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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배우의 운명은, 어쩌면 ‘타인의 자아’를, 그러니까 ‘배역의 자아’를, 배우 자신의 자아인 듯이 자각하면서, 그리고 타인의 본능을 자신의 본능인 듯이 자각하면서, 아니, 더 정확하게는, ‘듯이’ 자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배우 자신의 자아와 본능을 배역의 자아와 본능에 합치시킬 수 있어야만, 요컨대, 배우 자신의 ‘진실한 가면(假面; mask; masque)’을 쓸 수 있어야만,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도록 예정되었을 것이다 …….”
그런데 어지간히 일반화될 수도 있을 이 가설은 위험한 도그마(dogoma; 독단론)으로 전락할 위험을 겸비한다.
평시용(平時用; 일상용; 직업용; 생계용; 여가용; 처세용; 정치용; 사기용) 가면은 말 그대로 가식과 위선과 거짓의 상징물이라고 인식된다. 그래서 가면쓰기는 가면쓰는 자의 치부, 단점, 약점이나 강점, 장점, 특출한 재능 따위를 숨기는 동시에 그것들을 정반대로 외부의 타인들에게 오인되거나 착각되도록 꾸며서 암시하거나 내비치거나 제시하거나 과시하는 기만(欺瞞)이나 기망(欺罔)이라고 인식된다. 기만은 반드시 필요된다고 인정되거나 필요될 만하다고 용인되는 극히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언제나 부정적이고 거북스러우며 불쾌하거나 괘씸한 행위라고 인식된다. 가면을 잘 쓰는 자는, 그러니까 자신이 숨기고픈 진면(眞面)이나 진의(眞意), 본의(本意), 저의(底意) 따위를 감쪽같이 숨기는 동시에 정반대로 꾸며서 암시하거나 내비치고픈 것만 약삭빠르고 능란하게 암시하거나 내비치는, 타인을 기만하거나 기망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사기꾼, 협잡꾼, 야바위꾼, 정치꾼이라고 인식되기 십상이다. 가면쓰기를 능란하게 잘하는 자는 타인에게 무언가 나쁜 저의를 품은 자라고 느껴질 만한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그런 한편으로 근대 서양의 귀족사회와 부르주아사회에서 주로 발달한 이른바 가면무도회(假面舞蹈會; masquerade ball; bal masqué)의 참가자들이 착용한 가면의 의미는 평시용 가면의 의미와 사뭇 다르게 인식된다. 물론 서양에서 진행된 가면무도회의 실상을 직접 관찰할 기회는 우리에게 드물다. 그것의 이미지 대부분은 유럽산 영화나 미국 할리우드산 영화와 서양의 문학작품들과 예술작품들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영화, 문학작품, 예술작품들에서 목격되는 가면무도회의 실재여부는 ‘진실한 가면, 아니면 가면의 진실’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딱히 중요한 변수는 아니다. 관건은 가면무도회가 상상되든 오인되든 실재하든 부재하든 무관하게 가면의 의미망(意味網)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가면무도회용 가면은 당연히 기만이나 기망을 함의한다. 그러나 이 가면은 일상적 이해득실의 차원을 비껴가면서 유혹과 매혹의 도구로서 이용된다. 가면무도회에서는 가면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는 문제도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가면을 쓰느냐는 문제도 중요하지 않다. 모든 참가자가 가면을 써야 한다는 묵계나 규칙이 중요할 따름이다.
가면무도회에서 필용(必用)되는 가면은 유혹의 도구이다. 그러나 이 유혹은 가면쓴 자의 진면(민낯)을 단순히 가리는 은폐나 기만으로써는 완료될 수 없다. 이 유혹은 더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관능(官能)을 반드시 요구하며 동반하기 마련이다. 관능은 가면의 표면화된 인상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가면의 표층에 가려진 가면으로, 그러니까 제1가면 속에 은닉되거나 은폐된 제0가면으로, ‘파고들어나온다, 천입출(穿入出)한다.’ 가면무도회의 최종목적이 단순한 기만이 아니라면, 가면무도용 가면은 가면쓴 자의 얼굴을 ‘가리기’라는 최소기능을 수행하여 ‘가린 얼굴의 무엇’을, 그러니까 가면의 이면에서, 가면쓴 자의 내면에서, 들끓는 관능을, 최대로 암시하고 내비치는 아이러니(irony; 반어법; 反語法)나 역설(逆說; 역리; 逆理; 패러독스; paradox)을 암행(暗行)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면무도용 가면은 가면쓴자의 얼굴을 ‘가리기’로써 타인을 ‘기만’하기보다는 오히려 가면쓴 자의 관능을 암시하거나 내비쳐서 타인을 ‘유혹’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각설되자면, 가면무도회용 가면은 앞에서 간략히 언급된 평시용 가면과 다르게 지극히 물질적인 소품일 따름이다. 바로 이런 두 가지 가면의 차이가 분별되어야 한다. 왜냐면 재질별(材質別)로 다를 수 있는 가면의 의미들보다는 쓰이는(착용되는; 사용되는) 상황별로 다를 수 있는 가면의 다양한 의미들이 포착되어 분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평시용 가면과 가면무도회용 가면의 재질이 가면쓴 자의 몸(표정, 달콤한 말, 몸짓 따위)이든 다른 물질(다종다양한 재료들)이든 무관하게 두 가지 가면은 모두 나름의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들이므로 동일하다. 그러나 두 가지 가면의 목적은 다양하다. 특히 그런 목적들을 추구하는 메커니즘들의 차이는 두 가지 가면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한다. 가면쓰기의 의미도 쓰이는 가면의 재료나 목적대로 결정되기보다는 오히려 가면쓴 자의 목적과 그것을 추구하는 메커니즘대로 결정된다.
