은 만물지리萬物之理와 함께 결국은 도道를 가리킨다(池田知久). 林希逸이 “바로 大道이다[卽大道也].”고 풀이.
物之生也 若驟若馳 無動而不變 無時而不移
何爲乎 何不爲乎 夫固將自化
河伯曰 然則何貴於道邪
(물지생야 약취약치라 무동이불변하며 무시이불이하나니
하위호며 하불위호리오 부고장자화니라
하백왈 연즉하귀어도야아)
사물의 생성은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은지라 늘 움직여서 변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어느 때고 옮겨 가지 않음이 없으니 무엇은 하겠으며 무엇은 하지 않겠는가. 본디 스스로 변화하는 법이다.”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도道는 무엇 때문에 중시합니까?”
☞ 물지생야物之生也 약취약치若驟若馳 : 사물의 생성 변화에 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 또한 빠르다는 뜻이다.
☞ 무동이불변無動而不變 무시이불이無時而不移 : 불변의 사물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 하위호何爲乎 하불위호何不爲乎 부고장자화夫固將自化 : 노자老子 제37장에서 “도道의 불변不變의 모습은 인위적人爲的인 작위作爲가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 왕후王侯가 만일 이 무위無爲의 도道를 지켜 나간다면 만물萬物은 저절로 그 덕에 감화되어 나갈 것이다. 만일 감화되고서도 다시 유위有爲의 욕심을 일으킨다면, 나는 장차 이것을 무명無名의 박樸(무위無爲의 도道의 소박)으로서 이것을 진정시킬 것이다. 무위無爲의 도道의 소박함에는 또한 장차 유위有爲의 욕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니, 유위有爲의 욕심을 갖지 않아 마음이 안정되면 천하는 장차 저절로 바르게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한 부분, 그리고 제57장에서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무위無爲하면 민民은 저절로 감화되고, 내가 청정淸靜을 좋아하면 민民은 저절로 올바르게 되고, 내가 무위무사無爲無事하면 민民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무욕無欲하면 민民은 저절로 순박하게 된다.’고 하였다.”라고 한 부분과 유사한 사상적 표현이다. 이 부분은 내편內篇 ≪장자莊子≫에서 도道를 통해 만물萬物의 근원적 제동성齊同性을 강조하는 맥락을 답습한 표현으로 장자莊子가 만물萬物의 자생자화自生自化를 도道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池田知久).
☞ 연즉하귀어도야然則何貴於道邪 : 도道를 귀하게 여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뜻. 앞에서 북해약北海若이 말한 대로 만물은 본래 아무런 차별이 없다면 도道를 중시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귀어도貴於道는 도를 존숭한다는 뜻.
(동양고전종합DB에서 인용)
20180919
天在內人在外(천재내인재외)
천성天性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 인위人爲는 사람의 몸 밖에 있다.
莊子 外編 17篇 秋水篇 第2章-2(장자 외편 17편 추수편 제2장-2)
[제2장-2 해석]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도道는 무엇 때문에 중시합니까?”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치에 통달하고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반드시 권도權道에 밝고 권도에 밝은 사람은 외물外物로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불로 뜨겁게 할 수 없고 물에 빠뜨릴 수 없으며 추위와 더위가 해치지 못하며 짐승들이 해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그것들을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편안하고 무엇이 위태로운지를 잘 살피며 화와 복을 편안히 여기며 거취를 삼가는지라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천성天性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 인위人爲는 사람의 몸 밖에 있으며 참다운 덕은 천성을 따르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니 천天(자연)과 인人(인위)의 도道를 잘 인식하고 천성에 근본하고 참다운 덕德의 경지에 머물며 머뭇거리면서 구부리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면서 일진일퇴一進一退하게 되면 근원의 도道로 되돌아가고 궁극의 도道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백河伯이 물었다. “무엇을 천성天性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人爲라 합니까?”
[원문과 해설]
河伯曰 然則何貴於道邪
(하백왈 연즉하귀어도야아)
하백河伯이 말했다. “그렇다면 도道는 무엇 때문에 중시합니까?”
☞ 연즉하귀어도야然則何貴於道邪 : 도道를 귀하게 여길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는 뜻. 앞에서 북해약北海若이 말한 대로 만물은 본래 아무런 차별이 없다면 도道를 중시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귀어도貴於道는 도를 존숭한다는 뜻.
