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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48:30-35.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 2026. 3.1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그렇다면 어찌 이런 환경과 여건이 되었나요? 특히 지도자들 사이에 이런 의문과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대선지자를 거치면서 왕 족이었던 다니엘이나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과 호세아와 미가와 아모스까지 시대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확실한 음성을 듣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받고 받아야 할 이스라엘의 내일과 미래를 위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전하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quality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은 어느 곳인가?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현장이 어디인가? 왜 그 곳에 계시는가에 대한 의문과 왜 이렇게 하시는가에 대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의문의 해답을 하나님께서 제사장 에스겔에게 환상과 꿈을 통하여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환상으로 나타나셨는데 환상으로 나타난 영적인 의미는 현재의 상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내일과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임재이었습니다. 내일과 미래를 위한 오늘의 적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할을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재의 경험과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나라에 대하여 깊이 묵상을 했습니다. 왜요? 현재의 상황이 포로 민으로 잡혀온 이방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지방이었습니다. 목이 메이도록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던 그 발 강가와 아하와 강가이었습니다. 겔1: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포로로 잡혀간 지 30년이었습니다. 4월 5일 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 자신으로는 그 무엇을 할 수 없는 한계 속에 얽매임을 받는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만들어 졌는가?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가? 어디에 계시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처음에는 한탄도 하지만 오랜 세월 30년이 넘도록 해결이 안 되면 그냥 포기하잖아요? 하지만 에스겔을 그의 아버지를 이어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 낙심한 백성들과 조금이라도 함께한 그 발 강가에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깨달을 수 없는 각양의 모양과 모습으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하실 일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2장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3장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시다가 갑자기 말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겔 11:16-17. 그런즉 너(에스겔)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또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흩어진 곳에서도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성전은 잠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로 귀환하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누구에게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를 환상으로 보여 준 장면이며 그 장소가 에스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성전을 측량하시고 그 곳을 여호와 삼마로 명명했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은 어떤 곳인가요? 겔48:30-35.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 오백척이요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는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똥쪽의 너비는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의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쪽의 너비는 사천 오백척이니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며 하나는 스블론 문이며 서쪽도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여러분, 환상으로 본 성전은 온전한 12지파가 기준이었습니다. 세 지파씩 동서남북으로 나누었으며 동서남북의 크기는 같은 사천 오백 척이며 똑같은 개념의 한 방향 이었습니다. 문을 세 개씩 동서남북 모두 12개의 문입니다. 지파마다 문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양과 크기와 입구를 평등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측량하시고 만드신 여호와 삼마인 성전은 어떤 곳이며 왜 이 곳에 계시는가요? 왜 여기 계시다는 말씀을 하실까요?
1. 여호와께서 에스겔 성전을 말씀하시는데 왜 여호와께서 에스겔 성전에 들어가실까요? 왜 여호와 삼마입니까? 모든 공의를 이루시고 약속한 은혜를 주시고 말씀의 확신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회복과 돌아옴의 시작이었고 그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예배의 공동체의 기준이었고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입니까?
1-1. 새 영을 부어주십니다. 겔11: 19-20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로운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럽고 신앙하는 마음을 주어서 나의 율례와 규례를 좇고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 에스겔 성전에 들어가시고 거기에 계십니다. 여호와 삼마로 규정하시고 이름을 붙이신 그곳에서 공의와 복을 주십니다. 일치한 마음을 주시고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시고 신앙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한 마음과 일치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율법과 규례를 좇고 지켜 행하게 하시려고 여호와 삼마에 계십니다.
1-2. 속지 말고 부정하지 말고 거짓 속담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입니다. 겔12:22-24.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하는 너희의 속담이 어찌된 것이냐? 그러므로 에스겔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속담을 못하리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날이 더디고 묵시의 응답이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답하기 위해서 들어가십니다. 날과 모든 묵시가 응답이 된다는 확신을 위해서 여호와 삼마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이 없습니다.