평시용 가면쓰기는 대체로 가면쓰는 자의 (좋거나 나쁜, 선하거나 악한) 진면과 진의를 가려서 숨기고 정반대로 오인되거나 착각되도록 꾸며서 타인을 기만하거나 기망하여 이익(이윤이나 수익을 포함하는 물질적 쾌락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정, 칭찬, 환심, 호의적 언사와 자신의 안전, 안위, 지위를 보장하는 타인의 언행 따위)을 사취하려는 행위라고 인식되기 십상이다. 이런 ‘가면쓰기’는 가면쓴 자의 가면에 가려진 것들을 가려서 숨기거나 부정하고 정반대로 인지되도록 꾸며 이익을 사취하거나 취득하거나 구걸하려는 행위라고 간평(間評)될 수 있다. 이런 가면쓰기가 최대효과를 거두려면 가면쓴 자의 진면과 진의를 최대한 ‘가려서 숨겨야’ 한다.
그런 반면에 가면무도회용 가면쓰기는 오히려 가면쓴 자의 드러나는 평시용 가면과 가의(假意)를 가려서 숨기고 부정하여 그자의 더 내밀하거나 더 본질적인 매력 같은 것을 외부로 드러내어 표현하는 행위라고 가설(假說)될 수 있다. 그런 표현은 먼저 유혹의 일환처럼 보인다. 그것은 가면쓴 자의 관능을 숨겨서 타인을 기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관능을 암시하거나 내비쳐서 타인의 관심을 그런 관능으로 흡인하여 침잠시키려는 표현이다. 관능의 원리는 타인의 관능을 사취하기보다는 자신의 관능에 타인의 관심을 침잠시켜 고착시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관능은 가면쓰기라는 유혹행위로써, 그리고 그렇게 유혹하는 관능으로 흡인되는 타인의 관심이나 흥미를 향해, 가면쓴 자의 숨은(가린) 매력 같은 것을 암시하거나 내비치거나 과시하는 행위이자 능력일 수 있다. 이렇다면 가면무도회는 가면쓴 자의 관능을 타인에게 암시하거나 내비쳐서 흡인한 타인의 관심이나 흥미를 가면쓴 자의 유혹대상 속으로 투입하는 의례라고 비유될 수도 있다.
이런 투입의례(投入儀禮)는 유혹대상의 관심을 사취하는 행위가 아니다. 가면쓴 자의 가면을 파고들어나오며(천입출하며) 촉발된 관능은 극적이게도 그것을 인지하고 그것에 흡인되는 타인의 관심으로 뛰어든다. 그러니까 가면은 가면쓴 자를 바라보며 유혹당하는 타인의 관심 속으로 가면쓴 자의 내밀한 관능을 투입하면서 가면자체를 천입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혹하는 관능의 가면은 가면쓴 자의 관능을 가려서 내면으로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외면으로 암시하고 내비쳐 ‘드러내고 표현하여 투외(投外)시키고 천입출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분별될 수 있는 가면의 메커니즘들은 이제 거꾸로 목적들의 차이를 드러낸다. 애초에는 동일한 목적성을 공유한 두 가지 가면이, 그리고 가면쓴 자의 내면을 가려서 숨긴다는 동일한 최소기능을 수행한 두 가지 가면이, 상이한 메커니즘대로 기능하다가 상이한 목적대로 다변화된다.
그런데 이런 차이화(差異化)와 다변화는, 이런 메커니즘의 다양화와 목적의 다변화는, 과연 어떻게 시작될까? 가면의 최소기능이, 그러니까 가리고 꾸며서 기만하거나 기망하는 성질이, 그리고 더 나아가 ‘가리고 꾸미면서 암시하고 표현하는 역리적 특성’이 그런 차이화, 다변화, 다양화를 유발하지는 않을까? 요컨대, 가면이란 의도나 “의지(意志)”를 함유하고 반영해야만 비로소 존재의미를 획득하여 특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차이화, 다변화, 다양화의 원인은 아닐까?