北海若曰 知道者 必達於理 達於理者 必明於權
明於權者 不以物 害己
(북해약왈 지도자는 필달어리하고 달어리자는 필명어권하고
명어권자는 불이물로 해기하나니라)
북해약北海若이 말했다.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치에 통달하고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반드시 권도權道에 밝고 권도에 밝은 사람은 외물外物로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
☞ 지도자知道者 필달어리必達於理 달어리자達於理者 필명어권必明於權 : 권權은 권도權道. 권도權道는 상도常道와 상대되는 말로 때에 따라 변통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한다. 상황에 따른 바른 대처對處라는 뜻의 시중지도時中之道와 같은 뜻. 권도의 뜻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사례는 맹자孟子 이루離婁 상上에서 “남녀 간에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은 평상시의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고 구원하는 것은 권도權道이다.”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 불이물해기不以物害己 : 하백河伯의 질문에 답하여 도道를 아는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효용을 서술한 문장으로 ‘불이물해기不以物害己’가 작자의 실천적인 최종목표.
至德者 火弗能熱 水弗能溺 寒暑弗能害 禽獸弗能賊
非謂其薄之也 言察乎安危 寧於禍福 謹於去就 莫之能害也
(지덕자는 화불능열하며 수불능익하며 한서불능해하며 금수불능적하나니
비위기박지야라 언찰호안위하며 영어화복하며 근어거취라 막지능해야니라)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은 불로 뜨겁게 할 수 없고 물에 빠뜨릴 수 없으며 추위와 더위가 해치지 못하며 짐승들이 해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그것들을 가벼이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편안하고 무엇이 위태로운지를 잘 살피며 화와 복을 편안히 여기며 거취를 삼가는지라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 지덕자至德者 화불능열火弗能熱 수불능익水弗能溺 한서불능해寒暑弗能害 금수불능적禽獸弗能賊 : 소요유逍遙遊편 제3장에서 “이 사람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지 아니하니, 큰 홍수가 나서 하늘에까지 닿을 지경이 되어도 물에 빠지지 아니하며 크게 가물어 금석金石이 녹아 흐르고 토산土山이 타버리더라도 불에 타지 아니한다.”라고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사는 신인神人들의 덕을 설명한 말들을 참조. 또한 대종사大宗師편 제1장에 보이는 “그 같은 사람은 높은 데 올라가도 두려워 떨지 아니하고,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며, 불 속에 들어가도 뜨겁지 아니하다.”고 한 옛 진인眞人에 대한 설명 문장 참조.
☞ 비위기박지야非謂其薄之也 : 수화水火나 한서寒暑, 금수禽獸 등을 등한히 여겨서 함부로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박薄은 가벼이 여김.
☞ 언찰호안위言察乎安危 영어화복寧於禍福 근어거취謹於去就 막지능해야莫之能害也 : 찰察은 자세히 살펴서 잘 안다는 뜻. 거去는 물러난다는 뜻이고 취就는 나아간다는 뜻. 영어화복寧於禍福은 화禍와 복福을 편안히 여긴다는 것인데, 영寧은 편안히 순응한다는 뜻.
故曰 天在內 人在外 德 在乎天
知天人之行 本乎天 位乎得 蹢躅而屈伸 反要而語極
(고로왈 천은 재내하고 인은 재외하며 덕은 재호천이라하나니
지천인지행하고 본호천하고 위호득하며 척촉이굴신이 반요이어극이니라)
그래서 천성天性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 인위人爲는 사람의 몸 밖에 있으며 참다운 덕은 천성을 따르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니
천天(자연)과 인人(인위)의 도道를 잘 인식하고 천성에 근본하고 참다운 덕德의 경지에 머물며 머뭇거리면서 구부리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면서 일진일퇴一進一退하게 되면 근원의 도道로 되돌아가고 궁극의 도道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천재내天在內 인재외人在外 : 몸 밖에 있다는 것은 밖에 의존依存한다는 뜻. “천연의 본성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고 인사를 따르는 것은 외부의 행적과 관계된 것인지라 모두 하지 않고 자연에 맡긴다. 그 때문에 어떤 사물도 해치지 못한다.”(成玄英)
☞ 덕재호천德在乎天 : 지극한 덕德은 자연自然과 천성天性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뜻. “지극한 덕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달려 있다. 만약 제멋대로 인위적인 지식에 의존하게 되면 천성이 흘러서 방탕하게 될 것이다.”(成玄英)
☞ 지천인지행知天人之行 : 天천과 인人은 천성天性과 인위人爲.