1-3. 하나님께서 손수 씻기시고 바르시고 먹이십니다. 겔16:9-13. 내가, 하나님이 물로 너희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 돼지가죽 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띄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 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코 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화려한 면류관을 씌우고 곱고 형통한 왕후의 지위를 위해서 여호와 삼마를 하십니다.
1-4. 살아있는 군대가 되고 나눔이 하나가 되는 능력입니다. 겔37:1-10의 내용은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는데 그 수많은 뼈에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 마른 뼈들이 살아나게 합니다.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이 되고, 힘줄이 오르고, 살이 붙으며, 그 위에 생기를 불어 넣었더니 뼈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됩니다.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이 불어 넣으시는 그래서 살아있는 큰 군대가 되게 하시는 성전입니다. 37: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리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마른 뼈가 어떻게 연결이 되고 힘줄이 붙고 생기가 돋습니까? 어떻게 큰 군대가 되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하나가 됩니까? 둘이 하나가 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여호와 삼마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그 자리에 계십니다.
1-5. 교회는 생수의 강이 넘쳐야 여호와 삼마가 됩니다. 겔47:1-12의 내용인데 성전에서 물이 나옵니다. 여호와 삼마에서 물이 나옵니다.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물의 은혜가 베풀어집니다. 처음은 물이 발목까지 찼습니다. 두 번째는 무릎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허리이었습니다. 나중이 건너지 못할 강이었습니다. 특히47:9. 이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흐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점점 더 생육하고 번성하는 은혜와 복이 주어지는 성전의 물이 흐르는 여호와 삼마입니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건너지 못하는 강의 축복의 여호와 삼마입니다. 이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여호와 삼마를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왜 여호와 삼마입니까? 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는가? 오늘 말씀은 절망의 시대에 주어진 소망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 성전은 파괴되었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마지막에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나 48:35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하나님은 떠난 것이 아니라 떠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떠났다는 것은 현상만을 보고 현실의 문제 때문에 만들어 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에스겔 10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떠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징계의 채찍과 가르침의 막대기이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인도하시는 지팡이였습니다. 여러분, 왜 매를 드실까요? 징계는 끝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회복을 시키시고 이전보다 더 나은 영광을 위한 것 때문입니다.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되 오늘과 현실만을 생각하고 보는 눈을 내일과 미래로 향하게 항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시간들이 있지요?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은 상황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부재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겔48장은 회복된 성전과 회복된 땅을 보여주고 그 도시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여호와 삼마. 이 여호와 삼마는 번영된 도시의 이름이 아닙니다. 화려함도 없고 단순하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그 도시의 정체성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로그램과 규모와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계시는가? 함께 하시고 듣고 보고 계시는가?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도 여호와 삼마입니다. 신약에서 이 약속은 더욱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그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임마누엘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조명하시고 인도하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여호와 삼마입니까?
이전의 회복입니다. 고통을 받는 현 상황이 아닙니다. 회복의 약속은 임재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가운데 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주가 무엇입니까? 임재입니다. 그러니까? 회복의 핵심은 환경이 아니라 임재입니다. 신약에서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십니다. 마 1:23절 임마누엘이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선포했던 임마누엘입니다. 그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28:20.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오늘 여기에 이 예배 속에 함께하십니다. 이 확신과 신뢰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혼돈(混沌, chaos)의 시대입니다.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그만큼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 같지만 사회도 너무 빨리 변하여 우리 능력으로 좇아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오히려 더 바빠지고, 더 스트레스 받고, 더 살기 힘들어졌습니다. 날마다 터지는 대형사건과 자연재해, 정치혼란과 경제 불안, 테러와 전쟁과 질병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인생의 목적과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물질만능주의에 도취되어 사치와 유행을 쫓아다니거나 좀 더 재미있고 쇼킹한 것들을 찾아 방황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무엇도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아모스 8/11~13 주 하나님이 말하노니, 보라, 그 날들이 오리라.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의 기근이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라. 오직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니라. 사람들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방황할 것이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달릴 것이나 그것을 찾지 못하리라. 그 날에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2700년 전에 이러한 날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땅에 기근을 주시는데 빵이 없어 굶거나 물이 없어서 갈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찾으려고 사방천지를 돌아 다녀도 얻지 못하니, 그 날에는 젊은 사람들도 다 영적인 갈증으로 피곤해진다고 합니다. 미래가 불안하니 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서 운세를 보고 점을 봅니다. 답을 주지 못하는 우상을 찾습니다. 상해보험이나 생명보험을 들어 봅니다. 그래도 마음은 안정되지 않아 이 책 저 책을 뒤져보고, 이 종교 저 종교도 가보지만 마음의 갈증은 늘 해소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죽게 될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포기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이 전의 주셨던 은혜만을 생각해야 되는데 스스로 현실과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호와 삼마이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게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전의 영광과 회복으로 바꾸시고, 더하여 이전의 영광보다 나중이 더하는 영광을 얻게 하십니다. 그 것이 여호와 삼마입니다.