“가면의 진실”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가면의 “의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생각될 수도 상상될 수도 없다. 이 의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앞에서 서툴게 분별된 ‘숨기기와 표현하기’라는 가면쓰기의 이중적 메커니즘은 일상세계에서 통용되는 ‘직업세계와 여가세계’를 나누는 단순한 구분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면 가면은 거의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열하며 유치하고 교활한 속임수나 불쾌하고 괘씸한 놀이도구나 기만수단일 뿐이라고 통념될 것이고, 종래에 ‘가면의 진실’은 난센스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나 가면은 이따금 진실성 같은 것을 암시하거나 내비치곤 한다. 이른바 ‘선의(善意)의 가면’ 같은 것도 그리한다. 하물며 ‘악의의 가면’도 진실성 같은 것을 적잖이, 아니, 때때로 더 강렬하고 더 풍부하게 암시하거나 내비친다. 그렇다면 여기서 뜨악하게도 ‘가면은 스스로를 배반할 수 있다’나 ‘가면은 진실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어지럽히는 것은 ‘선과 악의 상반성’을 상기시키거나 강조하거나 고집하는 무의미한 동어반복들일 것이다. 그러나 가면의 의미를 아리송하게 혼동시키는 이토록 무의미한 동어반복들은 어떻게든 선악을 이분(二分; 양분; 兩分)하려는 지독하게 미련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의 소치들이 아니다. 이런 혼동은 가면을 쓰는 ‘의지’의 거취에서 파생한다.
1.
‘의도나 의지’를 불비(不備)하거나 불표(不表)하는 가면은 사실상 가면일 수 없다. 왜냐면 가면은 반드시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토록 당연한 필연은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 차단해버리고 다음과 같은 반문(反問)들만 동어반복시킬 것이다.
“의지를 불비한 가면이란 이미 언어도단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도대체 무슨 더할 말이 남겠는가? 우리가 그런 필연성을 어찌할 방도라도 있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가면의 의지는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는 피상적이고 동어반복적인 판단밖에 더 있는가?”
이런 막바지에서 ‘가면의 진실’은 모든 표현을 차단당해버린다. 그래서 박약하고 미숙한 판단력의 소유자는, 그러니까 본질을 숨기는 가면의 은닉은폐기능에만 집착하는 판단력의 소유자는, ‘가면의 진실’이라는 아이러니조차 ‘가면쓴 자의 의지’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독일 고전문헌학자·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간파했듯이,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워(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의지’를 확대해석하여 ‘일반인들의 의지’라고 오인하는 어리석은 판단이다.
더구나 가면의 이중의미(二重意味)와 다양한 의미들은 본질상 가면쓴 자의 ‘의지의 차이’에서 파생한다. 그런 차이는 목적들이나 메커니즘들의 차이가 아니라 가면쓴 자의 ‘의지의 성질들’의 차이이다. 그런 차이는 예컨대 ‘가면쓴 자의 의지는 어떤 의지이냐? 무엇을 바라는 의지이냐?’는 문제들을 유발한다. 이 문제들은 결국 의지의 성질별로 다른 차이들, 그러니까 가면쓴 자의 정신이나 감성의 건강상태별로, 그리고 그자의 삶을 향한 태도에서 파생하는 심력(心力)의 강도별(强度別)로 다른 차이들을 상기시킨다.
이런 차이들 중에도 가면의 진실과 관련하여 주목될 만한 것은 ‘부정의지(否定意志; negative will)와 긍정의지(肯定意志; positive will)의 차이’이다. ‘가면쓴 자의 가치(value of the masked)’와 ‘가면쓴 자의 가면의 가치(value of the mask of the masked)’는 바로 이런 의지들의 차이를 준거로 새롭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가면무도회의 가면도 평상시의 가면과 마찬가지로 재래식 의지론(意志論)을 적용받으면 부정의지의 소산들처럼 보인다. 그러면 두 가면은 기껏해야 ‘지겨운 일상을 살짝 벗어나는 가벼운 일탈’과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놀이나 여흥’의 차이밖에 갖지 않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평상시에는 극심한 울분이나 불평불만처럼 이른바 상대적 박탈감이나 기만당한 자의 분노를 자극할 정도로 크나큰 차이라고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박약하고 부실한 판단력은 기껏해야 두 가지 가면의 중대한 차이를 ‘부정적으로 보완’할 뿐이다. 이런 상황은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의 협잡질이나 짬짜미’라고 비유될 수 있다. 이러면 극심하게 오인된 심각한 차이는 표면적 차이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가면은 표면적인 것이라서 가면쓴 자의 진실을 표면화(表面化)하고, 그런 표면화는 은폐된 것을 꾸미거나 위조하거나 날조하거나 치장하여 드러내서 타인을 기만하거나 기망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런 동시에 가면은 가면쓴 자를 바라보는 타인이 가면쓴 자의 드러나는 내밀한 것과 함께 감행하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교감의 매체이다. 가면은 특히 가면쓴 자의 의지를 표현하는 역리적 매체라서 어쩌면 가면쓴 자의 가장 강밀한 내면성을 표현할 것이다. 그래서 표면적인 가면의 기만이나 유혹은 가면쓴 자의 내밀한 의지를 표현한다. 그런 의지의 선악을 어떻게 판단하여 고정하려는 박약하고 미숙한 판단은 가면의 진실이나 의지를 표현하기는커녕 묵살하거나 말살해버리기 십상이다.
