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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09주일설교 자비로운 아버지 비유(누가복음15:11-32)
본문: 누가복음15:11-32
제목: 자비로운 아버지 비유
오늘은 누가복음 15:11-32의 말씀을 가지고 “자비로운 아버지 비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자비로운 아버지 비유”
두주 전에 우리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들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고흐가 그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그림을 보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그림을 하나 보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디서 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카페 좌측에 걸려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우리 교회에 걸리기 시작한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전에 조립식으로 지어서 사용하였던 교육관에 먼저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2005년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최영모 선교사님께서 사역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에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 있는데 이 그림 원본이 걸려 있습니다.
그 박물관은 너무 사람들이 많고 그림이 많아서 한 그림을 시간을 두고 보려고 하면 몇 년을 보아도 다 못 볼 것입니다. 이 탕자의 귀환도 잠깐 스치듯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 장의 같은 그림의 복사 본을 사와서 하나는 사택에 하나는 교육관에 걸어 놓은 지 10년은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그림은 10년 동안 걸려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이 그림은 헨리 나우엔이라는 신부가 박물관에서 특별한 배려를 받아서 하루 종일 보고서 묵상하여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도 지난 한 주간 자주 그림을 들여다보았고 헨리 나우엔의 책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어떤 이는 돌탕이라고 합니다. 돌아온 탕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이 본문의 주인공이 돌아온 탕자일까요?
1.둘째 아들
그는 참 나쁜 아들입니다. 대놓고 나쁜 아들입니다. 그 어디를 봐도 좋은 구석이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종종 자식들에게 재산을 미리 주시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미리 나누어주고 그 자식들에게 괄시와 서러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상속세 때문에 미리 줍니다. 아예 부동산을 사면서 미리 자식들의 이름으로 해 놓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주 나쁜 행동입니다. 자식에게 부모의 재산의 분깃이 돌아가는 시기는 부모가 죽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 있는데 재산의 분깃을 달라는 것은 부모에게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요구하는 둘째 아들은 두말할 것 없이 나쁜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요구하자 줍니다. 그렇게 받았으면 둘째 아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재산을 바르게 잘 사용하고 관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재산을 다 처분하여 가지고 먼 나라로 갑니다. 재산을 받고서 그래도 부모의 말을 들으면서 살았어야 하는데 아예 부모의 말소리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재산을 받은 것도 나쁜데 멀리 떠나기까지 하였으니 정말 나쁜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예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고 보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아버지의 영향력은 받지 않겠다는 아들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드러내놓고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나갔으면 잘 살아야 했습니다. 그 재산 잘 사용해서 선한 일을 하든가 재산을 불려서 많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리어 어떻게 살았습니까? 허랑방탕하였습니다. 좋은 곳에 안 쓰고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썼습니다. 그리고 그 재물마저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 어디도 그를 환영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그런 사람이 나왔으면 잘 됐다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였는데 잘 먹고 잘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둘째 아들은 갈 곳을 찾다가 겨우 찾았는데 돼지를 치는 곳이었습니다.
새로운 직장이 생겨서 갔는데 악덕 농장 주인을 만났습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굶어 죽을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실까요? 둘째 아들의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첫 번째 아들은 홍포를 둘렀습니다.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둘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거의 하얀 옷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붉은 색이 보입니다. 원래 하얀 색이 아니라 붉은 색이 빠져 하얀 색이 되었습니다.
그가 신은 신발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신은 신발은 보이지 않지만 형이 신은 신발은 아주 좋은 신발입니다. 그것에 반해 둘째 아들의 신발을 떨어져서 발이 다 나왔고 신발의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거의 잃어 버렸습니다. 그림에서 자세히 보면 허리에 칼을 하나 차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이 아들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형이 찬 긴 칼과는 대조적이지만 그래도 둘째 아들은 다른 것은 거의 없어도 칼은 차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을 때 그때 생각난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들이고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아버지 집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자신은 지금 굶어죽을 상황이지만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들은 배부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품꾼마저도 배부른 곳이 자신의 아버지의 집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자기가 있을 곳이 그곳이 아니라 아버지 집임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이제 더 이상 아들로서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보아 달라고 하기로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종이라도 좋으니 아버지 집에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아버지 집이 최고였고, 아버지 집이 절실하였고, 그 어디서도 자신을 받아 줄 곳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받아 줄 것이라는 믿음까지 있었습니다. 떠나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채워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필요 없다고 떠나서 살던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버지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자신의 본향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둘째 아들은 15장 1절에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대 놓고 나쁜 짓을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살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품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은 수군거립니다.