☞ 본호천本乎天 위호득位乎得 : 위位는 ‘거처居處’(成玄英)라고 한 것을 따라 머문다고 번역. 득得은 덕德의 가차자假借字로 보는 것이 정설定說이라 그것을 따름.
☞ 척촉이굴신蹢躅而屈伸 :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면서 진퇴進退가 정定해지지 않은 모습. 척촉蹢躅은 머뭇거리는 모양. 굴신屈伸은 구부리고 펼치는 동작을 뜻한다.
☞ 반요이어극反要而語極 :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뜻. 요要와 극極은 모두 도道를 가리킴. 근원의 도와 궁극의 도. 반反은 복復, 돌아간다는 뜻이고, 어語는 말한다, 말할 수 있게 된다는 뜻.
河伯曰 何謂天이며 何謂人고
(하백왈 하위천이며 하위인고)
하백河伯이 물었다. “무엇을 천성天性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人爲라 합니까?”
(동양고전종합DB에서 인용)
20180920
莊子 外編 17篇 秋水篇 第2章-3(장자 외편 17편 추수편 제2장-3)
[제2장-3 해석]
하백河伯이 물었다. “무엇을 천성天性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人爲라 합니까?”
북해약北海若이 대답했다. “소와 말에 네 개의 발이 있는 것을 일러 천성이라 하고 말의 머리에 낙인烙印을 찍고 소의 코뚜레를 뚫는 것을 인위人爲라 한다. 그 때문에 인위로 천성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인간의 의도로 천명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허명虛名을 얻기 위해 타고난 덕德을 잃어버리지 말아서 삼가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천진天眞의 본성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원문과 해설]
河伯曰 何謂天 何謂人
(하백왈 하위천이며 하위인고)
하백河伯이 물었다. “무엇을 천성天性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人爲라 합니까?”
北海若曰 牛馬四足是謂天 落馬首穿牛鼻是謂人
故曰 無以人滅天 無以故滅命 無以得殉名 謹守而勿失 是謂反其眞
(북해약왈 우마의 사족이 시위천이오 낙마수하며 천우비 시위인이니라
고로 왈 무이인으로 멸천하며 무이고로 멸명하며 무이득으로 순명하야 근수이물실이 시위반기진이니라)
북해약北海若이 대답했다. “소와 말에 네 개의 발이 있는 것을 일러 천성이라 하고 말의 머리에 낙인烙印을 찍고 소의 코뚜레를 뚫는 것을 인위人爲라 한다.
그 때문에 인위로 천성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인간의 의도로 천명을 없애지 말아야 하며 허명虛名을 얻기 위해 타고난 덕德을 잃어버리지 말아서 삼가 지켜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천진天眞의 본성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 우마사족牛馬四足 시위천是謂天 :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비유한 표현.
☞ 낙마수落馬首 천우비穿牛鼻 시위인是謂人 : 낙落은 낙絡(이을 낙)의 뜻으로 취하여 낙마수絡馬首를 말머리에 고삐를 단다, 재갈 물려 얽어맨다고 풀이하는 것이 정설定說이나, 낙落과 낙烙(지질 낙)이 통한다고 보아 낙마수烙馬首를 “말머리에 낙인烙印 찍는다.”고 해석.
☞ 무이인멸천無以人滅天 무이고멸명無以故滅命 무이득순명無以得殉名 : 인人은 인위, 천天은 천성. 고故는 인간의 작위적 의도, 인지人知가 농弄하는 작위作爲이고, 득得은 덕德과 같다. 순殉은 따라 죽는다는 뜻.
☞ 근수이물실謹守而勿失 시위반기진是謂反其眞 : 반기진反其眞은 대종사大宗師편 제4장에도 이미 나온 바가 있다. 막역莫逆한 친구 자상호子桑戶가 죽었을 때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서로 화답하며 노래하기를, ‘아! 상호桑戶여, 아! 상호여. 그대는 이미 참된 세계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구나.’라고 하였다[相和而歌曰 嗟來桑戶乎 嗟來桑戶乎 而已反其眞 而我猶爲人猗].”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