이렇듯 가면이 곧 ‘표현’이라면, 경박한 선악판단은 의지의 표현을 묵살하거나 말살한다. 그래서 가면들의 차이를, 그리고 가면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간파하려는 안목은 가면들에 함유되어 표현되는 의지들의 차이를 포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면무도회를 주목받게 한다. 가면무도회는 평상시보다 더 긍정적이고 더 강밀한 의지를 표현하는 의례(儀禮)의 일종이다. 가면무도회용 가면은 가면의 본성을 더 절묘하게 암시하거나 내비친다. 이 가면의 의지는 가면쓴 자의 의지를 가려서 숨기려는 의지(평시용 가면의 의지)도 아니고, 타자화(他者化)된 자신을 부정하려는 퇴폐(데카당스; decadence)적 의지도 아니며, 자신의 단점, 약점, 치부, 결함 따위를 숨기는 동시에 정반대로 꾸며서 암시하거나 내비치거나 과시하려는 가증스러운 겸손의 위선적 의지도 아니다. 이 가면의 의지는 표현하려는 가면의 의지이다. 이것은 가면쓴 자의 진면과 진의를 가려서 숨기는 동시에 꾸미거나 위조하거나 치장하여 암시하거나 내비쳐서(표현하여) 타인의 관심을 낚아채려는 표현의지이자 유혹의지이다. 이 가면은 물론 여전히 상당히 수줍거나 강퍅한 부정의지를 얼마간 포용하여 표현하지만, 그리고 외부의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옛 대상에 몰입하여 침잠하는 퇴폐성마저 미미하게 표현하지만, 더 강밀한 긍정의지의 징조를 풍부하게 표현한다.
그런 반면에 평시용 가면은 가면쓴 자아의 결핍, 결함, 좌절 따위에서 비롯된 노예적 원한과 울분을 가리고 숨기는 동시에 조악한 웃음이나 우스꽝스런 (이른바 진취적 자신감 따위를 빙자한) 허세를 동반하는 가식과 허례로 꾸미고 표현하여 타인의 호의나 환심이나 이익을 사취하려는 허무주의적 의지의 표현이다. 이 가면은 소심한 안위와 천박하거나 소소한 쾌락을 노리는 불쾌한 미소를 흘려대는 가면쓴 자의 구차한 보복의지를 표현하고, 허무한 일상생활을 견디느라 신물을 삼키며 ‘복운을 타고난 타인들’에게 허리를 굽혀야 한다고 자탄하는 가면쓴 원한의 의지를 표현하며,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열등하며 불행한 타인들을 보면서 내심 주체할 수 없을 만치 끓어오르는 안도의 기쁨과 눈물겨운 만족감을 향락하려는 가면쓴 자의 잔인한 선의지(善意志)마저 조잡하게 표현한다. 이토록 빤한 평시용 가면을 보면서 구토를 느끼지 않을 자는 드물 것이다.
물론 가면무도회용 가면도 구토를 유발한다. 왜냐면 그것은 평시용 가면을 가리고 숨기려는 또 다른 가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가면의 가면’은 다소 유치한 긍정의지를 겸비한다. 이것은 가면쓴 자의 본능에 충실한 성정, 자신의 본능을 긍정하려는 의지라고 가설될 수 있다. 그런 본능은 비록 금세 뒤틀려 썩어문드러지겠지만, 그래서 가면의 위력을 빌리지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발동하는 막연한 의지의 발로이지만, 가렵고 알싸한 가면무도회에는 ‘가면을 가리는 가면의 쾌감’이 깃들인다. 그래서 가면무도회는 평시용 가면에 감금된 가면으로써 감행되는 초췌하고 슬픈 본능의 “쇼생크 탈출” 같은 것이다.