2.첫째 아들
첫째 아들은 어떤 아들입니까? 그림에서 보는 첫째 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훌륭합니다. 당당하게 서 있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화려한 모든 것을 다 치장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았을 때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고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대 놓고 거절한 적도 없었습니다. 늘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 집에서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장남으로서 책임을 다했습니다. 아들로서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아버지는 좌측에 큰 아들은 우측에 당당히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붉은 망토를 입고 있습니다. 겉모양은 많이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실제로 말투도 행동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을 것입니다.
종종 어느 집에 전화를 걸어보면 한 남자가 전화를 받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목소리마저도 닮습니다. 그렇게 큰 아들은 외형적인 부분에서나 행동하는 부분에서나 많이 아버지를 닮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훌륭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순종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잘 하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가 표현한 것을 보면 큰 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죽은 것 같은 동생이 살아 왔으며,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상황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 상황입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서 둘째 아들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허리를 숙여서 아들을 안고 있습니다.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감격으로 얼굴은 흥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잃어 버렸던 아들을 찾은 기쁨으로 한없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의 손은 꽉 쥔 채 허리춤에 있습니다.
아버지 얼굴에나 큰 아들의 얼굴에 빛이 비추어지고 있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비추는 빛은 그의 온몸, 특히 그의 손을 밝혀주면서 작은 아들을 환하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후광으로 감싸 안고 있습니다.
반면에 큰 아들은 얼굴에 비쳐진 빛은 차갑고 냉정하게 느껴지며, 그의 신체는 어둠 속에 가리워 있고 그의 거머쥔 손은 그림자 속에 남아 있습니다. 마치 그래도 동생이니 기뻐해야지 하는 마음을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이 거머쥐는 모습입니다. 어두운 손과 밝은 손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둘째 아들은 돌아왔는데 큰 아들을 돌아오지 않았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큰 아들도 집에 남아 있었지만 그도 역시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착한 아들이라면 당연히 하게 되어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속으로 그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도 재산을 가지고 자유롭게 아버지를 떠났던 동생이 부러웠을 것입니다.
종종 성도들 가운데 신앙생활 잘하면서도 세상을 부러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정죄도 하였지만 사실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타나는 큰 아들의 모습은 불만과 분노와 비판과 저주로 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잘 섬겼는데 아버지는 자신에게 잘 대해 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합니다. 동생은 소를 잡아 주면서 자신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불만 속에서 큰 아들은 자신의 순종과 책임은 짐이 되어 있었고, 섬김은 종살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집에 머물러 있었고 다른 데로 가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버지 집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로서 상실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주와 분노와 원망, 괴로움과 질투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쉽게 규정할 수 있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잃어버린 것은 명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돈과 시간과 친구들과 자기 몸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한 일들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작은 아들은 도덕률에 반기를 들고, 자기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스스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는 불을 보듯 하였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은 모든 것이 비참해 졌음을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의 상실감을 이해하기 훨씬 어렵습니다. 그는 올바른 일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순종했고, 책임감있게 행동했고 합법적으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 큰 아들에게 존경과 칭찬과 칭송과 심지어 그를 모범적인 아들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외형적으로 큰 아들은 흠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뻐하는 아버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둠의 권세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겉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습니다. 깊숙이 감추어져 있으면서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강해졌던 분노와 교만과 무례함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한 인물이 두드러지게 등장합니다.
그의 불평은 무엇입니까? 그는 열심히 오래 많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손쉽게 얻는 것을 자신은 못 얻는다고 말합니다. 또한 막 산 사람을 왜 그렇게 잘 해주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도록 놓아두어야 하는데 왜 난리를 치느냐고 합니다.
큰 아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자신은 빠져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는 소외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집에서 누구인데 소외되었다는 실망감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종이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다는 말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고, 기쁨은 그와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그래서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은 큰 아들도 집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화가 나 있고,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림에 나타나 있는 큰 아들은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의 권유로 집안으로 들어와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다르게 어둠 속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불만과 분노와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절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수군거립니다. 분노합니다.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 살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온 세리와 죄인들을 향하여 불평하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분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가지고 다음 주 한 번 더 말씀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둘째 아들만 탕자가 아닙니다. 첫째 아들도 탕자입니다. 둘째 아들이 겉으로 드러난 탕자라면 첫째 아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탕자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온 탕자라면 첫째 아들은 돌아와야 할 탕자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탕자가 되었지만 첫째 아들은 분노와 원망과 비판과 저주로 탕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어떤 모습입니까? 아버지 품에 있습니까? 그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서 자유와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봉사하고 있으며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십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께 돌아가야 합니다. 머뭇거리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구경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에서 잔치의 기쁨과 평안함의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길이며 우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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