3. 마지막으로 여호와 삼마의 적용입니다 여호와삼마가 어디입니까? 여호와 삼마가 무엇이며 어디에 적용을 해야 합니까? 지금 무너진 상황에서의 기도를 하는데 응답이 없습니까? 아하와 강가와 그 발 강가에서의 간절함 입니까? 병상 위의 고통 속에서 치유와 회복을 위한 부르짖음 입니까? 삶의 정체 가운데 이것도 저것도 그 무엇도 풀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거기에 있고, 나는 네가 있는 그 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건과 환경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함께하시고 임재하십니다. 무엇으로요? 여호와 삼마로, 거기에 내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여호와 삼마의 확신이 드십니까? 임마누엘이 느껴지십니까? 여호와 삼마와 임마누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습니까?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귀는 들음으로 복이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무엇이 없어서 조바심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곧 회복의 시작입니다.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이런 여호와 삼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척량을 하셔서 똑 같은 크기와 똑 같은 size와 똑 같은 축복의 문을 세 개씩이나 설치를 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의 축복입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축복입니다. 복의 근원과 이름이 창대케 되고 모든 민족 가운데 의뜸이 되는 복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축복입니다.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들려지나요? 여러분, 밤에 예솔이가 잠을 자다가 갑자기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무서워 울었습니다. 엄마가불을 켜주면서 엄마가 여기 있어. 울지마! 그런데 불이 켜진 것이 아이를 안심시킨 것이 아니라 엄마의 존재와 엄마의 음성이 예솔이를 평안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함께하심이 보여 지고 들려지는 곳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어두운 밤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는 특정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처음 부르신 곳입니다. 처음 약속을 하고 은혜를 받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름부음을 받았던 곳입니다. 나의 가정과 직장, 일터와 사업장과 계획한 곳입니다. 눈물의 골짜기입니다. 홍해와 광야의 길입니다. 요단강과 여리고와 아이 성입니다. 헤브론입니다. 고센 땅입니다. 어는 곳이든지 회복이 되는 자리와 현장입니다. 절망과 병상과 실패의 자리에서도 회복이 되는 현장입니다. 그런 곳이 어디입니까?
3-1. 절망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떠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에스겔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한 때는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절망의 시대이었습니다. 성전은 무너졌고, 도성은 불탔고, 백성은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 성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풀어서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너진 자리라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눈물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십니다.
3-2. 소망과 목표가 있는 사람과 소망과 목표가 분명한 자리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여호와 삼마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잠14:12~13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심지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그 희락(喜樂)의 끝은 근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겁게 놀아도 마음에 근심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항상 우울하고 불안하며 근심하는 것은 내 영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인 내 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 요일 4/19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 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 13/3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진리의 핵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징표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신할 속죄 제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에스겔서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은 무너졌던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고, 그 성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고 선언하셨는데 이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 소망의 선언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의 감사 서원이 여호와 삼마이시기를 그리고 날마다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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