이러면 가면무도회에서 가면은 원한에 찌든 본능의 근사한 탈출구처럼 감각된다. 이 가면은 구차한 일상에 시달리며 지치고 병든 개미들의 수줍은 일탈을 부추긴다. 이것은 억압된 본능, 뒤틀린 욕망, 미약하고 허무한 의지를 가려서 숨기는 동시에 정반대로 꾸며서 위조하거나 날조하거나 치장하는 가식, 허례, 허세로써 충족하려는 비굴한 가면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가면쓴 자의 본능을 표현하려고 평시용 가면을 가려서 숨기는 가면이다. 이런 ‘평시용 가면을 가려서 숨기는 가면’은 비록 조잡할망정 가면쓴 자의 평시용 가면을 가리고 숨겨서 그자의 내밀한 본능을 표현하려는 부조리한 의지의 소산이다.
바로 이런 본능을 표현하는 긍정이야말로 가면의지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가면도 긍정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여태껏 가면은 대단히 부정적이고 괘씸한 물건이나 처세라고 인식되었다. 왜냐면 가면이라는 물건이나 처세가 부정적이고 괘씸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면쓴 자들의 가면이 오히려 그것을 쓰거나 판단하거나 벗기려는 자들의 병들거나 조악한 의지를 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오로지 자신을 가리고 숨겨야만 자신의 ‘절망적 공허를 기만하여 채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의 박약한 판단이 그들의 의지보다 더 강밀한 긍정의지를 좀먹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가면은 의지를 표현한다고 거듭 강조될 수 있다. 비록 가면쓴 자의 내밀한 것들을 가리고 숨기는 것이 가면의 묘용(妙用)이겠지만, 가면은 본질상 내면의지의 “표현”이다. 가려서 숨기기는 가려서 숨기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방중술(房中術)의 일종이라고 비유될 수 있다. 그래서 가면을 대면하는 인간은 가면쓴 자의 부지불식간에 드러난 가면보다는 그자의 가면에 가려져 숨은 것들을 더 중요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면은 ‘가려서 숨기는 동시에, 아니면 가려서 숨기면서,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이다. 가면의 이런 이중성이 평시용 가면을 참을 수 없이 괘씸하게 만든다. 왜냐면 가면이 가려서 숨기는 것이야말로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것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면무도회에서 가면쓴 자의 본능을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가면은 오히려 일상의 가면을 가리고 숨겨서 그 가면의 가치를 드러내어 표현한다고도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런 표현이 메스껍고 지겨운 일상을 긍정될 수 있게 꾸민다. 이런 ‘평시용 가면의 가면’은 그래서 일상마저 긍정할 수 있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가면의 긍정이 일상에 순응하거나 이른바 “어쩔 수 없지 ……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렇게 대충 살지 뭐 …… ”라고 푸념하는 단순한 체념 따위라고 오인되지는 말아야 한다. 평시용 가면의 가면은, 그러니까 가면무도회용 가면에 담긴 긍정의지는, 탈진한 일상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수락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면 이 의지는 평시용 가면이 가려서 숨기거나 꾸며서 위조하려는 부정의지마저 긍정할 수 있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간에, 그러니까 가면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가면마저 긍정하는 이 순간에, 가면의 의지는 추진력을 폭현(爆顯)하기 시작한다. 부정의지는 본디 그것을 품은 자의 본의를 부단히 ‘가려서 숨기거나 정반대로 꾸며서 표현하여’ 외부세계를 피폐시키는 동시에 의지의 생래적 진취성마저 좀먹어 시들게 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의지도 긍정의지의 추진력을 차용하거나 취용하면 이른바 ‘파괴적 창조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런 긍정의지의 추진력을 차용하거나 취용하는 부정의지의 가면도 지겨운 허무한 일상을 파열시켜 새로운 세계의 진입로를 뚫는 수단처럼 기능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긍정성을 차용․취용하는 부정의지의 가면이 무미건조하고 허무한 일상을 흥겨운 창조의 소재로 변용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긍정은 모든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고 애오라지 긍정적인 것만 긍정하는 과정이 아니다. 심지어 부정마저 포용하는 것이 긍정의 원리이다. 그래서 긍정의지는 부정의지마저 아울러 추진하는 의지여야만 할뿐더러 그런 의지가 확실하다. 이래서 긍정의지를 표현하는 가면무도회용 가면은 메스꺼운 평시용 가면들의 부정의지마저 포용할 수 있다. 그렇게 긍정의지에 포용된 부정의지는 긍정의지를 창조적 파괴의지나 파괴적 창조의지로 변이시키면서, 예컨대, 가면무도회용 가면에 창조적 파괴성이나 파괴적 창조성을 부영한다.
2.
가면무도회용 가면은 ‘부정의지를 포용하여 창조적 파괴성을 겸비하는 긍정의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긍정의지를 차용하거나 취용하여 파괴적 창조성을 겸비하는 부정의지’마저 아울러 표현한다. 그러나 긍정의지를 차용․취용하는 부정의지의 파괴적 창조력은 아주 위험하다. 왜냐면, 예컨대, 이런 부정의지를 표현하는 가면무도회용 가면은 아예 가면쓴 자와 일체화되기를, 합체하기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 가면은 가면쓴 자의 본능, 본의, 의지와 완전일치하기를 바랄뿐더러 심지어 가면쓴 자와도 완전일치하기를 바라마지않아서 결국에는 ‘가면 아닌 가면’으로나 ‘가면 겸 비가면(非假面)’으로까지 변이하려고 안달하는 집요한 자가당착의지(自家撞着意志)의 소산일 수 있다. 그래서 이 가면은 아예 가면쓴 자로 완변(完變)할 때까지, 그러니까 ‘가면쓴 자 겸 가면’으로 전변(全變)할 때까지, 긍정의지를 차용·취용하는 부정의지를 필사적으로 강행하는 패도성(覇道性)마저 추득(追得)한다.
공연예술 중에도 특히 연극은 바로 이런 패도적 가면의 파괴력을 적절히 제어하고 표현하려는 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1976~1997년 일본 소녀만화잡지 《하나토유메(花とゆめ)》에 연재되면부터 한동안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지금에는 거의 고전(古典)처럼 회자되기도 하는 일본 만화가 미우치 스즈에(美內 すずえ; 니시오 스즈에; 西尾 鈴恵, 1954~)의 만화 《유리가면(ガラスの仮面; Glass Mask)》에서 피력되는 다음과 같은 의견도 가면의 집요하고 패도적인 자가당착의지를 예시한다.
“최상의 배우는 깨지기 쉬운 유리가면을 천 개라도 겸비해야 한다.”
이 만화 속에서 진행되는 연극의 압권은 미국 농맹인(聾盲人; 귀머거리소경) 작가·장애인권리운동가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 역할을 맡아 연기할 여배우를 뽑는 오디션 장면이다. 헬렌 켈러 역할을 따내려고 오디션에 응모한 후보여배우 4명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선발요건은 헬렌 켈러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헬렌 켈러답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저히 계산한 대로 연기하는 여배우 S와 본능대로 연기하는 여배우 O가 최후까지 경합한다. 그러나 연극이라는 예술장르(genre; 갈래; 분야)의 단점 겸 장점 ㅡ 주연배우 한 명이 빡빡한 공연일정을 소화하기 힘들다는 연극의 현장성(現場性)과 치열성(熾烈性) ㅡ 때문에 둘 다 주인공으로 뽑힌다.
그런데 《유리가면》은 본능적 연기와 배우를 은근히 편드는 듯이 보인다. 이런 편견은 본능적 연기자를 배우의 전형으로 인지하여 상찬하는 일반적 통념의 소산일 것이다. 왜냐면 무슨 배역을 연기해도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는 배우, 자신의 연기용 가면을 가면이 아닌 듯이 보이도록 연기하는 배우, 그러니까, 자신의 연기용 가면과 본능을 완전히 합체시켜 연기하는 경지에 도달한 배우야말로 진정한 배우라고 흔히 통념되거나 편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통념과 편견은 막강한 도그마처럼 연극, 연기, 배우를 규제하지만, 아이러니하고 패러독스하게도, 무대에서 실현되는 즉시 급격히 붕괴하여 자멸해버린다.
배우는, 연기자는, 본질상 가면쓰는 인간이고, 어쩌면 가면을 가장 잘 쓰는 인간, 심지어 가면을 ‘잘 써야 하는’ 인간일 것이다. 그런 배우의 가면은, 적어도 무대에서는, 가면이 아닌 것이라고 인지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배우는 무대에서 쓰는 ‘배역이라는 가면’을 아예 자신의 본능에 합체시켜 자기화(自己化)하고 체질화한 가면자체가 되어야 한다.
3.
이것이 ‘가면의 의지’를 문제시되게 만든다. 그런 문제는 대체로 배우의 본능과 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긋남, 삐걱거림, 균열, 파열, 붕괴 같은 불상사이다. 왜냐면 가면은 본질상 의지의 표현이지만, 배우의 가면은 의지를 극한으로 표현하는 순간에 오히려 가면으로서 기능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가면과 마찬가지로 배우도 배역을 극한까지 연기하는 순간에 배우라고 인지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여느 배역을 연기하든 배역을 직접 살(生)듯이 배역과 혼연일체하여 전혀 분간되지 않는 배우가 이상적 배우라고 회자되고, 또 그런 혼연일체의 순간은 배우의 가면이 고유한 존재의미를 완벽하게 실현하는 순간이라고 통념되지만, 그런 순간은 ‘가면썼되 가면쓰지 않았다’는 모순마저 동시에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거의 모든 영화, 방송극, 춤극, 악극(오페라, 뮤지컬, 창극 따위)을 포함한 거의 모든 연극에서 ‘배우의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이상(리상; 理想)’이 아른거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유리가면》이라는 ‘연극’은 배우의 이상과 마찬가지로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의지를 표현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의지는 ‘가면의 탈가면(脫假面)’이라는 부조리한 모순을 이상화(理想化)한다. 이런 모순은 어쩌면 거의 모든 배우의 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라는 공연예술은 현실에 실재하는 인물과 똑같은 등장인물, 배역, 배우, 연기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연극은 ‘극화(劇化)된, 캐릭터(변조되거나 창작된 성격)를 덧입은, 가공된 등장인물(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나 연기자를 요구한다. 등장인물과 배역은 희곡, 극본, 대본, 시나리오 따위에서 설정되거나 각색되고 배우나 연기자는 무대에서 연기하고 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심지어 배역의 본능마저 고스란히 연기하여 배역을 아예 현실에 실재하는 인물로 인식되게 연기하는 배우도 시종일관 가면쓴 인물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배역을 ‘연기하기보다는 아예 직접 살듯이 연기하는’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은 ‘가면쓰기로써 가면벗기를 성공한 가면의 의지, 가면쓰기로써 탈가면을 성공한 가면의 의지’이다. 또한 그런 연기를 해냈다고 자신하는 배우를 감격시키는 것도 그런 가면의 의지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감동과 감격의 순간이 균열과 붕괴를 돌발시킨다. 그것은 배우를 증발시켜버리는 순간, 조금 더 정확하게는, 배우를 그렇게 연기시킨 가면의 의지를 증발시켜버리는 순간이다.
이렇다면 《유리가면》이 은연중에 추구하는 ‘본능적 배우’의 현존은 불가능할 수 있다. 이런 불가능은 ‘배우처럼 연기하지 않아야 진정한 배우로서 연기할 수 있고, 배역을 연기하지 않듯이 연기해야 고스란히 연기할 수 있으며, 가면쓰기로써 탈가면해야만 배우의 본능을 실현할 수 있는 배우’에게 요구되는 가면의 모순된 자가당착의지에서 연원할 것이다. 이런 의지는 실현되기 직전에,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실현되었다고 감지되거나 인지되거나 인식되는 순간에 붕괴하면서 배우와 가면마저 증발시킨다. 그러니까 배우의 가면은 배우의 본능과 완전히 합체하여 혼연일체하기 직전에, 아니면, 혼연일체했다고 감지되거나 인지되거나 인식되는 순간에 의지와 기능뿐 아니라 의미마저 상실해버린다.
4.
배우나 연기자는 본연의 자신과 다른 인물을 재현하는 배역을 연기하려고 가면쓰는 공연예술인이다. 가면쓰기는 배역을 전혀 연기하지 않듯이 고스란히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운명, 그렇게 연기하려는 배우의 의지, 그렇게 연기하고픈 배우의 꿈을 실현시키는 필수요건이다. 그래서 배우는 사실상 가면과 비가면을 동시에 써야만, 가면쓰는 동시에 가면벗어야만, 가면쓰기로써 의지를 가려서 숨기는 동시에 꾸며서 표현해야만, 가면의 탈가면을 성공해야만 진정한 배우로서 연기하고 인식될 수 있다. 그런 배우는 배역과 완전히 혼연일체하여 배역을 직접 살아가는 실재하는 인물처럼 관객에게 인식시키기보다는 ‘배역이라는 가면’과 ‘배우이라는 가면’을 동시에 ‘써벗으면서’ 연기할 수 있는 공연예술인이다. 왜냐면 ‘순수가면’은 존재할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의 가면쓰기는 배우와 배역의 혼연일체과정이 아니라 배우-가면의 의지와 배역-가면의 의지를 동시에 표현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배역을 연기하지도 않고 배우자신을 연기하지도 않는 ‘이중가면을 쓴, 가면쓰기로써 가면벗는, 가면의 탈가면을 감행하는 제3인물’의 창조자일 수 있다. 연극을 위시한 공연예술들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제3인물을 창조할 수 있는 가면의 의지와 예술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리가면》은 배우의 의지와 배역-가면의 의지를 어지간히 혼동시키는 ‘진정한 배우는 본능적 배우이다’고 확신하는 도그마를 강화할 수 있는 작품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면 이런 도그마는 ‘자신의 진면과 의지를 가리고 숨기거나 꾸미는 배역-가면의 진면과 의지마저 가리고 숨기거나 꾸며서 자신의 진면과 의지와 혼연일체한 듯이 관객에게도 자신에게도 인지되도록 표현하는 가면쓰기로 자신의 진면과 의지를 표현하려는(연기하려는) 배우의 의지, 그렇게 표현해야(연기해야)만 진짜 배우라고 인식될 수 있는 배우의 운명, 그렇게 표현할(연기할) 수 있는 배우의 능력을 규정하는 가면의 의지’를 단순하게 간추려 ‘자신의 진면과 의지를 가리고 숨기거나 꾸며서 표현하려는, 표현해야 하는, 표현할 수 있는 배역을 연기하려는 배우에게 요구되는 가면의 의지’로 착각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면의 진실’은 나에게 말한다.
배우의 가면이 평시용 가면처럼 가면쓴 자의 진면과 진의를 가리고 숨기거나 정반대로 꾸며서 표현하려는 부정의지의 소산이라면, 여태껏 본능적 연기와 배우를 이상화한 도그마는 진정한 배우의 운명일 수 없다. 그러니까 ‘배역의 자아를 자신의 자아인 듯이 인지되도록 연기하는, 그리하여 배역의 본능을 자신의 본능인 듯이 인지되도록 연기하는, 아니, 더 정확하게는, ‘듯이’ 보이도록 연기하기보다는 아예 배역의 자아와 완전히 합체하고 배역의 본능과 혼연일체하여 아예 배역자체가 될 수 있는 본능적 가면을 쓸 수 있어야만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맹신하는 통념을 여태껏 부주의한 연극인들과 관객들에게 강제한 정언명령, 절대명령, 지상명령은 진정한 배우의 운명일 수 없다. 그런 도그마, 정연명령, 절대명령, 지상명령은 파괴적 창조성을 발휘하는 공연예술가의 자랑스러운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진면과 의지를 부정하는 비굴하고 수동적인 어릿광대의 운명일 뿐이다.
그러나 배우의 가면이 가면무도회용 가면처럼, 아니, 그런 가면에 차용되거나 취용되는 부정의지를 더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포용하는 긍정의지를 발휘하여, 가면쓴 자의 진면과 진의를 가리고 숨기거나 꾸미는 배역-가면의 진면과 진의마저 가리고 숨기거나 꾸며서 자신의 진면과 진의로 인지되도록 표현한다면, 어쩌면, 진정한 배우의 운명을 완전히 표현하지는 못해도 어렴풋이 암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왜냐면 그런 가면을 쓴 배우는 ‘가면쓰기로 탈가면할 수 있는, 가면의 모순된 자가당착의지를 극한까지 표현할 수 있는, 가면써야만 가면벗을 수 있는, 자신의 진면과 의지를 가리고 숨기면서 꾸며야만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진면과 진의를 숨기거나 꾸며야만 역력히 표현할 수 있는, 그리하여 숨기고 꾸며야만 표현할 수 있는 가면의 진실’을 연기할 수 있을 것이 때문이다. 그런 배우의 가면과 연기는 경직된 도그마를 균열시키고 배역도 배우도 아닌 제3인물을 창조하는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는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공연예술가이다. 그래야만 한다! 배우는 자신과 배역 모두의 진면과 진의를 숨기고 꾸며서 고스란히, 아니면 적어도, 역력하게 표현하면서(연기하면서) 자신의 가면뿐 아니라 배역의 가면마저 파괴하여(증발시켜) 제3인물을 창조하는 가면쓴 자이다. 그래야만 한다!
하물며 평시용 가면도 가면무도회용 가면이나 배우용 가면처럼 긍정의지를 차용하거나 취용하거나 포용하는 가면, 유쾌한 가면, 가면쓴 자와 관객 모두에게 ‘표면의 심층’을 체험시켜 감동시킬 수 있는 가면이라면, 그런 ‘가면의 진실’은 한낱 신파극처럼 인간들의 진실을 노골적으로 과격하게, 과다하게, 표현하여 은폐하거나 왜곡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러니하게 가리고 숨기거나 꾸며서 더 선연하게 드러내고 더 정밀하게 표현하여 가면쓴 자와 관객 모두를 감격시킬 수 있는 통쾌한 비극(tragedy)의 원료일 것이다. 그것은 단조롭고 허무한 잡통잡락(雜痛雜樂)들만 횡행하거나 흥행하는 비관적인 일상세계마저 환골시켜서 통쾌한 비극의 방랑길로 탈태시킬 수 있 있으리라.
쓰라린 고통마저 달콤한 눈물로써 반기며 방랑하는 배우-집시들의 시간 속을 주유(周遊)하는 방랑길로 …….
(2001.01.xx.)
아랫그림은 벨기에 화가 피에르 올리비에 조셉 쿠망(Pierre Olivier Joseph Coomans, 1816~1889)의 1870년작 〈가면(Le masqu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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